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를 처음 만난건 꽃피는 봄에서 뜨거운 여름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계절이였다.
" 민윤기라고 해 "
그 짧은 인사에 여자애들은 수근거렸다. 드디어 우리반에도 훈남이 생겼다면서.
분명 다 들릴텐데 못들은건지 안들리는 척을 하는건지 민윤기는 담임이 가르킨 자리에 앉아 책을 뒤적일 뿐이였다.
민윤기가 앉은 자리는 바로 내 앞자리였다.
가끔 수업시간에 멍떄릴떄는 동그란 뒷통수가 쎄게 생긴 얼굴과 딴 판이라는 시덥잖은 생각을 하곤 했다.
한달이 지나고 민윤기는 저와 잘 맞는 친구들을 사귄듯 했다.
과묵해보이는데 옆반 김태형과 정호석이랑 친구라는게 의아하긴 했다.
그동안 나와 민윤기는 별다를것없는 반친구 사이일 뿐이였다.
사실 가까워질 이유도 없었다. 같은 반이라는 교집합을 빼고는 나와는 다른 세상 사람같았다.
평범한 나와는 달리 민윤기는 학교에서 잘생겼기로 유명했다.
우리반에 찾아와 민윤기를 찾는 3학년 언니들도 많았다. 동아리도 달랐다.
그런 나와 민윤기가 나눴던 대화는,
" 야 "
" 응? "
" 저기 펜좀 주워주라 "
혹은
" 책상 좀 뒤로 "
" 아, 응! "
이 전부였다.
서로가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는 아니였지만 별 인상깊은 사이도 아니였다.
그렇게 한계절이 지나 선선한 가을이 왔다.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수험생이 되기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모든 학생들이 그렇듯 매 순간이 불안하고 짜증스러웠다.
더군다나 며칠 전 봤던 모의고사 등급이 한 등급씩 낮게 나와 더 스트레스였다.
그게 화근이였는지 석식시간 후 배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다.
분명 생리 할 시기는 아닌데 아랫배가 땡겨왔다.
조금만 참아보자 하고 영단어장을 뒤적이다가 손,발까지 차가워지는 느낌에 결국 담임쌤을 찾아갔다.
' 고3 얼마 안남은거 알지? 몸 관리 잘해야해 '
조퇴증을 끊을때 조차 성적얘기를 들었다.
선생님 딴에서는 백프로 노력파인 내가 안쓰러워 하신 말씀이였겠지만 오늘같은 날은 그 마저도 짜증이 났다.
*
학교 건물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까지 가려면 조금 걸어야했다.
하루종일 안에만 있다가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좀 살 것같았다.
해가 막 지려고 하고있었다.
이 시간에는 야자 아니면 과외 하느라 밖에 있는 일이 드물었는데 오랜만에 나와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동네까지 가는 버스는 30분 마다 한대씩 왔다.
학교랑은 거리가 있어서 바로 걸어가는것 보다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는게 더 나았다.
이어폰을 끼고 핸드폰을 보고있는데,
딱!
아 깜짝이야. 손으로 내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자 민윤기가 서있었다.
예상치 못한 인물에 한번 더 놀라 멍하니 쳐다봤다.
그 앞에는 기다리던 버스가 서있었다.
이거 기다리던거 아니야? 큰 노래소리에 목소리가 묻혔다.
입모양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 ...어 어디서 내려? "
" 하늘새 아파트 "
" 아 그래? "
민윤기는 묻는 말에 전부 단답이였다.
집에 가는거야? 응 석식 먹었어? 응.
이 어색한 대화도 떨어져 앉았으면 할 필요 없었겠지만 자리가 나란히 앉는 두개 뿐이였다.
그래도 같은반인데 혼자 서서 가는 모양새도 웃겨 먼저 앉은 민윤기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혔다.
어색해하는 나와는 달리 민윤기는 신경도 안쓰는듯 핸드폰만 만졌다.
그러다가 마이 주머니에서 이어폰 하나를 꺼냈다. 와 되게 비싼거 쓰네.
며칠전 이어폰이 망가져 인터넷을 뒤지다가 알게 된 브랜드였다.
옆에 앉은 나를 신경도 안쓰는 모습에 나도 곧 편해졌다.
끌어안은 가방에 턱을 기댔다.
집에 가도 마음 편하게 쉬지는 못할것이였다.
가방 안에 든 문제집 중 뭐부터 풀어야하나 고민하고있는데,
" 야 "
얘는 꼭 사람을 야 아니면 저기 라고 부른다.
고개를 돌려 보자 할 말이 있는듯 귀 뒤를 만지작 거린다.
" 왜? "
" 너 김태형이라고 아냐 "
김태형이라면 민윤기랑 붙어다니는 애 중 하나였다.
