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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참에 몇 해만 쉬시지요, 폐하."

"무어라?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것이냐? 바로 지금이 절호의 기회이거늘. 월음의 왕이 죽었다. 왕이 죽었단 말이다!"

"해서 잠시 군사들을 복귀시키시란 말씀입니다."

 

 


대승이 말을 꺼내놓자마자 황제는 펄쩍 뛰며 소리를 높였다. 다른 때였다면 그래 니 말이 다 맞다, 맞장구치며 하라는 대로 움직였을 황제였으나 이 좋은 때에 어찌 당치도 않은 소리를 하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대체,"

"퇴군을 명하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지금은 때가 좋지 않으니 군사들도 한숨 돌릴 겸, 잠시 기다리시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왕가의 피를 물려받지도, 그렇다고 황제 교육을 받아 정식으로 황제가 된 몸도 아니었으니 정치에 정(政) 자라도 아는 것이 있어야지. 할 줄 아는 것이라곤 그 주먹이 전부요, 무작정 군사들을 풀어 전쟁을 벌여놓는 것이 다였다. 하니 나라를 제멋대로 끌고 다니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승인 민윤기를 가장 측근에 두고 그의 조언을 받아들이곤 했다. 아니, 그의 말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더 맞으려나. 그의 말은 항상 옳았으니까. 그나마 저 무정하고 무식하기만 한 황제를 올바르게 세워주는 사람이었다. 그러했으니 황제의 말을 유일하게 끊어먹을 수 있는 자이기도 했고.

 

 


"군사들이 몇 해째 계속되는 전쟁으로 지치다 못해 역진해 버렸다 들었습니다. 이러다 줄곧 수비만 해오던 월음이 되려 역전이라도 해온다면, 그동안의 수고가 모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태자가 있으니 그럴 일은 없느니라."

"태자님이 더욱 걱정이지요. 그 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계신 분이신데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으실 겝니다."

"크흠...."

 

 


태자는 보통 사람이 아니니 괜찮다, 덜컥 고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황제는 입을 꾹 다물었다. 황제의 아들, 태자가 호랑이라니. 짐승이라니. 과연 그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고도 무사할 수 있을까. 알아서 입을 다무는 것이다. 그래, 결코 태자를 위함이 아니겠지.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서 내쫓길까 하는 걱정뿐이었다.

쥐가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왕이 죽고 나라가 잔뜩 어지러워진 이때 바짝 몰아세우다 월음이 전과 달리 갑작스러운 반격을 해와도 전혀 이상할 리 없었다. 게다가 그리되면 일양의 군대가 여린 갈대마냥 무너질 것은 안 봐도 뻔했다. 몸과 정신이 이미 많이 지쳐있는 상태였으니. 그대로 먹이였던 쥐에게 목이 뜯길지도 모르는 판이었다.

 

 


"또한 백성들도 헤아려주셔야지요. 월음, 곧 폐하의 백성이 될 사람들입니다. 공포심으로 얻은 민심이 얼마나 가리라 생각하십니까. 하물며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이 온전히 폐하의 백성이 되리라 생각하십니까. 그들의 원성을 사고 싶은 것은 아니시겠지요."

"하면 내게 어쩌란 것이냐!"

"말씀 드렸다시피, 군사들을 복귀시키시고 몇 해만 월음 정복을 멈추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물며 이 기회에 완전히 집어삼켜버리자, 월음을 치게 된다면 그 후 나라를 잃은 백성들이 과연 얌전히 일양의 백성이 되려 할까. 더한 손가락질과 폭동을 원한다면 그리하라지.
황제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을 하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 내키지는 않았으나 윤기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것을 황제 역시 알고는 있었다. 그의 뜻대로 군대를 돌려 자비와 도리가 남아있는 황제로서 그들의 원성을 조금이라도 덜 사느냐, 묵살해버리고 태자에게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라 명하느냐.

 

 


"태자에게 황궁으로 복귀하라 이르거라."

"망극하옵니다, 황제 폐하."

 

 


결국 대승 윤기의 의견을 따르자, 판단이 내려진 황제는 어언 여섯 해가 흐른 후에야 드디어 태자에게 황궁으로 돌아오라 명을 내렸다. 그래, 기회는 지금뿐이 아니다. 이제껏 큰 그림을 위해 인내해왔는데 조금을 더 못 기다릴까.
라고 생각하며, 우매한 황제는 제 말에 슬쩍 올라가는 윤기의 입꼬리를 결코 보지도 못 했다. 흑색으로 물들어있는 그의 간교한 속내 또한, 결코 알아차리지 못 했을 것이다. 그저 충직한 신하, 그리 여기고 있겠지. 다 이 나라를, 황제를 위한 충언이라 생각하겠지. 멍청한 황제여. 세상 사람 모두가 윤기를 진정한 황제라 일컬으며 옥좌에 앉아있는 황제는 그저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수군거리는 것도 황제는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그저 땅따먹기에 눈이 멀어있으니 세상 돌아가는 형세에 대해 무얼 알겠어.
너의 백성이 아니라 곧 나의 백성일 될 사람들이다. 하니 내가 그들을 헤아려야지. 날카로운 눈으로 황제를 보며 윤기는 생각했다. 게다가 월음의 왕이 죽기 전 비밀리에 보내왔던 간서가 있으니, 언제든 그걸 빌미로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쉽게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음이었다. 그 적당한 때를 기다리기 위해 윤기는 황제를 꿰어내 군대를 돌린 것이었다. 사실 이 간서는 황제에게 당도했어야 했으나 도중 윤기가 빼돌리는 바람에 그는 절대 이것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을 터이다. 그렇게 조금씩 내게 일양을 넘기거라. 곧 내 발밑에 머리를 조아리며 살려달라 애원하는 때가 올 것이다. 하며 윤기는 저를 향한 어리석은 믿음을 조롱하며 생각했다.

