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레 종인이의 볼 위에 주르륵 흘러내린 눈물 한 줄기는 날 당황시켰다. 종인이를 때리지도 욕하지도 않았지만 종인이를 울렸다. 난 나쁜 사람인 걸까? 이런 건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 배워본 적이 없어서, 종인이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하지만 위로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조용한 훌쩍임은 줄어들긴 커녕 조금씩 잦아들었다. 우린 그 상태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종인이를 의식적으로 피하게 된건 종인이가 입조심을 못한 날부턴 아니었다. 종인이를 포함한 우리 동아리 후배들은 구설수에 자주 오르내렸다. 워낙 말썽을 잘 피울 것 같은 아이들이라 그러려니 했었지만, 턱을 괴고 졸고 있던 오후 시끄러운 화재경보음이 내 졸음을 깨운 그날, 옆반에서 흠뻑 젖은 채로 걸어나오는 태민이와 종인이는 나를 실망시켰다. 특히나 종인이가 말이다. 나를 바라보는 종인이의 눈빛은 그저 연행되는 죄인이었다. 종인이가 선생님에게 끌려가고 아이들은 우르르 교실 안에 들어가 젖어있는 담배 필터 무더기를 발견했다. 찬열이의 책상 위였다. 반쯤 태워진 것들과 물에 젖기만 한 새것도 섞여있었다. 그걸 가지고 말이 많았다. 이 학년 교실에 물건을 훔치러 들어와서 담배까지 핀 쓰레기 같은 놈들이라며 모두 혀를 내둘렀다. 아이들은 모두 일 학년 말썽쟁이들을 싫어했다. 싫어하면서도 관심 일순위는 말썽쟁이들에게 있었다. 그 애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뉴스 속보처럼 빠르게 들려왔다. 뉴스라기엔 신빙성이 좀 떨어지긴 했지만, 내 짝은 뉴스로 친다면 뉴스 앵커와 다름없었다. 옆 자리인 나는 자연스럽게 청취자가 되주곤 했다."경수야.""어?""저번에 일 학년들 있잖아. 너네 동아리지?""응. 왜?""같이 있으면 오줌 안 지려? 걔네들이 동급생 담배불로 지졌대.""그럴 애들이 아닌데.."에이 설마.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야. 남의 살을 담배로 지지면 경찰서에 가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이건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그리고 걔네 삼치기 쩔잖아.""삼치가 뭔데..? 생선이야?""셋이서 바이크 하나 타고 깝치는 거. 밤마다 돌아댕긴대. 내 친구가 직접 봤다던데? 아무튼 너 조심해." 순정소설w. 아우디 친구가 직접 봤다고? 그럴듯한 얘기엔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문을 접하고 나서 종인이가 무서워졌다. 다른 애들은 나와 가까이 지내지 않았기에 상관없었지만 항상 내게 잘 대해주던 종인이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마치 지영이가 주위 여자애들에게 하는 짓처럼 살갑게 굴다가 돈을 뜯어내는 용도로 날 쓴다든지, 아님 내가 만만해서 놀리는 거였다든지. 나는 눈치 있는 편이 아니라 그걸 못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 이후, 나는 유별난 말썽쟁이인 줄만 알았던 후배들의 하극상을 급식실에서 목격하고 정말 그 소문들이 사실일 거라 확신했다. 그렇지만 지금, 내게 기대서 울고 있는 종인이는 내가 알던 종인이와 더 가까운 것 같다."괜찮아. 울지 마."대답이 없는 종인이다. 눈치가 보여서-종인이가 무서워서일지도 모르겠다-종인이를 밀어내진 못했지만, 종인이에게서 풍기는 담배 냄새는 코를 마비시킬 정도로 지독했다. 담배 안 핀다면서? 나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다. 