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
"너 이름이 뭐냐?"
"좀 가지 그래."
하필 시험날에 걸린 독한 감기 때문에 특목고 진학을 위한 내 3년 간의 여정은 모두 물거품이 됐다. 아무리 스펙이 완벽하고 쌓아온 내신이 탄탄해도 소나기가 내리는 시험 성적은 날고 기는 영재들이 모인 엘리트 집합소에 어울리지 않았다. 대학 입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면학 분위기라며 신신당부를 하던 S대 경영학과를 다니는 사촌 형의 호언장담이 떠올랐다. 불합격 통보를 받고 근 3일을 식음을 전폐하던 내게 부모님은 대치동 소재의 사립 고등학교 진학을 권했지만, 누나의 음대 입시만으로도 이미 부모님의 등골이 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괜찮아요. 이번에 집 앞에 새로 생긴 고등학교 갈게요.」
시설도 좋고, 아무래도 내신 관리 하는 것도 더 수월할 것 같으니까 괜찮아요. 하하하.
"도경수? 성이 도야? 와, 존나 살면서 도 씨는 처음 보네. 너 근데 혹시 친구 중에 변 씨 있었냐? 내 이름도 존나 특이하거든. 혹시 니 주위에 백현이 있었냐?"
…… 그냥 그때 부모님 말을 들었어야 했다.
골칫덩어리
w. 웰던
학교는 신설답게 깨끗하고 시설이 매우 좋았다. 아마 게 중에는 성적이 탁월하게 좋았을 내가 신입생 선서를 하고 1회 졸업생이 될 여러분들은 우리 학교를 빛낼 차세대 주역 …… 어쩌고 저쩌고 하는 교장의 말을 들으며 대충 학생들을 눈으로 훑었다. 다들 평범하게 보이지만 유난히 짝다리를 짚었다거나 요란하게 껌을 씹는 부산스러운 행동을 하는 놈들도 몇 명 보인다. 이렇게 우스운 먹이 사슬이 결정되고 온갖 폼은 다 잡다가 졸업하면 짱깨 배달이나 하겠지.
저만치 앞에서 다리를 달달 떨며 잡담을 하는 머리통이 보인다. 밝게 염색을 한 머리통에 꼴사납게 줄인 교복 바지, 끽해야 담배나 라이터 따위나 들어있을 가벼워 보이는 책가방.... 그동안 놈이 밟아왔을 삶이 안 봐도 훤하다. 면학 분위기 조성에 도움이 안 되는 꼴통 새끼들. 나는 저렇게 골 빈 놈들이 딱 질색이다.
"임시 반장은 아까 입학식 때 봤지? 경수가 맡기로 하자. 괜찮지?"
"네."
"자리는 우선 자기 임의대로 앉고, 정식 출석부 나오면 그때 제대로 정하는 걸로 하자. 이상."
말이 임시지 아마 1년 내내 궂은 일을 맡길게 뻔하다. 담임이 나가자 마자 교실은 시장통으로 변했다. 첫날인데 뭐 할 얘기가 있다고 지랄들은. 미래가 암담한 한심한 모습들을 뒤로 하고 이어플러그를 귀에 꽂았다. 수학은 선행이 우선이다. 이미 중학교 때 공통 수학은 마스터했지만 감각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매일 조금씩 풀어줘야 한다. 손이 부지런해야 수학을 잘하는 거다. 알겠나!!! 스파르타식으로 나를 가르치는 과외의 얼굴을 떠올리며 손때가 제법 묻은 문제집을 꺼내들었다.
어디 보자, 이건…….
"야."
"……."
골똘히 생각에 잠기려는데 웬 예의 없는 손가락이 어깨를 쿡 찌른다. 이건 뭔가 싶어서 뒤를 돌아보니 아까 강당에서 봤던 양아치가 싱글벙글 쪼개고 있다. 얼굴에도 날티 가득한 게 딱 봐도 날라리 맞다. 별 생기다 만게 시비를 건다 싶어서 다시 문제로 눈을 돌렸다. 별 4개짜리에 신유형. 확실히 처음 보는 유형이라 그런지 풀이 과정 도출이 좀 어렵다. 일단 미지수를 x, y로 두고 근의 공식을 써서 방정식을 풀면..........
