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비밀결사대 01
written by 스페스
흔히 혼마치라 불리는 경성의 본정통은 우리 집이 있는 종로와는 판이하게 다른 세상이다. 경성우편국을 끼고돌자마자 대로변에는 미쓰코시, 미나카이, 히리다 백화점이 줄줄이 늘어섰고, 화려한 양장을 입은 조선인과 일본인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종로와는 달리, 세련되게 정돈된 본정통은 내게 별세계 같았다.
아직도 손에 감긴 레이스 장갑의 감촉이 낯설어 나는 본정통 대로를 걷는 내내 손을 움켜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석진이 보내온 연보랏빛 원피스는 아무래도 주인을 잘못 만난 듯 했다. 무릎 근처에 치렁하게 떨어진 치마가 어색해 몇 번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약속 장소인 미쓰코시가 가까울수록 심장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뛰어댔다. 미쓰코시 백화점 4층에 위치한 노천카페는 근래 모던보이, 모던걸들의 집합소나 다름없었다. 시야가 탁 트여 경성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보기 좋다는 이유로 일본인이나 조선의 부호들은 쓰디쓴 커피 한 잔에 몇 말의 쌀 값을 턱턱 지불해댔다.
굳이 완벽하게 모던 걸 행세를 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내 눈에도 엉성하기 그지없지만. 내게 총기도면을 전달할 이름 모를 누군가도 어설프게 모던보이 행세를 하고 나올 터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그는 나처럼 미쓰코시 백화점의 엘리베이터보다 경성을 가로지르는 낡은 전차를 훨씬 더 많이 타봤을 것이다. 맞선을 빙자한 임무만 무사히 완수하면 그뿐이다. 정국이 전한 바에 따르면 내게 비밀문서를 건넬 이는 피부가 하얗고 검은 코트를 입은 사내로 내 머리 위에 놓인 분홍색 코르사주를 보고 나를 찾을 거라 했다.
커피숍 안은 예상했던 그림이었다. 한껏 치장한 남녀가 짝을 이뤄 대화하기에 여념없었다. 홀로 앉아 그 남자를 기다리는 일분일초가 영겁같았다. 간혹 시야에 걸린 일본인 헌병대가 나를 주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면, 테이블 밑으로 내린 양손 가득 땀이 배어났다. 여유로운 척 미소를 짓고 있지만 물컵을 든 손이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렸다. 전정국이 어머니 말씀을 곱게 들었더라면, 경성도서관 앞에서 정국이 낯선 사내와 나누는 대화를 엿듣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렇게 긴장감에 구토할 것 같은 기분으로 어설픈 모던걸 행세를 할 필요조차 없었을 텐데.
한 달 전쯤이었다. 경성도서관 앞 벤치에서 정국이를 본 날이. 남매인지라 멀리서도 한눈에 남동생을 알아봤지만, 뻔히 학교에 있을 시각이라 처음에는 정국이가 아닌 줄 알았다. 동생은 또래로 보이는 낯선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모습이 어쩐지 의문스러워, 책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던 게 모든 사건의 시작이었다.
"다음달 10일, 장소는?"
"YMCA가 될지 조선호테루가 될 지 아직 모른대. 물론 너는 그냥 중간 역할을 하는거야."
"누굴 만나는 건데?"
조선호테루라... 둘의 대화에 책으로 가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잇새를 앙다물었다. 착실하게 학교나 다니는 줄 알았던 막내가 조선호테루를 드나들다니. 모던보이 행세라도 하는 걸까. 어린 게 벌써부터 여자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건가. 돌아가신 아버지가 들으시면 기함을 토할 노릇이다. 혹시나 웃음이 새어나갈까 숨을 꾹 참았다. 둘의 대화가 더 선명히 들렸다.
"그건 아직 나도 몰라. 중요한 건 이번건만 성공하면 무기 준비는 끝난 다는 거지."
"타케트는?"
타케트? 달뜬 정국의 목소리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타케트라니.
결국 막내도 독립운동에 발을 들인 게 분명했다.
누군가는 우리 집안을 대단하게 여겼고, 누군가는 우리 집과 거리를 두려 했다. 아버지는 조선총독부 경감 살해 미수 사건의 연루자로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옥중 사망. 큰 오빠는 일본군의 눈을 피해 만주로 향했고, 작은 오빠는 끈질긴 감시는 피했으나 친일파에게 총을 겨누다 그 자리에서 일본군이 쏜 총에 맞아 유명을 달리했다. 아버지의 죽음과 첫째 아들의 만주행까지는 훈장처럼 여기던 어머니도 둘째 아들의 죽음을 두 눈으로 본 후에는 그 태도를 완전히 달리했다.
