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항력
08
나는 내 행복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싶었다. 누구도 침해하지 못할 나만의 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대편에 서있는 나 자신을 직면해야만 했다. 지금껏 한 번도 마주하지 않았던 아이였다.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상처투성이에 잔뜩 피를 흘리는 모습일 것이라고 나는 지레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질끈 감았던 눈에 차단되었던 시야는 내게 두려움만 가증시켜 줄 뿐이었다. 서서히 눈을 뜨자 무엇인지 모를 것이 아른거렸다. 거울이 나를 비치고 있는 형상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눈에 보이는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학교로 돌아오던 지민이 결국 쓰러졌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이 여간 위태로운 것이 아니었는데, 나는 그때 그의 상태를 눈치 챘어야만 했다. 색색거리는 숨이 여실히 느껴질 정도였다.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지민이 아스팔트 도로로 추락하듯 정신을 잃었다. 나는 쓰러지는 그의 몸을 잡으려 온힘을 다해 감싸 안았지만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엉덩이에서 아린 고통이 척추까지 타고 올라왔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열띤 숨만 내뱉고 있었다.
때마침 울리는 지민의 전화에 나는 그를 안고 있던 팔을 빼내어 그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형’이라는 글자가 화면에 떠다녔다. 내 마음대로 받아도 되는 것인지 고민을 하다 아직도 바닥에, 정확히는 내 위에 쓰러져 있는 그를 내가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 내게 어떻게 대처했는지 말하라 한다면 나는 허둥지둥 댔다고 말할 수밖에는 없었다. 축 늘어진 그의 몸을 빨리 이불 위로 옮기고 싶었다. 가까운 곳에 있었던지 그의 형이 내가 있는 도로에 오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았다. 걱정된 듯 급하게 숨을 몰아쉬며 도착한 그가 내 위에 쓰러져 있는 지민을 보고서는 자리에 멈추어 섰다. 나는 어색하게 눈만 깜빡이며 다급함을 표했고, 그의 형은 헛웃음을 짓더니 그를 병원으로 옮겼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지는 동안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의 몸을 연신 흔들어대다가 불덩이 같은 몸에 그를 억지로 깨우려는 행동을 그만두었다.
지민의 형은 의사였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그의 연락을 받아 병원에 있는 것이니 지민이 일어나면 잘 둘러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가정을 함부로 꿰뚫어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지민은 1인실 병실 침대에 곤히 누워있었다. 그러다가도 고통에 찬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침대의 난간을 아래로 내렸다. 누운 그의 옆에 앉아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병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급하게 그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내자 열린 문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형이 보였다.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냥 앉아 있어요.”
“아, 네….”
“원래 이맘 때 쯤엔 많이 앓아요. 지민이 일어나면 내일이나 모레쯤에 퇴원하면 된다고 말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지민이…, 아니에요. 같이 아프지 않게 조심해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지민의 손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려두었다. 그의 손이 움찔거리더니 이내 내 손을 약한 힘으로 잡았다. 나는 그에 놀라 누워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아직까지도 눈을 감은 채로 색색대고 있었다. 그의 얼굴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래로 내려깔린 속눈썹이 촉촉이 젖어있었다. 흘러내리는 그의 땀을 손으로 훔쳐냈다. 창문으로 보이는 바깥에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병실 문이 다시 열리고 지민의 팔에는 링거주사가 놓였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우물쭈물하다 이내 병실을 나와 버렸다. 내일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병원 엘리베이터에 타 닫힘 버튼을 누르곤 숨을 내쉬었다. 엘리베이터만 타면 그때의 지민이 잔상처럼 따라붙었다. 잔상이 내게 말을 걸었다. 가지 마. 엘리베이터는 이미 1층에 도착한 후였다. 나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밀린 연습을 위해서이기도 했고, 자꾸만 눈에 아른거리는 그의 모습을 잊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를 사랑하고 싶다고 한 것은 나였으나, 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아직 나는 겁을 내고 있었다.
