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겨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즐겁게 읽어 주시길 바라요:)
1.
-재미없어.
습관처럼 재미없다는 말만 뇌까린다. 재미없어, 재미없어, 재미없어… 아, 그런데 이건 정말 재미없다. 발단은 유난히 맑던 하늘이었다. 웬일로 수업도 일찍 끝났겠다, 원래라면 명동이나 종로 어디쯤의 술집이나 가는 게 맞았으나 난데없이 '신선한' 구경거리를 알고 있으니 저만 믿고 따라오라는 이석민의 말에 혹해 버린 것은 분명히 저 하늘 때문일 테다. 이렇게 화창한 날에 어둑한 곳에 처박히기도 싫어 순순히 따라 가봤더니, 태연하게 역으로 향한 이석민이 무려 기차에 올라타는 것이 아닌가. 얼떨결에 기차까지 타고 도착한 이곳은-
-어이, 이석민.
-이야, 역시 사람은 풀을 밟고 살아야해, 논밭 시원하게 깔린 걸 보니까 속이 다 풀리네.
-추수 다 끝나고 논이고 밭이고 아무 것도 없는데 풀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여긴 도대체 왜 온 건데!!
권순영이 이미 바락바락 항의하고 있길래 굳이 나도 가세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렇지, 겨울을 목전에 둔 11월에, 텅 빈 논밭을 구경하는 게 무슨 놈의 재미냔 말이다. 그저 어서 집에 가서 드러눕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볼 일 다 끝났으면 가도 되냐? 난 잠이나 잘래-
-나도 갈란다. 어우, 추워 뒤지겠네.
권순영이 코트 단추를 꼭꼭 채우며 호들갑을 피운다. 모-던 보이 운운하며 셔츠에 얇아 빠진 모직 코트 하나 걸치고 나설 때부터 저럴 줄 알았지,
-새끼들아, 멀리 좀 내다보고 살아라. 내가 설마 논이나 보여주려고 니들 다 데리고 왔게?
의기양양한 이석민의 손가락 끝에 걸린 것은, 단출한 목조 건물 한 채였다.
2.
황량하게 펼쳐진 논밭 너머로 다닥다닥 초가집이 달라붙은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엉성한 십자가를 내건 그 건물만이 유일하게 이질적이었다. 반신반의하며 이석민을 따라 교회 비스무리한 그것에 다가서니 코맹맹이 목소리들이 낭랑하게 울린다. 이제 보니 간판도 붙었다.
‘일칠리 야학 강습소’
-뭐야, 야학? 이석민, 너 우리 몰래 이런 거 하고 다니냐?
-어쩐지 요새 자주 없어지더라니.
아까부터 잠자코 따라오기만 하던 홍지수가 한 마디 툭 던진다. 그래, 요즘 이석민이 자주 약속을 물리긴 했지.
-이 형님은 벌써부터 조국을 위해 애쓰고 있다고, 권순영 같은 놈들이랑은 다르게 말이지.
-나 같은 놈들이 뭐 어떤 놈인데? 이 새끼 봐라,
-그래서, 우리는 여기 왜 데리고 온 건데? 같이 여기 선생이나 하자고?
권순영이 또 시끄러워지기 전에 재빨리 끼어들었다. 사실 야학이니 뭐니 해도 무덤덤했다. 조국을 위해 애쓴다고? 애초에 우리에게 조국이라고 할 만한 게 있기는 하냔 말이다. 어차피 나와는 하등 관계없는 일이지만, 말이 그렇지 않은가.
-그게, 나랑 같이 여기 일을 도와주던 친구가 이번에 동경으로 유학을 가서...
-대신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렇지, 역시 인텔리 홍지수! 일단 다들 들어가보자고!
그러고는 말릴 새도 없이 교회 문을 열어젖힌다. 부실한 복도를 따라 늘어선 교실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아이들이 들어차 있다. 창문 너머로 들여다 본 칠판에는 구구단이 빼곡하다. 선생님이 선창하면 아이들이 입을 모아 따라한다. 팔 오 사십, 팔 육 사십 팔, 팔 칠 오십 팔, 팔 팔,
팔 칠 오십 팔?