'우리 집안에서 더 이상의 독립운동은 없다.'
어머니는 조국 해방을 위한 노력에 끝이 어디 있겠냐마는 이만큼이면 할 만큼 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하셨다. 특히 4남매 중 막내 정국은 기나긴 아버지의 옥살이 동안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정국이의 귀에 딱지가 일도록 어머니는 밥상에서 같은 말을 반복하셨다.
"아버지와 형들이 네 몫까지 했응게, 막둥이 너는 죄책감 느끼지 않고 그냥 살어두 된다."
노을이 마을 언저리를 붉게 물들일 때까지, 나는 한참이나 집 근처를 배회했다. 자꾸만 둘째 오빠의 마지막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어머니가 그렇게 신신당부 했건만, 결국 막내는 제 신념을 따랐다. 배신감, 걱정, 분노, 뒤섞인 여러 감정이 동네를 몇 바퀴 돌도록 가라앉지 않았다.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는 이미 정국이 집에 돌아와 제 방에 콕 박혀 책을 읽고 있다고 했다. 막내의 방, 창호지 문에 노오란 불빛이 스며나왔다. 두 형이 사라진 탓에 정국이 혼자 쓰게 된 방이었다. 한참이나 그 앞을 서성이다 망설임 끝에 막내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삐걱하는 소리에 정국이 책을 읽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등잔불에 정국의 얼굴이 말갛게 드러났다.
"왜?"
무뚝뚝한 말소리에 아무답 없이 문을 닫고 책상 앞에 앉자, 정국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무슨 일있어?"
"......."
"나 얼마 안있으면 시험이야."
정국이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까. 입을 벙긋 거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연필을 쥔 채로 한참이나 책을 노려보던 정국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맑은 눈동자가 유독 반짝거렸다. 한참이나 다물고 있던 입을 간신히 열었다.
"다음 달 조선호테루. 타케트는 누구니?"
정국이의 눈이 확연히 커졌다.
"누나!"
"전정국. 너는 하지 말랬지. 어머니 쓰러지시는 거 기여코 봐야겠어?"
"누구야? 누구한테 들었어?"
정국이 한층 격앙된 목소리로 다급히 물었다. 얼굴 가득 불안이 서렸다. 혹시나 어머니가 들을까 문밖을 흘끔 보고는 소리를 낮추라는 모양새를 취했다.
"경성도서관에 갔었어. 학교에 있을 녀석이 대낮에 종로 바닥에 있는 데 누나가 안 궁금해?"
"누나"
"당장 그만둬."
"안 돼."
"어머니한테 말한다."
"말 못할 거잖아. 누나는 말 못해."
"네 몫은 아버지랑 오빠들이 이미 했다고."
"아버지 몫은 아버지가 하셨고 형들도 형들 몫을 했어. 나는 내 몫을 하는 거야."
한번도 본 적없는 단호한 모습이었다. 정국이 쥐고 있던 펜을 놓고 나무 칠이 벗겨진 상을 옆으로 밀었다.
"전정국"
"아버지 앞에 떳떳한 아들이고 싶어. 형들이 바친 목숨 뒤에 숨고 싶지 않아. 비겁해지기 싫어."
"어머니는? 기어이 쓰러지시는 거 볼래?"
"아무 일 없을 거야. 정말로."
어머니를 입에 올렸음에도 정국이는 전혀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다. 말문이 막혔다. 막내가 어느새 훌쩍 커버렸다.
"누나, 독립이 코앞이야."
* * *
조선식산은행 맞은편에 위치한 카페 스페스의 주인은 전형적인 모던보이, 아니 모던보이들의 우상이었다. 스페스는 경성에서 유일하게 여급이 없는 카페로 조선에서는 보기 드물게 와인을 파는, 연일 서양식 재즈가 연주되는 독특한 공간이었다. 여급이 없다 보니 가볍게 한 번 놀아보려는 남성들의 출입은 전무하다시피 했고 그 덕에 고급문화를 향유하려는 모던보이들이 자신들이 진짜배기임을 증명하기 위해 문턱이 닳도록 스페스를 드나들고는 했다. 사교계에서 스페스의 주인인 호석과의 친밀도는 그들의 지위와 교양 수준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호석과 가장 가까운 이는 경성의 화류 문화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윤기였다. 그는 호석의 벗으로 스페스의 오픈 여부와 관계없이 유일하게 출입이 허용된 자였다.
