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항력
05
때로는 자신의 속에 담은 말을 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것이든. 듣는 사람이 있건, 없건 꺼내는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다. 자신의 속에 담을 내뱉음으로써 자신과 비슷한 고통을 가진 다른 이의 마음까지도 치유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도 더 좋은 것이 있을까. 다만 문제는 다른 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렸다. 만약 그것이 다른 이의 감추고픈 이면이었다면 자신을 더욱 고립시키며, 경계 태세를 강화하게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이 있을까. 같잖은 위로, 타인에게는 비수가 될 내 속에 담긴 말.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타인에게 낙화落火와도 같은 터지는 감정을 선사할 수는 없는가. 존재만으로도 누군가의 소도蘇塗로 남을 수는 없는가.
발표회 기간은 눈 깜짝할 새에 다가왔다. 더불어 지민의 상태도 나날이 예민해져 가고 있는 중이었다. 몸이 좋지 않은 것인지 콜록대는 모습도 보였다. 컨디션 조절이 생명이기에 그는 자신의 아픈 것조차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누군가에게 쫒기는 사람마냥 구는 것이 여간 위태로운 것이 아니었다. 오전 수업이 끝나기까지 대략 1시간정도가 남아 있었다. 어느새 나는 춘추복을 입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지민은 가까이 앉아 있는 내게도 들릴까 말까한 정도로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안무를 상기시키듯 그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교실은 조용했다. 아마, 지민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게 콜록댄 그가 인상을 구기며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오늘 발표회 볼 만 하겠다.”
“왜?”
“김예나, 일주일 전에서야 조 구했다던데? 또 실수하는 거 아냐?”
“야.”
교실 끄트머리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학생들은 진즉에 지민의 눈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심기가 불편한 것쯤은 눈치 채고 있었다. 지민의 목소리가 교실에 낮게 깔렸다. 그다지 큰 목소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목을 집중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저 멀리서 학생들이 지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지민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와는 상반되게, 반의 분위기는 초여름을 앞둔 지금에서도 팔에 소름이 올라올 만큼 시렸다.
“시끄러워.”
그렇게 말한 지민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볼에 홍조기가 보이는 것이 열이라도 오른 듯 했다. 어쩐지 아까부터 자꾸만 따뜻한 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에게 무어라 말하려고 하기도 전에 그는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벌써 그가 다시 내게 잔뜩 경계심을 품은 지 이 주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왜 그가 다시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경계인지 아닌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학생이 일어서며 엉덩이를 털었다. 시선은 지민에게로 고정시킨 채였다. 지민은 다시금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니, 그것을 몰랐을 것이었다.
시끄러워, 지랄하네. 지민의 말투를 따라하며 다시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교실 안의 모두가 위험을 감지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말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행여 그들을 말리다 지민의 눈에 띄기라도 할까 겁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지민이 숨죽여 웃었다. 옆자리에 앉은 내게로 간신히 들려오는 정도였다. 몸에 오른 열 때문에 주체가 되지 않는 것인지 그의 머리가 흔들렸다.
“박지민 무서워서 학교 다니겠나. 김준성한테 다리 아작 낸다고 했다며.”
나는 슬슬 지민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는 한다면 하는 사람인 것을 알았다. 무섭도록 자기가 뱉은 말은 지키려 하는 사람이었으며, 자기 것에 대한 소유욕도 강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지민을 관찰하며 얻은 결과였다. 지금 당장에라도 지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그들에게 주먹을 날려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몸을 던져서라도 지민을 말려야 할 것이었다. 누가 뭐래도 오늘은, 좆같은 발표회 날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못 해서 안 한 것 같아?”
분노를 꾹꾹 눌러 담은 지민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그가 고개를 젖혔다. 첫 사석에서의 만남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의 머리칼이 다시 흩날렸다. 진심이 가득 담긴 말이었다. 그의 표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아무도 그의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예상컨대, 내가 아는 지민의 모습을 학생들은 반도 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주먹 쥔 그의 손이 희게 질렸다. 그의 눈이 찌푸려졌다가 다시 웃음을 띠었다.
