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 영화 '건축 학개론' 中
'양
아
치
의
순
정'
14
좋아해.
"......"
여주 좋아해 난. 권순영의 목소리가 아직까지 귓가에 맴돌았다. 둘이 사라지고도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주는 점점 더 얼어가는 몸도 모르고 한 시간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김여주?"
고개를 돌렸을까, 한 다름에 다가온 건 민규였다. 굳어있는 여주의 얼굴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민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꽁꽁 얼은 여주의 양 팔을 두 손으로 잡았다.
"너 지금 시간에 뭐하는 거야 밖에서? …야, 몸은 또 왜이렇게 차가워? 미쳤나봐 얘가."
"……"
"…야, 일단 들어ㄱ"
"…순영이는."
"……"
"…자?"
빨려 들어갈듯 여주의 투명한 눈에 비춰지는 민규의 까만눈이 작게 깜빡였다. 이어 허공으로 퍼지는 작은 한숨과 함께 민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코까지 쳐 골며 잔다 너 이러는거 모르고. 그제서야 풀리는 여주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민규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여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화상아.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래?"
"……"
"말 안해줄꺼야 김여주?"
넌 그런 마음 알아? 제 질문과는 다르게 뜬금없이 터진 여주의 말에 민규의 입이 삐딱선을 타며 답했다. …무슨 마음.
"나랑 걔는 확연히 다른 길이야."
"……"
"…근데 내 길에는 가끔씩 비도 오고 눈도 오고 떨어지는 꽃잎도 날려."
"……"
"그런데 우연히 내 길에 진흙탕이 있는거야. 난 길이 거기 밖에 없으니까 밟을 수 밖에 없어. 근데 하필,"
"……"
"…권순영이 나랑 같이 같은길을 걷자고 손을 뻗어 와."
"……"
"…내 두 발은 진흙 투성인데."
"그새끼 길엔 비도 눈도 안온데?" 나무가지로 애꿎은 땅을 파며 조용히 얘기만 듣고있던 민규가 들고 있던 나무가지를 던지며 무심히 말했다.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피한체 민규는 괜히 모래가 묻은 손을 털었다. 그걸 누가 알아. 비도 눈도 오는지 안오는지.
"말 안 해주면 몰라."
"……"
"걔가 걷고 있는 길이 설령 꽃길일지라도, 넌 말 안 해주면 몰라."
"……"
"니 발이 진흙 투성인지도 말 안 해주면 모른다고."
"……"
"니가 지금 불안한게 뭔지, 권순영은 알 것 같아?"
"……"
"아니, 걘 절대 몰라."
혀를 한번 차며 주머니에 손을 넣은 민규가 잡히는 따뜻한 핫팩을 여주에게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작 궁상 떨고 이제 좀 들어가라. 핫팩을 천천히 매만지기만 반복하는 여주 뒤로 몇 걸음의 발을 옮기던 민규가 뒤를 돌아 아직도 벽에 기대 쭈그려 앉아 있는 여주를 바라보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야. 김여주."
"……"
"나도 몰랐어."
"……"
"너가 말 해주기 전까지. 몰랐다고."
새벽에 잔기침이 입안에서 맴돌더니 결국 밤새 뜨거운 열을 얻고야 말았다. 찢어질 듯한 목에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난 여주가 방안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조금 부은 눈의 지혜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눈을 마주 할 수가 없었다. …잠이나 잘 껄. 생각이 많았던 지난 새벽의 저를 원망하는 여주였다.
혹시 몰라 챙겨 온 마스크를 뒤집어 쓴 여주가 죽을 상인 얼굴로 버스에 올라탔다. 아쉬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은 아이들 뒤로해 첫번째로 올라탄 것이였다. 창밖을 바라 볼 힘도없어 여주는 창가에 머리를 기댄체 눈을 감았다. 곧이어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곁을 스쳐 지나가는 온기들이 느껴졌다. 야 김여주 괜찮아? 걱정스러운 수민의 목소리에 여주는 힘없는 고개를 저었다.
익숙한 향이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깊게 감긴 여주의 눈이 뜨거운 숨과 함께 파르르 떨렸다.
"……"
"……"
스쳐지나 간 줄만 알았던 향이 제 곁을 계속해서 맴돌았다. 머리까지 지끈거리게 만드는 향기에 부은 눈을 간신히 뜬 여주가 제 옆자리에 앉아 태연하게 앞을 바라보고 있는 순영에 순간 당황해 굵은 기침을 내뱉었다. 소리만 들어도 고통이 전해져오는 기침에도 순영은 묵묵히 굳은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다 작은 한숨과 함께, 그제서야 달아오른 여주를 바라보았다.
"……"
"……"
마주친 두 눈 속에서, 몇시간 전 고요한 새벽속에 민규와 함께 있었던 모습이 겹쳐보여 순영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도 안전벨트를 푸르고, 어딘가에서 얻어 온 담요를 여주의 몸에 꼼꼼히 덮어주는 순영의 입에서는 한마디의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마스크 속에 파묻혀 영문을 모르겠다는 여주의 눈을 마주한 순영은 결국 힘이 풀려 피식, 하고 여주에게 져버리고 말았다.
"…내가."
"……"
"너를 어떻게 이겨."
"……"
"그치 여주야."
'D-1.'
