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락비/피코]해를 품은 달 02
형에게 있어서 학교는 그 날이 마지막이였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 날 내내 형은 광적으로 학교에 대한 거부감을 표출하며 벌벌 떨어대었다. 심지어는 길거리에 다니는 우리 또래 아이들의 그림자만 봐도 기겁을 하며 숨곤 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할머니는 혹시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며 내게 물으셨고, 나는 유치원도 나오지 않은 형이 학교에 다니기엔 아무래도 무리였었나보다고 둘러대었다.
이상하게 이번 거짓말을 하는데는 마음이 답답하고 숨이 막힌다.
형을 지키지 못한 나약함을 감추려 거짓말을 내뱉는 내 입을 찢어 발기고 싶었고,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이 소름끼치도록 혐오스러웠다.
여태껏 살면서 느껴왔던 것의 수백, 수천배의 자괴감이 파도처럼 밀려와 나를 집어 삼켰다. 그 파도 안에 갇혀 크고 작은 암초에 몸을 찧이고, 찢기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형을 지키지 못한 나는 눈물을 흘릴 자격조차 없었다. 오히려 당해 마땅한 벌이라고 여겼다.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내 피로 붉게 물든 그 파도 속에서 생각했다.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그 녀석들에게서 형을 지켜낼 수 있었을텐데. 할머니를 걱정시키는 일 따위 하지 않았을텐데….
고개를 갸웃거리시는 할머니를 보며 눈물샘에서 울컥울컥 뿜어져 나오는 눈물을 가슴으로 쓰게 삼키던 그 날 알았다.
난 우리 가족 하나 지키지 못하는 약해 빠진 운명을 지닌 바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내 안에 순수한 눈을 가진 앳된 소년이 말라 비틀어져 쓰러졌고, 그 위로 눈과 귀가 막힌 늙은 얼굴의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보는 것도 싫고 듣는 것도 싫어 제 스스로 눈과 귀를 막고 태어난 그 소년이 말했다.
야, 이 바보야. 세상은 이런거야. 헛된 기대 하지마. 너 같은 놈에게 쉽게 마음을 여는 사람은 없어. 있다면 너처럼 불쌍한 녀석이겠지.
…내가 말이 너무 심했나…?
그러니까 이제 그만…나처럼 눈도 막고 귀도 막아.
한결 편해질거야. 내가 장담할게.
그 날 밤.
'학교', '사물함', '나쁜 친구들', '아파'…나만 알아 들을 수 있는 이 네 단어만을 되뇌이다 눈물로 잠이 든 형의 어깨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소리없이 울었다.
미안해. 바보같이 약해 빠져서. 지켜주지 못해서 내가 너무 미안해… …. 그날따라 작아보이는 형의 등에 얼굴을 묻고 나는 한참을 그렇게 끅끅거렸다.
▒▒▒
노래를 부르지 않았는데도 찾아 온 미미한 달빛이 우리가 나란히 누운 방 안을 비추었지만,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걱정 가득한 손길로 내 두 뺨을 어루만지는 달빛에도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 나를 보며 우리의 베개 맡에 앉아 형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눈과 귀가 막힌 소년이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달님아, 울지마. 그만 뚝해.」
「…흐으, 흐…」
「…너 자신을 자책하지는 마. 해를 품었던 달의 운명을 안고 태어난 인간이잖아. 네 잘못이 아냐.」
「으윽…형…형아…」
「너 자신도, 앞으로 만나게 될 널 품었던 해의 운명을 안고 태어난 인간도 너무 원망하지마….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니까. 너희에게 있어서 사랑은 어쩔수 없는 죄악이였던 것 뿐이야. 이해해.」
「미안…미안해…내가 약해서 그래…내가 못나서…」
「…그…내가 미래를 좀 볼 줄 아는데…시간의 절벽 끝에서 너희 둘이 웃고 있기는 해…왜 웃고 있는지 모른다는게 문제지, 웃고있어 둘이…나란히 마주보고 서서…
… …어? 한 명이 더 있는 것 같기도 한데…으아, 더이상은 안 보인다. 미안…. 」
「내가…다 내가아…」
「음…아깐 내가 말이 좀 심했지…? 그, 눈도 막고 귀도 막으라는 말 있잖아. 네가 해와 가까워 질수록 세상에 부딪혀봤자 좋을게 없어서 그래. 네 마음이 닿은 그 모든 것들을 해의 열기가 집어 삼킬지도 모르니까…그럼 너 또 울거잖아, 지금처럼.」
「… …」
「…어, 그, 음…그러니까, 내 말은…잠깐, 너 자냐!?」
「… …」
「…진짜 자네. …누군 미안해 죽겠고만! 정작 당사자는 퍼질러 자고있네!!…뭐, 그래도 가끔 이렇게 찾아와서 친구가 되어줄게. 그러니까…나처럼 눈도 막고 귀도 막아. 될 수 있으면 세상과 접촉을 피해.