 

 

 

 

 

 

 

 

 

虎熊傳

호웅전 ; 밤에 피는 꽃

04



 

 

 

 

 

 

 


-

익숙한 듯 궁문을 지나려는 태형 앞에 그곳을 지키던 수문군 둘이 막아섰다. 그렇지. 쉬이 넘어갈 리 없었다. 태형이 금위군에 것도 제2대 부대장이라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을 터, 함께 있는 여인이 문제였다. 머리끝부터 길게 늘어뜨려 온몸을 꽁꽁 싸매놓은 장옷은 잔뜩 내리깔은 눈조차도 보일랑 말랑했으니 영 찜찜한게 그 모양이 수상했다. 그들은 제 할 일을 하는 것뿐이었다. 궁에 수상한 자가 들면 아니 되니까.

 

 


"내 사촌 누이요. 곧 입궁을 할 터라, 내 고모부께서 부탁을 좀 하셨소. 큰 소란 없이 구경만 시켜주고 나올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태형은 기분이 나쁘다는 듯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준비해놓았던 말들을 술술 뱉어놓았다. 그 어찌나 태연한지 감히 의심도 못 하겠더라니까.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눈빛을 주고받는 둘이었으나 태형이 누구던가. 임금과 왕궁을 지키는 수비대의 부대장이 아닌가. 설마하니 궁에 위험한 자를 들이겠어. 하물며 태형은 직급으로 보나 가문으로 보나 누구든 쉬이 건들지 못 하는 자였다. 괜히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무슨 화를 당하려고. 하니 영 달갑지 않아도 길을 터줄 수밖에.

 

 


"드시지요."

"고맙소."

 

 


슬쩍 시간이 지체되기에 태형의 입에서 끝내 '내가 누군 줄 알고!' 하는 말이 튀어나가려는 찰나, 다행히도 그전에 길을 터주었다. 대신 큼- 소리를 내며 고개를 짧게 까닥 끄덕인 태형은 얼른 함께한 여인을 데리고 궁안으로 들었다. 그들의 눈에서 벗어나자마자 늘 가던 길을 찾으며 태형은 걸음을 바삐 했다.

 

 


"으아-! 오줌이라도 지릴뻔했네...."

 

 


한데 이게 무슨. 푸하- 답답하게 덮여있던 장옷을 끌어내리자 빼꼼 고개를 내민 것은 고운 여인이 아닌 보통보다 왜소한 사내아이였다. 늘 태형의 옆에 붙어 다녔던 그의 시노 홍이가 아니야. 또 무슨 장난을 꾸미는 것인지, 이번엔 여인의 옷을 입고 말이다. 그 몸높이도, 덩치도 태형과 비교하여 꽤나 작았으니 여인이라 해도 썩 믿을만한 모양이었다. 하니 수문군들도 큰 의심 없이 검속을 넘어가고 출입을 허가했던 게지.

 

 


"도련님."

"...."

"도련님!"

"...."

"아, 도련님!"

"왜, 왜 자꾸 부르는 것이야!"

"이 다리가 후들거려 죽겠습니다! 좀 천천히 가시지요!"

 

 


태형에게 질질 끌리다시피 걷던 홍이가 벅찼는지 자꾸만 그의 도령을 부르다 이내 빽, 소리를 질렀다. 힘이 부칠만도 하지. 태형이 아무렇지 않게 거짓을 고하는 그때에도 혹 들통날까 다리까지 벌벌 떨었다. 정말 들키면 난 목이 날아갈 거야! 하면서. 게다가 보폭이 한참 작은 데다 평생 입어보지도 못 했던 치마를 입었으니 어찌나 거동이 불편하겠어. 태형의 이끔이 아니라 제 걸음으로 또박또박 걷는 것이 얼마였는지 손가락에 꼽을 수도 있겠다.

 

 


"일찍부터 데리러 가겠다고 약속했어. 날 기다리고 있을 거야."

"도련니-임, 그 마음 충분히 알겠지만 제 모양새도 좀 헤아려주세요.... 이게 얼마나 불편한 줄 아십니까?"

"... 알았어. 한데 넌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빨랑 다시 써!"

 

 


그럼에도 아랑곳 않고 제 길을 재촉하던 태형은 이내 홍이가 우는소리를 내자 걸음을 늦추며 그 뒤를 돌아봐주었다. 아이의 꼴을 보아하니 내가 너무했다, 싶은 거지. 그제야 천천히 홍이와 발걸음을 맞춰주며 혹여나 다른 이의 눈에 띌까 장옷을 다시 머리를 씌워주었다. 다시 답답하게 장옷을 뒤집어쓴 홍이는 푸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뱉었다. 괜히 도와드린다고 했어. 괜히 따라왔다구. 또한 중얼거렸다.


가장 구석진, 궁의 가장 안쪽에 있는 곳이니 쉬지 않고 발을 움직였어도 조금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곳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 앞에 멈춰 오늘따라 더욱 높아 보이는 별궁의 담을 태형은 올려다보았다.

 

 


"이 곳에 계시는 것이어요, 도련님?"

"응. 벌써 예쁘지?"

"농이시지요? 꼭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데요, 으-."

"이 담 너머는 그렇지 않아. 얼마나 예쁜데. 그걸 사람들이 몰라줘서, 너무 안타까워."

"...."

