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공기는 두 사람 사이를 더 딱딱하게 만들었다.
비바람에 흐트러진 제 머리를 겨우 수습한 탄소는
아까 전부터 자신을 무표정으로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던 정국을 향해 살짝 경직된 표정을 지으며 해명을 하였고
정국은 그런 탄소가 어디까지 이야기를 하는지 커피를 마시면서지켜보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사과 드리겠습니다.
오는 도중에 앞에서 차량 추돌 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내려서 여기까지 뛰어오느라 본의 아니게 오랜 시간동안 기다리게 한 점. 정말 죄송합니다."
"흐음...결국 요점은 늦었으니 한번만 봐달라 이거 아닌가요?"
"네? 아니 그게 그러니까..."
"늦을거 같으면 미리 연락이라도 하시던가 아니면 나중에 약속을 다시 잡던가 그래야 되는거 아닙니까?
보아하니 바보는 아니신거 같은데 왜 그 생각은 못하신겁니까?"
"아..."
미처 그 생각은 못했던 탓이였을까.
탄소는 작게나마 탄성이 입 밖으로 터져나왔고
그런 탄소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던 정국은 탄소를 살짝 째려보다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건지
살짝 망설인 후에 힘겹게 제 머릿속에 맴돌던 말들을 하나 둘 꺼내기 시작했다.
"근데 말이야. 탄소씨..."
"아 네. 하실 말씀이라도?"
"탄소씨 입장에선 좀 뜬금 없겠지만...난 지금 탄소씨한테 느끼고 있는 지금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고민하고 있는 중이에요."
"네? 갑자기 그게 무슨..."
"까놓고 말해서. 날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거에요? 아니면 정말로 하나도 기억이 안나는거에요?"
"예? 모르다뇨? 제가요?"
"네. 탄소씨가 지금 나 속이고 있는거 같은데...아닌가?"
"죄송하지만 전 초면에 만난 사람 속일정도로 악질은 아닙니다."
"허, 초면이라니. 이거 완전 섭섭한데요? 난 탄소씨 이름 듣자 마자 우리의 아름다운 추억이 하나 둘씩 생각나서 기분이 좀 묘한데..."
대체 이 무슨 생뚱맞은 과거 회상이란 말인가...
탄소는 정국의 말에 아까 전보다 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고
반대로 정국은 탄소가 불안해 하는 만큼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가 된 듯이 테이블에 턱을 괴며 탄소를 더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에이~얼굴 좀 펴요 탄소씨. 아니 탄소야."
"저기 왜, 왜 갑자기 반말을 하시는 거에요?"
"너 남한테 관심없고 둔하고 바보인거 진작에 알았지만 지금도 이렇게 눈치가 없을 줄이야. 왜 기억 확실히 나게 해줘?
우리 예전에 같은 중학교 다녔잖아. 너 중학교 다닐때 공부도 잘하는데다가 엄청 예쁘다고 해서 교내에서 인기 엄청 많았었는데...
아. 물론 그것도 내가 손을 쓰니까 다 한순간에 불과했지만."
정국의 입에서 중학교 시절 이야기가 나오자 마자 탄소는 떠올리기 조차 싫은 순간이 연기처럼 피어 올랐는지
마치 가시에 찔린 사람처럼 온 몸을 잘게 떨면서 정국의 얼굴을 외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탄소에게 있어 중학교 시절은 햇살 처럼 눈부시고 찬란했던 시기가 아닌 시궁창보다 더 잔혹하고 힘겨웠던 그야말로 악몽같은 3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을 썼다니...안그래도 불안한 와중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들은 탄소는 제 미간을 찌푸렸다.
"고생 좀 많이 했지? 하긴 널 믿고 따르던 네 친구들이랑 네가 모르는 수 많은 학생들이 다 등을 돌려 널 향해 손가락질을 했으니 그럴만도 하겠네..."
"너...너 대체 뭐야. 니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기억하기도 싫은 그 순간을 떠올리게 해? 어? 그리고 니가 손을 썼다니? 그건 또 대체 뭔소리야?"
"다 알고싶어? 근데 그전에 너 내 이름 들으면 놀라 자빠질텐데..."
"그래서 니가 누군데...정체가 뭔데?"