그게 그나마 네 운명의 아픔을 덜 느낄 수 있는 길이야. 나처럼 견디지 못해 스스로 숨을 끊는 바보같은 짓은 절대 하지마. 운명을 다 받아내지 못한 벌로 우주의 먼지만도 못한 존재가 되버려.
누군가의 고통에서 볼품없이 태어나 이승에도 저승에도 속하지 못하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불안정한 하루살이 같은 삶이 시작되지. 내가 너의 자괴감에서 생겨난 것처럼 말이야.
…너보다 먼저 해를 품어봤던 달로써 충고하는거야. 절대 주어진 삶을 스스로 포기하진 마. 내가 힘 닿는데까지 널 도와줄게. 그러니까…힘내, 달님.」
그 소년은 잠든 나의 머리카락을 날이 꼬박 새도록 한참이고 쓸어넘기다 방 안에 햇빛이 서서히 차오를 때즈음 제가 태어난 내 가슴 속으로 되돌아갔다.
그가 내 가슴 속으로 스며들 때까지 깨진 않았지만 무의식 중에 눈물이 멎은 것은, 잠결에 들었던 ´힘내, 달님´ 그 말 한 마디가 너무나도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였을까.
ㅡ힘내, 달님.
…고마워. 내가 달님인지 뭔지 꿈나라에나 있을법한 네 이야기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고마워.
하얗고 찬 위로가 되었어.
▒▒▒ 해를 품은 달 지호 과거편 마침. ▒▒▒
「너… …달이구나. 빛을 잃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달.」
「그건, 네가 달이기 때문이야.」
´달빛이랑 참 닮았어. 가엾고 예쁜 것이.´
울어선 안 되겠죠
보여선 안 되겠죠
나의 마음이
아파 무너져와도
그런 아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아무 것도 난 할수없죠
<양파 - 기억할게요 中>
「앞이 깜깜해. 아무것도 안 보여. 어떻게 된 걸까…?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거야?
…손에 닿는 것도 없고 숨소리도 내 것 밖에 안 들려…이상해…무서워…어, 엄마…아빠…할머니…흐으…태운이 형…
나 집에 갈래요…누가 나 좀 살려주세요…어두운 거 싫어…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
가끔씩, 아주 가끔씩은 나도 그럴 때가 있다.
보통의 인생을 살고있는 내 또래의 누구나라면 24시간 한시도 빠짐없이 받고있을 부모의 맹목적인 사랑에 다시금 파묻혀 아주 작은 것에도 기겁을 하며 칭얼거리다, 오후의 햇살에 온몸의 털을 부비는 새끼고양이처럼 그 사랑 안에서 스르륵 눈을 감고 나른한 잠에 빠져들고 싶은, 이런 말도 안 되게 어리고 우주만큼 커다란 바람을 꿈 꿀 때가 있다.
「엄마…아빠아…어딨어요…엄마…!」
그때마다 가슴 속 깊이 아무도 몰래 숨겨 둔 열두 살 된 어린 나의 목소리가 또렷이 울려 내 숨통을 아프게 옭죄었다.
그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내 귀를 쥐어 뜯고, 그 하얀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가린 손이 부들부들 떨릴 때까지 힘을 주어도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리고 보이는 통에 아주 죽을 맛이였다.
심지어는 세상물정 모르고 마냥 순수하기만한 눈동자에 가득 들어 찬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어둠에 익숙치 못한 그 맑은 눈이 이리저리 데록데록 구르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닥쳐…닥치고 꺼져, 제발!˝
쿵, 쿵, 쿵.
굳게 말아쥔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 찍고, 또 내리 찍고 나서야 어린 나의 환영은 아직도 깊고 굵은 상처들이 울컥울컥 검은 피를 뿜어대는 심장 저편으로 사라졌다.
사라진 환영에 안심할 새도 없이 그가 흩어지면서 뿜어대는 하얗고 찬 신기루에 잔뜩 옭죄여졌던 숨통이 다시한 번 턱, 막혀왔다.