 

 


여전히 시선은 담을 향하면서도 벌써 그 너머가 보이는 듯 나지막이 말하는 태형을 보며 홍이는 입을 살짝 벌린 채 눈을 깜빡였다. 정말 좋아하시나 봐. 입꼬리까지 기분 좋게 올리는데 보고만 있어도 그 마음이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담 너머 경관을 말하는 것이 아닐 테지. 담 너머에 살고 있는 그분을 말하는 것이겠지. 하긴, 늘 그랬다. 이곳에 다녀오고 나면 꼭 지금과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이런저런 그분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오늘은 어떠했다, 그분은 어떠했다. 혹은 금방 보고 왔음에도, 또 보고 싶다고.

 

 


"기다리실 텐데, 얼른 서두르시지요!"

 

 


자신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더는 낭비하지 말고 서두르자는 것이었다. 혹여 더러워질까 홍이는 입고 있던 옷가지들을 벗어내 보자기에 곱게 싸더니 어깨에 걸쳐매고 담을 타기 시작했다. 태형과 그동안 얼마나 쏘다니며 몇 개의 담을 타고 다녔으면 그 모습이 퍽이나 익숙했다. 태형도 얼른 홍이를 따라 담을 오르기 시작했다.

미궁 같이 복잡한 별궁 안을 요리조리 헤집고 다니면 저 멀리 높게 올라온 매화나무 가지에 붉은 댕기가 바람에 날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호석이 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호석은 늘 언제 오겠다, 며칠은 오지 못 한다 미리 일러주었지만 이따금씩 불쑥 들 때가 있어 무슨 수가 필요하겠다 생각이 들어 둘만의 표식을 만들어 두었다. 하여 붉은 댕기가 매화나무에 걸려있다면 그가 오지 않았다는 표식이었다. 들키면 안 되니까.
호석이 한 나흘간은 별궁에 들지 못 한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오늘은 있겠지 하면서도 혹여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역시나 날리고 있는 확실한 표식에 태형은 잘게 웃으며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우와. 대체 얼마나 귀하신 분이시길래 이리 깊답니까? 저는 길을 기억하지도 못 하겠습니다."

"힘들어? 이제 이곳만 지나면 돼."

"예. 힘듭니다! 도련님도 참 대단하시지. 여태껏 이 담들을 혼자 넘나드셨어요?"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한 번도 힘들다 생각한 적 없었다. 오히려 즐거웠으면 즐거웠지 늘 자신만 고생하는 것에 한번 불평을 한 적도, 투정을 부린 적도 없었다. 내가 보고 싶으니까. 내가 가고 싶으니까. 내가 좋아서 그리하는 거야. 태형은 생각했다. 그 어느 곳이라도 기꺼이 그녀를 만나러 갈 각오가 되어있었다. 이보다 더 험한 곳이라도, 기꺼이 그리할 수 있었다.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 공주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야전은 공주가 가장 자주 머무르는 곳이었으니 그 담이 가장 높았으며 다른 곳들과 달리 호위병까지 문을 지키고 있었다. 해서 공주는 태형을 생각해 별궁의 입구나 다른 전각에서 기다릴까, 물었지만 태형은 금방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몸이 조금 고단할 테지만 의심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다들 공주가 늘 그랬듯 한참을 얌전히 야전에 머무르고 있다 생각하겠지. 실은 이 별궁을 빠져나갔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를 테지.

 

 


"태형아?"

 

 


담 너머로 맑고 낭랑한 목소리가 퉁- 튀어 올랐다. 가만히 마루에 앉아 기다리고만 있을 차분한 성격이 되질 못 했다, 우리 공주는. 드디어 별궁을 벗어난다. 궁 밖을 나선다. 이날은 얼마나 기다리고 꿈에 그렸던가. 하니 개운하게 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이 되자마자 공주는 나갈 채비를 마치고 일찍부터 야전에 당도해 태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있지 못 하고 정원을 빙글빙글 돌았다가 보이지도 않는 담 너머를 쭈욱- 올려다보았다가.
이제 올 때가 되었는데 싶어 온 신경을 담벼락 밖으로 두고 있었으니 별안간 그 너머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가 어찌나 반갑던지, 목소리가 먼저 마중을 나간 것이다.
태형 역시 바로 코앞에서 올라온 목소리에 방글방글 웃음이 터졌다. 높지만 얇은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채 마주하고 있는 것이 오늘따라 설레고 더욱 두근거리더라.

 

 


"기다려! 금방 넘어갈게!"

 

 


태형은 서둘러 마지막 담을 올랐고 그 옆에 함께 서있던 홍이 역시 뒤를 따랐다.

 

 

 

 

 

 

 

 

 

-

"우아-, 이리 고운 것이었습니까? 제가 입었을 땐 영.... 역시 주인이 따로 계셨나 봅니다!"

 

 


