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비밀결사대 05
written by 스페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반지하 창틈으로 흘러 들어오던 사이렌 소리마저 뚝 끊긴지 오래다. 졸음이 몰려오는 통에 자꾸 눈이 감기려 할 즈음 민윤기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가자."
그를 따라 일어나자 무릎에 놓인 외투가 바닥에 스르르 떨어졌다. 남자가 자신의 코트를 주워 내게 건네며 말했다.
"그 복장으로 들어가면 가족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찢겨나간 탓에 높이가 제멋대로인 치마가 무릎 위에서 서걱거렸다. 독립운동가를 숨겨주었다는 말을 했다가는 노발대발할 엄마의 얼굴이 벌써 눈에 선했다. 그가 건넨 외투를 걸쳐 입고 허리끈을 조였다. 창고를 빠져나오자 가을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골목을 오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긴장감이 일던 골목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고요한 풍경이었다.
"근데 어떻게 확신했어?"
"뭘요?"
"총을 든 남자말이야."
"지금 이 땅에서 떳떳한 일을 하고도 정체를 숨겨야하는 사람들은 독립운동가 뿐이에요. 길거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총질하는 일본 장교나 헌병대, 누구도 얼굴을 가리는경우는 없잖아요."
순간 너무 격하게 말을 했나 싶어 입을 다물고는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나를 향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순간 안심이 됐다.
코너를 돌자마자 이어진 좁은 골목 끝, 집 앞을 서성이는 검은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는 폼이 누가 봐도 전정국이었다.
"저기, 저 끝이 우리 집이에요. 여기서 갈게요. 근데 혼자 가도 괜찮겠어요?"
"너랑 있는 게 더 위험해. 무슨 일상이 이렇게 다이나믹하냐."
"참나. 걱정을 해줘도 뭐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 그만하고 들어가."
그가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동네 개를 쫓는 듯 허공에서 손을 휘적이는 모양새에 살풋 웃음이 났다.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들어가. 얼른. 남자의 낮은 목소리에, 그제서야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얼른 귀가하기를 기다린 사람처럼 그새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누나."
골목 끝에선 정국이가 이번에도 단숨에 코앞까지 달려왔다. 제법 화가 난 얼굴의 녀석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몇 시야. 미쳤어?"
"어이구 우리 막내 누나 걱정했어?"
"장난칠 기분 아니야."
녀석이 내 팔목을 잡아채 손을 물끄러미 살폈다. 캄캄해서 잘 보이지 않는지, 손목을 붙든 채로 집 안까지 나를 끌고 간 녀석이 제 방 앞에 나를 세웠다. 정국이 방에서 새어 나온 불빛에 손바닥에 묻은 선혈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정국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 설명해봐."
"집에 오는 길에 어깨에 총상 입은 남자를 봤어. 도망치는 것 같길래 그냥 좀 숨겨주느라."
"미쳤어? 누구인 줄 알고."
"딱 봐도 애국청년이였어."
"그러다가 일본 놈들한테 걸렸으면."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정국이가 제 머리를 쓸어올렸다. 단단히 화가 났을 때 종종 나오는 행동이었다.
"조용히 해. 엄마 듣겠다."
"그 옷은 또 뭐고."
목소리를 낮춘 정국이가 외투를 눈으로 훑었다.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몰라 입이 바싹 말랐다. 민윤기의 존재를 설명하기에는 일이 단단히 꼬여있었다.
"어? 어... 그 남자가 입던 옷."
"독립운동가? 그걸 누나가 왜 입어?"
"그게 어깨에 피가 너무 나길래 치마 찢어서 지혈했더니 덮어줬어."
"누나 진짜."
내가 입은 외투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녀석을 뒤로하고 마당 한가운데로 향했다. 바닥에 놓인 철제 세숫대야에 조심스레 물을 붓고는 손을 담그자, 선혈이 풀어져 대야안을 빨갛게 물들였다. 가을 날씨인데도 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혹시나 물소리에 잠든 엄마가 깰까 봐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손을 닦는 내내 정국이가 한쪽 구석에 서서 나를 지켜보더니 말했다.
"나 보고는 엮이지 말라며."
"그 말은 여전히 유효해. 그런 일에는 얼씬도 마. 전정국."
"... 싫어."