피아노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메트로놈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피곤했다. 금방이라도 앉은 자리에서 건반에 머리를 박고 숙면을 취할 것 같았다. 6월 발표회가 끝났으니, 7월에는 실기시험이 연달아 있을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론 시험 역시도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에 좀처럼 시간을 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때에 연습 없이 보낸 하루는 타격이 클 것이 뻔했다. 나뿐만 아니라 지민 역시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핸드폰을 들어 연락처에서 지민의 번호를 찾았다.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먼저 왔다고 말해야 할까. 몸은 괜찮은지 물어야 할까. 결국 전원 버튼을 눌렀다. 밝게 띄워져 있던 화면이 어둡게 변했다. 아직 자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잘 때만큼은 편하게 두고 싶었다.
연습실 바닥에 깔린 이불에 몸을 뉘이고 잠을 청했다. 너무 졸리면 일의 능률이 떨어지니 오히려 잠시 자는 것이 좋다는 소리를 흘려들은 적이 있었다. 내게 지나치게 많은 말들이 스쳐지나간 탓에 어디서 들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출처도 모르는 이야기를 핑계로 나는 마음의 안식을 취하려 했다. 고작 3달이었다. 지민이 내 연습실에 오고가기를 반복했던 것은. 그런데 왜 지금이 이토록 외롭게 느껴지는지 몰랐다. 유난히도 공기가 찼다. 병실에 혼자 있을 그가 생각이 났다.
“지민이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내 교실까지 직접 찾아온 예나였다. 의도치 않게 날카롭게 말이 나갔다. 그녀는 내 대답에 입을 다물고 한참을 고민하는 듯 했다. 곧 있으면 수업이 시작할 것임에도 빈 지민의 자리와 내 자리를 번갈아보며 서있었다.
“…그러게, 그걸 왜 당연하게 너한테 물었지.”
그녀가 손에 든 쇼핑백을 뒤로 숨겼다. 예상컨대, 지민에게 줄 선물이었을 거다. 교실에 찾아온 것이 이번 한 번이 아님을 알았다. 발표회 이후로 지민에게 선물을 줄 생각이었던 건지 낮이건 밤이건 지민을 찾는 눈길은 끝내 지민을 찾지 못했다. 지민은 밤낮없이 심하게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 수업 시작해. 가.”
“…….”
그녀가 지민의 자리에 앉았다. 뭐하는 거야? 그녀가 책상에 얼굴을 박고 누웠다. 나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어차피 출결은 마지막 수업에서만 확인하기 때문에 해가 될 것은 없었지만 왜 그녀가 내 옆자리에 앉았는지는 미지수였다. 나도, 나도 박지민이랑 무대하고 싶었는데…. 너 때문에. 고개를 옆으로 돌린 그녀가 쭉 째진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지민의 눈빛에 비하면 겁날 것 없이 선했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최고의 무대가 될 수 있었는데….”
선생님이 들어온 뒤에도 읊조리듯 말하는 그녀에 웃음이 터질 뻔했다. 최고의 무대가 될 수 있었다고. 누구에게. 지민, 혹은 그녀에게? 아마 전적으로 그녀에게만 최고였을 것이 분명했다. 밀려드는 생각에 정신이라도 차리려 고개를 흔들었다. 열등감이 이제는 타인을 해 입히는 방향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별로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피곤해서 그런 모양이다. 나는 또 다시 자기합리화를 했다. 지민의 자리에 앉은 그녀가 아니꼬웠을 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마지막 수업까지도 우리 반에 있었다. 그녀는 결석처리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식당으로 걸음을 옮기는 중에도 그녀는 끈질기게 내게 따라붙었다. 누군가가 내게 따라붙는 것은 지민 이후로 처음이라 어떻게 반응해줘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의 여지도 없이 그녀는 내 일에 대해 궁금한 것은 없어 보였다. 내가 예나를 지나쳤던 그 길이었다. 다른 여학생과 함께 지나가던 그녀를 회상했다. 현재로서 아무도 곁에 두지 않은 채로 나를 따라온다는 것이 이상했다. 앞에서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찬바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미적지근한 바람이었다. 나뭇잎이 거세게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교정을 걷는 발걸음 소리만 들려왔다.