-야, 저기 칠판에 팔 칠 오십 팔.
셋의 시선이 조로록 칠판으로 향한다. 곧바로 권순영이 조잘거린다.
-오십 팔? 오십 육이잖아. 뭐야, 선생님이 틀린 거야?
-어...?
-이석민, 잘난 체는 있는 대로 하더니 뭐가 이렇게 엉성하냐? 조국을 위해 일하고 있다며?
-아니, 저 애가 학교에서 아직 정식으로 배운 게 아니라서..
실수한 건 저 선생인데 이석민이 왜 쩔쩔 매는 건지, 우스울 노릇이다.
-실수한 건 전데 왜 석민 오라버니가 곤란해 하세요.
그러니까 말이다,
...어?
삽시간에 사위가 조용해지고 예의 선생의 목소리만 복도를 울린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여주라고 합니다.
3.
-그래, 그러니까 그렇지. 그래서 얘가.. 어, 그래.
횡설수설하는 이석민을 내버려두고 여자에게 말을 붙여보았다.
-혼자서 여기 애들 가르치는 거에요?
벽이 무너져라 달라붙어서 복도의 상황을 염탐하고 있는 저 아이들 말이지.
-아뇨, 원래는 석민 오라버니랑 다른 선생님들이 수업하시는데 지금은 한 분이 사정이 생기셔서 제가 임시로 맡고 있어요.
-아아, 그래서 구구단 같은 것도 잘 모르시는구나. 진짜 선생님이라면 그럴 리가 없죠~
-야, 윤정한. 지금 뭐하는데..!
이석민이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무시하고 내 앞의 얼굴에만 집중했다. 입을 꾹 다물고 나를 쏘아보는 눈빛이, 아주 재미없지는 않다.
-그래도 선생님이랍시고 나선 사람인데, 구구단도 몰라서 되겠어요?
-야..
-윤정한 꼬인 거 하루 이틀이냐. 냅둬.
홍지수의 말은 응원인 셈 치기로 했다.
-그러니까, 팔 칠이
-앞으로 노력해서 고치겠습니다.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십 육이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여자는 전혀 감사하지 않은 얼굴로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점점 흥미로워진다.
-그래요, 그런데 뭐 어떻게 노력하려구요? 배울 곳은 있고? 학교도 안 다닌다면서,
-직접 가르쳐주실 것 아니면 참견 그만 두셨으면 좋겠습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석민 오라버니, 오늘 들러 주신 것 감사했습니다. 다른 분들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숨도 안 쉬고 말을 쏟아내고, 또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서 빠르게 걸어가 버린다. 오늘 수업 끝났어 얘들아, 외치는 말의 끝에 분명 쌍시옷 따위의 상스러운 무언가가 달려 있는 것 같았지만 못 들은 체 하기로 했다.
-오늘 만나서 즐거웠어요~
저쪽도 내 말을 못 들은 체 하기로 했나 보다. 꼿꼿이 허리를 세운 그녀가 성큼 성큼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야 이 미친 놈아!!
-아, 놓으라고! 내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니?
-네가 너 성격 틀려 먹은 건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진짜 오늘은,
-그래, 내가 봐도 좀 심하긴 했다.
-권순영 너도 똑같애, 니가 교실 바로 앞에서 떠들어서 애가 듣고 나온 거 아냐! 진짜 미안해서 어떻게 하냐...
-알겠으니까 집이나 가자. 벌써 해지려고 한다.
-그래, 우리 빨리 집이나 가자. 나 너무 피곤하네.
-네놈들을 여기 데려온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지...
울먹이는 이석민을 질질 끌고 서울로 올라가며 생각했다.
확실히, 신선하긴 했어.
클리셰 범벅 투성이인 모자란 글입니다ㅠㅠ 졸려서 그냥 올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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