"형 어째 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
호석이 크리스탈 술잔을 닦으며 텅 빈 바에 홀로 앉은 윤기를 향해 말했다.
"어. 좀."
"또 그 꿈꿨어?"
"하여간 정호석 눈치는."
"이 정도는 돼야 경성 모던뽀이들의 꿈과 희망 아니겠어?"
호석의 대꾸에 윤기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술잔을 들었다. 손가락 길이만한 잔에 갈색 술이 찰랑거렸다.
"또 독한 술 대낮부터 마신다. 아니다. 뭐 형이 밤낮 가렸나. 누구는 형처럼 살아보고 싶어서 안달났는데, 형은 인생이 참 무기력하고 재미없지?"
"어떤 정신 나간 놈이 나처럼 살고 싶대."
"여기 주야장천 드나드는 애들 대부분이지. 조선방직회사 아들에 조선증권 과장이면 급여가 얼마야. 경성 바닥에 형처럼 되고 싶은 놈들이야 널리고 널렸지."
"그래봤자 매국이야."
윤기가 손에 들린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담담한 윤기의 목소리에 호석이 입을 닫았다가 꽤 길어지는 정적을 부수려 일부러 농을 던졌다.
"왜 아버지가 꿈속에서 노발대발하셨어? 나라 팔아먹는다고?"
"차라리 노발대발하셨으면 좋겠다."
윤기는 간헐적으로 돌아가신 친아버지 꿈을 꾸고는 했다. 잊을만하면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가기 전날의 아버지가 등장해 자신을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꿈을 꾼 아침이면 윤기는 늘 죄책감에 시달려 증권회사에 얼굴도장만 찍고 스페스로 향했다. 제 마음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 호석이기에, 스페스는 윤기에게 안식처와 같았다.
"형 그러지 말고 여자라도 만날래? 이 정호석이 한 번 소개시켜줘?"
"여자는 무슨. 아! 맞다. 지금 몇 시야?"
윤기가 급하게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꽤나 귀찮은 얼굴로 가방을 집어 들었다. 손목에 놓인 고급 일제 시계가 다섯시를 향하고 있었다.
"왜?"
"맞선. 방직공장 김사장님 명이시다."
'방직공장 김사장'은 윤기가 호석 앞에서 숙부를 부를 때 쓰는 호칭이었다. 숙부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소년이었던 윤기를 거두었다. 남들 앞에서 윤기는 숙부를 꼬박꼬박 아버지라 불렀으나 숙부에 대한 감정은 조금 복잡했다. 고마움, 연민, 그리고 경멸 비스무레한 은근한 비아냥 그 어디쯤.
"와 아버지도 징하시네. 형이 몇 명을 물 먹였는데 또 맞선을 잡으셨대? 아 아니지, 맨날 관심도 없으면서 그 자리에 나가는 형이 더 대단한가. 근데 이번에는 누군데?"
호석이 깨끗하게 닦인 유리 잔을 흰 천 위에 뒤집어 놓으며 물었다.
"화신상회 둘째 딸."
호석이 낯익은 상호를 듣고는 눈을 반짝였다.
"회신상회? 거기 얼마전에 첫째 딸 결혼했잖아. 나도 초대받아서 갔었는데."
"그런 곳 일일히 불려다니는 거 안 귀찮냐?"
"에이 뭘 모르는 소리. 인맥이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거야. 근데 형이 그 집 둘째딸 만나면 볼만하겠는데. 그 집 언니 결혼하는 거 보고 둘째딸도 결혼하고 싶어 안달났대. 형 임자 만났네."
윤기가 피곤하다는 듯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나저나 형 아버지가 총독부 쪽은 포기하셨나보네. 그렇게 정치와 경제의 끈끈한 연을 강조하시더니."
"내가 파토낸게 많아서, 더이상 총독부 쪽으로는 고개를 못드시겠대."
호석이 못말린 다는 표정으로 윤기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잘한다. 이번에는 예의 지키면서 잘 좀 하고 와. 저번처럼 어여쁜 처자 앞에 두고 건성건성 하지 말고. 또 그게 우리 모던보이들의 매너 아니겠어?"
"모던보이는 무슨."