접시를 들고 평소와 같이 샐러드부터 담기 시작했다. 내 뒤에 가만히 서있던 그녀가 내가 집게를 내려놓자마자 같은 샐러드를 접시에 담았다. 내 점심식사를 따라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듯, 내가 집는 것들은 족족 집어다 자신의 접시에 올렸다. 항상 지민과 앉던 자리에는 그녀가 자리했다. 모든 것이 불쾌했다. 그녀가 나를 따라오는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도통 그녀의 머리에는 무슨 생각이 든 것인지 알고 싶을 정도였다.
“뭐야, 너. 왜 자꾸 따라와.”
“그냥. 궁금해서.”
말을 끝낸 그녀가 샐러드를 입으로 집어넣었다. 드레싱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한참이나 샐러드와 나를 번갈아보며 인상을 쓰던 그녀가 눈을 감고 다시 한 번 더 입으로 밀어 넣었다.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 진짜. 그제야 나는 젓가락을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앞에 앉은 그녀가 결국 드레싱이 뿌려져 있는 부분의 야채는 옆으로 골라냈다. 산더미처럼 수북이 쌓인 야채에 괜한 마음의 짐도 같이 쌓이는 기분이었다.
“안 먹을 거면서 왜 가져왔어.”
“…네가 가져와서.”
왜인지 살짝 풀죽은 그녀의 모습에 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더 날카롭게 말을 하면 금방에라도 그녀가 식당을 뛰쳐나갈 것만 같았다. 고기를 담아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벌써부터 속이 답답한 게 체할 것만 같았다. 야채에 범벅이 된 드레싱 탓에 그녀가 더 먹지 못하고 야채를 이리저리 뒤집으며 깨작거리기 시작했다. 있던 입맛도 달아날 지경이었다. 불편하고, 어색해서 못 견딜 분위기였다.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가 다행이라는 듯 눈을 더 크게 뜨곤 나를 따라나섰다. 그녀의 접시에 담긴 야채들이 모두 버려졌다. 참으로 저것들이 모두 귀한 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작스럽게 다시 밀려오는 소외감에 발걸음을 멈춰 섰다. 뭐든 부와 관련된 것들에 겁내본 적 없는 학생들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내게는 별 상관이 없었다. 그저 좌절감만 안겨줄 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난을 숨겨야 했다.
“이쪽은 강의실 가는 방향 아니야?”
“어, 맞는데.”
“이번 주 강의 없어.”
빨리도 말해준다. 혈압이 오르는 것만 같아 뒷목을 부여잡았다. 발바닥에 뜨겁게 열이 올랐다. 발목까지 쑤시기 시작했다. 근본적 원인이 그녀인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녀가 얄미워 한 대 치고 싶기도 했으나, 연신 한숨만 내쉬며 참아내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연습실.”
그녀의 표정이 실망했다는 듯이 일그러졌다. 그것을 티내기라도 하는 듯 어깨까지 축 처진 모습이었다. 나는 그녀가 비 맞은 제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습실까지 따라올 모양인지 졸졸 꽁무니만 쫓는 모양새였다. 피곤이 몰려왔다.
“나한테 원하는 거 있어?”
“아니?”
“그럼 뭔데, 왜 자꾸 따라와?”
내 말에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샴푸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이내 바람에 코끝에 맴돌던 향기도 같이 사라졌다. 그녀의 시선이 가까워진 내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나를 하나하나 다 뜯어보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괴상했다. 한때 내가 부러워했던 그녀였다. 물론 그 생각은 빠르게 접었지만 말이다. 그녀의 얼굴이 다시 멀어졌다.
“이해가 안 가네.”
“뭐가?”
그녀의 콧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것은 나를 비웃는 것만 같은 착각에 사로잡히게 만들기 충분했다.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놓으면 학교에 잡아먹힐 것 같았다.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내 환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여전히 내 얼굴을 다시 뜯어보고 있었다.
