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가 우리학원에 온 날, 별 생각 없었던 게 사실이야. 남고를 다니지만 문과다 보니 수학학원 문과 반에는 여자애들의 비율이 더 많았거든.
거기다 난 여자친구가 있던 상태였고.
형과 비교 당하기 싫어서 나는 학교가 끝나면 새벽까지 학원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가는 생활을 2학년 올라가면서 시작했고, 그 생활을 반 년 정도 할 때 즈음 여자친구와 헤어졌지.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내가 많이 힘들었겠지. 이해는 해도 많이 힘들었나봐.
헤어지고 나서 정말 미안하게도 나는 별로 힘들지 않았어. 그냥 그렇게 더 공부하는 데에만 열중했던 것 같아.
너세봉이 처음으로 내 기억 속에 남게 된 계기는 너가 선생님한테 한 말 한마디였어.
질문형 수업시간에도 질문 하나 하지 않고 수업만 끝나면 학원 문 나가고 선생님하고 말도 잘 안 하길래 난 너가 선생님이랑 낯을 가리는 거 아니면 공부에 별 뜻이 없는 애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그 날은 너가 웬 일로 학원 수업 훨씬 전에 와서는 선생님한테 되게 수줍게 웃으면서 할 말 있다 하는 네 목소리가 들리길래 물 마시러 나왔다가 나도 모르게 너 얘기에 집중하게 됐어. 엿들을 의도는 아니었지만.
"선생님, 저 이번 중간고사 수학 전교 1등했어요."
그냥 너가 달라보였다고 해야하나? 내 생각이 한참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왜 그런진 모르겠는데 충격을 받아서 그런가 그 날 수업은 네 뒷통수만 보다 끝났어.
그렇게 고3 수능이 끝날 때까지 난 수업을 듣는 네 뒷모습을 나도 모르는 새에 쳐다 보고 있는 날이 많았고 가끔 학원가 근처에서 다른 학원으로 들어가는 널 알아볼 수도 있었고, 그렇게 난 내가 너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구나라는 걸 알게 되었어. 학원에서 수업 들을 때는 무표정으로 수업만 듣는 넌데, 생각보다 친구들과 있을 땐 밝고 귀엽다는 것도 알게 되었을 땐 호감 이상의 단계구나라는 것도 알았지만 그럼 뭐가 달라지니? 난 고3이고 너도 고3이고 우린 둘 다 좋은 대학이 목표임은 확실한데 말이야. 무엇보다 난 너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렇게 고3은 끝났어. 난 수능을 망쳤고 내 목표만큼의 대학은 자연스럽게 가지 못하게 되었지.
그래도 3년동안 가장 믿고 따랐던 수학학원 선생님이라서 뒤늦게나마 선생님에게 연락을 드렸고 선생님은 술 한잔 하자며 날 불러내셨었어.
"그래서 원우, 재수는 안하게?"
"뭐..네.. 아시잖아요. 저 열심히 했다는 거. 여기까진가 봐요."
"야 임마. 너 열심히 하는 거 내가 알지. 내가 다 속상해서 그래 임마. 물론 너 지금 붙은 대학도 충분히 좋은 대학이다만 못내 아쉽고 그래서 물어본건데. 잘 생각했네 우리 원우. 3년 동안 공부하느라 고생 많았어."
"쌤이라도 알아주셔서 감사해요. 나머지 애들은 다 잘 갔어요?"
"뭐, 학원 애들? 말도 마. 원우 너 말고 대학 간 애 세봉이 밖에 없어! 하, 공부하는 게 너희 둘 밖에 없었으니까 당연한 결과긴 한데. 니네 문과 반에 공들였던 거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 죽겠다."
"아, 세봉이는 대학 잘 갔어요?"
"뭐..너랑 비슷한 정도? 그래도 너가 더 잘 갔어 임마 걱정마. 근데 너 세봉이랑....야하 이거 보게."
"..네?"
"너 임마 전원우. 너 내가 너 수업에 집중 안하고 너세봉 뒷통수 보는 거 몰랐을 줄 알아? 하, 이놈 자식 너 수능 망친 거 탓할 사람 찾으려면 너를 탓해라."
"아무도 탓 안해요. 그리고 그런 거 아니예요, 선생님."
"뭐가 아니긴 뭐가 아니야 원우야. 세봉이가 좋았어?"
"아니라니까요 진짜 왜그러세요 쌤 진짜."