종인이는 내가 숨을 참을 수 없을 때까지 나에게 기대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점차 울음을 멈췄을 때도 그대로였다. 오늘따라 작아보이는 종인이의 등을 두드려주고 종인이를 밀어내려고 했으나, 종인이가 내 어깨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종인아.. 있지, 다 울었으면..""저 다 안 울었어요..""아니야 너 다 울었어.""잠깐만요.."더는 들리지 않는 훌쩍임에도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난 아무 말도 못하고 귓가에 너무도 생생히 들리는 종인이의 숨소리만 들었다. 이토록 눈물을 쏟아낼 정도로 마음 고생을 한 줄은 몰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누구보다 미웠던 종인이가 안쓰러웠다. 나는 종인이에게 그저 가벼이 여길 수 있는 친한 선배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내 비밀 얘기까지 가볍게 여기는 종인이를 너무 싫어했는데, 종인이는 그게 아니라는 걸 몸소 증명하듯 아이처럼 굴었다. 급식실에서 살벌하게 백현이를 노려보던 김종인-그 때문에 종인이가 더 미워지기도 했다-은 없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교정에 침을 뱉는 종인이도. 적어도 내 앞에서는 그랬다. 담배 냄새가 익숙해져 거슬리지 않을 정도가 됐을 때, 종인이는 고개를 들고 촉촉히 젖은 눈으로 나를 봤다. 하지만 종인이는 오 초도 안 돼서 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 상황이 어색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이제 다 울었어?""네... 곧 종 치겠어요."종인이의 말대로 남은 시간이 여유롭진 않았다. 차라리 고마운 타종이었다. 지영이에게 호되게 당할 뻔한 장소에 계속 있고 싶지 않다. 유지영은 남녀노소 안 가리고 협박하는 게 취미생활이다. 비록 난 팔다리 멀쩡한 남자애지만, 다섯 명의 언어폭력과 날카로운 눈초리는 혼자서 감당하기엔 무거운 것이었다. 만약 종인이가 와주지 않았다면 정말 맞았을지도 모른다. 종인이가 와줘서 정말 다행스럽다.우리 둘은 걸음을 재촉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시끌벅적하던 복도엔 벌써 교과선생님들이 책을 챙겨들고 교실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교실에 먼저 들어가지 않으면 꾸중을 들을 것 같다. 그래서 더 빨리 걷는 나였다. 종인이도 나를 따라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일 학년 교실이 있는 층에서 위층으로 올라가기 전, 종인이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 종인이를 불러세웠다. "종인아 잠깐만!""왜요?""지금까지 피해서 미안해. 나도 앞으로 너랑 다시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그리고 오늘 진짜 고마워!!"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도덕 교과서 같은 이런 말은 백현이에게 뽀뽀해달라는 말을 하는 것보다 부끄러워서 종인이의 대답도 듣지 않고 냅다 계단을 밟으며 올라갔다. 몇 주간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든 응어리가 사라진 것처럼 가뿐하다. 종인이와 나는 예전처럼 친한 형 동생 사이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기분 좋은 예감을 한다. 지영이의 폭언으로 그늘진 뒤뜰에도 손을 뻗었던 초여름 햇살은 우리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말했다. "야야. 경수야."내 짝은 나를 귀찮게 만들며 수업 중 겨우 불러낸 잠결을 헤집어놨다. 