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동갑 연하 전정국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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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엠티가면서 먹게 먹을 것 좀 챙겨줘요,"
우리집 화장실에서 샤워를 마치곤, 머리를 털며 나오는 정국이의 모습을 보며 새삼 감탄했다.
어리긴 어리구나, 근 2년간 연애를 통해 매일매일 깨닫는 사실이다만, 녀석은 정말 어렸다 12살 차이면 뭐 말 다했지.
그래서, 녀석의 휴대폰 화면에 뜬 어린여자들의 수많은 메세지에도 난 할말이 없다.
- 오빠 오늘 엠티 와?
그래 녀석도 누군가에겐 오빠겠지, 그럼 나랑은 띠동갑 그 이상의 차이겠구나 심드렁하게 녀석의 휴대폰 화면을 바닥으로 돌린 후 냉장고에 들어있는 식재료를 들썩거리며 정국이 부탁한 먹을거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34세, 지금 애를 낳아도 노산이라니, 연하킬러라니 그런소리를 들어도 늙은 노처녀는 할말이 없다.
그리고, 2년의 연애동안 무수히 많은 전정국의 바람기를 눈감아주는것도 어쩌면 34살의 나에겐 모든게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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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티를 간건지, 후배를 꼬시러 간건지 모를 전정국의 페이스북 담벼락을 몇번 흘끔대다,
"일 안하십니까? bts업체 웹사이트 도안 구상해서 가져오라고 한지 이틀 지났습니다."
이 세상 어느 웹 디자이너가 웹사이트 도안을 이틀만에 만들어 보고한다고, 괜히 김팀장님의 뒷통수에 들리지 않을 말들을 궁시렁대며 마악 프로그램을 가동시키는데,
"탄소씨 다 들립니다."
"아..네.."
뭐하나 되는일이 없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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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나 친구들이랑 밥한끼 먹게 용돈 조금만 붙여줘,
야근에 추가근무까지, 뭉친어깨를 주무르며 확인한 휴대폰에 뜬 메세지였다 하루종일 신나게 논다고 연락한통 없더니만, 이럴때만 연락하는 전정국이 야속하다가도 군말없이 5만원 가량을 붙여줬다. 늙은 노처녀는 줄게 돈뿐이다 정국아,
-지잉 -지잉
"누나 고마워, 오늘도 야근이야?"
"응, 정국아 너무 늦게까지 놀지말고-"
돈이라도 붙여줘야 겨우 전화한통 오는구나, 그래도 오랜만에 듣는 제 연인의 목소리에 묵은 피로가 싹 씻기는 기분이라 또 실실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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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살이랑 사귀면 무슨기분이냐 전정국,'
'몰라 그냥 그렇지뭐.'
'니여자친구는 너 업고 다녀도 모자라겠네ㅋㅋㅋ 그나이에 22살 만나기 어디 쉽냐,'
정국도, 마냥 그런줄만 알았다. 남들이 우스갯소리로 말하는대로 어린 연하가 30대 중반에 들어서는 누나를 만나주는것 자체가 고마운 일이라고, 그렇게만 생각해왔다.
"점심 먹었어? 보고싶다,"
연애 초반, 밥때가 되면 당연시 걸려오던 전화와,
"정국아, 오늘 친구들이랑 밥먹는다며? 돈 붙여놨으니까 맛있는거 많이 먹어."
당연시 챙겨주던 사소한 많은것들,
연애 2년차에 접어들자,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누나의 연락이 점차 귀찮아 지기 시작했고, 누나의 성의는 점차 어린 내가 누나를 사겨줌으로써 얻는 권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정국아, 오늘 학식은 뭐나왔어? 누나 오늘 야근 없는날인데, 보고싶다."
"누나, 바빠요 끊어 나중에 전화할게."
"누나 나오늘 어디 놀러가는데 용돈좀 줘요, 사랑해."
"응 정국아 다치지 말고,"
점점 둘의 연애는, 사랑이라기 보단 갑과 을의 팽팽한 줄다리기와도 같아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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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좋아해요..."
그렇게 위태롭다면 위태롭게, 안정적이라면 안정적이게 지속되던 둘의 연애의 막바지가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의 전화를 귀찮아 하는 정국의 태도에, 보고싶은 마음을 꾹꾹눌러가며 애써 썼다 지우는 11자리의 번호들, 다른여자와 있는걸 목격했다는 수많은 목격담들.