술잔을 내려놓은 윤기가 의자에 걸어 놓은 트렌치코트를 빠르게 걸쳐 입고 걸음을 옮겼다. 윤기가 나가자 출입문에 달린 종이 딸랑 소리를 냈다. 호석은 걸어나가는 윤기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 * *
정국이가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끈질기게 설득했지만 막내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도리어 계속 말렸다가는 만주로 떠나 독립군에 힘을 보태겠노라고 나를 협박하기에 이르렀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독립운동에는 손을 떼겠다는 확답을 받았을 즈음, 정국이는 이미 접선지로 향하는 길을 눈 감고도 외울 정도가 되었다.
총기도면을 넘겨받기로 약속한 날이 보름 앞으로 다가왔을 때, 종로서의 일본인 간부를 겨냥한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 종로서 순사들은 의심 갈만한 사람들을 쥐 잡듯 잡아들이거나 감시의 수위를 높이겠다며 본정으로 향하는 길을 차단하고 사람들을 하나하나 수색하기에 이르렀다. 애국단체 청년들은 줄줄이 종로서로 끌려들어 갔다.
종로 정미소 집 큰 아들이 경찰서에 연행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밤이었다. 정국이의 방에 그림자 두 개가 일렁였다. 분명 누가 올 시간이 아닌데, 방문에 드리운 낯선 그림자를 보니 심장이 무섭게 요동쳤다. 혹시나 정국이를 잡으러 온 건가. 아니면 정국이와 연결된 누군가가 잡혀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하는 건가. 버선발로 달려가 방문을 열어젖혔다.
“어?"
익숙한 얼굴이었다.
"석진오빠가 이 시간에 무슨 일?"
두근거리던 가슴이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언제 봐도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이제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석진을 알게 된 지도 햇수로 6년이 되었다. 처음 봤을 때 검은 교복 차림의 의과생이었던 그는 이제 종로의원에서 근무하는 어엿한 의사가 되어 있었다.
“있는 줄 몰랐네.”
이 늦은 밤 내가 집에 있는 걸 모를 리가 없는데, 있는 줄 몰랐다는 대꾸가 조금 이상했다. 오빠의 얼굴이 묘하게 불편해 보였다.
“무슨 일이에요? 오빠가 이 시간에.”
“정국이랑 할 얘기가 좀 있어서.”
"설마 이 밤에 신문에 나온 웃기는 얘기하러 온거에요? 멍텅구리 헛물켜기였나?"
석진은 가끔 신문에 나온 인기 유머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떠올랐다며 우리 집에 들르곤 했다. 항상 손에는 쌀 포대나 종이에 둘둘 말린 고기가 들려있었다. 재밌는 얘기를 전하러 왔다는 핑계로 오빠는 슬쩍 식재료를 두고 떠났다.
오빠의 유머는 보통 이런 식이었다. 깨가 죽으면 뭔 줄 알아? 개가 한 마리만 사는 나라 이름은 뭐게? 하도 실없는 소리를 해서 동네에서는 그가 얼굴로 의대에 합격했을 거라는 우스갯소리도 돌았다. 오빠는 늘 질문을 던진 뒤 자기 입으로 정답을 말하고는 재밌지 않냐며 상대의 반응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내가 예의상 웃어주는 바람에 꼬박꼬박 우리 집을 찾아오는 것 같다.
"음. 그럼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새로운 문제를 내볼까."
"누나 맞추지 마."
정국이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저었다. 무시하라는 뜻이었다. 말도 안 되는 언어유희에 이골이 난 까닭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채소는 뭐게?""
정국이를 게의치 않고 오빠가 문제를 냈다. 답을 듣고 나면 헛웃음 짓게되는 유머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문제를 듣고 나면 승부욕이 발동했다. 분명 맞추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던 정국이도 정답을 떠올리려는 듯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정답은 우엉. 아하하하하."
"아. 형 진짜 그거 그만하면 안 돼요?"
"너도 웃었잖아. 전정국. "
"저 안웃었는데요."
"아닌데. 웃었는데. 내가 봤는데."
"아 진짜. 이 형 몇 살이야."
정국이가 미간을 구기며 석진오빠를 타박했다.
"근데 진짜 이 시간에 온 이유가 뭐예요?"
내 질문에 정국이와 석진오빠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둘 사이에 알 수 없는 기류가 흘렀다. 눈짓으로 뭔가를 주고받는 듯 하더니, 석진오빠가 눈을 깜빡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 이거 말하려 온 건데. 우엉."
"아... 형."
"아. 왜 전정국. 우엉이 이상해?"
"망했어. 둘러대려면 좀 될만한 걸 해야죠. 그냥 말해요. 누나도 다 알아요."
"싱글이도 알아?"