정국은 탄소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제 턱을 괴고 있던 손을 쭉 뻗어 고개를 떨군채 서럽게 흐느끼고 있는 탄소의 턱을 잡아 제 얼굴을 보게 만들었고
탄소는 정국의 손길에 강제로 고개를 들어 보기도 싫은 정국의 얼굴을 다시 한번 마주하게 되었다.
"전.정.국. 이게 내 이름이야."
전정국이라니...
탄소는 정국의 말에 혼란의 정점에 다다른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막대한 부로 학교를 휘청이게 만들었던 것도 모자라 중학교 시절 자신을 지옥에 빠트린 장본인이 무려 J그룹의 외동 아들이자
바로 지금 제 앞에 있는 정국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 탄소는 도저히 버티기가 힘들었던건지 이내 크게 경기를 일으키며 제 얼굴을 쥐고 있는 정국의 손을 내쳤다.
"전정국 당신이...아니...니가 날 그 꼴로 만든 주범이라고? 설마...거짓말 하는거 아니야?"
"아니. 나 맞아. 그때 너에게 지옥을 선사한 악마같은 놈이...
그리고 그 악마가 이제 곧 있으면 너의 약혼자 될 사람이라고. 어때? 이제 좀 상황 파악이 되는거 같아?"
"아니야...아니야! 그럴리 없어...그럴리가 없다고!!"
애써 부정하려 외면하려 소리를 질러봤지만 탄소는 이미 정국의 손바닥 안에 갇힌지 오래되었고
정국은 탄소의 반응에 진짜 악마에 빙의된듯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탄소에게 다가간 다음 억지로 탄소의 양 어깨를 잡으며
한층 더 격양된 목소리로 탄소의 마음을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야 김탄소 정신 똑바로 차려. 니가 이렇게 나약하게 나오면 내가 널 어떻게 더 괴롭힐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너만 피해자라고 생각하지마. 날 천하의 이기적인 X끼로 만든게 다름 아닌 넌데 왜 그건 새까맣게 잊었을까?"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분명히 내 기억에서 그때 너한테 밉보일만한 행동을 한적이 맹세코 단 한번도 없었단 말이야!!"
얼마 남지도 않은 제 힘을 쥐어짜내 발악을 한 탄소였지만
그 외침이 안타깝게도 정국에겐 별로 통하지 않은듯 정국은 오히려 가소롭다는 말투로 탄소를 천천히 짓뭉개고 있었다.
"역시 당사자는 기억을 하나도 못해. 이래서 불공평하다니까?
너 중학교 입학한지 얼마 안됐을때 스토커한테 시달리고 있는거 같다고 난리쳤던거 생각나?"
"..."
"그때 네 자리며 사물함이며 익명의 편지랑 선물이 매일매일 있었잖아.
그런데 너는 그걸 누가 너한테 보낸건지 모르다보니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섭다고 하면서 그 선물이랑 편지 다 내다 버렸지.
그리고 그 광경을 내 눈으로 다 지켜봤고..."
"설마 그거...니가 보낸거였어?"
"어. 그거 내가 그랬어. 중학교 입학식때 너한테 첫눈에 반했으니까.
예쁘고 청초했던 네가 맘에 들어서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에 네 자리랑 사물함에 편지랑 선물을 몰래 놓고 그랬는데...
끝내 너는 싫증나는 표정과 더불어 스토커 자식 죽어버리라고 하면서 내 여린 진심을 박살내더라."
"말도 안돼..."
"그제서야 깨달았어. 가질 수 없으면 부숴 버리라는 그 말을...
그래서 철저히 짓밟아 주겠다고 다짐하면서 널 지옥으로 밀어넣기 위해 전교생을 끌어들였지.
너를 혼자로 만들기 위해 어떤 수단을 이용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때마침 그때 너네 회사가 자금난으로 휘청이고 있더라고?
그래서 교내에 너와 너네 가족에 대한 온갖 괴소문을 퍼뜨리기 위해 그 일을 이용했지. 어때 대단하지 않아?"
"미친 놈.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라 말할 자격이 있어? 그때 당시 우리 집안이 얼마나 힘들었는데!!
학교에서 왕따 당하는 것도 서러운 마당에 회사까지 주저앉을 뻔한 그 시기에 두배로 고통 받으니까 사람이 도저히 못살겠더라.
나 그때 진짜 너무 힘들어서 아무도 모르게 자살한 다음에 나 혼자 조용히 세상 뜨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었어. 알아?!"