“괜히 이상한 마음 들게 하지 마. 이재현이 왜 학교에 안 나오겠어?”
나는 무엇보다도 지민이 저렇게 웃는 모습이 낯설었다. 왜 그가 한계치에 다다를 때쯤이면 저렇게 순한 얼굴을 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습관 같기도 했다.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의자가 밀리며 내는 소리가 기괴하게 울려 퍼졌다. 순간 숨을 들이마시곤 숨을 멈추었다. 그에게는 타인의 숨을 멎게 하는 그런 힘이 있었다. 재현이 지민의 말에 따라 급하게 유학을 떠났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다른 아이들은 모를 것이니 이상한 소문이 뒤따를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지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들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휘둘러도 이상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민은 그 상태로 교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닫힌 뒷문을 바라보다가 빈 의자에 시선을 두었다. 그가 교실을 빠져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는 도통 다시 떠오를 줄을 몰랐다. 학생들은 교실 끄트머리에 아직도 머물러 있는 그들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아마 그것은 야유의 시선이었을 것이었다. 학교의 분위기는 지민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으니 말이다.
지민은 수업이 시작되고 나서도 들어오지 않았다. 수업에 집중이 될 수가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온갖 시나리오가 떠다니고 있었다. 지민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기숙사에 없을 것이라면 지민, 자신에게는 매우 혹독한 일이겠지만 차라리 연습실에라도 있었으면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으면 했다. 그가 스스로 공포의 대상이 되기를 원한 적은 없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시큰거리는 손목을 주물렀다. 시계의 초침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시계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곧 있으면 수업이 끝나겠다고 생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전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지민이 빠져나간 뒷문을 따라 빠져나갔다. 급한 걸음으로 뛰다시피 건물에서 벗어났다. 그가 무리한 연습이라도 했다가는 큰일이었다. 곧 발표회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멀리 있는 연습실 건물을 탓하며 걸었다. 코끝에 스치는 풀 향이 퍽 고통스러웠다. 숨이 찬데다가 한 곳도 빠짐없이 푸르게 자리한 식물들의 향까지 코를 타고 들어오니 고역이었다. 몇몇의 학생들과 어깨가 부딪히기도 했으나 나는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4층까지 뛰어올라오니 입으로 심장을 토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민의 연습실 앞에서 한참이나 숨을 골랐다. 헝클어져 있을 머리칼도 정리했으며, 떨리는 손도 잠재웠다. 도어락의 번호키를 꾹꾹 눌렀다. 어쩌다보니 연습실의 비밀번호까지 알게 되어버린 탓이었다. 이 주간 지민이 연습실로 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의 공간에 온 것은 저번 그가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본 이후로 처음이었다. 문득 지민이 연습실에 있어도 문제라는 생각에 번호를 누르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지민이 다시금 불완전함을 내보이며 내게 왜 왔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아니, 그 전에 나는 왜 지민의 연습실에 왔을까. 나 자신도 모르는 것이었다.
결국 눈을 꾹 감고 누른 마지막 번호키와 함께 도어락이 열렸다.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지 못하고 우두커니 복도에 서 있었다. 가만히 서있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고역이었다. 피로감이 몰려왔다. 나 스스로 던지는 질문의 늪에 빠진 탓이었다. 이대로 내가 문을 열지 않으면 곧 문은 다시 잠길 것이었다. 문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섰다. 문을 열 용기가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땅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다시 들어 올리자 문이 벌컥 열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시선을 올리자 그의 손이 보이고 다음으로는 지민의 얼굴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지민이 문을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기고는 가만히 서 있었다. 내게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는 입도 벙끗하지 않은 채였다. 나는 열린 문 사이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안에서 지민이 자신의 몸을 옆으로 세워 내가 들어올 자리를 마련했다. 연습실에서는 내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연습실에 들어서자 문은 원래 막혀있던 것 마냥 굳게 닫혔다. 그는 내게 아무런 말도 걸지 않았다. 거울 속의 자신만 뚫어질 듯이 바라보며 몸을 꺾었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내 연습실의 이불과도 같이 헝클어진 모습을 하고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거울로 눈이 마주친 그가 자신의 이불이 깔린 곳을 향해 오려는 듯 몸을 내 쪽으로 틀었다. 그가 했던 것처럼 이불을 접어 올리자 가만히 서있던 그가 다시 몸을 거울을 향해 돌리곤 음악을 처음부터 다시 틀었다.