자신이 건네준 옷으로 갈아입고 온 공주의 모습을 한번 보더니 홍이는 그리 평을 내놓았다. 함께 공주를 기다리던 태형은 어떤 말 대신 흡족한 듯 환하게 웃으며 소감을 전해주었다. 궁안에서 입던 옷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원체 이곳에서도 귀한 대접을 받으며 곱게 자라온 공주였던 터라 궁 밖의 귀족 가문 규수들이 입는 의복이 썩 잘 어울렸다. 다만 뭐랄까, 더욱 친숙해진 느낌이랄까. 아무래도 궁 밖에서 많이 보았던 모습이었으니 꼭 그 사이 거리가 더욱 가까워진 것 같았다. 괜히 그전보다 더욱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어째서 였는지. 하도 어렸을 때부터 공주의 모습을 봐와서 그랬던 걸까. 이젠 더 이상 어리기만 하고 여린 소녀가 아닌, 강인하고 기품 있는 어엿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아직 별것 아닌 새 단장을 한 것뿐인데 벌써부터 붕붕 들뜬 기분에 공주는 말이 없었다. 며칠간, 아니 평생 이날만을 기다려 왔으면서, 왜 이리 떨리는 것인지. 그 오랜 세월, 이날만을 꿈꾸며 준비해 왔으면서, 왜 이리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것인지. 
태형이 별궁을 벗어나자, 그냥 던지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말을 꺼냈던 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났다. 그동안은 용기가 나질 않았던 것을 포함해 어지러운 상황들이 겹쳐 정신이 없었기에 계속 미뤄왔다. 군왕이 세상을 떠난 것과 세자가 즉위하는 것 때문에 온 궁이 어지러웠으니 공주는 오죽할까. 아니, 사실 그저 핑계였다. 태형의 말에 처음으로 혹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하루아침에 지금껏 꽁꽁 숨어살았던 별궁을 나서자 결심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호석의 허락은 꿈도 꾸지 못 했으니, 몰래 빠져나갔다 들킬지도 모를 일이고. 무엇보다 혹여 공주라는 존재가 궁 밖에서 들통나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까 봐.
하지만 그럴 일은 일어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어차피 세상 사람들은 공주 얼굴도, 무엇보다 공주가 살아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테니까.

해서 몇 달간의 고심 끝에 호석이 나흘 동안 궁을 비운다는 소식에 한번 나서보자, 굳은 결심이 섰던 것이다. 아예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잠시, 구경만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어떤 곳인지 짧더라도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정말 위험천만하고 잔인한 곳인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사실은요, 아가씨. 그 옷, 우리 도련님께서 몇 군데나 돌아다니시며 구한 옷인지 제가 다 지칠뻔했습디다. 거 아무거나 고르시면 되지, 이건 이래서 아니다 저건 저래서 아니다. 아가씨께 딱 맞는 옷이 없다 시며 어쩌나 까다로우셨는지,"

"그만, 그만! 하여간 너는 그놈에 입이 방정이다, 입이! 가만 보면 나보다 더 시끄럽다니까-."

"괜히 민망하시니까 그러시는 것이지요?"

"내가 말을 말아야지. 서두르기나 하자. 이러다 해가 다 진 후에야 나가겠어."

 

 


후- 몇 번이나 숨을 몰아쉬며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공주의 모습에 태형은 조금씩 떨리고 있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괜찮을 거라고. 그럼 공주는 그 손의 온기를 느끼며 마음이 가라앉았다. 정말, 괜찮을 것 같았다.


아침부터 몸을 바삐 움직였으나 아직 갈 길도, 앞으로의 일정도 빡빡했으니 얼른 출발해야 했다. 더 지체하다간 무슨 변수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니.
공주가 여전히 야전에 머무르고 있다, 는 근거를 위해 공주 역시 그들과 함께 야전 담을 넘어 그곳을 벗어나야 했다. 몸이 조금 힘들 테지만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공주는 씩씩하게 앞장을 섰다.




"조심해!"

"으-아!"




담을 타는 것이 이리 어려운 것인 줄 꿈에도 몰랐네. 태형이 그동안 이 힘든 것을 매일 해왔다 생각하니 새삼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끼는 공주였다. 당차게 앞장을 섰음에도 제 키를 훌쩍 넘는 그 높이에 공주는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끙끙 담을 오르는데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생각만으론 쉬워 보였는데 막상 해보니 몸이 마음대로 따라주질 않았다. 그걸 지켜보며 태형은 혹여 공주 몸에 상처라도 날까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다행히 누군가 다치는 것도, 누군가에게 들통나는 큰일도 없이 무사히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홍이 너는 때를 봐서 조심히 궁을 빠져나오거라."

"예, 도련님. 그럼 부디 무사히 궁을 빠져나가시길 바라겠습니다, 아가씨!"

"큰 신세를 졌어. 정말 고마워.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을게!"

"에이, 은혜는 무슨. 별것 아닙니다-. 가서 도련님과 재미난 시간 보내세요!"

 

 


싱긋 웃으며 팔을 훨훨 내젓는 홍이를 뒤로하고 공주와 태형은 마저 발을 움직였다. 별궁을 제외한 궁 안도 공주에겐 처음 보는 것들이 많았으니. 궁에서 살고 있는 공주보다 늘 이곳을 헤집고 다녔던 태형이 이곳 지리에 대해 더욱 빠삭했으니, 그를 길잡이로 삼아 이제 궁 탐방을 시작해볼 차례였다. 이 광활하고 아름다운 궁을.

 

 


"떨려?"

"... 응."

"걱정 마. 내가 공주님 옆에 꼭 붙어있을 테니까."

 

 


태형은 공주의 떨리고 있는 눈을 바라보며 그 앞에 서서 어깨에 걸쳐있던 그녀의 장옷을 머리 위에 살포시 씌워주었다.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 공주에게 확신을 주듯 활짝 웃어 보였다. 나만 믿으라는 듯, 그렇게 환히. 얼마나 믿음직스럽고 든든하던지 정말 모든 두려움, 걱정이 다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갈까, 하며 한번 더 웃어준 태형은 공주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최고의 하루를 선물해줘야지, 생각하면서.