"이런. 나 때문에 죽을 생각까지 한거였어? 흠...이거 너무 미안해지는데 어째?"
"허, 이제와서? 어이가 없네...됐고 이제 그만해.
미안하고 나발이고 더이상 너의 그 가식적인 말 못들을거 같으니까. 오늘 맞선은 없던 걸로 하자. 그게 너한테나 나한테나 서로 좋은 거잖아 안그래?"
제 양 어깨를 잡고 있던 사악한 두 손을 과감하게 내쳐버린 탄소는 등을 돌려 정국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순식간에 탄소의 손을 재빠르게 낚아챈 정국은 그 손을 잡아당겨 탄소를 제 품안에 가두었다.
"어딜 도망가? 갈땐 가더라도 같이 가야지. 안그래요 공주님?"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이런 자리에서 너 혼자 심각한 표정으로 나가면 주변에서 욕한단 말이야.
더군다나 우린 이제 곧 있으면 정식으로 약혼도 하고 나아가서 결혼까지 할텐데 일찍부터 사람들 시선도 신경 써야지."
"내가 미쳤다고 너랑 같이 살 거 같아? 내가 아무리 너보다는 을이라고 해도 자존심이 있는 한 너랑은 절대 약혼 못해!"
"아아 그래? 뭐 지금은 내가 죽을만큼 싫어도 생각이라는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거니까. 너무 밀어내지는 말아.
그건 그렇고 시간이 꽤 많이 지난거 같은데 내가 집까지 차로 태워다줄까?"
"됐어. 너랑 같이 차타고 가다간 숨막혀서 요절할거 같으니까 택시타고 갈께."
"이봐요 탄소양. 내가 지금 호의를 베풀었으면 네가 알아서 따라오는게 너한테 좋을거야.
막말로 내가 너희 어머님이랑 아버님한테 찾아가서 약혼 파기한다는 말 꺼내는 순간...그 날로 너는 개박살나서 집 밖으로 쫓겨날텐데?
그러니까 더 이상 피 볼 생각 하지말고 조용히 따라와."
그렇다. 지금 탄소는 아무리 날고 뛰어봤자 정국한테 있어선 그저 을이였다.
그 현실을 알고 있었지만 차마 인정하기는 싫었던 탄소는 자신을 내리누르는 정국의 압력에 결국 아무런 대꾸조차 계속 하지 못한 채 정국의 손에 이끌려 차에 타게 되었고
그런 탄소를 살짝 흘겨보다 살짝 조소를 지은 정국은 이내 시선을 다시 앞으로 옮겨 천천히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처럼 차 안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고
정국과 탄소 또한 서로 아무런 말도 없이 무겁고 어색한 침묵만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탄소는 이런 환경이 싫었던 걸까?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한 나머지 잠시라도 다른 풍경을 보자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돌린 다음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김태형...니가 왜?'
찰나의 순간이였지만 제 눈에 들어온 사람은 다름아닌 태형이였다.
태형을 본 그 순간. 탄소의 눈에 비친 그 모습은 마치 슬로우모션으로 재생이 되는 것처럼 세상이 잠시나마 느리게 흘러가는거 같은 착각을 하였지만...
정신차리고 다시 자세히 보니 태형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였다.
그의 옆에는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태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땐 그 둘이 마치 연인인 것 같은 착각이 들게 만들 정도로 말이다.
네가 변한 걸까? 아니면 나의 착각인 걸까?
우린 멀어지더라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결국에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걸까?
이기적인거 알지만 네 마음이 어떻든 난 변함이 없어.
그건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테니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부디 기다려줘.
내가 곧 갈게.
(이번화는 정국이 분량이 콸콸 넘쳤습니다. 다만 글을 쓰다보니 정국이가 너무 못되게 써진거 같아 글을 쓰는 내내 정국이한테 미안함을 느꼈어요ㅜㅜㅜ)
(앗 태형이는 이번에 마지막 부분에서 대사 없이 움짤만 등장했네요...미안하다ㅠㅠㅠ)
(그나저나 정말 태형이는 여주를 잊고 새 사람을 만났을까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ㅎㅎㅎ 궁금하시면 다음화를 기다리시면 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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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미안해, 4명 한끼에 90만원은 도저히...” 호텔 뷔페값 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