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나는 전정국이 나오는 꿈을 꿨다.
녀석은 기껏해야 네댓 살쯤 되었을까,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때 모습 그대로였다.
그 때의 전정국은 성격이 아주 제멋대로였었다.
다음 대 알파 늑대라는 이유로 오냐오냐해 주던 어른들이 많았던 탓이리라.
그러나 나 역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기에, 녀석의 어리광은 내게 통하지 않았다.
'니가 내 부인 될 사람이야?'
나는 어린 전정국이 어린 나에게 혀 짧은 투로 말을 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녀석에게는 미안하지만, 당시의 나는 바로 앞집에 살던 오빠를 좋아하고 있었다.
어릴 적의 나는 두 눈을 치켜뜨며 대꾸했다.
'누가 너랑 결혼한대? 난 싫거든?'
잠시 놀란 얼굴을 하던 전정국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녀석은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도 너 같은 거 싫거든!'
'뭐래, 재수없게. 내가 너보다 나이 더 많거든? 누나라고 안 해? 죽을래?'
다시 보니 참 유치찬란한 싸움이었다.
전정국과 나는 처음부터 꽤나 삐그덕거리는 사이였던 게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다.
모난 성격의 두 사람이 부딪치고 또 부딪치다 결국 무뎌지는 데까지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이미 다음 장면이었다.
어느새 훌쩍 자란 모습의 전정국과 나는 원로님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훌쩍 자랐다고는 하지만, 이제 겨우 열댓 살쯤 되었을까. 아직도 전정국의 얼굴에는 솜털이 보송보송했다.
원로님은 근엄한 얼굴로 우리가 서로의 반려가 되어야 함을 알렸다.
내가 내 이름을 알고 난 이후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말이라, 솔직히 나는 별 감흥이 없었다.
동요하지 않는 나를 돌아보는 전정국의 얼굴에 놀랍다는 듯한 표정이 스친다.
얼마 후 녀석은 슬쩍 떠보듯이 말했다.
'난 누나가 나랑 짝 되기 싫어하는 줄 알았어.'
그 말에 옛날 일을 기억해낸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전정국을 놀렸다.
'뭐야, 전정국. 뒤끝 되게 길다? 그걸 아직도 기억하냐?'
그 때까지도 순진하기만 했던 전정국은 그저 얼굴을 붉힐 뿐이었다.
또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우리가 동거를 시작하고 난 후의 시점인 것 같았다.
지금까지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는 방관자였던 내가 이제 전정국과 직접 눈을 맞추고 있다.
이건 내 기억이 아니라고 생각한 순간 녀석이 내 위로 엎어지듯 나를 껴안았다.
그 와중에도 나는 몇 년 사이 전정국은 엄청나게 커 버렸다는 생각을 했다.
'누나.'
느릿하고 나른한 부름에 귀가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몸을 일으킨 전정국은 얼굴을 잔뜩 굳히고 있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에 왜 허벅지가 저리는지 모를 일이다.
배꼽 아래에서 시작된 열기가 온 몸으로 퍼지더니 삽시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끙끙거리는 나를 전정국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경멸을 담은 듯한 그 검은 눈동자가 아프도록 시렸다.
악몽이었다.
'나랑 이런 게 하고 싶었어?'
녀석이 딱딱한 투로 말했다.
아니라고 말하려는 입술은 굳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녀석은 어른처럼 핏줄이 솟은 손으로 내 볼을 쥐었다.
나는 가위에 눌린 듯 꼼짝달싹 못하고 전정국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는 고개를 숙여 내게 입을 맞췄다.
아찔하게 입 안을 유영하는 녀석의 호흡에 맞추느라 허리가 들썩거렸다.
나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여행자처럼 다급하게 그를 갈구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열기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녀석의 손길이 등 언저리를 쓸어내렸다. 소름이 돋았다.
아니, 소름이라고 말하기엔 뭔가 달랐다.
다른 이름을 고민해 보았지만 떠오르는 건 하나였다.
쾌락.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다리가 절로 벌어질 법한, 그런 쾌락.
'기분 좋아 보이네.'
여전히 딱딱한 녀석의 목소리에, 나는 그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결국 나는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에 잠을 깼다. 온몸이 식은땀에 푹 절어 있었다.
공기 중에는 아직도 전정국의 페로몬 냄새가 감돌았다.
나는 멍하니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꿈 생각을 했다.
다른 장면들과 달리, 마지막 장면은 분명 '기억'이 아니었다.
전정국보다 앞서 발정기를 겪었던 내가 당시 숱하게 했었던 상상이었다.
감출 수 없는 순수한 욕망과, 이런 내 모습을 알아챈 전정국이 나를 경멸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섞인 발칙한 상상.
그날 새벽, 나는 끝내 다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
*
"누나, 피곤해 보여."
전정국이 신발을 신다가 문득 그렇게 말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녀석의 말을 받아쳤다.
"너 때문이잖아, 똥개야."
"...미안, 근데 나도 어제는 죽을 뻔해서."
어제 누나 방 문 안 잠갔으면 진짜 덮쳤을지도 몰라.
전정국은 내 복잡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런 시답잖은 농담을 했다.
나는 먼저 문을 나서는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삼켰다.
페로몬의 영향에서 그나마 가장 자유로워지는 날은 보름달이 뜬 그 다음 날이었다.
그런 날에 전정국이 보여 주는 모습에서는 어렸을 적 나를 무척이나 따르던 그 모습이 비쳐 보였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육체적으로 녀석에게 끌린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알아오면서, 전정국은 내게 너무도 소중한 동생이자 친구가 되어 있었다.
그런 녀석과 한순간의 욕정으로- 혹은 '짝'이라는 명목적 관계로 이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그토록 녀석을 밀어내는 이유 중 하나였다.
지금 이 순간 가장 궁금한 것은 단 하나.
전정국,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
이 글은 1인칭 주인공(여주) 시점입니다.
여주 스스로도 혼란을 겪고 있을 뿐더러, 여주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저 짐작만 할 뿐이죠.
그리고 이 글의 세계관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국과 여주는 늑대 일족입니다.
늑대 사회는 철저한 계급 사회로, 우두머리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합니다.
무리에서 가장 높은 우두머리 늑대를 '알파', 그 다음을 '베타'라고 부릅니다.
알파의 직책은 보통 대대로 계승하게 됩니다. 다음 대 수컷 알파는 정국, 암컷 알파는 여주입니다.
각 세대의 수컷, 암컷 알파는 서로 짝을 지어 가장 강한 후손을 낳을 의무가 있고, 서로 강한 섹스어필을 느낍니다.
지금까지 글에 드러난 세계관은 이 정도입니다. 나중에 더 나오게 되면 이런 식으로 다시 알려드릴게요.
마지막으로, 부족한 글에 많은 관심 가져주시는 암호닉 분들입니다. 늘 감사합니다. 댓글 잘 읽고 있어요:)
안녕하새오 / 라온 / 코발트블루 / 지민이어디있니 / 10041230 / 뿡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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