태형과 공주는 나란히 함께 걸으며 궁 안 곳곳을 둘러보았다. 궁 안이 이리 넓은 곳인 줄은 평생 모르고 살았던 공주에겐 가는 곳마다 탁 트인 그 모습들이 어찌나 별천지같이 보였는지 모른다. 늘 서책으로만 보았던 곳, 호석과 태형이 대신 전해주어 상상만 해보았던 곳이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이곳들은 평소 그려왔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근사했다. 모르고 살았던 지금까지의 세월이 아쉬울 정도로. 한참을 걸어 별궁을 빠져나왔음에도 아직 궁 안은 공주가 밟아보지 못 한 땅으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또 어찌나 많던지. 가는 곳마다 궁인들이며 내관들이며 관료들까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이곳에 모아놓았나 싶을 정도로 많더이다. 내가 살아온 세상은 정말 우물이었어. 난 그저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다, 하는 생각이 들어왔다. 즐겁고 행복하면서도 쓸쓸하고 초라해지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그마저도 쉴 새 없이 설명을 덛붙이고 있는 태형을 보자면 싹- 날아갈 수 있었다. 여긴 소주방, 여긴 세답방. 저쪽은 수혜궁, 저쪽은 은경궁. 본인이 더 신이 나서 떠들고 있는 태형의 모습에 입가엔 맑은 미소가 올랐다.




"아,"

"응, 왜? 왜 가던 길을,"



공주를 이끌며 잘만 걷고 있던 태형이 갑자기 우뚝 걸음을 멈추어 표정을 삽시간에 굳히기에 공주가 물었더니 그는 대답 없이 한 곳을 쳐다볼 뿐이었다.




"누가,...."




금색의 용 모양 수가 놓아져 화려하고 기품 있는 적색의 곤룡포를 덮고 중후하고 단단한 옥대를 허리에 둘렀으며 몇십은 되어 보이는 내관들과 궁녀들을 거느린 저분은, 아마도. 용모 또한 훤칠한 것이 단정하고 맑으면서도 따뜻한 인상을 가지고 있으며 남녀노소 불문하고 호감을 끌만한 곱디고운 상이라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게 사실이었나 보다. 만일 평범한 가문의 영식이었다면 너도나도 줄을 서서 탐냈을 1등 신랑감으로 따놓은 당상이었음이라. 아, 그래서 그분이 누구냐면.

뜻밖의 인물과의 대면에 공주 역시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 이리 곧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만나게 된다면, 그 준비도 아직 해놓질 못 했는데.




"저분은,"

"내 오라버니, 주상 전하시지."




먼저 깍듯이 허리를 숙인 태형이 벙쪄있는 공주에게 설명해 주려 했으나, 말을 가로채며 공주가 대신 이어 붙였다. 단번에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제 오라비가 아닌, 왕으로서 먼저. 그 모습으로 보나 풍기는 기운으로 보나, 누가 보아도 막 즉위한 파릇파릇한 왕의 자태였다.
공주 역시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추면서도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가슴이 쿵쾅쿵쾅 요동을 쳤다. 손이 잘게 떨리며 몸이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걱정 마. 알아채지 못 하실 거야."




혹여 자신이 몰래 별궁을 빠져나온 것이 들통날까, 하는 염려에서가 아니었다. 태어나 처음인 제 오라비와의 만남에 잔뜩 떨리고 긴장이 되는 중이었다. 저를 알아보시지 않을까, 오히려 기대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같은 궁에 살면서도 서로 떨어져 한번 본 적도 없이 그 긴 세월을 살아왔으나 하나뿐인 제 누이를, 단박에 알아보지 않을까. 차라리 그랬으면. 알아보았으면. 잊지 않고 기억해주었으면 싶었다.




"이게 누구야. 부대장 아닌가?"

"전하를 뵈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나야 뭐. 늘 평안하지."




이젠 세자가 아닌 어엿한 한 나라의 군왕이 된 석진은 제게 깍듯이 예를 갖추고 있는 태형을 알아보곤 걸음을 멈추어 그들 앞에 섰다. 태형 역시 긴장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공주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 할 확률이 이 궁의 넓이만 하다 하여도, 혹여나 하는 마음에 입술이 빠짝 말라 왔다. 하필 이때 마주치냔 말이다. 막 즉위한 석진에게 떨어진 그동안의 처리할 일들과 인계된 일들이 많아 꽤 바쁜 몸이었기에 근래는 오다가다 궁에서 마주친 적이 별로 없었으니 그와의 만남은 예상치도 못 했다.




"한데 이 여인은 누구신가? 나도 모르는 새에 혼인이라도 한 게요?"




결국 석진은 태형 옆에 얌전히 서있는 낯선 여인의 정체에 대해 물었고 아찔한 그 상황에 태형은 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의 아비라는 사람은 제가 하는 모든 일이라면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오는 자였으니 태형과도 그다지 살갑지만 않은 사이였다. 사리분별 못 하던 어린아이였을 때야 자주 어울려 놀았지만, 김두형의 새까만 속내를 알아차리고 난 후부터는 떨떠름한 사이가 되었다지.
하여 실례가 되는 말인 것을 알면서도 석진은 아무렇게 지껄여놓았다. 사실 이리 마주친 것도 석진에겐 별로 달갑지 않았다. 그저 모른 척 지나갈 수도 있었으나 내가 그리 쪼잔한 사람은 아니지. 하며 조금이라도 대화를 더 이어가보려는 것이었다. 여인의 정체가 궁금했던 것이 아니라, 대화 주제를 위함이었다. 난들, 태형이 어느 여인과 함께 있는 것이 무슨 상관이랴.




"제 사촌 누이입니다. 곧 입궁할 아이인지라, 그전에 구경을 시켜달라기에."

"입궁. 입궁이라...."