갑과 을의 줄다리기 속에서 을은 점점 승리에대한 미련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득달같이 걸려오던 전화, 연상답지 않게 보고싶다 애교를 부리던 목소리를 듣지 못한지 1주일이 되어서야 제 연인의 변화를 깨닫는 정국이었지만,
당장 제 품에 안긴 후배의 곰살맞은 애교에 의아함은 점점 잊혀져만 갔다,
그렇게 사랑받는다는 감정의 소중함을 모르곤, 결국 이별을 고하는건 정국이었다.
"나 여자 생겼어요, 누나보다 한참은 어리고 예뻐."
"2년동안 수고했어, 고마웠어."
여자가 생겼다는 자신의 말에도 아무런 질책없이 팽팽했던 끈을 놓아버리는 탄소의 태도에 어안이 벙벙해진 것은 오히려 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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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탄소씨 그렇게 멍하게 있지말고 선이나 봐요,"
매일같이 저를 갈궈대던 민팀장님의 제안에, 혼기도 가득 찼겠다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탄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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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랬죠, 우리 지금 직장에서 매일보는 민윤기 김탄소 아니고 선보러 나온거에요."
사실 좀 많이 놀랬지만, 회사에선 매일같이 '보고서 이딴식으로 쓸겁니까?' 히스테리를 부리던 민팀장님을 이렇게 사석에서 보니 마음한구석에서 색다른 감정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속으로, 몰래 동경하던 사람과 선을 본다는게 이렇게나 떨리는 일일줄, 누가 미리 언질이라도 해줬다면.
식사를 하는 내내, 부끄러운마음에 볼이 붉어졌다, 시선을 피했다 하는 나를 보며 팀장님은 소리없이 웃으셨다.
종국에는, '몰랐는데 귀엽네요 탄소씨' 하며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팀장님의 태도에 귀까지 빨개지는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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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여기 엄청 비싼 레스토랑인데! 여기서 밥먹는거야?"
같은시각 레스토랑에 들어선 정국의 눈에 들어찬 탄소의 모습은 연애초반 둘의 모습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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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히 충동적이었다, 다른여자가 생겼다고 차버린 전 애인의 집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행위 자체가.
"누나, 바람이라도 펴줄게요 누나 나 아직 좋아하는거 알아."
"정국아, 그건 니 여자친구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나 너한테 차인거야, 응? 이러지말고 돌아가, 가서 나 버리고 만난 여자친구한테 최선을 다해."
김탄소는 끝까지 어른스러웠다. 아니 어른이니까 어른스러운게 당연한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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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부터, 사랑스러운 제 연인을 만나 데이트를 해도, 연애 초반 한참이나 설레여야할 스킨쉽을 해도, 온통 탄소의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 정국이었다.
결국, 정국은 그날이후 이별을 고했고. 그렇게 둘의 연애는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지우지 못한 탄소와의 메세지 창, 일방적인 사랑을 못본척, 못들은척 무시하던 제 태도,
걸려오던 전화를 귀찮다는듯 끊어내던 자신의 모습,
그런자신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주기만했던 그때의 너, 다른 여자가 생겼다 이별을 고하던 당당했던 자신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미안한 마음을 참아낼 수 없었다.
"누나, 미안해요 나 다 정리했어요, 누나도 사랑받고싶어했다는걸, 내가 너무 무관심 했다는걸 이제서야 알아서 미안.. 내가 잘할게요 제발.. 한번만 기회를 줘요.."
수화기 너머로 횡설수설 들려오는 정국의 목소리에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나였다.
상처받고 버려져도, 사랑을 줄수만 있다면 행복할것만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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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후 장족의 발전을 보인건 바로 전정국이었다.
"누나, 오늘 밥 먹었어요? 나 사실 도시락 쌌는데, 밥 아직이면 같이 먹고 싶어."
"왜 귀찮게 그런거까지 싸오고그래,"
사실은 좋으면서, 한껏 튕기듯 뱉어낸 나의 말에.
"보고싶은걸 어떡해"
투정을 부리듯 받아치는 전정국이었다.
그래 뭐, 이만하면 사랑받는 여자 된거지, 어설프게 싸온 도시락 뚜껑을 열며 끙끙대며 홀로 도시락을 쌌을 정국을 떠올리니 저절로 웃음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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