"원우야, 나중에 세봉이 번호 달라그러면 줄게. 세봉이랑 잘 되면, 선생님이 고기 한 번을 더 못 사주겠냐! 그건 그렇고 너 이제 알바 시작해야지. 넌 그냥 가르치는 거 할 거지?"
그냥 가르치는 거 한다고 하지 말걸. 너는 교재 편집하는 거 하더라 세봉아. 난 스무살이 되고 나서도 너 뒷통수 뿐이 못 봤어. 질문 방에서 나오면 넌 항상 교재 편집하느라 컴퓨터만 보고 있고, 난 거기서 너 뒷모습만 한참 서서 보다 나오기 일쑤였지. 초콜릿 빛 나게 바꾼 네 머리도 예뻐보이고, 렌즈를 낀 건지 수술을 한 건지 안경을 벗은 네 옆모습 살짝살짝 보는게 다였어.
그러다 선생님한테 뭐 부탁하러 잠깐 들렸다 나가는 길에 너 학원 문 열고 들어오는 데, 예쁘더라 세봉아.
그 날로 나는 선생님한테 온갖 놀림을 받아가며 너 번호를 알려달라 했고, 많은 고민 끝에 저장 버튼을 누르고는 카톡에 들어가 너의 프로필을 보는데 그것 역시 예쁘더라.
얼굴을 제대로 마주쳐 본 적이 없어서 카톡 프사가 너 얼굴 겨우 제대로 보는건데, 정말 예뻐져서 놀랐어.
번호 받아도 문자 한 번, 카톡 한 번 보내지 못했지만 그냥 내 카톡 친구 목록에 떠 있는 너가 좋았어.
"야, 전원우. 오늘 약속 있냐?"
"아니, 왜? 야 그건 그렇고 겁나 오랜만이다야."
"야 그럼 나 지금 피시방인데 나랑 지금 최승철 있거든? 그니까 이따 밤에 소주 각?"
"동네에서? 야 권순영은?"
"아 권순영도 불러 불러. 나 우선 바쁘니까 이따 너랑 먼저 권순영 만나서든 어디서 만날지 정하고 카톡해."
"게임 좀 작작해 이 자식아."
"수고!"
오랜만에 이석민한테 연락와서 받았더니, 아직도 피시방에서 게임에 미쳐사느라 답이 없고 최승철도 마찬가지고. 여하튼 권순영한테도 빨리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전화 걸었더니 웬 일로 바로 받더라고.
"여보세요? 순영아!"
"응 여보세요?"
"지금 뭐하는 중이야?"
"응, 나 술마시고 있어. 여자랑."
"오 여자친구? 그럼 끊는다."
"아냐 임마. 그냥 초등학교 때 친구."
"아 그럼 이따 최승철이랑 이석민이랑 술마시기로 했거든. 너랑 나랑 먼저 만나있으라 하는데 너 지금 어디서 술마셔?"
"나 여기 역 근처."
"아 나 지금 학교 끝나고 집가는 길이여서 역 거의 다 왔는데, 지금부터 만나면 너 친구가 불편해 하려나?"
"아 근처라고? 아 나 너 오면 나야 좋은데, 친구가. 물어보기나 할게."
"그래 뭐."
친구랑 뭐라뭐라 얘기하더니 다시 달칵거리면서 받는 순영이 목소리가 밝다.
"응 와. 오면 연락해!"
"나 지금 역 나왔어. 니가 말하는 술집 어딘지 알 것 같은데."
"아 다 왔어? 여기여기 손 흔들고 있을게."
"어 끊어."
근데 권순영 목소리가 너무 높은게 좀 취한 것 같은데 얘..
문 열고 들어가니까 큰 소리로
"여기야 전원우!"
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까 이미 얼굴이 시뻘건 권순영이 있고, 그 앞에는
너
너세봉.
나 진짜 미치는 줄 알았어. 너가 맞나. 너가 맞다면 옷 좀 더 괜찮은 거 입고 학교 갈 걸. 머리 올린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온갖 생각 다 하면서 발은 누구보다 빠르게 너 앞으로 가더라.
왠지 당황한 얼굴로 순영이 팔목을 잡는 너 앞에 서서 먼저 얘기했어.
"아......안녕하세요."
그렇게 어색하게 인사하려고 했던게 아닌데, 널 내 눈 앞에서 보니까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굳어버려서 그렇게 밖에 인사하지 못했어.
그 놀란 와중에서 이 상황이 너무 설레서 마냥 좋았어. 난 그랬어 세봉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