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피니트/다각] 사인 온(Sign on) 번외 , 명수 성열
w.규닝
시간은 벌써 어스름한 새벽 기운이 걷혀 갈 때 즈음 이었던 것 같다. 무작정 따라 붓는 술이 컵을 비켜나 테이블 위로 넘쳐 흘렀다. 명수가 제 옷소매가 적셔진 것을 보고 낮은 목소리로 욕을 내뱉었다. 진짜 씨발. 모든 게 엿같다. 흐릿한 눈을 들어 쳐다본 정면에는, 성규가 숨소리 하나 없이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저를 보고 좆같다느니 뭐같다느니 하던 성규는 언제 그랬냐는듯 죽은듯이 고른 숨으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미친 놈. 대책없이 널브러져 있는 성규의 머리통을 쳐다보던 명수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우현의 얘기를 듣자마자 그 작은 눈에서 펑펑 눈물을 쏟아낸 성규는 명수의 속을 있는대로 헤집어놓고 잠에 빠진 것이었다. 싫지 않으니까, 나는 남우현이 좋아요. 다시금 잔 가득 채워진 술을 멍하니 바라보던 명수의 머릿속에 푹 잠겨있던 성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괴롭히지…말아줘요. 퉁퉁 부어서 벌게진 눈을 하고선 그대로 쓰러지기 직전에 성규가 했던 말이었다. 싫은 게 아니니까 좋아하는 거라는, 그런 궤변이나 늘어놓은 주제에 먼저 쓰러져서 잘도 잔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실은 왜 웃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어울리지도 않는 웃음을 입가에 걸친 명수가 테이블 바닥에 흩어져 있는 성규의 갈색 머리카락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명수의 손 끝에 닿은 성규의 머리카락은 간질간질하게 명수의 심장을 괴롭혀 왔다. 닮았다고 생각했다. 2년 전, 한결같았던 성열의 머리색. 오갈 데가 없어 방송국 비상 계단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울 적에도 가벼운 입맞춤을 나눌 때엔 어김없이 자신이 감싸 안았던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 김명수, 담배 피고 키스하지 좀 마. 그럴 때마다 너랑 헤어지고 싶거든? 무작정 입을 맞추고 싶어서 키스했던 제 자신을 밉지 않은 투로 나무랐던 그 때의 이성열. 막무가내인 키스 끝에 흐트러진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정리하며, 저리 가. 입을 삐죽였던 2년 전의 이성열.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김성규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말도 안되는 말이지만, 방송국 일 때문에 지쳐서 칭얼거리던 그 때의 이성열이 피곤함에 곯아 떨어져 자고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성규의 머리카락으로 뻗었던 손을 한 치 거둬들인 명수가 여전히 실실거리며 웃었다.
그 새벽에는 그렇게, 웃었다고 생각했다. 운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저를 속였을 만큼.
-
"왜 말이 없어?"
솔직히 처음에는, 시도 때도 없이 헤어짐을 말했던 이성열의 말버릇이 또다시 시작된 줄로만 알았다.
"못 들었어? 그만 만나자고."
몇날 몇일을 뜬 눈으로 새워, 오랜 결정 끝에 꺼낸 말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미미한 빛의 백열등이 먼지 쌓인 소품들을 어둡게 밝히고 있었고, 프로그램 중간- 남는 시간을 농땡이치고자 성열의 손목을 붙잡고 무작정 끌고 들어온 소품실 안에서 잔잔한 성열의 목소리가 의미 없이 기지개를 켜던 명수의 행동을 뚝 멈추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 삐걱거리는 매트 위에 눕다시피 앉은 명수가 기지개를 켜던 팔을 거둬들이고 대수롭지 않은 눈빛으로 성열을 훑어봤다.
"넌 또 왜 그러냐, 피곤해 죽겠는데."
"흘려 듣지 마. 장난으로 말한 거 아니야."
"야, 여기 와서 앉아봐. 여기 편하,"
"씨발새끼야. 나 방금, 진심으로 헤어지자고 한 거라고. 못 알아들어?"