"너 이름이 뭐냐?"
"좀 가지 그래."
할 짓도 없는지 문제를 푸는 걸 계속 쳐다보더니 한다는 말이 저거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는 집중을 하고 있을 때 방해받는 걸 정말 싫어한다. 특히 수학을 풀 때는 더더욱. 남의 일은 알아서 뭐 하게? 알려주고 싶지도 않고 저런 놈과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내 귀한 시간을 소비하기는 더더욱 싫다.
"도경수? 성이 도야? 와, 존나 살면서 도 씨는 처음 보네. 너 근데 혹시 친구 중에 변 씨 있었냐? 내 이름도 존나 특이하거든. 혹시 니 주위에 백현이 있었냐?"
그랬더니 대뜸 남의 마이에 멀쩡하게 걸린 명찰을 휙 뺏더니 무슨 계집애들 마냥 쪼아댄다. 진심으로 싫다. 싫다. 싫다고. 대답을 하는 대신 명찰을 휙 낚아채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귀찮다는 티를 팍팍 내도 계속 껄쩍대면 쟤는 진짜 병신이다, 하고 생각하면서.
"너는 수학이 재밌냐? 나는 보기만 해도 대가리 깨질 것 같던데."
당연히 그러시겠지.
"너 아까 신입생 대푠가 뭔가 했다며? 너 그럼 중딩 때 공부 잘했었냐?"
너같은 새끼들 400명이 다 내 발 밑에 있었다.
"너 옆자리 비면 나 거기 앉을래. 이 오빠가 시력이 또 존나 좋아요. 중간고사 때 니꺼 좀 봐야겠다."
그렇게 빨빨대며 가방에서 서브 배터리를 꺼낸 변백현은 (슬쩍 훔쳐본 가방에는 휴대폰 충전기와 지갑, 모나미 볼펜이 전부였다) 실실 쪼개며 요란한 소리가 나는 휴대폰 게임을 시작했다. 처음엔 소리가 작길래 그냥 내버려두자 싶었는데 역시 소리가 작으면 맛이 안 산다며 볼륨을 최대치로 높였다. 이 새끼 봐라.
피버! 슈퍼 피버! 울트라!
이어플러그를 뚫고 촐랑대는 효과음들이 귀에 들어와 박혔다.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 야."
들은 체도 안 하고 배경음악에 맞춰서 어깨를 들썩인다. 이게 반장 말을 무시하는 거야 뭐야.
"야, 변백현."
"어어, 잠깐만."
잠깐만은 무슨. 순간 열이 머리 끝까지 뻗쳐서 휴대폰을 낚아채 배터리를 분리시켰다. 벙찐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변백현이 보인다. 그러게 왜 신성한 교실에서 게임을 하고 난리야. 철이 없어도 유분수지.
"곧 수업 시작이야. 다들 교과서 꺼내고 자리에 앉자."
쟤 뭐야. 진짜 범생이 맞나봐. 하면서 수근수근거리면서 다들 그래도 말은 잘 듣는다. 나같은 반장을 만나야 너희가 최소한 밑바닥은 안 까는 거야. 부산스럽게 사물함을 오고가는 놈들 사이에서 최고 기록 갱신에 실패한 변백현의 살벌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전혀 쫄지 않았다. 면학 분위기를 잡으려면 첫날부터 이렇게 해야 나중에 탈이 없는 거야. 한결 조용해진 교실 분위기가 만족스럽다. 옆에서 궁시렁대는 이 골칫덩어리만 없으면 완벽한데.
"자, 그럼 문학 교과서 차례를 보자. 5페이지로 넘겨 봐."
