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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illharmonic orchestra(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 어린 소년은 얼마나 큰 상처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소년이 감당할 수 있는 상처이긴 할까. 상처가 이미 소년을 잡아먹어버린 것은 아닐까.여느때처럼 바이올린을 키는 소년의 새하얀 손이 흔들리기 시작했던 건, 어느순간 소년이 꾹 잡고있던 바이올린 현이 예전처럼 떨리지 않는다 것을 알아채 버린 건 언제부터였을까.'나 아파요. 힘들어. 죽을 것 같애.'하고 말하고 있는 소년의 손을 그의 바이올린이 '아직은 아니야.'하고 잡고 있는 것만 같아 보였다.소년은 여전히 나를 슬프게 한다. 처음들었을때 내게 충격을 안겨준 그 연주와 같이.소년의 연주는 여전히 완벽하다. 슬프게도.2009年 05月 17日따스한 봄날 세베스 강당에서the pillharmonic orchestra의 단원을 모집합니다. 바이올리니스트 1명.-안녕하세요.하얀 A4종이에는 sehun oh라 적혀있는 짧은 이름과 증명사진 하나. 그리고 간단한 인적사항이 전부였다. 이게 전부야? 레이, 니가 1차로 다 골라냈잖아. 그런데 콩쿠르 입상은 커녕 아무 것도 없는걸. 투정부리듯 중얼거리자 레이가 대답했다."베오르가 특별히 넣은 걸로 알고 있는데."뭐? 베오르가? 어린 소년의얼굴을 빤히바라보았다. 한 번 더 pr종이를 보았다. 91년생이면... 19살, 저 소년을 베오르가 특별히 뽑았단 말이야? 이유는? 왜 너한테만 말한거야? 궁금증이 가득한 말만을 쉴 새 없이 내뱉자 레이는 웃음 섞인 한숨을 내뱉았다."일단 들어 보자고, 나도 잘 모르니까."레이가 팔을 살짝 들어 연주를 시작해도 좋다는 사인을 보냈다.소년은 텅빈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바이올린을 한 번 쳐다보더니 목언저리에 가져다댔다.소년의 나이와는 맞지 않는 공허한 표정이었다. 순간 저런 표정을 짓는 소년이 궁금해져 어린나이에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하고 생각하려는 찰나 소년의 연주가 시작되었다.나는 어떤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았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소년의 바이올린은 해일과도 같았다. 평화로이 해변가를 걷고 있던 내 시야를 예고도 없이 가득채워버린 해일은 아무런 생각도, 행동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저 온 시야를 가득 채워버린 눈 앞의 해일을 바라보며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그렇게 소년은 나 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모든 것을 한 번에 덮치고 쓸어버렸다. 6분 남짓한 짧은 시간동안 소년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소년의 바이올린에 잠식당했다.우리는 소년의 연주가 끝나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모든 지원자들에게 했던 "연락하겠습니다."라는 짧은 말을 건냈을 뿐이었다. 오늘 지원자들에게 수도 없이 말했던 저 말은 아무런 의미를 담지 않은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소년에게 건낸 말은 달랐다. '당신을 꼭 우리 오케스트라에 데려오고 싶군요.'2009年 05月 18日단 한 명의 바이올리니스트를 모집했기에 우리는 고민했다. 물론 화제의 중심은 '소년'이었다. 다른 참가자들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저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를 데려오느냐 마느냐였다. 물론 그의 연주는 우리 모두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었지만 그 때문에 의견은 상반되게 갈렸다. 그의 연주는 지나치게 어두웠다. 곡의 영향이었을까? 아니. 모두 알 수 있었다. 그의 바이올린은 아프다. 그에 만의 하나라는 가능성으로 머릿 속을 온통 차지해버린 것은, 그 상처어린 바이올린이 이 오케스트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고. 소년의 연주에서 비롯된 처음 해보는 상상이었다.
2009年 05月 19日누가 봐도 명백했지만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그 어린 바이올리니스트를 단원으로 맞이하기로 하였다. 모두가 동의하진 않았지만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를 놓치면 안돼.'"베오르!"온 신경을 귀에 두고 있었다. 전화의 수신음이 끊기자마자 베오르의 이름을 불렀다. 먼저 이야기를 꺼낼거라 생각했던 베오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먼저 말을 꺼낸건 나였다.
"베오르. 저 소년을 도대체 어디서 찾은거예요?""세훈이 왔었나보군."베오르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준, 내가 언젠가 한 번 말하지 않았나. 그에 대해.""....""그리고 자네는 찾고 있지 않았나.""하지만.""끊게. 곧 돌아갈테니 그때 보자고."전화가 끊기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다가 생각났다. 언젠가 베오르가 내게 해준 이야기가.
