冬
우현은 바닥에 쓰러진 채 거칠어진 숨을 고르는 성규에게 바짝 다가섰다. 몸을 굽혀 길고 가느다랗게 뜨인 눈가의 상처를 핥자 팔뚝 아래에 눌려있는 성규의 몸이 벗어나려고 파드득거리는 것이 전해져 왔다. 그 눈가를 살짝 깨물고, 조금 웃고, 팔에 힘을 가했다. 좀 전에 걷어차인 환부를 건드린 건지 희미하게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멱살을 거머쥐고 억지로 일으켜 세운 후 벽쪽으로 몰아세워 얼굴을 쥐고 들어올렸다. 일그러진 미간과 꼿꼿하게 자신을 노려보는 눈매. 핏방울이 검게 말라붙은 꽉 다물어진 입술. 홀린 것처럼 우현은 그쪽으로 입술을 들이밀었지만 성규는 주저 없이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잔혹할 정도로 단호한 거절에 비참함이 욕구처럼 머리를 마비시켰다. 옆으로 젖혀진 목선을 끈적하게 덧그리던 우현의 이가 결국 살점을 물어뜯었다. 귓바퀴를 타고 흘러드는 낮게 질린 신음. 천천히 묻는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 그 자식 생각해??
그리고 늘 시각을 잡아채던 그 눈은. 새까만 눈동자는 놀라움도 당혹도 아닌 분노로 반들거리고 있었다. 그 격한 시선에 우현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성규를 벽에 몰아붙이고 있던 몸이 일순 느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급히 손아귀에 다시 힘을 주려했지만 그 짧은 순간 먼저 움직인 쪽은 성규였다. 성규는 눈썹을 찌푸리며 우현의 정강이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통증은 피부 안쪽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날카로웠지만, 우현은 단지 품을 빠져나가는 성규 쪽으로 몸을 날렸다. 몇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다시 허리를 잡아채인 성규는 중심을 잃은듯 우현의 체중에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 허억, 아으윽...
- 이렇게까지 비열해지고 싶진 않았는데 말이야...
우현에게 잡힌 채 바닥에 쓰러진 성규가 곳곳의 상처를 뒤흔드는 고통과는 또 다른 긴장에 빳빳하게 굳었다. 우현은 성규의 오른쪽 손목을 쥐고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말 잘 들었으면 피차 좋았을 거 아냐? 손마디와 손톱 하나하나를 잘근잘근 물고 혀로 감았다. 자신의 타액에 젖은 손끝 위에 댄 입술을 천천히 위쪽으로 밀어 올렸다. 레이디에게 정중하게 키스하는 것 처럼 몇 번이고 부드럽게 손등에 입 맞추는 동안, 성규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우현은 다시 웃었다.
- 나도 이 예쁜 손가락을 분지르고 싶지는 않으니까... 협조해주지 않겠어?
안개처럼 체념의 색이 흐트러지는 홍채. 흔들림 없이 고정된 눈동자의, 그 김성규를 무력하게 한다는 행위 자체가 수반하는 쾌감은 몸을 저릿하게 할 정도로 강력했다. 팔꿈치로 어깨를 고정한 채 단추가 거의 떨어져 나간 셔츠 자락을 벌렸다. 선득한 조명과 찬 공기 아래 그대로 드러나는 몸. 하얗다. 목젖에서부터 천천히 손을 미끄러트리자 바짝 굳는 피부는 부드러웠다. 파르스름하게 멍 자국이 난 허리를 지분거리며 우현은 뜯어내듯이 셔츠를 벗겨냈다. 곳곳에 흩어진 작게 긁힌 상처들. 설원에 꽃잎이 진대도 이렇게 붉을까. 잔 상처를 하나씩 쓸어내리며 순간 순간 통증에 물드는 얼굴을 응시했다. 이런표정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지만, 그렇지만.
- 개 같은 자식...