"죽었을지, 살았을지 모르겠어. 그 남자. 독립운동은 목숨거는 거야. 그니까 넌 안 돼. 너까지 죽는 꼴 못 봐."
뭉툭한 비누가 손에서 미끌거리다가 세숫대야 안으로 추락했다. 조용한 마당 안에 찰랑 물소리가 일었다. 제 방으로 들어가려 신을 벗던 정국이가 내 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살 거야. 하지만 구차하게는 아니야."
* * *
윤기는 여자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코너를 돌자마자 몸을 숨겼다. 어둠 속을 서성이던 남자가 금세 여자 앞으로 달려왔다. 윤기는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여자를 훑어보던 얼굴이 쌈닭과 제법 닮아 보였다. 윤기는 단번에 그가 밀서에 적힌 남동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담벼락 뒤에 숨어 두 사람을 몰래 지켜보고 있는 자신이 구차하게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쉽사리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홀로 걷는 길은 유독 캄캄했다. 간신히 빛을 내던 가로등도 그 수명을 다한 듯했다. 간혹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뿐, 도시는 적막했다. 윤기는 그제야 손목을 들어 시계를 살폈다. 이제 막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 마지막 전차는 보나 마나 끊겼을 테고, 혼마치에서라면 쉬이 볼 수 있는 택시도 이곳에서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윤기는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열쇠를 매만지며 터벅터벅 어두운 골목을 빠져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 피곤한 하루였다. 쌈닭 같은 그 여자와 엮인 이후로 매 순간이 그랬다. 윤기는 하루동안 있었던 일들을 천천히 되짚어 보았다. 여러 장면을 끝으로 머릿속에 복면 쓴 사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숨이 턱 막히는 듯 괴로웠다.
그리고 어느새 열 살 소년이었던 그 시절의 기억이 윤기를 잠식했다 .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 그 떠올리기 싫던 유년의 기억이.
열 살이었던 윤기는 또래에 비해 다소 비관적이었다. 허구한 날 다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던 아버지와 그런 가장을 걱정하느라 웃음소리 한 번 듣기 힘든 집안 환경의 영향이었다. 그러나 동갑내기보다 한참 빠른 눈치와 냉소적인 현실감각처럼 타고난 윤기의 성질이 비관적인 태도를 형성하는 데 더 주요한 요인이었다.
윤기는 아비를 쏙 빼다 박은 아들이었다. 부자는 살갑지도, 다정하게 표현할 줄도 몰랐다. 허나 마음속에 쌓아놓은 수 많은 걱정은 서로를 향한 애정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제 막 열 살이 된 소년은 거울에 비친 제 아비의 얼굴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베레모를 눌러 쓰고 상의를 반듯하게 매만지던 아버지의 눈빛은 어딘가 모르게 평소와 조금 달랐다. 순간 소년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가슴께가 싸했다.
윤기는 구두를 신고 마당을 나서는 제 아비의 걸음걸이를 바라보았다. 배를 깔고 누워 책을 보는 척 했으나 아버지가 안방에서 나온 이후로 윤기의 정신은 온통 그에게로 향해 있었다. 이주 전 임무를 수행하다 다리를 다친 후로 남자는 지금껏 절뚝거리며 걸었다. 그런 남자의 걸음걸이가 어린 윤기를 불안하게 했다.
"오늘은 안 가면 안 돼?"
소년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말이었다.
"와그라는데?"
"그냥."
윤기는 일부러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답했다. 불편한 다리로 바쁘게 나가는 아비가 걱정스럽다는 말을, 윤기는 목구멍으로 꾹 삼켰다. 경상도 사내인 제 아버지가 그랬듯 윤기 또한 무뚝뚝한 표현 속에 담긴 투박한 진심을 좋아했다.
일부러 손에 쥔 책으로 더 높이 얼굴을 가렸다. 왠지 모르게 아비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절뚝거리면 걷는 아비의 발 끝에만 시선이 고였다. 행여 눈을 마주쳤다가는 자신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솟을 것 같았다.
남자는 느리게 마당을 가로질렀다. 그리고는 철문을 밀다 말고 뒤를 돌아 아들을 향해 말했다.
"니, 내 걱정되나?"
"걱정은 무슨."
"옛 말에 생즉사 사즉생이라 했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 기다. 걱정 마라. 내는 이미 독립에 목숨바칠 각오했다. 대답해봐라. 윤기야. 죽을 각오하믄 어케 된다고?"