싱글이는 석진오빠가 나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어느 날인가 와서 '너 싱글이지?' 하고 묻기에 어안이벙벙했는데, '난 벙글이야. 하하하하!'하며 또 그 시답잖은 농을 던졌다. 그 이후로 석진오빠는 꼬박꼬박 나를 싱글이라 불렀다. 굳이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 놔두고 그게 뭐냐고 투덜거렸지만, 석진오빠는 꼭 싱글아, 하고 나를 불렀다.
"싱글이가 안다고?"
"네."
막내의 말에 석진오빠의 얼굴이 굳어졌다. 금세 말투가 차분해졌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내가 다 안다니. 뭘 안다는 말인가 싶어 정국이를 빤히 쳐다봤다.
"결국 누나 소원대로 됐어. 요즘 우리 학교 애들 다 종로서로 잡혀들어가서, 나도 감시 붙을 수 있대. 그래서 그거 못하게 됐다고. 총기도면."
"뭐? 진짜?"
정말 다행이었다. 뜯어 말려도 꿈쩍 않던 정국이가 독립운동에서 손을 떼다니,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했다. 그간 종로서 총격 사건 이후로 정국이 또래들이 하나 둘 끌려가는 것을 볼 때마다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 안그래도 정국이를 집안에 묶어놔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근데 너 이거 말해도 돼?"
나에게 비밀을 지키라고 신신당부하던 녀석이었다. 아무리 가족같은 사이라도 오빠 앞에서 이렇게 다 말해도 되는 건가.
"누나. 그게."
정국이가 다급하게 무언가 설명하려했다. 정국이와 석진오빠가 이 문제로 상의한다는 건, 애초부터 오빠가 이 일을 다 알고 있었단 뜻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니 정국이가 오빠랑 왜 상의를..."
"일단 내 얘기를"
"너 이 일 못하게 됐다는 말을 왜 오빠한테 들어? 지금 오빠도 한통속이예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석진오빠가 부상당한 독립운동가를 비밀리에 치료해줬다거나, 현상금이 걸린 학생들을 몰래 숨겨줬던 일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위험한 상황으로 정국이를 끌어들인 게 오빠라니. 배신감에 뒷머리가 얼얼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야. 그리고 처음부터 석진이 형이 나한테 지시했던 것도 아니고, 형이 연관되었다는 건 뒤늦게 알았어."
정국이가 애써 변명했지만 하나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적어도 석진오빠는 아니어야 했다. 6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바로 다음 날, 아버지의 친필 서신을 들고 우리집을 찾아온 게 석진오빠였다. 누렇게 바란 종이에는 우리 가족을 부탁한다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때부터 당연히 아버지와 독립운동이라는 매개체로 엮여있는 사이임을 짐작했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무언가 한다는 걸 알게 된 건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은 아니어도, 오빠는 정국이를 말렸어야죠. 울 엄마 저렇게 고생하는 거 지금껏 다 봤으면서."
"정국이가 아버지께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고 싶대."
담담한 어투였다. 석진은 어느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아버지가 오빠에게 우리 가족을 부탁했는지도 모른다.
"그 부끄럽지 않은 아들 못 돼서 어떻게 하냐. 전정국."
괜히 정국이에게 쏘아붙였다. 실은 말리기는커녕 정국이의 행동을 알면서도 침묵한 오빠에 대한 배신감이었다. 무엇보다 나 몰래 둘만 비밀을 공유한다는 사실이 못내 서운했다. 미안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던 정국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적막이 방을 에워쌌다.
"오해는 마. 정국이도 얼마나 고민했겠어. 어린 나이의 치기로 결정한 건 아닐거야."
"치기가 아닌데 목숨을 걸어요?"
"치기가 아니라 신념이니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말리긴 했지만, 정국이가 무슨 마음으로 총기도면을 전달한다고 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어머니는 두 오빠가 이미 정국이의 몫을 다 했다지만, 어쩌면 그 말이 정국이를 짓눌렀는지도 모른다. 자신은 아직 제 몫을 해내지 못했다는 자괴감, 시대의 불운에 당당히 맞서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형. 저 그냥 하면 안 돼요? 감시는 잘 따돌릴 자신 있어요."
석진오빠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전정국 조용히 해. 오빠 얘 절대 못하게 해요."
"저 할 수 있어요. 형"
"안 돼. 차라리 제가 할게요. 제가!"
엉겁결에 생각지도 않던 말이 튀어나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일순 나를 향했다.
"누나 미쳤어?"