“왜, 박지민이 널 그런 표정으로 보는지.”
“무슨 소리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어. 너 뭐 특별한 거 있나? 아, 피아노?”
순간적으로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무시를 전제로 깔고 있는 것 같았다. 하마터면 그녀에게로 손이 올라갈 뻔했다. 아슬아슬하게 남은 이성이 그것을 제지했다.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행여 때리기라도 했으면 나는 학교에 다니지 못할 정도의 큰 일이 벌어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해는 하지 마, 그냥 물어보는 거니까.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이가 갈렸다. 속으로는 분노가 차오르고 있었다. 내게서 시선을 거둘 줄 모르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어디 가! 외치는 그녀의 목소리만 들려올 뿐, 나를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걸을 때마다 몸이 잔뜩 휘청거렸다. 짜증이 밀려왔다.
택시에 올라타 눈을 감았다. 목적지는 역시 지민의 병원이었다. 연습을 포기한 거나 다름없었다. 실은 나조차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죽기 살기로 매달렸던 연습을 포기하고 가는 이유를. 차가 과속방지턱을 넘으며 크게 흔들렸다. 창문에 머리가 부딪혔지만 개의치 않았다. 고작 그저 그런 고통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 감정을 내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내 가슴이 왜 일렁이는지, 알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상승했다. 뒤로 보이는 바깥풍경에 유리창에 손을 올렸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던 나무는 어느새 저 아래로 멀어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는 바깥으로 걸음을 디뎠다. 공기부터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한적한 복도에 내 발걸음이 울려 펴졌다. 이 소리를 지민이 들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의 병실 앞에 멈춰서 한참이나 숨을 골랐다. 손잡이가 내 피부에 닿았을 때, 나는 묘하게 손을 타고 이는 전기를 느꼈다.
“…나 왔어.”
“…….”
지민은 병실 침대에 혼자 앉아 있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그 무엇도 틀어져 있지 않았다. 적막이 병실의 빈 공간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그는 반대편 벽만 뚫어지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벽은 희게 페인트칠 되어있기만 했을 뿐, 어떠한 흠집조차도 없었다. 문이 닫히고 내가 그에게로 한 발짝 걸어가자 그제야 그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운 것 같기도 했다.
“아직도 아파?”
“언제 갔어.”
지민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나는 다리가 굳어버린 듯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내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뒤로 보이는 창문에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빛이 지민처럼 아주 서서히 스며들었다. 빛을 받아 갈색으로 보이는 그의 머리칼에 정신을 놓고 있자, 어느새 그는 내 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의 눈이 나를 훑었다. 그때처럼 빛을 등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이 나를 향해 반짝이고 있었다. 그가 나를 안고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다시 그때처럼 그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그가 숨을 크게 들이쉬는 듯 몸이 크게 들썩였다.
“일어났는데 네가 없었어.”
“미안해. 수업 듣고 왔어.”
“…네가 다시 안 올 것만 같았어.
내 허리를 끌어안은 그의 팔에 더 강한 힘이 들어갔다. 그의 힘에 나는 저절로 숨을 멈췄다. 쿵, 쿵. 어디선가 느껴지는 커다란 진동이었다. 그의 숨에 어깨가 뜨뜻했다. 그의 머리칼이 내 목을 간질였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가지 말랬잖아. 제발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마. 응?”
“……응.”
“너까지 나 버리면 나 정말…, 죽어버릴지도 몰라…….”