2006/ 11/ 21베오르의 방에 들어갔을 때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그의 지독한 버릇 중 하나는 간접흡연을 즐긴다는 것이었다. 그는 담배를 직접 입에 대는 것은 혐오하면서도 담배연기에 둘러 쌓인채 공상을 하는 것은 곧잘 즐겼다. 어릴 적부터 그 이상한 모습을 보아온 나는 그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익숙해져버렸다. 베오르. 소파에 온 몸을 푹 파묻은채 눈을 감고 있는 베오르를 작은 목소리로 불렀고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채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맞은 편에 앉았고 베오르는 손가락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연기를 내뿜고 있는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베오르는 드디어 나를 쳐다보았다. 베오르는 한참동안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나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준, 자네가 쓴 곡을 보았네."드디어 베오르의 입에서 꺼내진 말에 나는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완벽하더군. 그리고 그걸 내게 보여주지 않은 이유는.""...""불가능한 화음이 있더군. 하지만 그걸 자네가 모를리는 없고.""그건...""준, 그 곡을 연주할 수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를 찾고 있지 않나."베오르는 이미 내 머릿 속을 모두 꿰뚫고 있었고 그에 대한 부연설명을 할 필요는 없었다. 베오르는 침묵 속 대답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다시 소파에 온 몸을 푹 파묻고 눈을 감았다. '저' 행동의 의미는 둘 중 하나다. 아주 피곤한 일이 있었거나, 피곤할 일이 있거나. 무슨 일일까. 재떨이 위의 담배 개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개수를 채 다 세지 못 했을때 베오르는 나는-하고 입을 떼었다."운 좋게도 세 명의 천재를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지."여덟, 아홉"..."열..."신은 참 가혹하시지. 운명의 장난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베오르.""준, 난 신이 내게 주신 임무를 성실히 수행할 생각이네."나는 더 이상 베오르에게 말을 할 수 없었다. 베오르는 다시 담배불을 붙이고 있었고 그 뜻은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있었기에. 베오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볼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해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과거를 여행할까 우리.2005/ 03/ 21 - 1
겨울의 끝이었다. 또는 봄의 시작. 너를 만난 것은, 그 경계에 서있던 아슬아슬함. 그때 이루어졌다. 어김없이 벤치에 앉아 있는 날이면 누군가는 그런 나를 보며 수군거렸다. 쟤가 걔라며? 다 알면서 의문형으로 말을 마치는 것이 퍽이나 우스워 피식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음악으로 통하는 학교인만큼 그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빠르게 학교를 휘감았다.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소문'이라는 것이 말이다."맞아."그리고 난 딱히 그것을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사실이니까."네가 말한 것들 말이야."나는 벙찐 표정을 하며 나를 보는 여자애 두 명에게 친절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이라니까? 나는 멍하니 나를 쳐다보는 아이들에게 확인시켜 주듯 방금 막 완성한 악보를 팔랑팔랑 흔들어주었다. 아, 맞다. 있잖아."내가 베오르 아들인건 사실인데 너희들이 아무 생각없이 떠들어대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니야."사실 너희가 만들어내는 영화같은 이야기는 너무 낯간지럽거든. 나는 덧붙여 말했다. 그 아이들은 내게 비밀스러운 일을 들키기라도 한 듯 얼굴이 빨개진채 걸음을 옮겼다. 그 판에 박힌 장면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악보를 손에서 놓쳐버렸다. 흩트러지며 느리게 떨어지는 오선지들에 나는 입을 벌려 아-하고 애매한 소리를 내었다. 간헐적으로 부는 바람에 의해 흰 종이들은 같은 극을 가진 자석처럼 멀어졌다. 다시는 야외에서 작곡을 하지 않아야지-하고 결심하며 당장 아래에 있는 오선지를 주섬주섬 줍기 시작했다."준!"나는 꽤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레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레이는 다섯 걸음정도 떨어져 있었다. 손에는 꽤 멀리까지 가버린 내 악보를 쥐고 있는 모습이었다. 레이는 앞으로 매고 있던 크로스백을 벤치에 던지더니 곧 당연하다는 듯 주저앉아 악보를 주웠다. 나는 그 모습에 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역시 너밖에 없어." 하고 말했고 레이는 그에 "속편한 소리하고 앉아있네!" 하고 외쳤다. 또 웃음이 나왔다.2006/ 05/ 21"레이 난 왜 몰랐을까. 왜 몰랐을까. 내 탓이야. 이건 전부 내 탓이야. ""준, 제발 너 때문이 아니야. 그만해, 준, 제발."손에 잡히는대로 흰 종이들을 찢으며 울음을 억지로 삼키며 어쩔 줄 몰라 저의 가슴을 아프게 치는 그 애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피아노 옆에 있던 악보대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쓰러졌으며 발을 디딜 수 있을만한 모든 곳에는 흰 종이들이 갈기갈기 찢겨져있었다. 계속되는 처절한 장면들에 나는 잠시동안 멍하니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은 날카로운 것에 베인듯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준의 손 때문이었다. 준! 나는 소리를 지르고는 그 애의 손을 낚아 챘다. 주먹을 꾹 쥐고 있는 그 애의 손을 억지로 폈다. 살이 벌어져 있었고 그것도 모르고 손을 꽉 쥐었는지 그 사이 손톱자국으로 상처는 엉망이었다. 피는 울컥울컥 계속 차올랐고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그 애의 손을 잡고 있는 내 손 조차 모두 빨갛게 물들여졌을때 준은 피로 뒤덮힌 우리의 손을 한 번, 손을 꽉 잡고 있는 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소리 내며 울기 시작했다. 아파. 너무 아파- 쉰 목소리를하며 숨이 끊일듯 울었다. 레이, 너무 아파. 아파- 나는 그런 준의 손을 한참동안 꽉 쥐고 있었다.2009年 05月 20日"준, 정신 좀 차려."
