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GH
HI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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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w. 크램
" 와우. 세상 정말 좁다. "
" ... ... "
" 그죠, 누.나? "
... 깐죽이가 '누나'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능청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사람이 너무 궁지에 몰리면 사고 회로가 정지 되는 모양이었다. 이 호랑이 굴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보지만, 떠오르는 답은 없었다.
나는 망했다.
그 순간 타이밍 좋게 또다른 여자애가 내 자리로 다가왔다.
" 시민이랬지? 이름 예쁘다! 난 유정연이라고 해! "
" 콱마. 유정연. 너 어디 함부로 전학생한테 반말하래? 눈 깔아, 이래 봬도 '대누님'이시다. "
" ... 예리야. 이 새낀 또 왜 이래? "
" 몰라. 이동혁 아까부터 저 상태야. "
" 크하하하하핡하하학! 개꿀잼. "
깐죽이는 날 놀리는 데에 완벽하게 재미가 들린 듯 했다.
아까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면, 이젠 저 깐죽거리기를 멈추질 않는 주둥이를 딱 한대면 쳐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지금 분위기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 했는지, 예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 누나? 시민아 너 혹시 복학생이야? "
" 어? 아니 아니!! "
" 그럼 혹시, 이동혁이랑 아는 사이? "
" 아니! 나 쟤 완전! 오늘! 처음보는데! "
" 와, 누나 그러기에요? 우리 아는 사이잖아! "
시민이는 너 모른대잖아. 어디 약을 팔아. 어? 정연이가 깝죽이의 등을 빡빡 내리치자 녀석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옆에 있는 놈에게 도움을 청했다.
" 야. 이민형! 뭐라고 좀 해 봐. 너도 저 '누나' 알지? "
내가 '스물 두 살'이라고 뻥쳤던 것까지 정확하게 다 기억하던 놈이다. 녀석과 나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입가엔 알 듯 말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작작해 이동혁. "
... 잠깐. 이민형이랬지?
너 설마, 날 도와주려는 거니? 그래 어쩐지 넌 좀 착하게 생겼더라.
저 이동혁이라는 놈이 나한테 누나누나 거리는 것만 좀 막아 준다면, 내가 그날 골목길에서 네게 무엄하게 굴었던 것을 뉘우치며 평생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
" '누나' 얼굴 빨개진 거 안 보이냐. "
... 리가 없지.
둘은 이미 합세해서 나를 지구 끝까지 놀려 먹기로 텔레파시로 결정을 내린 듯 했다.
어째 피식하는 녀석의 웃음이 이동혁보다도 얄밉다는 생각이 들 때 쯤, 교실문이 벌컥 열렸다. 이윽고 어수선한 교실 안에 출석부로 교탁을 내리찧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자자, 유정연. 너도 자리로 돌아 가고. 다들 조용히 해라. "
" ... ... "
" 회장은 인사. "
마음을 추스리고 나도 수업을 준비하려던 때였다. 이민형이 뜬금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차렷. "
" ... ... "
" 경례. "
" ... ... "
" 선생님께, 인사. "
나는 눈이 번뜩 뜨였다.
말도 안 돼. 설마 쟤가 회, 회장?!
***
예리와 정연이는 쉬는 시간이 되자 매점을 보여주겠다며 날 이끌고 1층으로 내려갔다.
교실만 벗어나면 시비 걸릴 일도 없을거라 믿었는데, 때마침 매점 안에 있던 이동혁을 마주쳤을 때 나는 좌절했다.
" 어? 하이 누나! 누나도 군것질 좋아하나 봐요? "
" 득츠르. "
그놈의 누나누나 때문에 노이로제 걸려서 단명할 지경이다.