짝이 무슨 얘길 할지 벌써부터 예상이 된다. 어차피 공공연한 소문을 내게 말해주는 것이면서, 귓가에 바짝 다가와 소곤대는 짝이었다."응..""일 학년들 또 사고쳤대.""무슨 사고?""오늘 점심 시간에 매점에서 뭐 훔쳤대. 그거 때문에 교무실 들어가는 거 내 친구가 봤다던데?""아닌데? 한 명은 나랑 같이 있었는데?""그래..? 너 걔네랑 친해? 걔네 완전 쓰레기잖아.""쓰레기 아냐. 너가 말하는 소문 다 뻥 같아.""솔직히 말이 되냐? 옆 반에 뭐 뽀리러 들어간 거 너도 다 봤으면서..""그래도 소문은 소문이야.""소문 아니야. 내 친구가 봤다고.""소문이야.""아냐.""소문 맞거든?"나도 모르게 높아진 언성에 입을 꾹 다물었지만 칠판에 필기를 하고 있던 선생님께서는 나를 매섭게 노려봤다. 선생님은 주의를 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결국 내 태도 점수를 깎았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한낱 소문에 휩쓸리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뿌듯함일까, 아니면 친동생처럼 지내고 싶은 종인이를 옹호해줬다는 것에 대한 뿌듯함일까? 학교가 마치고 내 휴대폰엔 오랜만에 장문의 메세지와 함께 종인이의 이름이 찍혔다. 발신한 시간보다 늦게 확인한 거였다. 「형이제저 입단속도 잘할거고요 저도형이랑더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저는형이랑 원래부터 친하게지내려고 했었어요 그리고요 동아리시간에 저도 관심가르쳐주세기에요」관심가르쳐주세기에요..? 맨 마지막 문장이 이상했다. 아무리 읽어봐도 뭔가 이상하다. 문자를 얼마나 고쳤으면 단어 삽입을 잘못했구나? 종인이의 실수에 큭큭 웃음이 났다. 교실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백현이는 갑작스레 휴대폰을 뺏어가더니 액정을 확인했다. 바로 백현이의 표정은 굳어버렸다."경수야, 이게 뭐야? 너 얘랑 사이 안 좋다며.""어어.. 오늘 화해했어.""그래? 나는 경수가 얜 좀 멀리했으면 좋겠는데.""종인이는 괜찮아. 태민이랑 다른 애들이 나쁜 거야.""...글쎄."그 말이 끝이었다. 굳은 표정도 멋있는 백현이지만 하교길에 한 마디도 안 하고 걷기만 하는 백현인 날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발걸음에 맞춰주던 백현이는 발걸음이 빨라져있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어서 당황스럽지만 난 묵묵히 백현이의 옆에 붙어 걸었다. 우리 동네에 근접했을 때 백현이는 먼저 갈게, 하고 자신의 집쪽으로 가버렸다. 난 조증 환자도 아닌데, 백현이의 낯선 행동 하나에 기분이 순식간에 우울해졌다. 우리가 친구일 때도 백현이는 날 데려다주곤 했었는데. 백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생각했다. 그날 하루는 답장 한 통 없고 연락도 없는 백현이어서, 난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백현이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백현이의 모닝콜이 없는 것만 빼면 평소와 같은 아침이었다. 계절의 변화에 온도가 높아진 아침 공기는 날 막지 않았지만, 아무도 없는 아파트 앞은 내 발걸음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백현이가 조금 늦나?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지만 오히려 내가 조금 늦은 것이었다. 백현이가 아니라면 학교에 일찍 갈 이유도 없는데. 하교길은 몰라도 백현이 없는 등교길은 싫다. 기분 따라 한참이나 느려진 내 발걸음, 걸음걸음 걸을 때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게 됐다. 백현이가 뒤따라올까봐. 