숨이 막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쥐고 있던 사진을 북북 찢어 공중에 집어 던졌다. 서로에게 기대어 너무나도 아름답게 웃고 있던 엄마 아빠의 사진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생기를 잃은 겨울나무의 나뭇잎처럼 바닥에 나뒹굴었다.
˝안 보면 될 거 아니야…안 바라면 될 거 아니냐고!!˝
그래도 도저히 트이지 않는 숨통을 부여잡고 쓰러져 바닥에 떨어진 사진 조각 위를 있는대로 구르며 헛구역질을 해댔다.
역겨운 소리를 내며 괴로워 하는 나를 눈과 귀가 막힌 소년이 멀찍이서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에게마저 꺼지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처럼 내게 있어서 너무나도 당연한 평범한 일상을 바라는 것은 거의 금기 수준이였다.
같은 학교 문제아들에게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맥없이 두들겨 맞았던 중학교 2학년의 어느 여름 날 밤에 '진짜 너무나도 행복해서 온종일 웃고만 다니는 그런 날을 내게 딱 하루만 허락해 주세요.' 하고 빌었다가 곧바로 들이닥친 호흡곤란으로 병원에 실려 간 적이 있을만큼.
누군가 내게 다가오는 것도 싫었다. 이 거지같은 운명의 쳇바퀴 위에, 닳아서 가죽이 벗겨지고 근육이 너덜거리는 발바닥으로 뛰는 사람은 나 하나로 족했다. 이것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지 잘 알기에 그 누구도 관여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학교가 끝나고 돌아오던 골목길에서 내게 사탕을 건네던 어린 여자아이의 머리 위로 갑작스레 화분이 떨어져 내린 적이 있다. 다행히 그 때가 비가오는 날이라 우산을 쓰고있어서 큰 화는 피했지만, 자칫 누군가 이 아이처럼 내게 따뜻한 손을 내밀었다간…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였다.
때문에 착하고 선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다가와주지 않길 바랬다. 나의 불결한 운명이 뿜는 저주의 기운 때문에 그런 따스한 사람들이 다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래서 내게 먼저 다가오려는 하얀 웃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으르렁, 이빨을 보이고 얼음처럼 차갑게 대했다.
그러면 그들은 얼마 못 가 어깨가 추욱 쳐져서 돌아서거나 호의를 무시하는거냐며 내게 화를 내었고,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지호야, 너는 왜 말이 없어? 애들이랑 어울리는게 싫어?」
「상관하지마.」
ㅡ난 괜찮아. 그러니까 더이상 다가오지마.
「…너는 사실 착한 아이 일거야. 무슨 사정이 있어서 발톱을 세우는 것 뿐이지. 네 눈을 보면 알 수 있…」
「상관하지 말고 꺼져.」
ㅡ그러다 너 죽을지도 몰라. 너 죽으면…죄책감에 나도 죽을거야. 물러나줘, 제발.
다가오지마.
돌아가.
너희들의 따뜻한 눈은 내 운명에 어울리지않아.
이 빌어먹을 운명에 6년간 길들여진 나는 정말 괜찮으니까…이제 그만 가.
▒▒▒
˝파수꾼 아저씨…˝
˝…˝
˝어마어마한 기운이 달님에게 빠르게 다가오고 있어요. 그것도 둘 씩이나.˝
˝눈도 막히고 귀도 막힌 주제에 잘도 눈치챘구나. …지호에게 그간 느껴보지 못한 행복과 느껴보지 못한 슬픔이 동시에 몰아치겠지.˝
˝어떻게 해요…˝
˝…운명이야.˝
살려주세요. |
아 정말ㅋㅋㅋㅋㅋㅋ미치겠네ㅋㅋㅋㅋ표현력 고갈ㅋㅋㅋ아...피토하면서 썼습니다...근데도 이상한건 함정.... 순수했던 어린 지호가 독하고 차갑게 자란 것에 의미를 두고 싶어서 브금도 바꿨습니다...가사가 지금 지호의 상황이랑 맞아 떨어져서요ㅎㅎ 지호의 과거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스토리가 진행 될 예정입니다. 아 이거 또 어떻게 풀어나가야할지 작가도 모른다는건 진짜 리얼 함정ㅋㅋㅋ 오늘도 망글 읽느라 고생하셨어요! : D |
* 암호닉 :)
쵸코/이불/달/솜사탕/낙서/루팡/오이/쌀알/나의 왕자님/현기증/달토끼/쨔응/새주/꿀/용구리/우샤론 님 감사합니다 !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