역시나 태형의 걱정과 달리 석진은 김두형 그자가 또 무슨 꿍꿍이인지 영 석연치 않을 뿐이었다. 또 기가 찬 일을 벌이려는 것은 아닌가. 가뜩이나 근간 왕후를 들이는 것이 어떻냐며 헛소리를 늘어놓던데. 여식도 없는 자가 당최 무슨 이유로 그딴 말을 뱉어놓는가 했더니 이 아이를 들이밀 작정인가 싶었다.
하여 석진은 제 누이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잔뜩 의심이 서린 얼굴로 꽁꽁 싸매놓은 공주를 뚫어보았다. 자신을 제 뒤로 숨기려는 태형의 움직임에도 공주는 오히려 장옷을 쥐고 있던 손의 힘의 풀며 곧이라도 제 정체를 밝힐 듯 불안스럽게 굴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석진이 공주를 향해 나지막이 물었고 태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낯선 여인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도 그렇고, 굳이 그 이름을 물어보는 것도 그렇고. 어찌나 불안하던지 꽉 쥔 손에는 땀이 차더라.
공주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게 덜컥 이름을 묻는 석진의 관심에 괜한 기대가 생기더라. 금방이라도 보고 싶었다며 저를 알아볼 것만 같아서.




"한낱 궁녀의 몸이 될 아이의 이름 따위가,"

"내 너에게 묻지 않았느냐. 이름이 무엇이냐."




어쩌면 공주는 이제 다 들통이 난다 해도 상관없다 여겼는지 모르겠다. 후의 일은 후의 일일뿐, 태형에게 해가 가지 않는다면 뭐든 괜찮다고 생각했다. 해서 오라비라는 사람 앞에서 이 답답한 장옷을 걷어내어 제 얼굴을 드러내볼까 싶기도 했다. 날 알아봐달라고.
하지만 저를 꼭 숨겨주려는 태형의 뒷모습과 꽉 쥐고 있는 그의 손을 보면 차마 그리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결코 무사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제 앞의 여인이 공주란 걸 알게 되면, 공주가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 모든 사실이 드러난 후 잔뜩 혼란스러워질 상황을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로 인해 태형이 해를 입게 된다면 더욱.
그래 오늘은 그저 태형의 말처럼 구경, 나들이를 하러 나온 것이니까. 급할 필요 없다. 성급히 굴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에는 정해진 때가 있을 테니까. 오늘은, 그때가 아니야.




"야화라 합니다."




태형의 두둔에 석진은 더욱 의심하며 공주에게 물었고 이내 공주는 작지만 당돌하게 대답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정식 이름은 아니지만 석진도 언젠가 한번쯤을 들어보았을, 불러 보았을 그 이름 말이다. 하지만 결코 기억하지 못 할. 공주는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걸어보는 것이었다.

 

 


"야화라... 내 특별히 기억해 두도록 하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대답을 들은 석진은 그제야 찡그렸던 눈썹을 펴며 의심을 조금 덜었다. 하나 여전히 김두형의 조카라는 것에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꼭 저런 말을 끝에 덛붙인 것이다. 후에 두고 보겠다는 뜻이려나. 그 외에 다른 뜻은 없었다.
그에 공주는 어째 기운이 빠진 듯한 목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역시 자신을 알아보지 못 하는 것이라며. 제 대답에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석진의 모습에 실망을 한 것이다. 제 앞에 서있는 여인이 공주일지도 모른다 생각조차 못 하는 것인지, 공주라는 그 존재 자체를 생각 못 하는 것인지 통 알 수가 없잖아.




"그럼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봅시다, 장군."




끝까지 떠름한 표정을 보이며 석진은 마저 발을 옮겼고, 남겨진 둘은 석진이 시선에서 사라질 때까지 깍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천천히 들었다. 그가 사라진 후에도 주위를 살펴보는 치밀함까지 잊지 않았다. 혹여 또 누군가 나타나거나 몰래 그들의 대화를 옅들을 지도 모를 일이니. 조심 또 조심.




"후.... 식겁했네."




곁에 호석이라도 있었더라면 어쩔 뻔했냐고. 공주가 제 이름을 망설임 없이 말했을 때는 정말, 숨이라도 넘어가는 줄 알았다. 석진이 별 의심 없이 넘겨서 다행이지. 하긴 답하지 않고 꾹 버티며 더 끌었으면 장옷까지 걷어보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왕 앞에서 장옷을 그리 뒤집어쓰고 있는 것은 예가 아니요, 마땅치 않은 처사였으나 아직 궁녀가 아닌 외간 여인이었기에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꽁꽁 조여오던 가슴이 한결 편해진 것 같아 숨을 한번 더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어쩌면 저보다 더욱 긴장하며 속을 졸이고 있었을 공주를 그제야 챙길 수 있었다.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 했던 제 오라비가 바로 눈앞에 나타났는데 얼마나 놀랐겠냐고. 순간 손을 붙잡고 냅다 튀어버리려다 그만두었다.




"괜찮아?"




태형이 공주를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상태를 물었고 공주는 장옷 사이로 빼꼼 보이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괜찮지 않았거든. 속이 상할 대로 상해버렸거든. 제 친 오라비를 만나면, 하고 싶었던 말들이 참 많았는데. 이렇게 만날 줄은, 이렇게 끝나버릴 줄은 몰랐다. 석진이 야속하고 그에게 서운했다. 기억하지 못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으나, 만나게 된다면 금방 저를 알아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긴, 나 또한 그를 오라비가 아닌 왕으로서 먼저 알아보았으니 그를 탓하면 아니 되는 것일까. 어쩌면 석진이 아닌 자신의 처지가 야속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살아가야만 했던 지난 세월이 야속했다. 그의 잘못이 아닌 것을. 탓할 사람을 잘못짚었다.