학교에 다 왔을 때 내 기분은 비로소 엉망이 됐다. 백현이는 이미 교문에서 학생 지도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이름을 적고 있는 백현이에게 달려가 당장이라도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등교 시간이라 교문은 북적거렸다. 난 울상이 돼서 교실로 올라갔다.짝의 인사에 답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자마자 꺼내든 건 핸드폰이다. 목메임을 짓누르면서 꾸역꾸역 키패드를 눌렀다. 백현이가 이따라도 보면 답장해주겠지.「백현아... 왜 그래 나 뭐잘못했어..?오늘 혼자와서슬펐어」종일 백현이의 답장만 기다리는 나인데 오후가 되도록 답장은 없다. 만반의 경우를 생각하며 나를 안심시켰다. 백현이 휴대폰이 고장나서 연락을 못한 걸 거야. 아침에 훨씬 일찍 와야 할 일이 생겨서 나한테 연락했어야 했는데 휴대폰이 고장나서 연락 못하고 먼저 온 거야. 매일 같이 등교했는데 날 까먹진 않았겠지. 같은 건물 안에 있으면서 마지막 교시까지도 연락은 두절이다. 왠지 수업이 끝난 교실 앞에도 백현이가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내 기분이 얼마나 더 엉망이 될까? 공교하게도 오늘은 정말 백현이가 필요했다. 담임선생님이 책상서랍과 사물함을 다 비우라고 하셔서 들고 갈 게 많았는데, 내 손으론 부족했다. 학교 예산으로 낡은 책걸상과 사물함을 바꾼다고 했다. 더 좋은 책걸상을 쓰게 되는 건 좋지만 왜 하필 어중간한 시기에 바꿔서 곤란한 상황을 만드는지 모르겠다.책상서랍에 있던 교과서 전부를 가방 안에 쑤셔넣고 남은 것들은 손에 들었다. 아직 사물함이 남아있다. 사물함에서 오래도록 빛을 보지 못하고 있던 줄넘기며 참고서는 내 깊은 한숨을 자아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백현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백현이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교실 밖에도 백현이가 없고, 신발장에 유일하게 남은 내 운동화는 아침에 놓아둔 그대로였다. 운동화 한 짝이 슬프게 보일 줄은 몰랐다. 마음을 고쳐먹고 찬열이에게 전화를 걸었다."찬열아~ 어디야?"- 왜."나 손이 모자라서 그런데 좀 도와주면 안 될까? 교과서 하루만 집에 갖고 가야 하는데.."- 그러고 싶은데 나도 담임이 책상서랍 비우래서 뭐 들고 있는 거 많아."너네도 그랬구나.. 알았어." 생각해보니 나만 이런 것도 아닌데 동급생 친구에게 부탁해봐야 소용도 없었다. 참고서를 그냥 버릴까, 고민에 빠졌다. 그래도 안 된다. 이 참고서도 살 땐 돈 주고 산 새책인데. 그러다 문득 생각난 건 종인이었다. 그치만 화해한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부탁을 해? 아아. 어떡하지. 결국 종인이에게 전화를 건 나였다. 종인이는 통화연결음 뚜, 소리가 세 번도 되기 전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종인아 너 어디야?"- 저요? 저 지금 피씨방이요."벌써? 알겠어."- 뭔데요? 왜요?"아냐."- 뭔데요. 아, 빨리 말해보세요."그게.. 나 오늘 짐이 좀 생겨서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데 괜찮아. 넌 이미 학교도 아니고.."- 아니에요. 저 지금 갈게요!종인이는 그말만 하고 전화를 뚝 끊었다. 거절 당할 걸 각오하고 참고서를 버리기로 마음 먹고 있었는데, 종인이는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숨을 헐떡거리며 우리반 교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저 급급한 모습을 누가 보면 여기 사람 하나 쓰러진 줄 알겠다."뛰어왔어?""형 들고갈 게 이거예요?"