빵을 고르고 다시 교실로 올라가는 순간까지 녀석은 끊임 없이 깐죽대며 말을 걸어 왔고 나는 녀석을 무시하려 무진장 애쓰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예리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들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 시민아. 너 괜찮아? 안색 완전 안 좋아 보여. "
" ... 어?! 으, 응! "
" 혹시 이동혁이 놀리는 거 때문에 그런 거면 신경쓰지 마. "
" ... ... "
" 내 눈엔 너 전ㅡ혀 노안처럼 안 보이는 데... 걔 눈이 이상한거야. 그래도 그렇지, 전학 온 애를 그렇게 놀리냐. 나쁜 새끼. "
뭔가 잘못 짚어도 단단히 잘못 짚은 듯한 예리가 이동혁의 뒷통수에 때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엄청난 흑역사를 얘기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난 어색한 웃음만 하하 흘릴 뿐이었다.
교실에 들어서자 마자 이동혁이 책을 읽고 있는 이민형 책상 위로 카카오빵 하나를 툭 던지며 투덜댔다.
" 내가 빵셔틀이냐? 새끼. "
" 어, 땡큐. "
뭐야, 안 어울리게 책 읽기는...
게다가 상상도 못 했는데, 이 녀석이 회장이었다니. 정말 알 수 없는 컨셉의 놈이라고 생각하며 나 역시 자리에 앉아 카카오빵을 북 뜯었다. 카카오빵의 별미는 빵에 같이 들어있는 바로 이 카카오 스티커... 인데.
아씨, 또 제이지다. 난 맨날 얘만 걸려. 못생긴게. 오늘 참 되는 거 하나 없구나 싶던 순간이었다.
이민형이 봉지에서 꺼내든 스티커가 눈에 들어 왔다. 헐! 라이언이다... 쓰벌 부럽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민형과 내 눈이 딱 마주쳤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건지, 녀석이 낮게 웃었다.
" 어른도 원래 이런 거 좋아해요? "
" ... ... "
" 라이언. 갖고 싶으면 줄까? "
... 됐다 이 새끼야. 하마터면 얘 역시 지금 날 놀리지 못해 안달난 천적이라는 걸 잊을 뻔했다. 입에 빵을 신경질적으로 쑤셔 넣고는 일부러 떵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 어아 맣이 가이세어. (너나 많이 가지세요.) "
" 싫음 말고. "
아오... 저걸 확 그냥.
***
예리와 정연이, 그리고 저 악마 두 명까지 합해서 넷이 같이 점심을 먹는 사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나는 혼자 점심을 먹겠다고 자처했다. 쟤네랑 밥 먹다가 체하느니 혼자 먹는 편이 훨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한 여자 전학생을 혼자 밥 먹게 둘 수는 없다는 예리와 정연이의 고집에 못 이겨 나는 저 악마들과 나란히 급식실까지 끌려가야 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아무렇게나 욱여넣고 있는데,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이민형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컥... 컥! "
급격히 사례가 들어서 미친듯이 어깨를 들썩이며 기침하는 내게 예리가 괜찮냐며 놀란 표정으로 물병을 따 내밀었다.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와중에도 여전히 내 얼굴을 향한 녀석의 시선이 느껴졌다. 뭘 봐 임마. 입모양으로 위협해보지만 녀석은 씨익 웃어보일 뿐, 미동도 없다.
이렇게 밥도 제대로 못 먹게 만드는 거 역시 그날에 대한 복수의 일극인건가... 나는 내일부터 반드시 혼자 밥을 먹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 아, 잘 먹었다. "
" 하여간 이동혁. 엄청 많이 먹어요. "
" 야. 너네 먼저 올라가. 나랑 이민형은 나중에 갈게. "
" 너네 또 담배 피러 가지? 냄새 제대로 안 털고 올라오면 뒤져 진짜!! "
" 뉘예, 뉘예. "
담배라는 단어를 듣자 그날의 흑역사가 또다시 스멀스멀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불길한 예감에 얼른 자리를 뜨려는 찰나, 뜬금없이 이동혁이 내게 허리를 깍듯이 굽히며 깐죽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 저 누나. 저희가 감히 담배 피러 가도 괜찮겠습니까? "
저놈이 왜 저 말을 안 하나 했다...