"... 산다고."
여전히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은 책장을 넘기며 윤기가 답했다. 마당 끝에 선 아비의 얼굴이 보고 싶었지만 꾸역꾸역 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목구멍이 따가웠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모습을 결코 제 아비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니까 걱정하지 말고, 네 어무이 잘 챙기고."
끼익, 철문이 닫히는 소리에 그제야 윤기는 대문을 쳐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뛰쳐나가 아버지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고 싶었지만 소년은 꾸역꾸역 참아냈다. 엉엉 울어버릴까봐.
윤기는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그 순간을 가장 후회했다.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거울 속 비친 아비의 얼굴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대문을 열고나가 먼 길을 달려서라도 아버지를 붙잡아 볼걸. 허리춤을 꼭 껴안고 가지 말라고 떼라도 써 볼걸. 윤기는 그 순간을 두고두고 후회했지만, 야속하게도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이 다시는 오지 않았다.
생즉사 사즉생이 틀린 말이라는 것을 소년은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죽음을 각오를 한 사람은 이미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을. 생의 의지는 죽음의 결단 앞에 아무 힘도 없음을.
"죽을 각오를 하면 산다며. 근데 왜 그랬어. 아버지."
달빛에 의지해 어둠 속을 걸으며, 윤기는 그 시절 소년이 된 것처럼 가슴에 사무친 말을 뱉었다. 하염없이 길을 걸으며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려 무던히 애썼지만 야속하게도 거울에 비친 아버지의 얼굴은 기억 속에서 점점 흐려졌다. 홀로 걷는 길이 유독 외롭게 느껴졌다.
* * *
분주한 여인의 움직임과 달리 식탁에 앉은 두 남자는 침묵했다.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는 아주머니가 뜨끈한 소고깃국을 식탁에 올리자 윤기의 숙부가 콧등에 놓인 안경을 고쳐 쓰고는 수저를 들었다. 국을 한 수저 크게 떠먹는 숙부를 보고나서야 윤기는 입 안에 밥을 밀어 넣었다. 보통 윤기는 아침밥을 걸렀다. 그럼에도 한 달에 두어 번, 예의상 숙부와 아침식사를 함께 했다. 윤기의 숙부는 여전히 손에 든 신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신문 가장 앞면에 적힌 기사를 주욱 읽고는 젓가락으로 깨작깨작 밥을 먹고 있는 윤기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퍽퍽 좀 먹어라. 사내 자식이 그렇게 말라서 쓰겠냐."
"아침을 안 먹다 버릇해서 입맛이 없네요."
"습관 들이면 아침마다 허기져서 밥부터 찾게 될 거다. 그나저나 어젯밤 소식은 들었냐?"
숙부의 말에 윤기가 바짝 얼었다. 어젯밤 벌어진 사건들이 머릿속에서 환영처럼 떠올랐다. 그러나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무슨 소식이요?"
"종로 쪽에서 또 총격 사건이 발생했더구나."
순간 입 밖으로 밥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더 이상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다. 숙부가 혀를 끌끌 차며 덧붙였다.
"마시모토 경감님이 종로 마작관에서 총격을 당하셨단다. 종로 의원에 입원해 계시다고 아까 연락받았다. 조금 빗겨갔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큰 일 치룰 뻔 했지 뭐야. 오늘 병문안 갈 테니, 윤기 너도 퇴근하자마자 병원으로 오고."
"네."
"너도 늘 몸 조심해라."
"제가 뭐 그 정도 급이 되나요."
"뭐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총은 갖고 다니냐?"
"아뇨."
"앞으로는 꼭 챙겨 다니고."
윤기는 침대 맡 서랍에 넣어둔 검은 소총을 떠올렸다. 윤기가 조선은행에 들어갈 무렵, 숙부가 입사 선물이랍시고 건넨 물건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무기가 제게는 선물이 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원체 아침은 잘 먹지 않았지만 오늘 윤기는 완전히 밥맛을 잃었다. 아침상에서 오가기에는 꽤 불편한 이야기들이었다. 더군다나 어제 복면을 쓴 남자의 얼굴과 캄캄한 대로를 걷는 내내 떠오른 유년의 기억들은 여전히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식탁 위를 부유했다.