나는 자신의 책가방 안에 두꺼운 참고서들을 넣는 종인이를 보며 속담 하나가 떠올랐다. 잘 키운 동생 하나 열 친구 안 부럽다. 종인이는 내가 들고 있던 교과서도 뺏어들고 앞장섰다. 내가 괜찮냐고 몇 번을 물었지만 종인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런 건 일도 아니라고 했다. 조금만 지나면 어깨가 무지 아플텐데 저래도 되려나? 내 어깨랑 종인이 어깨는 넓이부터가 다르니까 안 아플 수도 있겠다."근데 변백현 선배는 형 짐도 안 들어주고 어디 갔대요?""모르겠어.."백현이 얘기에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백현이를 하루만 안 봤을 뿐인데 안절부절하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속상하고, 난 집에 가서 뭘 해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것이다. 백현이가 차라리 내게 불같이 화를 내줬으면 좋겠다. 그건 무섭겠지만 백현이가 너무 보고 싶은 마음에서 든 생각이다. 나는 일부러 화제를 다른 것으로 돌렸다."너 그거 알아? 너네가 막 친구한테 담배빵 했다고 소문 돈다? 바이크도 탄다고.. 내가 그래서 아니라고 했어.""그거 소문 아닌데요.""...진짜야?"종인이는 얼굴 표정을 굳히고 날 쳐다보더니 가짜겠어요 그럼? 했다. 담배빵이 진짜라고? 말로만 듣던 담배빵을 상상하니 소름이 돋는다. 빨간 담뱃불이 생살을 지지면 얼마나 아플까. 으으, 불에 타는 고통이 제일 아프다던데."종인아. 니가 지금은 잘 모를 수도 있는데 그건 나쁜 짓이야...""형.""응?"종인이는 씩 웃더니 뜸을 들였다. 더 무서운 행동이 종인이 입으로 직접 나올까봐 심장이 두근두근거린다."가짜예요. 누가 그런 이상한 소문을 냈지?""뭐야. 놀랐어.""우리 맨날 피씨방 학교 집 이러는데.. 바이크 탈 거리가 돼야 바이크를 타든 말든. 우리집에 자전거는 있는데 형 나중에 타고 싶으면 말해요."장난이어서 다행이다. 종인이가 먼훗날 조직폭력배의 일원이라도 되는 줄 알고 정말 걱정스러웠다. 종인이는 요즘 게임이 뭐가 대세다, 태민이는 싸움만 잘하고 게임을 못한다면서 이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파이터다, 가벼운 농담을 했다. 누가 뭐래도 난 테트리스가 제일 좋다. 금세 지칠 걸로 예상했던 종인이는 씩씩하게 우리 동네까지 잘 걷더니 갑자기 우리 아파트를 얼마 남기지 않고 뒤돌아섰다. 갑자기 종인이가 왜 이러지? 멀리서 한 여자가 '김종인!!' 종인이의 이름을 외치며 달려왔다. 아무래도 저 여자 때문인 것 같다."형 어디 다른 길 없어요?""왜? 쭉 가면 아파튼데?""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고요.."종인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앞으로 직진했다. 달려오던 여자는 우리의 앞길을 막아섰다. 종인이가 비켜 지나가려고 하면 종인이를 막아섰고 그 반대편으로 가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야 김종인!! 왜 모르는 척이야. 너 학교 끝나고 여기로 샜냐? 엄마한테 이른다. 어, 넌 종인이 친구니?""네. 학교 선배예요.""얘 귀엽다. 얼마 안 머니까 다음에 우리집 놀러와. 수궁동이야."종인이는 우리집 근처 사는데 웬 수궁동?"종인이 너 우리 동네 사는 거 아니었어?""당연히 이 동네 살죠. 대체 누구세요? 저 이 동네 사는데요?""미쳤니? 니 누나잖아, 누나.""예? 우리 누나 이렇게 안 못생겼어요.""얘 좀 봐라? 죽을래?""머리가 아프신가. 진짜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네요.""어쭈? 진짜 미쳤네?""형 뛰어요!!"자칭 종인이 누나분과 종인이를 번갈아보며 어쩔 줄 몰라하다 결국 종인이를 따라 뛰어가는 나였다. 체육 시간보다 더 열심히 달린 것 같다. 종인이는 폐활량이 받쳐 주는지 저만치 먼저 달려가 아파트 입구 계단에 주저앉았다. 