지민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발목에서 오는 고통에 눈을 찡그렸다. 두 번을 연속으로 턴을 한 그가 다시 허공으로 날아오르듯 뛰어 한 바퀴를 더 돌아 착지했다. 그 모습에 나는 지민의 모습에서 나비를 연상시킬 수 있었다. 그의 모습은 금방에라도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다. 어쩌면 신기루와도 같았다. 야속하게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어쩌면 내게 가장 큰 시련을 안겨 주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의 감정 변화를 누구보다도 더 잘 캐치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치기어린 생각이었다. 나는 나의 감정조차도 파악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서 땀방울이 떨어졌다. 눈물과도 같아 나는 정말로 그것이 땀방울인지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야 했다.
옷을 갈아입고 발표회가 열릴 무대가 있는 건물로 향할 때까지도 지민과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내가 그에게 했던 말이 해가 되는 말이었나, 혹은 그에게는 우습게 느껴졌나. 나는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우리의 차례는 대략 앞에서 열 번째였다. 기다리는 동안 지민의 얼굴이 더욱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곧 쓰러질 듯 열기가 느껴졌다.
“너 몸 괜찮아? 올라갈 수 있어?”
“…괜찮아.”
건성으로 대답한 지민이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차게 떨리는 내 손을 그의 얼굴 위로 올려놓고 싶었다. 옆에서 그가 길게 내쉬는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더운 숨이 내 몸을 감싸는 것만 같았다. 무대에서는 예나가 시작하기 전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결국 다른 조를 찾은 모양이었다. 무용과 학생들로만 구성된 무대였다. 나는 그녀가 실수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는 저번의 실수를 만회할 생각이었던 듯, 다시 그랑쥬떼(Grandjete)의 동작을 안무에 넣은 듯 했다. 시작 전 그녀의 불안한 눈빛을 읽음과 동시에 그녀가 다시 발목을 삐끗했다. 뒤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맨살에 닿은 의자의 천이 아주 까슬까슬해서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아팠다. 몇 달 전, 나를 지나치는 그녀를 보며 그때의 실수를 모두 잊었다는 생각 역시도 사람을 파악할 줄 안다는 나의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녀는 아직 실수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실수는 흉터처럼 그녀에게 따라 붙어 공포를 심어주었던 것이었다. 한참이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결국 부축을 받으며 일어난 그녀는 눈물이 터졌다. 끅끅대는 숨넘어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나는 그녀가 불쌍했다.
지민과 나의 차례가 되자 모두가 확연히 집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들의 기대감에 중대한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피아노에 반쯤 가려진 지민의 모습도 그랬다. 원래는 피아노가 반대 방향으로 돌려져 있어야 맞지만, 내 순서에서는 방향을 돌려 내 쪽에서 지민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숨을 골랐다. 눈앞의 피아노 건반이 아른거렸다. 가뜩이나 열이 올라있을 그는 쓰러지지 않는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밝은 빛 때문에 누구의 시선도 내게 닿지 않았다. 지민과 시선을 맞췄다. 건반에 손을 올려놓고는 그와 함께 숨을 들이 쉬다, 내쉬기를 반복했다. 그와 내 호흡이 일치하는 순간 나는 첫 건반을 눌렀다.
멀리서 그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그와 동시에 건반을 눌렀다. 그의 감정에 함께 빠져들어 연주를 이어갔다. 글리산도를 마침과 동시에 쿵하는 소리와 함께 피아노 선율이 멈췄다. 그에 지민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죽은 듯이 누운 그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뻗었던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졸랐다. 다시 시작되는 연주에 그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가 뒤구르기로 미끄러지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연주는 어느새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고, 지민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어서 연속으로 두 번 턴을 하더니, 허공에 띄운 몸을 한 바퀴 돌려 착지했다. 느려지는 연주에 그가 여린 나비의 날갯짓을 형상화했다. 점점 낮아지는 멜로디가 마침표를 찍었고, 지민은 무릎을 꿇은 채로 몸을 축 늘어뜨리고선 고개를 숙였다. 우리의 무대가 막을 내렸다.