윤기는 몇 번 국을 휘젓다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아직 식사 중인 숙부가 윤기를 흘끗 보고는 가봐도 좋다고 말했다. 윤기가 머뭇거리자, 남자가 접어놓은 신문을 펼쳐들고는 말했다.
"지각할 셈이냐. 난 회사 사장이라 쳐도 너는 일개 월급쟁이가. 태업은 망하는 지름길이야."
윤기가 의자에 놓인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기가 불편할까봐 괜히 흰소리 하는 거라는 걸, 윤기는 잘 알았다. 숙부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거실로 나가는 윤기를 향해 남자가 덧붙였다.
"아, 곧 태형이 오는 건 알고 있지?"
"네."
"대체 그 좋은 동경을 두고 왜 이 난리통을 오는지 모르겠다."
"태형이가 아버지 좋아했잖아요."
남자가 웃는 낯으로 신문을 접어두고는 여인이 내온 과일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그래, 나도 그 녀석이 보고 싶긴 하다. 그때 너도 태형이랑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동경. 윤기는 숙부의 친아들인 태형과 함께 유학길에 오르고자 했으나 독립군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이를 거절당했다. 사실 그 시절 태형보다 동경에 가고 싶어했던 이는 윤기였다. 윤기는 늘 생각했다. 차라리 동경에 머무는 편이, 마음은 더 편했을거라고. 누군가는 화려한 도시에 밤낮 취하고, 누군가는 생을 걸고 자유를 위해 싸우는 이 모순된 땅에 발 딛고 서지 않았더라면. 그렇다면 유년기의 처절한 기억은 벌써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 * *
정국은 어머니와 함께 밥상을 차리고 있는 누나를 흘끔 보았다. 몰래 누나의 방에 들어간 정국이 옷걸이에 정갈하게 걸린 외투를 살폈다.
어젯밤 상황을 다시 되짚었다. 캄캄한 밤, 자정이 넘어서 집 앞에 온 누이. 손에 묻은 핏자국. 독립운동가를 숨겨주었다는 말에 모든 상황이 납득되었지만, 단 하나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누나가 입고 온 남성용 외투. 정국은 옷에 대해 묻는 제 질문에 당황한 낯으로 답했던 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총을 맞은 남자가 입던 옷이라고 했다. 옷을 매만지던 정국의 눈이 가늘어졌다.
분명 총상이랬다. 누나의 손에 묻은 시뻘건 혈흔이 그 말을 증명했다. 그런데 외투 어디에도 탄환의 흔적은 없었다. 구멍은 커녕 헤진 곳 하나없는 트렌치코트를 매만지며 정국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 * *
"야 박지민 그만하고 오늘은 들어가라니까."
아직 개점시간이 한참 남았는데도 카페 스페스 안은 꽤 소란스러운 듯했다. 팔자에도 없는 카페를 드나드는 내 자신이 퍽 우스웠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여섯시에 맞춰 조선 증권 앞에 서있다가 민윤기에게 옷을 돌려주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복장으로 혼마치에 서 있는 건 모던걸들의 은근한 무시와 비웃음을 감수하겠다는 것과 같았다. 치마가 찢겨나간 탓에 평소대로 걸친 옷차림이 왠지 초라해 보였다. 그래서 일부러 사람들의 통행이 적은 다섯시 즈음 카페 스페스로 향했다.
간판의 조명은 꺼져있었다. 허나 문틈으로 새어 나온 말소리를 듣고 겁도 없이 출입문을 밀었다. 무거운 철제 문이 꽤나 쉽게 열렸다. 딸랑 종소리가 울리고, 손님용 테이블에서 떠들던 카페 주인과 마대자루를 든 소년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어? 쌈닭. 아, 저도 모르게. 죄송해요. 일단 이쪽으로 앉으세요."
난데없는 등장에도 스페스 주인은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가 해사하게 웃더니 금세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를 내어주었다. 다른 자리는 아직 청소 중이라는 말을 덧붙이고는, 남자가 쏜살같이 주방으로 향했다. 테이블 위에는 요즘 가장 유행하는 모던 잡지가 펼쳐져 있었다. 「혼마찌의 모던걸, 모던보이」라는 특집 기사 아래로 본정통에서 한창 유행하는 옷차림이 소개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사와 함께 실린 사진이 눈을 사로잡았다. 카페 스페스 앞에 선 주인, 호석의 사진이었다. 중절모를 잡고 한껏 멋을 부린 채 서 있는 자태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박지민. 오늘은 청소하지 말랬지."