"정말 괜찮은 거야?"




고작 눈만 살짝 보이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표정도 읽히지 않았을 텐데 태형은 그런 공주의 마음을 금방 알아차렸고 다시 한번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인 채 물어왔다.




"응. 그럼! 갈 길이 멀지 않아? 서둘러야지!"



 
항상 저를 걱정해주고 생각해주는 태형 앞에서 어찌 그런 속상한 마음을 내비칠 수 있겠어. 게다가 오늘은 좋은 날인데. 계속 기분을 가라앉히고 있기엔 너무 아깝잖아. 공주는 얼굴을 활짝 펴며 한껏 올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오늘은 좋은 날이다.


그리고 한참을 더 그 안을 쏘다니다 대체 이 넓은 곳은 어디가 끝인가 싶을 즈음, 문득 태형은 걸음을 멈추더니 조금은 차분해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곳은, 궁 밖."

"...."

"그곳으로 향하는 마지막 문이야."




다시금 가슴이 쿵쿵 뛰어댔다. 장옷을 쥐고 있는 손에 땀이 차고 호흡이 가빠졌다. 두려우면서도 동경해왔던 그곳. 그곳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공주님이 원하는 대로 해. 이제라도 돌아가고 싶다면 그리해도 괜찮아. 정말, 나가고 싶어?"

 

 


만약 조금 더 빨리 별궁 밖으로 나왔더라면. 아무도 없는 별궁이 아니라 이 넓은 궁 모든 곳을 밟으며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었더라면. 그렇게 살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외롭고, 목을 죄여오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진 않았을 텐데. 굳이 궁 밖을 나서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왕족은, 공주는. 궁 밖을 나서는 것이 쉽지 않다고 들었다. 그런 보통 공주들처럼만이라도 살아왔더라면, 이곳까지 오지 않았겠지. 굳이 이 밖으로 나가고자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못 했으니까. 그들처럼도 살아보지 못 했으니까. 나가고 싶었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이제껏 저 밖을 향한 두려움과 걱정은 이미 충분히 해왔다고. 공주는 태형을 향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했던 약조, 기억해?"

 

 


옆에 꼭 붙어 있겠다고, 누구도 해를 끼칠 수 없게 옆에서 꼭 지켜주겠다고. 그리 약조했다.
문을 나서기 전, 태형은 공주와 마주 서 가만히 눈을 맞추며 잡은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 그러니 날 믿고, 걱정 하지 않아도 돼.

 

 


"응. 기억해."

"사실 더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그 약조를 지킬 수 있게 돼서 기뻐. 너의 처음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이어서 더 기뻐."

 

 


진심을 다해 말해주는 태형에 포근한 미소가 지어졌다. 설레고 두근거리는 이유가 꼭 처음인 궁 밖의 세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홍조가 오르는지 양 볼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장옷으로 가리고 있어 망정이지 창피한 꼴을 보일 뻔했잖아. 늘 저런 말들로 기분을 붕붕 띄워놓는다니까. 그래 태형은 항상 다정하고, 따뜻하고, 향기로웠다.

 

 


"나도 기뻐. 너와 함께여서, 더 기뻐."

 

 


곧 돌아오는 공주의 답변에 태형은 방글방글 웃음꽃을 피웠다. 언제나처럼, 그렇게 웃어주었다. 그에겐 늘 고마운 것들만 산처럼 쌓여있었다. 오늘도 한 개 늘었네. 태형이 아니었으면 꿈도 못 꾸었을 테지. 공주 혼자서라면 절대 해내지 못 했을 것이다. 별궁을 벗어나다니, 궁을 벗어나다니.

설렘 반, 걱정 반. 한 발짝만 내디디면 그토록 원했던 바깥세상이었으니 이제야 실감이 난 공주는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고 맞잡고 있던 태형이 그것을 느꼈는지 더욱 꽉 쥐여준 채 남은 한 걸음을 뻗었다. 궁문을 나서는 것은 들어오는 것만큼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고 태평하게 걸어 나오기만 하면 되는 것. 태형을 발견한 수문군 둘은 다른 말없이 꾸벅- 그에게 예를 갖출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대로, 아무 탈 없이 궁 문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렇게 쉬운 것이었어, 이렇게. 몇 걸음 더 발을 움직여 수문군들의 시야에서 벗어나고서야 답답하게 시야를 가리고 있던 장옷을 걷어내 시원한 바람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 어찌나 후련하고 개운하던지. 어째 더욱 높아 보이는 하늘을 향해 후- 깊은 숨을 내쉬었다 다시 가득 몸에 담았다. 아, 이게 궁 밖의 냄새구나. 사실 별다를 것이 없을 텐데, 특별할 것이 없을 텐데. 괜히 더 시원하고 맑은 느낌이랄까. 그리고 눈앞에 들어오는 그 풍경들도, 공주에겐 너무 어색하고 신기했으며 정겹고 평화로웠다.

 

 


"어때?"

"어떻냐고? 좋아, 너무 좋아! 우아-,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아!"

 

 


마음껏 만끽하고 있는 공주를 보며 태형은 푸슬푸슬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게 뭘 별것이라고. 이리 좋아할 줄 알았으면 아니라 마다하여도 더 일찍 데리고 나왔을걸, 하면서 말이다. 반짝이는 눈으로 제겐 생소한 풍경들을 눈에 담고 있는 공주의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럽던지.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게 뭐야? 어디든 데려다줄게."

"음... 나는. 나는 그냥,"

"응."

"그냥 같이 걷고 싶었어."

"...."

