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 딜레마 (Hedgehog dilemma)
가까이 다가가려 하면 서로의 가시 때문에 다시 멀어지게 되는 고슴도치처럼
다가가지 못하고 거리를 두게 되는 인간관계
이별이라는 단어가 대체 무슨 개념인 것인지. 지훈은 짐을 싸고 있는 지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굳게 닫혀있는 현관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 사이 정리하자. 어젯밤 지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머릿속에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누가 망치로 머리를 강하게 내리친 것처럼 머리가 찌르르 아파져 왔다. 한참 짐을 싸던 지호가 휴, 무겁게 한숨을 쉬며 시계를 바라본다. 새벽 2시를 다다르고 있었고 지호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아직 다 챙기지 못한 짐들을 지나쳐 창가 쪽으로 몸을 옮긴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지호의 건조한 행동과 표정에 괜히 더 섭섭함이 밀려왔다. 지호와 지훈의 사이에서 무거운 거리감이 느껴진다. 처음부터 몰랐던 사이처럼, 아예 마주친 적도, 말을 섞은 적도 없는 그런 사이처럼, 지호는 어느부터인가 지훈을 아예 모르는 사람 취급하였다. 한참을 어두컴컴한 창가 너머 낮게 떠있는 하늘을 바라보던 지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린다.
" … 안 자? 나 새벽에 너 잘 때 나가려고 했어. "
" 너 나가는 거 보고 자려고. "
병신. 낮게 욕을 읊조리며 지호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접었다 폈다를 반복했는지 잔뜩 구겨져 너덜거리는 종이를 꺼내는 지호. 그리곤 천천히 펼쳐 가만히 읽어보다가 이내 다시 접는다. 이거, 너 주려고 썼는데. … 편지야? 지훈의 물음에 지훈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훈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구겨진 종이를 건네준다. 건네받은 종이에서 독한 담배냄새가 훅 끼쳤다.
" 짧아. 내가 가면 읽어. 지금 읽지 말고. "
" 지금 읽고 싶은데…. "
지훈의 말에 지호는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려 보이며 털썩 몸을 떨구었다. 그리곤 싸다 만 짐을 다시 하나하나 꼼꼼히 챙기기 시작했다. 지훈은 건네받은 종이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짐 챙기는 것을 도왔다. 이 옷 내가 사준 건데. 눈에 낯익은 것들이 많았다. 이것도, 저것도…. 자신과 지호가 다정히 서서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이 눈에 띈다. 지호는 사진을 집어 작은 수첩에다 끼우고는 턱, 닫아 챙긴다. 눈앞이 뿌옇진다. 정말 몇 시간 후면 모든 것이 끝난다. 지호와 나눴던 체온, 흔적, 모든 것들이 이제 정말 추억으로 남겨질 거라는 생각에 지훈은 흐려지는 눈앞을 아무렇게나 벅벅 비비고는 애써 씨익 웃어 보인다. 진짜 웃으면서 보내줘야 하는데.
" 짐 거의 다 챙겼다. "
" 엉. 아, 존나 많아. 이 수면 바지는 왜 샀었지. "
입을 한 번 삐죽대며 꽉꽉 채운 짐가방을 손으로 꾸욱꾸욱 눌러 부피를 줄이려 하는 지호의 하얀 손을 잡았다. 약간 차가웠다. 흔들림 없던 지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 … 우리 진짜 헤어져? "
" ……. "
" 정말 이대로? "
" ……. "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우지호, 우지호. 이제 다정히 부를 수도 없는 이름을 속으로 연신 불러본다. 지호의 손 위에 겹쳐진 지훈의 손이 작게 떨려왔다. 이 예쁜 손도 이제 못 잡는데…. 지훈은 차가운 지호의 손을 으스러질 듯이 꽈악 잡았다. 절대 놓지 않을 듯 잡은 지훈의 손도 차가웠다.
그런 지훈을 보던 지호가 굳은 표정을 서서히 풀었다. 그리곤 입꼬리를 찬찬히 올려 웃어 보인다. 아슬아슬하게 걸린 지호의 미소가 창가 너머 하늘처럼 어둡게 느껴진다.
* * * *
" 우지호? 그 새끼. 밖에도 안 나간다던데. "
" 아, 맞다. 우지호가 있었지. 얼굴 못 본 지 거의 1년이 다 됐네. "
" 진짜 집 방구석에만 처박혀있는다더라. "
재효와 민혁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지훈은 술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술맛이 뚝 떨어졌다. 처음부터 이 새끼들이랑 같이 술을 마시는 게 아니었다. 지훈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내려놓았던 술잔에 담긴 술을 마저 탈탈 털어 마셨다. 한참 신 나게 민혁과 대화를 나누던 재효가 눈치를 살피며 지훈의 빈 술잔에 술을 따라준다.
" 우지호. 소식 알아? "
재효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지훈은 얕게 미간을 좁혔다. 점점 싸늘해지는 공기에 이제 슬슬 집에 가야겠다고 느낀 지훈이었다. 우지호, 소식…. 우리 사이 정리하자, 잘 지내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곁을 떠난 지 어느덧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시간 참 빠르구나. 물론 그 1년 사이에 들려오는 지호의 소식을 안 들으래야 안 들을 수 없었다. 그래도 차라리 좋은 소식이었으면 좋았을, 연락도 되지 않고, 아예 사람을 만나려 하지 않는다는 어두운 소식만 들려오자 지훈은 아예 귀를 닫아버렸다. 그런데 또 눈치 없게 말을 꺼내는 재효와 민혁에 지훈은 재효가 따른 술잔을 들지도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 시간 존나 빨리 가네. 춥다. 이제 일어나자. "
무언가 딱딱해지려는 분위기에 민혁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민혁따라 몸을 일으키는 재효와 지훈. 붉은 입술 사이로 입김이 작게 서렸다.
밖으로 나온 재효가 추운 듯 하, 입김을 크게 내뱉고는 이내 손을 휘휘 저으며 다음에 보자며 인사를 했고 민혁도 따라 손을 저으며 연락 좀 해, 연락 좀, 라며 짧게 맞받아친다. 지훈도 따라 재효와 민혁에게 인사를 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빨리 집에 가서 자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많이 자제하려고 했는데, 몸에 오랜만에 알코올이 들어가니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 약간 휘청거리는 몸과 정신을 애써 부여잡으며 천천히 걸어나갔다.
익숙한 골목길을 지나 지훈은 주머니 속에서 지잉, 길게 울리는 핸드폰을 주섬주섬 꺼냈다. 이 시간에 누구지. 전화인 모양인지 계속 울려대던 진동이 주머니 속에서 꺼내자마자 뚝 끊겼다. 확인해보니 모르는 번호로 부재중이 떠있었다. 누군가 싶어 번호를 꾹 눌러 통화를 시도했고, 잔잔한 컬러링이 자그마하게 지훈의 귓가를 웅웅 울렸다.
뚝 ㅡ.
" 여보세요. "
" 야, 야. 표지훈? 나, 김유권."
" … 아, 김유권? 요즘 연락도 없더니…. 번호 바꿨어? 웬일이야. "
" 뭐, 아니. 이거 잠시 친구 폰이고. … 우지호. "
" … 우지호? "
" 여기 니가 존나게 그리워하던 우지호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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