호석은 내가 앉은 테이블 위에 주스를 두고는 구석에 서 있는 소년에게로 걸어갔다. 바닥을 닦고 있는 소년의 마대자루를 빼앗아 들고는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였다.
"너 안색이 안 좋다고 퇴근하라니까 자꾸 고집을 부리냐."
"저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긴 뭘 괜찮아. 감기 걸렸나 본데. 자꾸 식은땀 나잖아."
"아녜요. 멀쩡하다니까요."
"고집 봐라. 아주 쇠심 줄이네."
사장이 마대자루를 손에 든 채 돌아와, 테이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괜스레 멋쩍어 그가 건넨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남자가 그제야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을 발견하고 급하게 잡지를 덮었다. 입을 다물었는데도 자꾸 웃음이 터져나왔다.
"죄송해요. 영업시간도 아닌데 불쑥 찾아와서."
"에이. 딴 사람도 아니고. 언제든 편하게 오세요. 근데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아. 이거 윤기씨 옷인데, 돌려드리려구요."
테이블 위로 보따리를 올리자 그가 보자기에 싸인 외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납득이 안되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윤기형이 그렇게 다정한 사람은 아닌데."
"네?"
"어제 날씨가 쌀쌀했었나요? 뭐 그렇다 치고, 귀갓길에 옷을 덮어 줄 그런 위인은 아니거든요."
남자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검지로 제 이마를 톡톡 치며 말했다.
"뭐 어쨌든 좋네요. 이건 직접 전해주세요."
남자가 윤기의 외투를 내 쪽으로 밀며 덧붙였다.
"아마 퇴근하면 바로 종로 의원으로 갈거예요. 이미 퇴근했을 수도 있고요. 분명히 아버지 따라 병문안 갈 거거든요."
어쩔 수 없이 카페를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전차를 향해 걸었다. 괜스레 길을 걷는 여인들의 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모던잡지에서 빠져나온 듯한 색색의 옷차림에 괜히 기가 죽었다. 내 차림새를 보고 수군거리는듯했다.
그깟 옷차림이 대수야. 나라가 이 모양인데 일제 물건이나 사면서 으스대고 말이야. 속으로는 몇 번이나 큰소리를 쳤지만 현실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종종걸음으로 이 길을 빠져나갈 생각뿐이었다.
"저기요."
골목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등 뒤로 기척이 느껴졌다. 사장과 실랑이를 벌이던 카페 스페스의 그 소년이었다. 호석과의 고집 싸움에서 졌는지 외투를 다 갖춰 입은 채 소년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아마도 조퇴하는 모양인 듯 했다. 가까워지는 소년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 보였다. 입술을 꾹 문채로 소년이 코 앞까지 걸어왔다.
"고집 부리는 것 같더니 결국 졌나 보네요."
"아뇨."
"그럼?"
"결국 살았어요."
소년이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내 앞에서 주먹을 쥔 채로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손을 펼쳤다.
그의 손에 놓인 아직 혈흔이 얼룩진 찢어진 치맛단.
갑작스레 머리가 어지러웠다. 거리를 걷는 다른 이들의 말소리가 아득히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지나쳤지만 길에는 오로지 소년과 나, 둘뿐이었다. 그제야 앞에 선 소년의 눈매가, 창고 안에서 황급히 제 눈을 가리던 남자의 눈과 겹쳐 보였다.
"덕분에요."
From.스페스 |
오랜만이죠. 설은 잘 보내셨나요? 사실 설 명절동안 두 세편은 거뜬히 쓰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쩜 명절이 더 바쁠까요. 최대한 일찍 오려고 했는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한 마음뿐이에요. 가끔 인티 들어올 때마다 쏟아져 들어온 쪽지 보면서 많이 놀랐어요. 나중에 독방에서 살짝 검색해보니 추천도 많이 해주셨더라고요ㅠㅠㅠㅠㅠ 아니 이 싸람들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세심하게 달아주신 댓글들도 정말정말 너무너무 큰 힘이 되었어요. 다들 애정합니다.
+ 암호닉은 계속 받습니다. 가장 최신화에 신청해주세요.
사랑스런 암호닉들 (가나다순)
감자 / 강아지똥 / 개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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