그도 나도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아득해지는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자, 고막으로는 박수소리가 타고 흘러들어왔다.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나는 빛에 눈이 부시다는 것을 알았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지민과 고개를 숙였다. 머리가 어질했다. 지민의 상태가 심각해진 것 같았다. 땀을 잔뜩 흘리며 고개를 찡그린 그는 숨을 쉬는 것조차도 힘겨워 보였다. 비틀거리는 그의 모습을 보다 먼저 퇴장하는 그의 뒤를 따랐다.
아무리 보아도 지민의 상태로는 더 이상 앉아있기도 힘들어보였다. 무대를 벗어나 보이는 계단으로 가려 지민을 이끌었다. 아직도 귀에서 이명처럼 박수소리가 맴돌았다. 우리와 마주친 교수가 눈을 번뜩였다. 'Alive' 우리와 아주 걸맞은 주제였다고 입이 마르도록 이야기했다. 눈을 뜰 수도 없어 보이는 지민의 상태를 보다가 적당히 눈치껏 예, 예. 하고 대답했다. 지민이 그를 부축하려 잡고 있던 팔을 내쳤다. 팔에 남은 그의 온기가 차갑게 식으며 한기가 돌았다. 멀어지는 지민을 따라갈 수도 없게 교수는 말을 이었다. 차라리 혼자 갈 수 있다면 빨리 가 쉬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들어 내버려두었다.
“지금껏 봐왔던 것 중에 가장 대단했어. 지민 학생과 자네는.”
“아,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시선은 지민을 쫓고 있었다. 비틀거리는 모양새가 퍽 위험해 보였다. 앞에 선 교수는 비켜설 줄을 몰랐다. 이제는 내 눈앞에서 박수까지 쳐대는 것이었다. 박수소리에 머리가 울리는 것만 같았다. 저 멀리서 지민이 계단으로 들어선 것이 보였다. 환상의 파트너였네. 교수가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손에 고인 땀이 흐르기라도 할 것 같았다. 다음 무대가 시작되기 전 인사가 있었다. 그러자 교수가 급하게 손을 흔들더니 그곳을 향해 걸음을 재촉해 걸었다.
갑자기 비틀거리던 지민의 모습이 떠올랐다. 차라리 엘리베이터로 갔으면 마음이라도 놓였겠으나 계단으로 가다가 그가 쓰러진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급한 마음에 구두에 까진 뒤꿈치가 따가운 줄도 모르고 뛰었다. 계단으로 들어서자 지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벌써 내려갔을 수도 있겠다고 머리로는 생각했으나 몸은 지민에게 빨리 가야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계단으로 내려가려 난간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시린 손잡이에 손바닥이 쓰라렸다. 급하게 계단으로 발을 내딛으려 하자 한 층 아래서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아는 목소리였다.
아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틈 사이로 보이는 지민의 얼굴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의 앞에선 그녀, 그러니까 나의 후원자이자 지민의 친모인 그녀가 지민의 앞에 서 있었다. 금방에라도 지민은 쓰러질 듯 위태롭게 숨을 내뱉고 있었다. 가만히 서있기만 했는데도 몸이 흔들리고 있었다. 길게 숨을 내뱉는 지민과 눈이 마주쳤다. 지민이 먼저 시선을 돌렸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지겹게 굴 거니? 이쯤 되면 다 큰 거 아니었어? 반항이라도 하는 거야?”
“…….”
“집에서 나가지도 못하게 다리를 부러뜨려놔야 그만둘 거니?”