레이의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깜빡 피아노 위에서 잠든 것이 생각났다. 여전히 눈을 감은채였다.
"...레이, 그 애 있잖아."
잠에 잠긴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레이는 응- 하고 대답했다.
"어떨 것 같아?"
나는 질문과 동시에 느리게 눈을 떴고 레이는 내 옆자리에 앉아 피아노 위에 올려진 악보를 살피는 것 같았다. 악보에 집중하고 있나. 막 뜨게 된 눈을 통해 보이는 시야가 흐렸다. 눈을 두 어번 깜빡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흐린 시야는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응?- 나는 대답을 재촉했고 동시에 가볍고 느린 레이의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악보에 집중하느라 말이 들리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2009年 05月 21日나는 항상 기억력 좋은 레이에게 택시 번호를 물었다. 그럼 그 애는 이제 번호 좀 외우라는 핀잔대신 천천히 번호를 읊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전화를 걸어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어디서든 사과 하나를 구해와 내 손에 쥐어주곤 했다. 이 사과 다 먹을때까지 돌아와야 한다?- 라는 말을 빼놓지 않으며, 예쁘게 웃어주기까지 한다. 나는 그에 똑같이 예쁘게 웃으려 노력하며 다녀 올게- 라는 말을 하고는 막 도착한 택시에 타버린다. 딱히 대답을 회피하려 한 것은 아니지만 이 손에 올려진 사과 하나를 다 먹을때까지 돌아 온다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럼 아마 평생 돌아오지 못할지도도 모르는 일이었다. 의도친 않았으나 항상 제정신을 차리고 보면 오른손에 쥐고 있던 사과가 사라져 있으니 말이다. 분명 단 한 입도 먹지 않았는데도.2009年 05月 22日시체마냥 잠만 잤다.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다.2009年 05月 21日"세훈?"현관문을 열자 보인 것은 그 애였다. 여전히 흰 얼굴과 새카만 생머리를 한 아이는 그때와 똑같았다. 그저 손에 들린 것이 바이올린이 아닌 캐리어였다는 것을 빼면. 그 애도 적잖이 놀랐는지 꽤 벙찐 표정을 했다. 이내 내가 나가려했었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캐리어를 옆으로 끌었다. 물론 나는 갑작스럽게 만난 세훈으로 인해 나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그 애의 섣부른 친절로 인해 아- 하고 탄성을 내뱉고는 다리를 움직여 두 걸음 정도 옆으로 비켜섰다. 먼저 들어오라는 친절이었다. 어쨌든 손님, 또는 단원, 구성원 또는,… 아니, 두 번째 만남을 이렇게 안도 밖도 아닌 곳에서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세훈도 내 행동의 의미를 알아챘는지 캐리어를 들어 안으로 들어왔다.철컥-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고 우리는 좁은 현관에 서있었다. 나는 손목시계를 한 번 흘끗 보았다. 시간은 꽤 촉박했다. 약속을 미룰까 생각도 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예의가 아니었다. 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했고, 피하는 것 마냥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다시 세훈을 쳐다보았다. 나는 세훈에게 예상치 못한 인물임이 분명했는지 여전히 어색하게 서있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베오르는 세훈에게 조금의 부연 설명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세훈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은 누구에요? 하고 묻는 것 같았다. 그런 세훈을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조금은, 늦어도 되지 않을까."일단 들어갈래?"말을 건내자 세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돌렸고 내가 무어라 더 말하려는 찰나 컬러링이 울렸다. 레이였다. 어떻게 안거야..."응"준, 가지마."왜 그래, 약속 한거야."그래도 가지마. 갈 필요 없어. 안가도 되는거잖아.- 레이는 꽤 차분히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화를 꾹꾹 누르는 것 같았다."그래도 가야해."너 진짜!- 레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화를 참고 있다는게 느껴졌다. 물론 그 감정의 대상이 내가 아니라는 것 또한, 너무 잘 알았다. 레이 넌 너무 날 걱정하잖아. 난 괜찮을건데, 정말이야. 나는 긴 말을 대신해서 하하 웃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잠시동안의 침묵은 항상 필요한 과정이었다. 나는 레이에게 괜찮다 표하는 침묵이었고 레이에게는 그런 나를 이해하기 위한 침묵이었다. 