그런 명수의 옆에 멀찍이 떨어져서 조용히 앉아 있던 성열이 대뜸 꺼낸 것은 평소 언행답지 않은 거친 욕이었다. …뭔 새끼? 성열의 헤어지자는 말을, 이번에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던 명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두운 주위 탓에 성열의 모습이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흥분했을 때면 늘 그랬듯이 오르내리는 어깨가 꽤나 진심으로 했던 말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명수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성열. 이번엔 또 무슨 이유로 헤어지고 싶으신데요?
"그렇게 비아냥거리지도 마."
"…야, 너."
"넌 지금도 진지하지 않지?"
얼굴 윤곽마저 뚜렷히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성열이 바람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이래서 내가 내린 결정이야."
"……."
"너 좋다고 사랑 타령이나 하고 살 시간에, 차라리 개처럼 일하고 사는 게 더 나을 거라고."
"…뭐?"
"항상 제멋대로인 니 뒤꽁무니 쫓아다닐 시간에, 세트장 구석에 처박혀서 직급 높은 작가들 원고에 오탈자나 고쳐주면서 살거나ㅡ 세트장에 있어도 모를만큼 작은 피래미지만 여기 저기 기웃거리면서 스태프들 점심 식사 주문 전화나 하는 게 더 가치 있을 거라고 생각될 정도로,"
우리가 헤어지는 게, 훨씬 더 잘한 선택이 될 것 같아. 김명수.
성열이 하는 말 중간마다 내뱉는 옅은 숨마저 피부 맡에 느껴질 만큼 고요한 소품실 안이었다. 자세를 고쳐 앉은 명수의 눈이 성열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진행될수록 차갑게 식어갔다. 그리고 결국 성열의 말이 끝났을 때에는ㅡ 뭐?라고 되물을 수도 없을 만큼 할 말을 잃은 명수가 저만치 보이는 성열의 실루엣을 보는 눈에 힘을 주었다. 지금 이런 말을 하고도 너의 표정이 멀쩡한 건 아니겠지. 사실은 이 때까지도 장난으로 하는 말일 것이라고 생각한 명수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면서 헛웃음을 지으려 했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그런 명수의 안이한 생각을 단칼에 잘라내듯 단호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덧붙여져왔다.
"그렇게 한다면, 지금 이렇게 너랑 소품실에 처박혀 앉아서 관계자들 눈 피해 쪽잠을 자지 않아도 될 정도로 성공하게 될 거니까."
그런 말을 한 성열의 목소리에서는 아깟번과 다르게 떨림이 느껴졌다. …이성열. 중얼거리듯 성열의 이름을 말한 명수가 속으로 솟구치는 짜증을 억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장난 치고는 멘트가 쎘다? 명수가 아까부터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성열의 실루엣을 보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 또 왜 그러는데ㅡ하며 성열 쪽으로 손을 뻗으려고 했을 때였다. 저를 향해 다가오는 손을 느낀 성열이 옆으로 살짝 몸을 비켜 멀어져 나간 것은.
그 때문에 미미한 백열등 빛에 살짝 드러난 성열의 얼굴이 보였다. 갈색 머리카락이 두 눈을 가려 어떠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가늠하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 말하니까, 성공하고 싶어서 환장한 놈으로 보이겠지?"
"……."
"근데 아냐. 너보다 일을 선택하려고 하는 진짜 이유는 너야. 니가 그렇게…만들었어."
저를 잡으려 허공에 뻗었던 명수의 손이 아직까지도 가까이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진짜 이유는 너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성열이 미약하게나마 자신을 비추던 백열등 빛을 등지고 섰다. 성열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어두웠던 소품실 안이 순식간에 어두컴컴하게ㅡ명수의 눈을 뒤덮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고 여기서 나간 후에, 퇴근하고 나서 집에 도착하잖아?"
성열이 소품실에 달린 작은 문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나는 평소처럼 집에 들어가자마자 겉옷도 벗지 않고 소파에 누울거야. 닫혀져 있는 커튼을 걷을 새도 없이 피곤해서 소파에 드러누워 있으면서도ㅡ 항상 보던 예능 프로가 시작할 시간에 맞춰서 티비를 틀 거고, 앞에 놓인 귤이나 까먹으면서 새벽까지 그렇게 거실에 널브러져 있을거야."
그렇게 걸어가기를 몇 발자국. 문고리 앞에서 걸음을 멈춘 성열이 길었던 말을 끝낸 후에 살짝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새벽까지, 아침까지. 그렇게 아침이 지나 또 다시 방송국으로 출근하게 되는 시간 바로 그 전까지."