나는 도중에 지쳐버려서 느릿하게 걸었다. 오늘 운동은 확실히 했다. 다시 평온해진 숨소리를 고르며 종인이 옆에 앉았다. 근데 저 여자가 종인이 누나가 아니면 대체 누구지?"진짜 너네 누나 아니야?""당연히 아니죠. 이름은 명찰 보고 알았나보네.. 요즘 세상엔 미친 여자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종인이 말대로라면 우리가 방금까지 말을 나눴던 여자가 소문만 무성하던 우리 동네 미친 사람이 맞다. 멀쩡하게 생겨서 어떻게 그 정도로 미칠 수가 있는지, 아무리 말끔해도 사람은 외관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걸 깨달았다. 그리고 미쳤다고 해서 말주변까지 미친 게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종인이는 충격을 받았는지 그 후로 말수가 줄어들었다. 종인이는 참고서를 내 방 책상 위에 내려놓고 집에 갔다. 혹시 또 필요하면 연락하란 종인이의 말에 나는 종인이를 미워했던 날들을 떠올리며 한없이 미안해졌다. 적막할 등교길을 예상하면서도 일부러 일찍 엘레베이터를 나선 오늘, 백현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침에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 그대로, 내가 백현이가 없던 하루만큼만 꿈을 꾼 것처럼 웃으면서 나를 반겼다. 정말 내가 꿈을 꾼 걸까? 꿈을 꿨다기엔 어제 하루가 너무 생생했다. 나는 백현이에게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백현아. 어제는 왜 연락도 안 하고 아침에 집 앞에도 없었어?""미처 생각을 못했어."나는 백현이 생각만 했는데. 백현이를 끔찍이도 좋아하는 내겐 가시 같은 말이었다. 백현이에게 서운한 티를 낸다면 백현이가 날 미워할 것 같아서 그러지도 못하고 그렇구나, 말하고 넘겼다. 우리가 함께한 날들 중 제일 기억하기 싫은 게 어제다. "오늘은 곧장 학원 가야지. 데리러 갈게.""응..""왜 이렇게 힘이 없어, 경수야."백현이가 맘대로 날 들었다 놨다 해서 힘이 없다. 백현이 때문에 힘이 없는데 그 이유를 묻다니, 백현이가 내게 한 질문 중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지금껏 나만이 백현이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백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종잡을 수 없는 바보 천지가 나다."대답할 힘도 없어?""응? 어제 혼자 무거운걸 들었더니 힘이 쭉 빠졌나봐. 책걸상 바꾼다고 막 그랬었잖아. 그래서 교과서 억지로 들고 갔는데..""혼자 안 들고 갔잖아.""어?""김종인이 도와주지 않았어?"종인이와 내 모습을 지켜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말하는 백현이었다. 김종인 세 글자를 말하면서 안색이 바뀌는 백현이의 얼굴에 내가 또 뭘 잘못한 건가, 지레 겁을 먹었다. 백현이가 다 알고 있는 이상 거짓말을 할 수도 없다. 애초에 거짓말은 필요없었다. 종인이는 그냥 동생이고 난 그냥 종인이랑 친한 형인데 백현이가 왜 이렇게 과민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가 안 갔다. 물론 친구 문제로 종인이를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 행동을 한 건 엄연히 따지고 들면 태민이었다. 종인이는 남일도 자기일처럼 도맡아서 해주는 착한 동생일 뿐이다."네가 전화 안 받길래 종인이한테 부탁한 거였어. 종인이 아니었으면 교실에서 내 교과서만 나뒹굴었을 거야. 태민이랑 놀아서 그렇지 종인이는 원래 되게 착해." "경수야. 종인이 종인이거리지 좀 마."".......미안해."아까 백현이가 한 말이 가시였다면, 이건 가시 백 개 박힌 선인장 같은 거였다. 