정국이 눈을 크게 떴다. 내내 감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너는 되는데, 나는 안돼?"
"위험하잖아!"
"너는 그럼 안 위험해?"
"지금 누나랑 나랑 같아?"
우리 둘의 목소리가 커지자 석진오빠가 눈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그냥 뱉은 말이긴 했지만 오기가 생겼다. 화난 정국이의 얼굴을 보니, 멈출 수 없어 더 모진 소리를 해댔다. 내가 왜 그렇게도 뜯어말렸는지 정국이가 알았으면 했다.
"그런데 그 생각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아무래도 정국이보다는 감시가 덜 할 테니."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석진이 입을 열었다. 그 말에 핏대를 세우던 우리 둘 모두 말을 잃었다. 오빠가 조용히 고개를 들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국이의 표정이 확연히 굳어졌다.
"본정통으로 하자. 백화점이든, 카페든. 오히려 검문을 쉽게 통과할 수도 있어."
"형!"
정국이가 언성을 높였다. 원망의 눈초리였다.
"진짜 할 수 있겠어?"
석진이 나를 향해 물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정국이를 막아보겠다고 던진 말을 석진이 그렇게 덥석 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 했다. 갑작스레 서운한 감정이 가슴께로 밀려왔다. 당연히 안된다고 할 줄 알았다. 당장 어떻게 검문을 통과해야 할 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를 그렇게 위험한 상황에 내몰 생각을 할 수 있다니. 오빠가 미웠다. 내가 발각되어 끌려가도 오빠는 괜찮은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 말이 입안을 맴돌았지만 그냥 삼켜버렸다. 애초에 나를 보낼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절망이었다. 오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담담한 척 했지만 표정은 분명 엉망일테다.
"형 이건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이 어떻게 우리 누나한테..."
석진이 빤히 내 표정을 살피더니, 갑자기 피식 웃어버렸다. 왈칵 눈물이 차오르는 걸 꾸역꾸역 참았다.
"농담이야. 이렇게 들으니까 화나지? 전정국. 싱글이 심정도 이랬을거라고. 널 말리는 너희 누나 심정도 좀 알아주라고."
석진이 웃으며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오빠. 나 그거 진짜 할 건데요."
목소리가 뭉개져 나왔다. 자꾸만 오기가 생겨 고집을 부렸다. 어떻게 해도 서운한 감정이 가시지 않았다.
"삐졌어? 삐졌네. 싱글이."
느릿한 말투로 석진이 말했다.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웃음을 참고 있는 장난스러운 얼굴에 더 화가 났다.
"안 삐졌거든요. 그거 내가 잘 끝낼 테니까 정국이 너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생각 마."
* * *
한참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누군가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심장이 멎는 듯 했다. 본격적으로 시작이구나. 긴장감에 맥박이 점차 빨라졌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자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석진의 말대로 백지장처럼 새하얀 남자가 검은 트렌치코트를 입고 서 있었다. 인상은 조금 차가워 보였다. 손목에 빛나는 시계나, 옷차림에서 느껴지는 아우라가 무언가 이질적이었다. 분명 어설픈 행색의 모던보이가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코가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구두부터 깔끔하게 떨어지는 양장까지 눈을 뗄 수 없었다. 독립운동가가 입기에는 꽤 비싸보이는 옷차림이었다.
"반가워요."
그닥 반갑지 않은 말투였다. 만남의 목적이 총기도면을 전달하는 것이니, 꼭 살가울 필요는 없었다. 임무 수행 중이니 상대도 분명 긴장했을테고. 감정 하나 섞이지 않은 사무적인 말투에 바짝 긴장됐다. 남자가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쭉 훑다가 머리 위에 놓인 코르사주를 유심히 살폈다. 순간 피식 웃더니 표정을 고치고 심드렁하게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순간 석진의 말이 생각났다. '네 옷차림을 보고 널 찾아갈거야. 혹시 시간이 지나도록 오지 않으면 급하게 일정이 변경된 거니 그냥 돌아오면 돼.'
"통성명은 해야겠죠. 민윤깁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처음으로 이렇게 글을 올려봅니다. 뭔가 민망하고 부끄럽기도 하네요. 글을 읽으면서 느끼셨겠지만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글입니다. 시대적 배경을 많이 살리려 했지만, 픽션이니 만큼 사실과는 무관합니다. 이번 편에는 등장하지 않은 나머지 인물들도 차차 등장 할 예정입니다. 처음이라 쑥스럽지만 암호닉도 신청해주시면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그럼 이만. by. 스페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