한참을 핸드폰만 잡으며 고른 호흡소리를 듣다 문득 거실을 쳐다보았다. 세훈이 있었다."안그래도 너한테 전화하려고 했는데."세훈은 캐리어를 거실 중앙에 내버려두고는 악보를 보고 있었다."집에 세훈이 왔어."세훈? 베오르가 데려온 그 애 말하는거야?"응. 네가 나 대신 세훈이 좀 봐줘."너 진짜 갈꺼야?...- 레이의 목소리는 어느새 차분히 가라앉아있었다. 그에 나는 가야해- 하고 말했고 레이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이내 알겠어, 대신 전화 받아- 하고 전화를 끊었다.2009年 05月 21日준은 아무래도 술에 취한 것 같다. 중얼중얼 알아 듣지 못할 한국어를 몇 마디 하고는 푸스스 웃는걸 보니 꽤나 거하게 취해버린 것 같다. 고개를 푹 숙였다가 다시 번쩍 들었다가 도리도리 흔들다가 턱을 괴어버린다. 그리고는 쿠우- 소리를 내며 자기 시작한다. 나는 그런 준을 보며 소리내 웃었다. 괜찮아 보여 다행이다. 다치지 않고 와서 다행이다.
네가 한 짓이 무엇인지, 너는 알아야 한다."이 손은 나의 이상이고 이 손은 나의 현실이지.""내 허상을 현실로 그려주는 유일한 사람."준은 말을 끝맺고는 씨익 웃었다. 나는 그런 그를 넋놓고 쳐다보았던 것 같다. 곧 그는 그런 내 시선에 민망해졌는지 하하 소리내어 웃었고 그러니까-하고 말했다. 그에 나는 아-하고 응할 뿐이었다."그 애, 모를리가 있나."허탈한듯 웃었다.당신이 저지른 일인데 왜 당신은 이미 없나. 당신이 각색한 대본의 주인공들은 이렇게 비참하게 망가져 있는데도.나는 베오르를 원망했다. 끊임없이 원망했다. 그가 말한 신이 준 임무라는 것은 이렇게나 비참한 것이었다.참으로 멍청한 생각이었다. 너를 둘러싼 공기가 없다면 이또한 전해지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너를 둘러싼 모든 것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모든 것이 방해였다. 온전한 너를 들을 순 없는 일일까. 이또한 열망하면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리라.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너를 들으면 항상 멍청해지는구나.베오르의 시선으로 나를, 그리고 그를 읽었을때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베오르가 말한 게 이것이었구나.그러기에 그는 나의 절대신이다. 나는 그의 유일한 광신도이기도 하다.순간이 이리도 찬란할 수 있을까.부유하는 먼지가 방해였고 미세한 공기의 파동이 방해였고 모든 이치의 기본이 되는 중력이 방해였다. 미쳐버린 것이다, 나는.너는 영원히 슬퍼하라. 없는 네가 내게 명령을 내리는 듯 했다. 그에 나는 웃음을 흘리며 그럴 수밖에-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감성이 붙잡을때에 나는 곤란해진다. 이성의 반대는 내게 악이었고 곧 달콤함이었다. 그가 의미하는 것은 내가 빠져나올 수 없음이리라.딩동- 나의 상념을 비웃듯 초인종이 울렸다.나를 닮지 말아라. 나를 담지 말아라. 배우지 말아라. 야비한 기회주의, 비열한 편의주의, 그리고 어차피 세상은 혼자 싸우기에는 무서운 곳이라 미리 단정짓고 불의인 줄 알면서도 군중에 야합하는 못난 패배주의, 너는, 그러지 말아라.이 또한 네가 없었다면 하나의 비곡에 불과했으리라. 네 부재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것이었다.비극이다. 레이는 혼잣말을 가장하며 조용히 읊조렸다. 이 모든것이 비극이다. 우리는, 너는 이 비극속 비운의 인물에 불과하다. 레이의 눈이 나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이 이 비극의 끝을 장식할 준비가 되었냐고 묻는다. 나는 그런 그의 이름을 부른다. 레이, 그의 눈이 나를 읽었다면, 비극의 끝은 비극일 뿐이라는 것을 답했을 뿐이었다.삶에는 위험과 불행이 잠복해있다는 것에 있어 예외는 없다. 그에 맞서는 것은 너무 비장하고도 슬픈 일이다. 언젠가는 사라지리라. 누군가는 내게 손을 뻗어주리라. 빛을 보고도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자신을 가두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것은 명백한 자살행위이다. 그리고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나는 그런 너의 자살행위를 손놓고 지켜볼 수 없다.그건 차마 내가 버릴 수 없는 신념이자 사상, 흔히 이데올로기라 부르는 것이었다.나는 항상 네가 눈물겹다.=밑에 다 버림2009年 05月 21日 -1골목길을 좋아한다. 생각 많은 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날, 내가 '내'가 될 수 없는 날, 그런 날이면 어김 없이 세베르에서 20여 분 택시를 타야 갈 수 있는 길을 찾아 가곤 한다. 내가 택시를 부르는 용도는 그것밖에 없기에 기억력이 좋은 레이에게 택시 번호를 물을때마다 그는 어디서든 사과 하나를 구해와 내 손에 쥐어주곤 한다. 이 사과 다 먹으면 돌아와야한다? 하고 말하며, 어깨를 툭툭 쳐주기 까지 한다. 나는 그럴때마다 대답 대신 슬쩍 웃어버린다. 사실 레이가 항상 하는 그 당부의 '말씀'을 난 한 번도 지킨적이 없어서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하여 그저 웃는 것이다. 