- 그래. 지금 여기 있는 건 개 같은 남우현이니까, 딴 놈 생각하지마.
우현은 무릎을 세워 성규의 두 다리 사이로 밀어 넣었다. 얇은 바지 아래 허벅지를 훑어 올리자 손안에 잡힌 얇은 피부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본능적으로 빠져나가려는 두 손목을 한 손으로 잡고 머리 위쪽으로 밀어붙인 후 다시 한 번 경고하듯이 손목과 유연한 관절을 가볍게 눌렀다. 그리고 까칠한 입술 아래 쓸리는 살결. 이마부터 시작해 눈썹과 관자놀이를 스친 우현의 입술이 귓볼에 닿았다. 늘 은은한 아기 냄새가 날 것 같았는데. 그것보다 더 농밀하고 더 자극적인. 말하자면, 자신의 밑에 깔린 채 미동도 하지 못하는 김성규에게 잘 어울리는, 우현은 씹어먹어 버리겠다는 기세로 귓볼을 깨물며 한 손을 성규의 하체 쪽에 가져다댔다. 그리고 아주 느긋하게 바지 위에서 성규의 것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한동안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성규의 허리가 튀었다. 억누르려고 노력하는 듯한 소리는 그럼에도 선정적이었다. 술 보다 마약 보다 강한 무엇에 진탕 취한 기분.
- 그래봤자, 읏, 하악...
우현은 심술궅게 손을 움직여 성규의 말을 끊었다. 얇은 종잇장처럼 바르르 떨며 감각을 몰아내려 하는, 그러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쾌감에 흔들리는 그 모습에 가학심이 머리끝까지 내달렸다. 그리고 성규의 저항과는 달리 바지 앞 부분을 밀어 올리며 반응하는 그 모습을 비웃듯 내려다봤다. 우현의 시선을 눈치챈 성규의 뺨이 수치심에 붉어지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유독 비음이 섞인 신음. 경련하듯이 파르르르 떨리는, 손아귀에 차는 만족감. 우현은 강압적으로 다리를 벌리고 일부러 느리게 버클을 풀었다. 거칠게 깨물었던 피부가 발갛게 부어올라 손끝으로 쓸자 미세하게 어깨가 파들거리는게 우현을 즐겁게 했다. 성규는 눈을감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젖은 입술은 역시 붉었다.
- 그래봤자,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아.
우현은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대신 눈이 뜨였다. 약간 흐릿한 시야에 곧장 보이는 것은 낯이 익을 대로 익은 천장무늬. 어리둥절, 고개를 돌려 확인한 거울 속의 자신은 졸린눈에 까치집과 다를 바 없는 혁신적인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꿈이였군, 하긴 그게 현실일리가 없지. 그런 김성규, 그런 남우현. 우현은 머리를 벅벅 긁고 시계를 한 번 확인했다. 낮잠만 자면 꼭 이상한 꿈을 꾼다니까. 그나마 약속시간을 느지막이 잡은 게 다행이려나. 어기적어기적 일어난 우현은 커튼을 걷고 창을 열었다. 어디에도 초점을 맞출 수 없을 정도로 새파란 하늘. 붕어빵, 붕어빵이라고? 잠깐 꿈을 되새겼던 우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강제에, 협박에, 어째 새디스트 기질까지 삼박자를 다 갖췄다. 기분은 맨틀까지 삽질인데 하늘은 어째 사정없이 높구나. 그리고, 우현은 베란다 귀퉁이의 세탁기 속으로 현란한 무늬의 팬티를 던져 넣었다.
**
- 여기야.