" 어른이 허락 안 해주면 안 되는데. "
이민형도 희미하게 웃더니 한 수 거든다.
새끼들이 진짜...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 그래. 제발 내 허락 묻지 말고 마음대로 해주라. 어?! "
눈빛을 교환하며 웃는 녀석들에게 이렇게 외치고는 뒤돌아 씩씩 걸어가는 길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집에 돌아가면 나는 아마 엄마에게 자퇴하게 해 달라고 조르고 있거나, 울면서 과거의 나를 무진장 원망하고 있거나, 이 둘을 동시에 하고 있을 거라고.
***
알고보니 이민형은 회장에다가 공부도 문과에서 10등 안에 들 정도로 잘하는 애라고 했다. 시험 기간에 같이 놀았으면서, 자기만 시험 잘 본다니까. 예리는 억울하다는 말투로 덧붙였다. 참고로 이동혁은 첫인상부터 짐작하던 그대로 반에서는 알아주는 까불이란다.
그럼 그렇지. 사람 놀리는 데에 아주 도가 튼 새끼 같더라니.
" 자자. 너네 요즘 화단에서 담배 피는 새끼들 많지. 어? "
" ... ... "
" 화단이 꽃 심는 데지 너네 담배 꽁초 심는 데야? 아주 꽁초들이 장난 없더만. 내일부터 학교 내부말고 화단에서 흡연하다 걸려도 바로 똑같이 징계하기로 했으니까, 알아서들 해라. 어? 쫌. "
" 네에ㅡ! "
" ...새끼들. 대답은 잘해요. 자, 종례 끝이다. 회장 인사. "
종례가 끝나고 애들이 분분히 흩어지는 순간까지도 난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이민형은 공부를 잘한댔으니까 어쩌면 이동혁보다는 공감 능력이 나을지도.
둘 중 한명에게 타협을 봐야한다면 이민형에게 말을 거는 쪽이 나을 거라 혼자서 결론을 내린 후, 가방을 매고 훌쩍 교실 문으로 걸어가는 중인 이민형의 어깨를 붙잡았다.
" 야. 이민형. "
" ... ... ? "
" 내가 미안! 그날은 내가 진짜, 진짜, 진짜, 미안하니까!! 제발 누나라고 부르지 말아! "
" ... ... "
" ...주면 안 될...까? "
이민형이 끼고 있던 이어폰을 빼내더니 나를 쳐다봤다.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두손을 모으고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 제발! 해 달란 대로 다 해줄테니까! 응? 나 정말 누나 소리 들으면 수명이 주는 병에 걸릴 거 같아!! 집에 남동생도 있는데 누나라는 단어에 공포증이라도 생기면 어떡... "
" 해달란 대로 다 해준다고? "
" ... ... 응? "
" 방금 그렇게 말한 거 아닌가? "
" 어?! ...어, 어. "
당황해서 말을 버벅이는 날 이민형이 빤히 바라보았다. 또또, 아까 그 급식실에서 그 눈빛이다. 지금은 밥도 안 먹고 있는데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녀석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
" 번호. "
" ...뭐? "
" 번호 달라고. 그럼 그만 할게. "
머리로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내 손은 녀석의 폰에 내 번호를 저장하고 있었다.
나 방금 번호 따인 거 같은데. 그것도 아주 이상한 방법으로, 이상한 타이밍에. 녀석은 폰을 챙겨들더니 '그럼 내일보자, 김시민.'이라는 말만 남기고는 다시 멀어져갔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눈으로 좇던 나는 뒤늦게야 정신으로 차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뭐, 어찌됐건 방금은 이름 불러줬으니까... 협상은 성공한건가.
***
진이 다 빠진 상태로 너털너털 집에 도착했을 때, 핸드폰에는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ㅡ주머니 확인 해봐.
주머니에 손을 넣자 내가 발견한 것은, 아까전 그 라이언 스티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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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회에 댓글 남겨주시고 암호닉 신청해주신 분들 전부 감사합니다! 암호닉은 모아 두었다가 3~4회쯤에 정리할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