레이도 그것을 아는지 나를 따라 예쁜 보조개를 보이며 웃어주었다.택시 안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기사가 말을 걸었다. "오늘은 피곤하지 않은 모양이시네요." 기사는 한국인이었다. 그는 20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항상 눈을 감고 있던 나를 기억하는지 그리 물어왔다. 나는 그것이 민망해 하하웃으며 오늘은 잠이 안오네요. 하고 대답했다. 사실 쓸데없는 접촉을 싫어하는지라 생긴 못된 버릇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허를 찔린 느낌이었다. 기사는 고개를 몇 번 끄덕거리더니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그에 나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휙휙 지나가는 형체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애였다. 완벽한 검정색 머리를 가진 그 애를 난 한순간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아- 하고 탄성 비슷한 소리를 냈고 움직이는 차안에서 그것은 그 애의 모습처럼 빠르게 없어졌다. 기사가 물었다. "세워드릴까요?" 아마 그는 내가 내는 소리에 그런 말을 꺼낸 것이다. 나는 아주 잠시 고민하다 이미 멀어진 그 애를 찾으러 간다는 것은 조금 바보같은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요. 그냥 가주세요." 나는 민망하게 웃으며 대답했고 그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나는 차 문을 열며 꽤 친절한 목소리를 냈고 기사도 웃으며 안녕히가십시오. 하고 말했다. 나는 택시에서 나오자마자 꽤 익숙한 길을 걸었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까만 아스팔트 길이 붉게 물든 것에 하늘의 풍경은 노을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5분 정도 걸었을까 골목의 입구가 보였다. 원래 1층엔 일반 가정집이 있었는데 맛있는 냄새가 나는 빵집으로 바뀐 것에 참 오랜만이구나 싶었다.골목 입구에 있는 회색빛의 가로등이 전기가 들어오는 소리를 내며 켜졌다. 하늘을 보니 노을이 조금씩 저물 모양이었다. 꽤 오래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람 한 점 없어 구름은 하늘에 머물러 있는 듯 했고 붉은 색의 빛이 구름을 물들인 것이 꼭 수채화 한 폭을 보는 듯 하여 관람비 하나 내지 않고 가장 아름다운 것같아 기분이 썩 좋아졌다. 그리고 붉은 하늘이 점차 어두워질때쯤 생각났다. 레이가 준 사과를 택시에 두고 내렸다는 것을. 순간 아차, 싶었지만 곧내 아무렴 어때싶어 걸음을 옮겼다. 레이에겐 사과의 의미로 사과 두 개를 줘야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하늘은 빠른 속도로 어두워졌고 곧 가로등만이 희미하게 어스푸름한 색을 띄게 되었다. 그리고 곧 나는 5월의 중간을 넘어가는 이 시간에도 밤은 꽤 춥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생경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으슬으슬 소름이 돋을때쯤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걸음을 돌려 스무 걸음쯤 걸었을까 바로 앞에 있을 세갈래 길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이 시간에, 이 골목엔 항상 사람이 없었는데. 불안한 마음에 걸음을 멈추었다. 거기다가 얼마 되지 않는 거리라는 것을 알려주듯 정확하게 귀에 꽂히는 거친 욕설에 순간 몸이 경직되었다. 이 골목에서 나가려면 무조건 저 길을 지나쳐야만 했다. 발을 굴리며 그자리에 서있었다. 계속 되는 마찰음과 함께들려오는 목소리는 2개였다. 하지만 분명 세 사람의 인기척이 났다. 싸우고 있는게 분명한데 한 명은 입조차 열지 않았다. 불안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한 걸음 내딛었을때 너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듯 했다.'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무의식적으로 숨을 참았다. 네 목소리는,'조금 더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겨야지.'조금씩 잦아들어가는 욕설과 마찰음에 섞여 그렇게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나는 걸음을 뗄 수 없었다. 환청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너의 흔적이 잠시라도 머문 이 공간에서, 내가 서있는 이 곳에서,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그렇게 굳어있었다. 고개를 돌리면 네가 없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게 될까봐, 걸음을 떼면 정말 다신 널 볼 수 없을까봐. 