패밀리 레스토랑의 가장 구석진 자리. 손을 들어올리는 성규 앞에는 화려한 색의 칵테일이 한 잔 놓여있었다. 서비스래, 부럽지? 그게 그렇게 좋다고 새실새실 웃는 성규의 등 뒤쪽으로 이쪽을 훔쳐 보고 있는 종업원 한 무리가 보였다. 얼씨구, 얼굴도 빨개져 있다. 그쪽으로 날카롭게, 가끔 세수하다가 자신도 섬뜩해질 정도로 남성적으로 눈을 한번 훕 떠보이고 우현은 성규의 맞은 편에 앉았다. 그 꿈 때문에 민망해서 눈도 제대로 못 쳐다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저 웃는 얼굴을 보면, 자동으로 빙구 같이 얼굴이 풀려버리고 만다. 너 진짜 용감하다, 그런 옷을 입고 밖에 나오고 싶디? 우현은 성규의 힉책에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개성적이기 그지없는 점퍼를 벗어 옆자리에 던져 놓았다.
- 그러고 보니, 많이 쌀쌀해 졌더라. 붕어빵 가판 같은것도 금방 나오겠던데?
- 켁.
아무 생각 없이 꺼낸 말이었겠지만 도둑이 제 발 저려 사레 들렸다. 괜찮아? 묻는 성규에게 건성으로 대답해준 우현은 깔끔한 눈매가 동그랗게 말리는 것을 외면하고 두꺼운 메뉴판을 아무렇게나 넘기기 시작했다. 갸웃, 새끼새 마냥 입술을 뾰족하게 만들고 한동안 우현을 보던 성규도 결국 메뉴판 쪽으로 눈을 돌렸다. 뭐 시킬까? 나는 뭐든 괜찮으니 형이 적당히 골라. 아일랜드 드레싱과 허니 머스타드 중에 한참 고민하던 성규가 결국은 마음을 정했는지 고개를 돌려 종업원을 불렀다. 메뉴판의 사진을 하나하나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지어가며 주문하는, 어떻게 보면 어린아이 같은 행동. 먹음직스럽게 인쇄된 사진위에 하얀 손가락이 얹혀있는 것이 도드라졌다. 그 손가락을 깨물고 손목에 입술을 대었던 장면이 지나간 기억처럼 머릿속을 휘저었다. 우현은 땀이 맺힌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시각, 후각, 청각과 촉각까지 이렇게도 선명하게 남아있는데. 그건 정말 꿈이었을까?
- 난 나한테 사라고 할 줄 알고 카드 챙겨 뒀는데 니가 사겠대서 놀랐잖아,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 ... 동남아 섬나라 어디 부족에서는 꿈속에서 누구한테 해를 끼치면 다음날 찾아가서 선물도 주고 거하게 대접을 한대.....
- 흠, 남우현, 너 나를 살해하기라도 한 거냐?
- 차라리 그런 거였음 좋겠수다.
- 자고로 꿈은 소망의 반영이라잖냐. 궁금한데...
100만 볼트 전기라도 통한 듯 화들짝 등이 섰다. 소망, 소망의 반영, 반영. 칵테일 잔에 입술을 대는 성규가 새삼스레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살풋 벌어진 입술 위에서 반짝이는 짙고 붉은 액체. 성규는 더 이상의 질문을 꺼내놓는 대신 연하게 웃고는 우현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동자는 여느 때처럼 까맣게 반들거릴 뿐이었지만. 오래전에 다 잊었다고 애써 믿어왔던 감각이 현기증처럼 되살아났다. 아릿하던 낮, 쌉쌀하던 밤, 끝내 잡히지 않던 설렘까지. 그 고운 눈웃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마치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냐고 묻는 것만 같아서.
원래 봄 여름 가을 겨울 총 4부작 쓴거였는데 어느새 겨울... 나머지는 그 계절에 올려야겠어요 ㅜㅜ 춥다ㅏㅏㅏㅏㅏㅏㅏㅏㅏ
우현이 아련아련..........ㅁ7ㅁ8
점점 글 쓰는게 퇴행성 관절염 마냥 안나오뮤ㅠㅠㅠㅠㅠㅠㅠㅠ 늙어만간다ㅜㅜㅜㅜㅜ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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