처음으로 부임한 학교가 여기라는 젊은 문학 선생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수업 흐름도 괜찮고, 가끔 던지는 농담도 우리들의 눈높이와 비슷한 수준이어서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문제는 옆자리에서 방금 일을 보복하려는지 계속 부산스럽게 구는 변백현이었다. 멀쩡한 자기 교과서를 두고 내 교과서에 도경수 바보 같은 유치한 낙서를 끄적이고, 아무 페이지나 찢어 메롱 ㅋㅋ 하는 쪽지를 던지질 않나 심지어는 내 책상에까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저, 선생님."
"어? 반장, 무슨 질문이라도 있어?"
질문은 아니고 큰 문제가 있긴 하죠. 나는 여유롭게 웃으며 여전히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는 변백현을 가리켰다.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자꾸 제가 수업 듣는 걸 방해해서요."
순간 변백현의 몸이 경직되고 놈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선생님이 앞으로 나와 보라며 손짓을 했다. 꼬시다. 꼴 좋다. 어디 앞에서 개쪽이나 당해보시지. 앞에 나와서 노래나 한 소절 부르라는 말에 오오- 하며 환호성이 커졌다. 뭘 믿고 긴장도 안 하는 건지 교탁 앞으로 잘도 걸어간다. 내가 원래 이렇게 나쁜 타입은 아닌데, 그래도 고소해서 자꾸 웃음이 난다. 꼬시기도 해라.
"어, 나 변백현이고. 알 놈들은 다 알지? 제 마음을 너무 몰라주는 반장에게 응급실 한 소절 바치겠습니다."
까고 있네.
응급실이라 하면 예전에 떠들썩했던 드라마의 ost로 기억하고 있다. 중학교 때 노래는 지지리도 못하는 놈이 헤어진 여자 친구보고 돌아오라며 축제 때 고래고래 악을 쓴 안 좋은 추억까지 있다. 걔보다 못하면 못했지 저 껄렁이가 잘 부를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수줍게 목을 큿흠, 거리면서 푼 변백현은 내 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노래를 시작했다. 내가 지 여자친구도 아니고 진짜 뭐야.
뭐야. 얘 좀 …… 잘하네?
떠들썩하던 교실은 순식간에 고요해졌고, 모두가 숨죽여 변백현의 노랫 소리를 경청했다. 사람은 분위기에 휩쓸린다더니 애꿎은 나까지 거기에 동요돼서 놈의 열창을 보고 있어야만 했다. 노래가 끝나고 열렬한 환호와 함께 변백현은 이거 완전 가순데? 너는 오디션 같은 데 안 나가냐? 하는 황송한 칭찬까지 받았다. 분명 개쪽을 주는게 목표였는데 자리로 돌아온 변백현은 굉장히 우쭐한 표정이었다.
"봤냐? 오빠 멋있지?"
"멋있긴 개뿔……."
정신 없던 수업이 끝나고 자꾸 얼굴을 들이밀며 칭찬을 요구하는 변백현을 확 밀치고 화장실로 향했다. 새빨개진 얼굴이 볼만하다. 천하의 포커페이스 도경수가 고작 저런 놈 때문에 화가 나서 이렇게 평정심을 잃다니. 찬물로 세수를 해도 아까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어쩌다 저런 골칫덩어리가 내 인생에 굴러들어와서. 나는 도대체 전생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왜. 왜!!!!!
///
17년 모태 솔로 도경수에게 얼굴이 빨개진다 = 화가 났기 때문이다 (단순한 놈 ㅋㅋㅋㅋㅋㅋㅋㅋ)
넉살 좋은 껄렁이 백현이와 까칠한 모범생 도경수의 러브 스토리는 이렇게 시작되는데..........☆★
이렇게 매일 티격태격하다가 한층 발전하는 관계도 써보고 싶네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흔히들 반대에 끌린다고들 하잖아요? 청춘 백도의 러브러브를 응원합니다 ㅠㅠ 요 귀염둥이들!!!
망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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