난 그렇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네 목소리가 완벽히 사라졌을때쯤, 그에 내가 정신을 놓칠때쯤, 바로 앞에 들리던 인기척이 멎어갈때쯤, 나는"더 때려."2009年 05月 21日 -2그 애의 목소리를 듣게 됐다.먼저 반응 한 것은 내 몸이었다. 영원히 이어지지 않을 것만 같던 두 번째 걸음은 무엇보다 빠르게 움직였고 곧 담벼락에 기대어 앉아 있는 그 애의 모습이 보였다. 우습게도 나는 그 애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 애의 손을 보았다. 흙이 조금 묻어있을뿐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네 옆에는 아마도 너와 싸우던 두 사람이 있었고 한 명만이 얼굴에 다친 흔적이 있을뿐 한 명은 멀쩡했다. 두 사람은 나를 보자 당황하더니 너에게 거친 욕설을 내뱉고는 골목에서 벗어났다. 그에 나는 곧바로 네 앞에 달려갔고 두 사람의 뒷모습을 쫓던 네 시선은 느릿느릿 나에게로 향했다. 누르스름한 가로등 빛은 네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모양을 조금씩 바꾸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너의 눈을 마주보았을때 나는 흠칫 떨었다. 네 날카로운 눈은 분명 나를 원망하고 있었다. 빨리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이 아닌 관망하고 지나치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 네 눈은 그것을 담고 있었다. 왜?'꼭 그래야 했어?'또 다시 들려오는 환청에 눈을 질끈 감고 목구멍에 걸려 차마 뱉어내지 못한 말을 삼키어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일어나려는 듯 너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너를, 너를 잡아야만 했다."음악을… 하는 사람이면."일순간 너의 인기척이 멈추어졌다. 울먹이는 내 목소리에 의해서가 아닌 '너'에 대해서 아는듯한 '음악'이라는 단어에 의해."조금 더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지……."눈을 뜨자 흐릿한 시야 속에서 똑바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네 얼굴이 보였다. 눈을 한 번 깜빡였고 그제서야 또렷하게 네 얼굴이 보였다. 놀란듯한, 조금은 화를 담아내고 있는 얼굴."세훈아."나는 먼저 일어났고,"가자…."너에게 손을 내밀었다.
2005/ 03/ 21 - 1
겨울의 끝이었다. 또는 봄의 시작. 너를 만난 것은, 그 경계에 서있던 아슬아슬함. 그때 이루어졌다. 어김없이 벤치에 앉아 있는 날이면 누군가는 그런 나를 보며 수군거렸다. 쟤가 걔라며? 다 알면서 의문형으로 말을 마치는 것이 퍽이나 우스워 피식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음악으로 통하는 학교인만큼 그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빠르게 학교를 휘감았다.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소문'이라는 것이 말이다."맞아."그리고 난 딱히 그것을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사실이니까."네가 말한 것들 말이야."나는 벙찐 표정을 하며 나를 보는 여자애 두 명에게 친절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이라니까? 나는 멍하니 나를 쳐다보는 아이들에게 확인시켜 주듯 방금 막 완성한 악보를 팔랑팔랑 흔들어주었다. 아, 맞다. 있잖아."내가 베오르 아들인건 사실인데 너희들이 아무 생각없이 떠들어대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니야."사실 너희가 만들어내는 영화같은 이야기는 너무 낯간지럽거든. 나는 덧붙여 말했다. 그 아이들은 내게 비밀스러운 일을 들키기라도 한 듯 얼굴이 빨개진채 걸음을 옮겼다. 그 판에 박힌 장면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악보를 손에서 놓쳐버렸다. 흩트러지며 느리게 떨어지는 오선지들에 나는 입을 벌려 아-하고 애매한 소리를 내었다. 간헐적으로 부는 바람에 의해 흰 종이들은 같은 극을 가진 자석처럼 멀어졌다. 다시는 야외에서 작곡을 하지 않아야지하고 결심하며 당장 아래에 있는 오선지를 주섬주섬 줍기 시작했다."준!"나는 꽤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레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레이는 다섯 걸음정도 떨어져 있었다. 손에는 꽤 멀리까지 가버린 내 악보를 쥐고 있는 모습이었다. 레이는 앞으로 매고 있던 크로스백을 벤치에 던지더니 곧 당연하다는 듯 주저앉아 악보를 주웠다. 나는 그 모습에 푸스스 웃음을 터트리며 "역시 너밖에 없어." 하고 말했고 레이는 그에 "속편한 소리하고 앉아있네!" 하고 외쳤다. 또 웃음이 나왔다.2009年 05月 21日 -3