"……"
일주일째 순영을 피하는 시간 속에서 어느덧 수능은 하루를 남긴체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항상 둘이였던 도서관이 아닌 혼자의 독서실에서도 여주의 머리 속은 온통 순영 뿐이였다. 딸깍, 딸깍. 공식 하나를 외우는 시간보다 순영과 함께 했던 하루, 아니 일분을 생각했고, 아무렇게나 써진 영어 문장 하나를 외우기보단 순영과 함께 공부했던 영어 문장을 생각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동안 순영을 피하기는 모래에서 바늘을 찾는것보다 어려운 일이였다. 왜 이러냐는 순영의 물음에도 묵묵히 입을 다물었고, 제 앞에서 처음으로 화를 내는 순영의 모습에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권순영은 꽤나 끈질겼다. 또 다시 아무 소리 없이 화면을 밝혔다 꺼지는 핸드폰 속엔 '권순영 197통.' 하는 문구만 띄울 뿐 난 녀석에게 아무 답도 전할 수 없었다.
말을 안해주면 모른다는 민규의 말. 입술을 한 번 깨물은 여주가 소리 없는 흐느낌과 함께 책상에 몸을 엎드렸다. 물기먹은 코를 들이마시는 소리는 여주 혼자 남은 독서실을 가득 울렸다. 말을 안 하는게 아니였다. 여주는 말을 못 하는거였다.
"……"
"……"
예상밖의 전개였다. 컴컴한 가을 밤 하늘 아래 하얀 입김만 연속적으로 내뱉는 두 사람의 거리는 어중간했다. 어떠한 말도 없이 그저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던 순영이 이내 여주에게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멀어지지마. 피하지마. 물기 어린 두 눈이 그렇게 말했다. 권순영이 운다. 점점 빨라지던 그 발걸음은 이내 한 순간에 여주 앞까지 다가가 그 몸을 세게 안았다. 서럽게 우는 순영의 등을 두들겨 줄 수도 따라 안아 줄 수도 없었다.
"…왜 그러는데 진짜."
웅얼웅얼. 내 어깨에 파묻힌 입술 때문에 녀석의 말이 조심스럽게 들렸다. 따라 울고 싶었다. 나도 녀석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고 싶었다. …큼. 점점 뜨거워지는 눈과 물기가 차오르는 코에 괜한 헛기침을 하며 감정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권순영."
"……"
"얼굴 보고 얘기하자."
"…싫어."
가까스로 떼어낸 얼굴은 이미 눈물로 엉망진창이 되있었다. 내 얼굴을 마주하고 다시 한번 일그러지며 눈물을 터뜨리는 얼굴을 닦아줄 수도 바라볼 수도 없었다. 너도 울잖아 여주야. …왜그래 진짜. 난 안울어.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떨리는 내 목소리에 권순영이 애원하듯 고개를 푹 숙인체 두 손으로 내 양팔을 잡아왔다.
"…좋아해."
"……"
"…좋아해 여주야. 어?"
나도 좋아해. 괜한 헛소리가 나올까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동그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달래주고 싶었다. 나도 너와 같은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렇게 말하기는 싫었는데, 진짜 울면서 말할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멋있게 고백하고 싶었는데 미안해. …그래도 좋아해 여주야."
"…미안." 천천히 들린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방울, 방울 눈물을 매달고 있는 눈을 조심스레 쓸어주며 입을 열었다.
"…니 옆에서 행복할 자신이 없다."
내가 너를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언제 있었냐는듯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수험장을 마지막으로 빠져 나왔다. 주책맞게 눈물이 나왔다. 모든걸 다 끝냈다 는 후련함과 점수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 아니였다. 툭 흐르던 눈물이 어느덧 두 뺨을 적셨다.
'나 이긴거야? 어? 진짜 너 90점이야, 여주야?'
교실을 뛰어다니며 좋아하던 너의 얼굴이 눈 앞에 그려졌다. 그만 풀려버린 다리에 길가임에도 불구하고 쭈그려 앉아 서럽게 흐느꼈다. 한적한 길가임에 다행이였다. 모든건 끝이 났다. 내 손으로, 내 입으로 끝냈다. 보고 싶었다. 다시 한번 나로 인해 웃고, 나로 인해 울고, 나로 인해 살아가는. 너로 인해 살아가는 나를 바라보고 싶었다. 잘 봤어? 전해지지도 않을 질문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졸업이 코 앞이였다. 훌쩍 지나간 세월엔 그 만큼의 시간의 머리를 길렀고, 우리는 성장했고, 모든 준비를 마췄다. 너는 수능이 끝나는 그 날로 행적을 감췄다. 졸업장 안받을꺼냐는 선생님의 음성메세지도 확인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김민규에게 욕을 한바가지 먹었다. 맞을 뻔 하기도 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쳤다며, 한 사람의 청춘을 망쳤다며. 별별 소리를 다 들었다.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내게 김민규는 그랬다. 원래 이런애였냐, 너와 말을 섞기 시작한, 너를 좋은 애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이 혐오스럽다고. 그건 권순영도 …마찬가지 일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말을 하지 않는게 아니라, 못하는 거라고. 내가 권순영의 인생을 망치는건 …그건, 녀석과 내가 연인이 되는 그 순간부터 일 거라고. 내 손으로 모든걸 망쳤다는 걸 나도 잘 안다고. 나의 청춘도 부셔져 버렸다고. 나의 별도 사라졌다고.
…나는 권순영이 나를 혐오해도, 권순영을 좋아한다고.
19살의 권순영에게 말하고 싶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결과가 어떻든, 글의 내용이 어떻든 결국엔 해피엔딩입니다.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