백현이를 싫어하는 입장이었다면 아무렇지 않았을텐데 백현이를 너무 좋아하는 나로썬 가볍게 넘기기엔 무리가 있는 말이다. 백현이가 종인이 얘길 싫어한다면 차라리 백 번 입을 다물겠다."내가 김종인 가까이 안 했으면 좋겠다고 했지. 그치 경수야.""그래도..""그렇게 가까이 하고 싶어?""아냐. 가까이 안 할게.""나랑 약속해."생긋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내어주는 백현이는 평소의 얼굴처럼 다정하고 따뜻해서 망설임 없이 백현이의 새끼손가락과 내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했다. 앞으로 백현이가 나쁜 말은 삼가고 예전처럼 달콤한 말만 해줬으면 좋겠다. 무조건적으로 백현이가 좋아서 어떻게 대처해야할지도 모르는게 나니까. 난 이 약속이 하루만에 깨질 줄도 모르고 안심했다.후덥지근한 날씨에 교실 벽면에 딱 붙어서 시원함을 만끽하고 있던 점심시간, 내가 등을 맞대고 있던 벽면 위의 창으로 누군가의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처음엔 모르고 있었는데 내 앞에 앉아있던 친구의 눈이 휘둥그레져서 난 위로 고개를 젖혔다. 아래에서 보이는 얼굴이 평소보다 못나보이긴 했지만 누가 봐도 종인이의 이목구비였다. 나는 교실 밖에 나가서 말을 걸면 될 것을 망각하고 계속 목을 젖힌 채로 종인이에게 말을 걸었다."거기서 뭐해? 어떻게 올라갔어?""어! 형 찾고 있었는데.""나? 나 왜?""어제 제가 가방에서 책 하나를 안 꺼냈더라고요. 제 책인 줄 알았나봐요."종인이가 참고서 하나를 나에게 내려보내려다 손이 미끄러지는 실수로-종인이의 속마음이 나를 미워했다면 고의다-내 얼굴 위에 던지다시피 했다. 단면에 맞아서 다행이지 책 모서리에 맞았다면 눈탱이가 밤탱이가 됐을지도 모른다. 참고서는 가벼운 중량이 아니었고, 내 이마는 살짝 띵하니 어지러웠다."아, 아, 내 손 씨발새끼.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요 형.. 아프겠다. 괜찮아요?"종인이는 굳이 손을 뻗어서 내 이마를 문질렀다. 반 애들의 눈으로 봤을 때 우리가 엄청 웃겼을 거다. 종인이의 모습이 동물원 울타리 안의 염소털을 만져보는 관광객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나 둘 사라지는 별의 잔상에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백현이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경수야."난 고개를 들었다. 어딘가 부패돼있는 웃음을 지으며 나와 종인이를 번갈아보는 백현이가 뒷문에 서있었다. ***순정소설 15화를 남기고 인스티즈 글잡과 작별합니다 T.T 요즘 너무 바빠서 인티를 돌볼 겨를이 없네요....그래서 15화도 늦어졌구요 독자님들께 너무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끝까지 소신연재 하고 싶었는데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순정소설 자체는 연중이 아니에요앞으로 순정소설과 그외 제가 쓰는 글들은 제 개인 블로그에서 만나실 수 있으세요지금까지 글을 읽어주신 한분한분 너무 감사합니다 28이전 글[EXO/카디백도] 순정소설 <14>13년 전 아우디 l 작가의 전체글 신작 알림 설정알림 관리 후원하기 이 시리즈총 0화모든 시리즈아직 시리즈가 없어요최신 글현재글 최신글 [EXO/카디백도] 순정소설 <15> 2913년 전위/아래글현재글 [EXO/카디백도] 순정소설 <15> 2913년 전[EXO/카디백도] 순정소설 <14> 2913년 전[EXO/백도] 엘리트 키드의 생애 上, 中, 下 4613년 전[EXO/카디백도] 순정소설 <13> 4613년 전[EXO/카디백도] 순정소설 <12> 4013년 전[EXO/카디백도] 순정소설 <11> 3813년 전공지사항[EXO/카디백도] 순정소설 <3> 7113년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