잘생긴 애들은 잘생긴 애들이랑 논다고 김태형 또한 준수한 외모였다.
친구가 중학교 시절 찐하게 짝사랑 했던 애로도 기억했다.
" 아는데 왜? "
" 걔가 너랑 친해지고 싶다는데 번호좀 알려줘 "
그러고는 내 손에 제 까만색 아이폰을 쥐어준다.
나 지금 이거 번호따이는건가.
손에 들린 핸드폰과 민윤기를 번갈아 봤다.
번호를 물어본 애 치고는 얼굴에 부끄러움 따위는 없었다.
정말 김태형이 이유인거같았다.
" 걔가 나랑 친해지고 싶은데 왜 너가 내 번호를 물어봐? "
" 지금 만났으니까 "
그러니까 저 개떡 비슷한 민윤기의 말은
‘ 나는 김태형이랑 친하고 그 친한 김태형이 니 번호를 알고싶어하는데 우연찮게 오늘 너를 마주쳤으니 나는 네 번호를 알아야겠다 ‘
이 뜻인듯 했다.
" 싫음 말고 "
핸드폰을 가져가려는 손을 밀어내고 내 번호를 꾹꾹 눌렀다. 자.
도로 건네자 뿌듯한지 입꼬리를 꾹 올린다.
어느새 버스가 우리 동네를 달리고 있었다.
다음 정거장이 민윤기가 내린다는 하늘새 아파트였고, 밖에 앉은 나는 민윤기가 나올 수 있게 다리를 바깥으로 뺐다.
" ...안 내려? "
버스 뒷문이 열렸는데도 일어나질 않길래 묻자 아는 형이 다음 정거장 앞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결국 같이 정거장에서 내려서 횡단보도가 있는 곳까지 걸었다
. 그렇게 늦은 밤은 아니였지만 해가 짧아져 어둑해져있었다.
" 여자애들은 밤늦게 들어가면 안무섭냐 "
번호를 물어본 이후로 내내 아무말 없던 민윤기가 물었다.
" 아직 일곱신데 뭘 "
" 아니 독서실에서 집갈때 "
" 아 조금? 근데 그땐 친구랑 통화하거ㄴ...어, 근데 너 내가 독서실 다니는거 어떻게 알았어? "
" 나오는거 봤어 김태형도 그 독서실 다니거든 "
" 아... "
횡단보도를 건너자 민윤기가 말했던 형이라는 사람이 손을 흔들면서 서있었다.
사실 말이 손을 흔든거지 윤기야!를 외치면서 오도방정을 떨고있었다.
" 쪽팔리게 진짜 "
민윤기가 그 사람 가슴께를 퍽 치며 말했다.
맞았는데도 뭐가 좋은지 실실댄다.
은근히 풍겨오는 냄새가 술냄새였다.
" 이 병ㅅ,아니 이 인간 쪽팔리면 먼저 가고 아니면 같이 가 "
가는 방향이 같아 같이 가야할지 아님 먼저 간다고 말해야할지 몰라 애매하게 서있는 나를 눈치챘는지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말없이 따라걷는데 아까부터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시선에 휙 쳐다보자 그 형이라는 사람이 빤히 내려다본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 여친? "
" 아니거든요 "
" 아니에요! "
" 맞네 뭘! "
" 예뻐서 좋아하냐? 짜식 외모밝히는건 나 닮아가지고. 어이 소녀. 얘가 어디가 맘에들어? "
" 그런거 아니라고요 "
부축하며 걷는 민윤기가 귀찮다는듯 대답했다.
응? 대답을 재촉하는 얼굴을 애써 외면하고 괜히 땅만 보고 걸었다.
" 난 여기서 계단 올라가면 돼 "
" 어 잘가 "
잘가 윤기 여친! 낯부끄러운 호칭에 놀라 민윤기를 쳐다보니 표정에 짜증이 가득하다.
그래놓고 휘청거리면 깜짝 놀라 제 어깨에 팔을 더 단단히 들춰맨다.
그 모습이 웃겨서 퍽 웃자 뭐가 웃기냐고 투덜댄다.
한번 더 인사를 하고 뒤돌아 집에 도착했을때 그제서야 오는 길에 약국에 들러 복통약 사오는걸 잊었다는걸 깨닭았다.
다시 나갔다 올까 싶었지만 아까보단 나아진 컨디션이 나아져 관두었다.
그러다 문득 벌써 갔을까 싶어 배란다 창문 밖을 내다보자 아직 끙끙거리면서 부축하며 걷는 민윤기가 보였다.
웅크려 앉아 그 모습이 더이상 보이지 않을때까지 내다봤다.
안녕 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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