지민이 얼굴을 묻은 내 어깨가 뜨거웠다. 그의 등에 머물러 있던 손을 올려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금방에라도 잘게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가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의 속눈썹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나는 그제야 숨을 후, 하고 뱉어냈다. 엄지로 그의 촉촉한 눈가를 훔쳐냈다. 그의 눈동자가 온전하게 나를 담았다. 그의 온전한 영혼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가 자신의 눈물을 훔쳐낸 내 오른손 엄지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또다시 시간이 멈추어 버린 것만 같았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그의 병실이 고요했다. 그저 내게 가까이 다가와 있는 그의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색색거리는 그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굳어버린 것 같았던 그가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가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 허리에 닿아있는 그의 팔에서 작은 떨림이 전해졌다. 눈을 한 번 깜빡이니 지민과는 코끝이 스칠 거리였다. 눈이 마주친 그가 잠시 몸을 움찔거렸다. 그가 눈을 감았다. 나는 그에 홀리기라도 한 듯 자연스레 그를 따라 눈을 감았다. 그의 숨결이 내 피부에 닿았다. 마침내,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첫 입맞춤 때에는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려온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지저귀는 새소리라든가. 애석하게도 나는 그것들을 들을 수 없었다. 오직, 지민의 미묘한 흐느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의 어린아이의 외침, 절규. 나는 그것들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은 안식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묘한 안식이었다. 지민은 무엇을 듣고 있을지 몰랐다. 내 어린아이의 절규? 그것이 내가 숨기고 싶어 했던 것이든, 무엇이든 이제 나는 더 이상 상관이 없었다. 그에게는 굳이 내 모습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곧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낙화落火. 그래, 나는 낙화와도 같은 터지는 감정을 누군가에게 선사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지금 그 감정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중이었다.
닿은 그의 입술이 묘했다. 찌릿하게 감전을 일으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도, 나도 어쩔 줄 모른다는 듯이 입술이 맞닿은 채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맞닿아 있는 피부로 피가 쏠리는 느낌이었다. 그대로 가만히 머물러 있고 싶었다.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 그의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야 바들거리는 눈을 떴다. 지민의 뒤에서 들어오는 빛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았다. 금방 적응되지 않는 빛에 눈을 찌푸렸다. 그제야 그늘져 있는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의 아래로 깔린 눈이 한참이나 깜빡였다. 내 허리에 둘러진 그의 팔이 뜨거웠다. 다시 손을 들어 그의 눈가를 훔쳐냈다. 그가 내 손목을 잡았다. 평소에 느껴지던 악력과는 다른 것이었다. 아주 약하고도,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어디 가지 마…. 응?”
“……안 갈게.”
그가 잡은 내 손목에 입을 맞췄다. 시큰거리던 손목의 감각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피부가 화끈거렸다. 나는 그의 눈빛에 아무런 말도 못한 채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의 눈빛이 뒤에서 새어 들어오는 햇빛만큼이나 따뜻했다. 금방이라도 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문득, 나는 그를 감당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그가 나를 감당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보이는 균열이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너와 나는 함께 헤쳐 나가야 할 운명이라고. 나는 그것이 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고. 그렇게 내게 은밀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그것에 대해 한 치의 의심조차도 가질 수 없었다. 그가 앗아간 내 손목의 고통만으로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짓밟았던 내 손목, 그곳에 그는 입을 맞추었다.
그가 다시 눈을 깜빡였다. 그의 눈동자 안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다. 그의 균열을 내가 채우고 싶었다.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내 균열 사이로. 나는 그것이 너무 따뜻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나는 드디어 내 자의로 지민을 안았다. 정확히는 안긴 꼴이었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몸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내가 그에게 했던 것처럼 조심스럽게 나를 토닥였다. 그렇게 나는 치유 받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치유 받는 것일지도 몰랐다.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디디는 것만 같은 설렘에 가득 찼다. 나는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듯 했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는 내가 항상 생각해왔듯, 지민이 아닐까.
우리는 정말로 행복해질 자유가 있을까.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그런 물음에 대한 답을 이제야 찾았다. 그의 품 안에서. 우리는 찾을 수 있다고, 서로에게서 우리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숨을 쉬고 있는 한, 그것이 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고. 서로에게 낙화落火와도 같은 감정을 선사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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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는 거부합니다.
계속 신청 받아요, 주저 말고 해주세요!!!
<사담>
이제 슬슬 조여온다..
글 쓰는 속도보다 연재 속도가 빠르다보니 어느새 이렇게...
미리 써둔 분량..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