그렇게 멀어져간 뒤 쪽에서는 그 어떠한 소음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명수는 아마, 언제나 그랬듯이 꼼짝없이 제 말을 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명수의 행동을 머릿속으로 상상해보다가 픽 웃은 성열이 바로 앞쪽에 있는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나는 너랑 헤어질거야."
지금 김명수는, 내 말을 또 장난처럼 여기고 있진 않을까ㅡ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준 성열이 힘이 들어가지 않는 입꼬리를 당겨 억지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때까지도 너는, 보고싶다 한 마디도 안 할 새끼라서."
잘 있으라는 한 마디 없이 성열이 소품실 문을 나섰다. 끝까지 잔잔했던 마지막 말은 성열이 섰던 자리에서 아직까지도 뱅뱅 맴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적어도 혼자 남겨진 명수에게는 그랬다.
쾅,닫혀진 문짝이 낸 소리가 명수의 귓전을 울려왔다. 그 둔탁한 소리가 손에 잡히지 않았던 아까처럼, 저와 성열을 더욱 잡히지 않는 곳으로 떨어트려 놓는 것만 같았다.
진짜로 장난이 아니었구나 생각한 것은 그렇게 문이 닫히고 난 뒤였다. 성열의 실루엣이 언뜻 비쳤던 자리 언저리에 앉은 명수가 아직까지도 굳은 표정을 하고서는 제 자리에서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장난식으로 헤어지자 말했던 성열이지만 이번만큼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금방이라도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와 …그냥 해본 말이었어. 말해 줄 것 같지가 않아서.
다시금 찾아온 숨이 막힐 듯한 정적 속에서, 머리카락을 어둡게 밝히던 백열등이 깜빡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종래에는 완전히 칠흙같은 어둠 속에 명수를 혼자 남겨두었다.
-
…우현아, 남우현.
어느샌가 테이블 위로 이마를 박았던 명수의 귓가에 흐느끼듯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도 없이 비워낸 술잔이 그새 동이 나버려 갖은 욕지거리와 함께 테이블 위로 엎드렸던 것이 생각이 났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계속해서 우현아, 우현아 불러대는 성규의 목소리를 들으며 몸을 일으킨 명수가 흐릿하게 풀린 눈으로 자리에 바로 앉았다.
잔뜩 웅크린 성규의 머리통 옆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어두운 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명수가 멍한 시선을 그 빛에 고정했다. 성규의 휴대폰 액정에서 나오는 불빛인 것 같았다. 지이잉 거리는 소리를 반복하던 휴대폰이 몇 초 후에는 깜깜하게 죽어버렸다.
아무 생각 없이 바라봤던 장면이었다. 취해서 잠을 자고 있는 와중에도 칭얼거리는 목소리로 우현의 이름만 연거푸 불러대는 성규의 목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있던 명수의 눈에 포착된 것이 다였다. 휴대폰. 문자라도 왔던 것인지 짧게 울리고 끝나버렸던 성규의 휴대폰에서 비쳤던 액정 빛.
명수가 제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렇게 휴대폰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액정을 켜게 되는 그 때 까지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정말이지 새까만 머릿속으로 몇 번의 실수 끝에 누른 번호는 그랬다. 예나 지금이나ㅡ연락 하고 있진 않아도 무엇보다 익숙한 열 한자리.
신호음은 꽤 길었다고 기억한다. 끊기기 직전까지도ㅡ건조하기 짝이 없지만 그런 통화 연결음만이라도 듣고 있으려, 받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면서 테이블에 엎드린 명수가 두 눈을 마악 감았을 때였다. 오랫동안 반복되던 연결음이 끊기면서, 2년 전 그 날처럼 무섭도록 잔잔한 침묵이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차라리 좋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라도 받아서 좋다. 술기운에라도 미친 셈 치고 말해버릴 수 있도록. 또 다시 전활 걸어 건조한 연결음에 들리지 않는 넋두리를 해 댈 바엔 니가 차라리 들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야."
지금와서도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밤마다 찾아오는, 생생한 초상화가 되어 남아버린 2년 전 그 날,
"……"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했다고.
"…보고싶어."
지금에야 말하는 것도,
…내가 전부 다 미안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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