지민이 그 말에 몸을 잘게 떨었다. 나는 숨을 멈춘 채로 있어야만 했다. 벽에 기대 선 지민이 한없이 작아보였다. 지금 그에게 다가갈 수 없는 나를 원망했다. 그녀가 그를 벼랑으로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를 건들이면 그는 바로 쓰러져버릴 것만 같았다.
“너희 형처럼 아버지 말 잘 들으면서 공부나 좀 하랬더니 기어코 버텨?”
“하기 싫다는 누나는 억지로 피아노 시켜서 결국….”
큰 마찰음과 함께 지민의 고개가 돌아갔다. 중심을 잃은 그가 크게 휘청거렸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떠한 소리도 새어나가게 하지 않으려 입을 틀어막았다. 숨이 막혀도 그대로 있었다. 차라리 저 자리에 서있는 것이 나였으면 했다. 벽을 짚으며 중심을 되찾은 그가 다시 자리에 섰다. 그의 볼이 더욱 발갛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보고 대신 예술 하라고 한 적 없어. 알았니? 이미 대체할 년이 있는데 왜 네가 이러고 있느냔 말이야.”
“…….”
고개를 들어 올린 지민이 나를 응시했다. 그녀가 말하는 대체할 년이라는 것이 나를 뜻하는 듯 했다. 이미 식사 자리에서 수차례 피아노를 강조했던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이 내가 아니라는 것은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그의 눈에 담긴 것은 경멸도 불안도 아니었다. 한없이 작아진 그를 나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떨리는 손이 틀어막은 입에서 소리가 새어나갈 것만 같았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은 그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몇 번을 말해줘야 알겠니. 너는 재능이 없어. 못한다고. 죽어도 못할 거야. 그러니까, 말이나 제대로 듣고 하라는 것만 해. 알아들었니?”
말을 마친 그녀가 누군가의 방관을 눈치 채기라도 한 듯 몸을 떨더니 빠르게 빠져 나갔다. 지민이 벽에 등을 기대고 미끄러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나는 몸을 일으켰다. 무릎부터가 달달 떨려왔다. 긴장을 풀면 다리에 힘이 빠져 계단에서 구를 것만 같았다. 지민이 있는 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지민이 가슴께로 끌어당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마지막 계단을 밟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져왔다. 부서질 것만 같은 그의 옆에서 무릎을 꿇었다.
“너 잘해. 내가 봐왔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열심히 해. 너는 잘할 거야.”
“…….”
“잘하고 있어. 응? 너는, 너는.”
횡설수설 말을 내뱉었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지민의 어깨에 손을 올려두고 있었다. 지민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저번 연습실에서 지민에게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가 오늘까지도 단 한 마디 밖에 하지 못했던 것이 떠올라 말을 그만두었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글자 배열이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뭐라도 하고 싶었다. 할 수 있다면 대신 아프기라도 하고 싶었다.
“아니, 몸은. 몸은 괜찮아? 병원 갈래?”
“…….”
지민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냈다. 동시에 지민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그는 간헐적으로 더운 숨을 내뱉고 있었다. 홀로 버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나는 알고 있었다. 지민은 그러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떼어낸 내 손을 보더니 그가 내 손목을 잡았다. 잡힌 손목에서 그의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가 손목을 끌어 당겼다. 덕분에 중심을 잃은 나를 안은 지민이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어깨에서 그의 뜨거운 숨과 떨림이 느껴졌다. 내 허리를 끌어안은 그를 보다가 어색하게 그의 등에 손을 올렸다. 그의 등을 토닥였다.
“나 힘들어.”
“…응.”
“숨 쉬고 싶어.”
“…….”
“아파. 너무, 아파….”
지민의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의 등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잘게 떨리는 목소리가 갈피를 잃은 듯 했다. 그가 내 어깨에 기대어 울었다. 그의 열이 내게로 옮겨져 오는 기분이었다. 덩달아 나까지도 몸에 열이 올랐다. 그가 이제라도 내게 기댈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를 안고 울었다. 내 어린 아이와 같은 지민 때문이었다. 힘겹게 숨을 쉬는 그의 등을 진정시키려 연신 토닥였다. 그의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누군가의 소도蘇塗가 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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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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