나는 너에게 손을 내민 채였고 너는 그런 나를 놀란듯 쳐다보았다. 터진 입술은 무언가 말을 할 듯 아닌 듯 조금씩 떨리는 것 같았다. 나만 알아차렸을까, 너도 알아차렸을까. 조금씩 떨려오는 몸은 오월의 추위때문이라 변명하기에는 과장같았다. 그래, 사실 그것은 착각이리라. 볼품없이 떨리는 몸과 너에게 내민 손은 오히려 네가 잡아줘야 할 듯 했다. 그만큼 불쌍할정도로 떨고 있었다. 나는, 그래서 네 눈이 흔들리는 것 같았고, 입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달싹거리는 것 같아 보였다."……."2006/ 03/ 21 - 2"준, 악보가 한 장 없는 것 같은데?"레이는 피아노를 치던 손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놀란 눈으로 레이를 쳐다보았다. 그런 내 표정에 레이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는 꽤 한참을 그렇게 멍청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레이가 눈을 꿈뻑 감았다 떴을때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레이는 괜찮은거야? 하고 물었다."순간 슈타르크 과젠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생각해보니까 그냥 써본거였어""네가 쓴거잖아."레이는 걱정하는 투로 말하면서도 어느새 새 오선지 한 장과 펜 한 자루를 내게 내밀었다."뭐야. 지금 쓰라고?"그런 레이의 행동에 피식 웃으며 펜을 받아들였다."끝까지 쳐보고 싶어서."레이는 남은 오선지 한 장도 받으라는 듯 팔랑거렸다. 한 손으로는 피아노를 치는듯한 모션을 취하면서. 그리고 나는 그런 어린아이같은 레이의 모습에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레이, 이 연습실 몇 시까지 쓰는거야?""5시까지. 그건 왜?"나는 시계를 한 번 보았고 의자에 놔두었던 코트를 챙겨들었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레이를 보며 씨익 웃었다."찾아올게. 한 장."(저장)*안이어짐주의*2005/ 07/ 11
"모르겠어……."나는 내 말에 조금은 표정이 바뀐 너를 보다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네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대로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모르는게 좋아."네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을때, 오랫동안 맺혀있던 눈물은 신발에 떨어져 툭하고 소리를 냈다.2005/ 00/ 00
"넌 계속 이렇게 웃었으면 좋겠어."
너는 조금 웃음이 가신 얼굴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엄지손가락으로 내 입꼬리를 잡아올렸다.
"이렇게."
너는 언제 그랬냐는 듯 진지한 얼굴을 지우고는 다시 활짝 웃었다. 그에 나도 너를 따라 실없이 웃어버렸다. 그게 뭐야. 하며,
2010/ 00/ 00
왜 몰랐을까. 너도 울고 있었는데."그만해 준."날카로운 만년필의 끝에 그여버렸다. 아니, 그어버렸던가. 곧 살점사이로 피가 차올랐고 나는 그것을 보고만 있었다. 레이는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내 손을 잡아챘고 곧 그 애의 흰와이셔츠 끝자락이 내 피로 더러워졌다. 레이는 계속 그렇게 내 이름을 불렀다. 준, 준, 준. 네 부름에 대답하지 못한채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후회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보이는 너의 표정에, 수척해진 얼굴에,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2010/ 00/ 00
언젠가 네가 물었다. 신을 믿어요? 준, 당신은 신을 믿어요? 그에 내가 뭐라 답했더라. 안개 낀 듯 흐릿하고 불투명한 기억 속엔 울고 있는 네 얼굴이 보였고, 나는 아무런 답도 주지 못했다.신을 믿으냐고, 세훈아. 네가 믿지 않는 신을, 애석하게도 나는 믿는다. 너는 은연중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완벽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세훈아, 그는 완벽하지 않다. 완벽하지 못하여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너와 달리 나는 완벽하지 않은 그 자체의 신을 믿었다. 그리고 끝내 너를 죽인 신은 그 증거가 되었고 애초에 너와 나를 만나게 한 것마저 증거가 되어버렸다. 세훈아 슬프게도 나는 그를 믿는다.2010/ 00/ 00 (결말)
너의 죽음을 들었다. 너는 항상 내게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짊어지게 하고 나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힌다. 침대에 누워 애써 억누르고 억누르던 장면이 느리게 재생된다. 까맣던 머릿속에서는 내 방이 비춰지고, 그 속에 네 모습이 비춰진다. 줄곧 입으로 내쉬던 숨이 아프게 느껴진다. 목구멍 여기저기를 날카롭게 긋는 숨에 입을 막았다.네 모습은 계속 된다. 책상 위 하얀 머그컵에 꽂혀있는 커터칼을 꺼내던 네가 이젠 문을 열어 천천히 밖으로 나가려한다. 그 모습에 나는 이때까지 참고있던 숨을 급하게 쏟아내며 헐떡거렸다. 가지마. 세훈아. 가지마 제발.나오지 않는 목소리에 목을 움켜쥐었다. 네 뒷모습을 따라간다. 너는 떨리는 네 손으로 천천히 거실의 가구들을 훑었다. 