"너랑 손잡고 거리 이곳저곳을 걷고 싶었어."

 

 


다른 어떤 것도 필요치 않았다. 자주 별궁 밖의 하늘을 보며 언젠가 이곳을 나가면,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아야지 상상했지만 막상 이 길에 서보니 그런 생각들은 아무렴 상관이 없었다. 그저, 좋을 뿐이었다. 뭐든 다 좋았다. 그저 그 답답하고 좁은 곳을 빠져나와 새 세상을 밟고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리고 함께해준 사람이 태형이라는 것에, 그 어느 것이든 상관없었다. 뭐든 좋았다.
잠시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실실 어여쁘게도 웃으며 공주는 답을 내놓았고 태형은 가만히 그녀를 보았다. 어찌나 예쁜 말을 늘어놓는지. 그 오랜 세월을 고민하고 생각했으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궁 밖을 나서면 하고 싶은 것들을 나열해 놓았으면서. 고작 그 사소한 것을 내어놓으니 어찌 예뻐 보이지 않을 수 있겠어.
이건 다 니 탓이다. 결국 참지 못 하고 쪽, 분홍 진달래처럼 물어있는 공주의 볼에 입을 맞추어 버렸다.

 

 


"... 뭐, 뭐 하는 거야! 갑자기 이러면...,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잖아!"

"하면 좀 덜 예쁘지 그랬어."

"그...!"

"그리 예쁘게 말하니 나도 어쩔 수가 없었는걸."


 

 

갑자기 닿아오는 따뜻한 입술에 어찌나 깜짝 놀랐는지 모른다.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니까. 얼굴은 얼마나 뜨겁게 활활 타오르는지 손을 데면 작은 열상이라도 당할 것 같더라. 정말 모두의 시선이 그 어여쁘고 귀여운 두 남녀에게 향했다.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놀라 이곳을 힐끗 쳐다보았고 심지어는 가던 길을 멈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낮에 이리 사람 많은 곳에서 꼴사납게 무슨 짓이냐며 혀를 끌끌 차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들 어떠하리. 남들이 뭐라 하든 그게 무엇 중요하리. 우리 둘만 행복하면 됐지.

 



"나를 놀리는 거지! 됐어! 나 혼자 갈래."

"놀리는 거 아닌, 어, 야화야! 같이 가! 화난 거야? 왜?"




하지만 공주는 적잖이 부끄러웠는지 괜히 삐친 소리를 늘어놓으며 자리를 피해버렸다. 뜨거운 열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니 얼른 다시 장옷을 머리 위에 휙- 덮어놓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어쩜 그리 태연하게 낯간지러운 말을 할 수가 있냐고. 늘 그런 말에 볼을 붉히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놀리는 것은 아닐까 싶잖아.
정작 태형은 그걸 몰랐으니 참으로 우습지. 영문도 모른 채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공주를 태형은 뒤따랐다.

 

 

 

 

 

 

 

 

 

 

 

 

 

 

 

드디어 윤기 등장! 뭐 얼마 나오진 못 했지만...ㅠㅠ 앞으로도 윤기 분량이 많아지려면 좀 더 전개가 돼야하지만ㅠㅠ 그래도 등장을 했다는 거에 전 매우 기쁩니다!ㅎㅎㅎㅎ

거참 분량이 다들 알맞게 나왔으면 좋겠는데 그러질 못 하네요ㅠㅠㅠㅠ 오늘도 태형이만 그렇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음화는 좀더 잘 나눠지길 바라면서!

곧 컴백을 하네요ㅠㅠㅠ 하루하루 터지는 떡밥에 허우적거렸습니다ㅠㅠㅠㅠㅠㅠ 방탄 체고 체고ㅠㅠㅠ

감사합니다!

 

암호닉♡

새싹 슈가코팅 자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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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와 정주행했는데 너무 재밌어요 ㅠㅠㅠㅠㅠ 밤되면 안되는데 어떡해요 ㅠㅠㅠㅠㅠㅠㅠㅠ 고삼이라 자주는 댓글 못달겠지만 그래도 암호닉 [카모마일]로 신청 가능할까요??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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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판다
그럼요! 너무 감사하죠ㅠㅠㅠㅠ 우아 또 암호닉이!ㅠㅠㅠㅠ 감사합니다ㅠㅠㅠㅠ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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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2
암호닉 [지쟈스]로 신청합니다! 정주행 했는대 어찌 이리 재밌소 ㅠㅠㅠㅠㅠㅠ 꼭 완결 내주시오 ㅠㅠㅠㅠ♡♡♡♡♤♤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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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판다
꼭 그리하겠습니다!!!! 제가 힘내서 완결을 내보겠습니다ㅠㅠㅠ 감사합니다ㅠㅠㅠㅠ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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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4
힘을 주겠소!!!♡♡♡♡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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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3
암호닉 [난나누우] 로 신청합니다!
밤이 되어 가는데..으아아 걱정되네요ㅠㅠ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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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판다
우아 세분이나 암호닉을 신청해주시고ㅠㅠㅠㅠㅠ 너무너무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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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5
새싹입니다 제가 늦었지요ㅠㅠ보고싶었습니다ㅠㅠ현생이 바빠서 챙기지를 못했는데 작가님의 글솜씨는 역시 최고입니다ㅠㅠ너무 재밌습니다ㅠㅠ분량도 많은데 재밌어서 조금 밖에 못읽은 거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재밌습니다ㅠㅠ그나저나 야화 얼른 집에 돌아가야 할 텐데...밤이잖아 야화야ㅠㅠ집에 가야 해ㅠㅠ
9년 전
비회원도 댓글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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