짙은 남색의 커텐을 스치고 그 앞의 갈색의 소파를 만지고 항상 커피가 놓여있던 탁상 사이를 지나 하얀 시계를 한 번 바라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네 시선은 천천히 움직이며 장식장을, 그 옆의 마른 화초를,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나무서랍장을, 그 위의 흰 오선지를...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 아파 입밖으로 새어나오는 울음을 막았다. 천천히 움직이던 네 고개가 움직임이 멈춘다. 그 시선 끝엔 너의 바이올린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네가 그곳으로 간다. 여전히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손을 한 번 꽉 쥐고는 그곳으로 걸어나간다. 조금은 빠르게. 그리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이올린을 잡는다. 바이올린이 떨린다. 네 왼손에는 떨리는 바이올린이 나머지 손에는 커터칼이. 그 모습에 나는 소리를 질렀다. 하지마. 하지마 세훈아.내 목소리는 네게 닿지 않는다. 커터칼의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게 너는 현을 끊어냈다. 바이올린은 단말마의 비명같은 소리를 내었다. 그에 너는 마치 신기루를 보듯 바이올린을 바라보았다. 그 눈이 아프다. 너무 아파보인다. 바이올린을 내려놓았다. 현이 끊어져 버려 소리를 내지 못하는 바이올린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버렸다. 나는 네 바이올린을 안아 들었다. 세훈아, 세훈아. 하염없이 네 이름을 부르며 입 안에서 새어나오는 울음소리를 끅끅대며 참았다. 얼마나 아팠니. 얼마나 아팠던거야. 왜 그랬어. 왜 죽여버린거야.쏴아아-아득하게 들려오는 물 소리에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집고 뛰어가 화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제발 세훈아. 제발. 보이는 것은 흰 피부를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새빨간 피. 그것이 네 팔을 타고 내려왔다. 남자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울린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는 손목이 아니라 손을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그어댔더군.' 이미 빨갛게 물든 커터칼로 너는 왼손가락의 마디마디를 긋는다. 칼이 생살을 갈라놓는 끔찍한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입을 막고 있던 두 손으로 두 귀를 막았다. 아니야. 내가 듣고 싶었던건 이런게 아니야. 세훈아. 나는. 나는.너의 팔이, 그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가, 모두 빨간색으로 뒤 덮힌다. 그리고 첨벙, 투명한 물속에 빠져버렸다."그는 숨을 쉬려 하지 않았어요.""...""입을 막고 있더군요."의사는 덧붙여 말했다. 목을 조른 흔적도 있었고... 그는 더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레이가 그 앞에서 귀를 막아버리는 무례한 행동을 한 탓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레이에게 뭐라 할 수 없었다. 입을 악물고 눈을 꾹감고 고개를 숙인채 숨마저 참고 있는 듯 아픈소리를 내는 그에게 감히 누가 무어라 말할까.=2009/ 00/ 00
곧 연주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네 손이 움직일때마다 감탄하는 것이었다. 은연 중 생각해버린 것은, 순간이라는 것이 이리도 찬란할 수 있구나. 나는 너의 장면을 담았고 너의 소리를 담았다. 내 몸에 닿고 담을 수 있는 것은 그것들로 충분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너와 함께 찬란해질테니.2006/ 03/ 21 - 4
오선을 피해 반으로 찢겨진 종이에는 분명 내가 그린 선들이 있었다. 자연스레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이런 짓을 한거야. 반으로 찢긴 악보를 자세히 살피니 왼쪽 구석에 무언가 쓰여져있었다.trumpet-트럼펫. 그 옆에는 무언가 더 쓰려 한듯 자그마한 선 하나가 그어져 있었다. 흡사 사인을 하듯 휘갈겨 놓은 단어를 읽자마자 나는 누군가를 붙잡아야만 했다."저기요."질문은 짧고 명확했다. 관악기 연습실, 어딘지 아세요?악은 달다.그것을 구분해내기는 힘들다.트럼펫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었다.보이지 않아 더 슬펐다 하면 너는 믿어줄까.길어진 머리에 눈이 가렸다. 흰 얼굴에 까만 그림자가 졌다.내 허상을 현실로 그려주는 유일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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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김고은 연기 진짜 많이 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