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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ody Romance
  W.DKN





  B.


  허술히 조여진 블라인드 틈 사이를 뚫고 들어온 눈 부신 햇살이 얼굴 위로 와르르 쏟아졌다. 한참을 몸을 뒤척이던 성규가 결국 퀭한 얼굴로 이불을 거두어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고작 여덟 시 반에 머무르는 시곗바늘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침대 아래 가지런히 놓인 슬리퍼를 꿰어 신고선 비척비척 걸어가 냉장고 앞에 섰다. 차곡차곡 쌓여있는 혈액 팩들을 둘러보다가, 손길이 가는 것을 집어 들고는 팩을 뜯어내 컵에 따랐다. 컵으로 쏟아지던 붉은빛이 하얗고 가는 성규의 손가락 위로 툭, 튀었다. 튄 부근을 핥아 내린 성규가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잔을 들고 천천히 소파로 향했다. 밤새 잠을 설쳐서 그런지 몸이 소파를 뚫고 바닥까지 푹, 꺼질 것만 같았다.  



  “12월 9일. 김재규가 다시 찾아왔다.”


  소파 구석에 처박힌 녹음기 버튼을 누르자 빨간 불빛이 들어온다. 한숨이 섞인 목소리가 조용한 집안을 울린다.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새, 온몸에 돋아난 두려움에 성규는 혼란스러웠다. 겹쳐 보이는 지난날의 기억들. 와장창. 제 손에서 날아간 녹음기가 유리창에 부딪혀 형편없이 흐트러졌다. 늘어진 니트를 추스르며 무릎을 끌어당겨 앉은 성규의 몸이 잦게 부들부들 떨렸다. 눈앞이 깜깜했다.







  “일찍 출근하네.”
  “사장님두요.”


  원형 테이블에 엎드려 있던 성규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이어폰을 빼냈다. 우진아, 대걸레 가져와서 여기 좀 닦아라. 착 가라앉은 앞머리 사이로 가려진 눈이 다시 폭 감긴다. 내내 충족되지 못한 잠이 이제야 쏟아진다. 노곤한 몸을 일으켜 뺨이며 목 뒤를 가볍게 문질렀다. 방으로 들어가 쪽잠이라도 잘까. 하다가도 일어났을 때 느껴질 뻐근한 통증이 싫어 자꾸만 마다하게 된다. 갈피를 못 잡고 어영부영하고 있는 와중에, 육중한 입구 문이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다.



  “저, 아직 영업시간 아닌데요.”
  “아, 미안합니다.”
  “잠깐만.”


  가게에 발을 들인 검은색 페레가모 구두. 그를 돌려보내려는 우진을 불러 세웠다. 곧게 뻗은 성규의 손가락이 가볍게 흔들린다. 괜찮으니까, 들어오세요. 예상치 못한 성규의 반응에 놀랐는지 우진이 한 발짝 물러서며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그 옆에 선 우현 또한 꽤나 놀란 얼굴. 어차피 곧 있으면 오픈인데 뭐. 그래, 이 냄새. 코를 톡 쏘는 짙은 머스크 향이 성규의 옆을 지나쳐 룸으로 들어간다. 밖이 추운지 코끝이 빨개진 게 제법 귀엽다. 오늘만 문을 조금 이르게 열자는 성규의 말에 우진은, 사장님이 뭘 잘못 먹은 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이내 입구 문을 열러 허둥지둥 발을 뗐다. 



  입구 문이 열리자마자 들어온 여성손님들이 이미 가게 군데군데에 자리 잡았는데도, 정작 궁금한 상대는 나타나질 않았다. 룸으로 들어간 주문이라고는 고작 맥주 한잔 정도. 아마 술 없이 앉아있기 뻘쭘해서 시킨 게 분명했다. 뒤늦게 도착한 알바생들이 벌써부터 활짝 열린 입구에 어리둥절 해하며 재빨리 주방으로 들어갔고, 그 덕에 이제야 밖으로 나온 우진에게 술 제조와 서빙을 맡겨두고 도망치다시피 룸쪽으로 빠르게 발을 옮겼다. 


  
  “오랜만이야.”
  “…나가주시죠. 곧 일행이 올 거라서.”
  “오랜만에 보는데 여전히 쌀쌀하구나?”



  테이블 위에 매달린 조명을 조금 위로 올린 성규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우현을 바라보며 웃자, 우현이 애써 고개를 돌리며 빈 캔만 들이킨다. 술 더 갖다 줄까? 재킷을 벗어 옆에 내려둔 우현이 말없이 고개를 내젓는다. 몇 살이야? 지난번에 못 듣고 가서 좀 아쉬웠어. 온몸에 내려앉았던 피곤이 싹 가신 듯한 기분이었다. 왜 이렇게 땡기지. 저 자신도 놀라울 정도로 성규는, 몸속 아주 작은 세포들까지 우현을 향해 곤두서있을 만큼, 우현에게 끌림을 느꼈다. 자꾸 튕기니까, 금방 사그라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분명히 성규는 지금 우현에게 끌리고 있었다. 감정으로든, 몸으로든, 뭐든.



  “나한테 관심 있어요?”
  “응. 그니까 물어보지. 아, 몇 살인데. 넌 나한테 관심 없어? 왜 이렇게 튕겨.” 
  “…스물여섯입니다.”


  어리네. 꼬맹이네, 꼬맹이. 테이블 위로 미묘한 감정이 팽팽하게 조여졌다 축 늘어지기를 반복했다. 불안정하게 쿵쾅 이는 심장.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가는 피의 흐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러는 그쪽은 몇 살이나 먹고 유치하게 구는데. 다리를 꼰 채 정자세를 유지하던 우현이 몸을 풀며 묻자 성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마치 이런 상황이 반가운 듯한 표정.


  “어? 갑자기 왜 반말해?”
  “불만이면 나도 놓으라며.”
  “아 맞다. 그래, 좋아. 계속 반말해. 듣기 좋다.”


  고개를 픽, 떨구며 웃는 성규에, 못 말린다는 듯한 표정의 우현의 얼굴에 웃음이 스쳤다. 나 안 넘어가. 꼬시지 마. 고개를 든 성규가 팔을 뻗어 빈 캔을 잡아끌며 말했다. 그건 두고 봐야 아는 거지. 차가운 표면의 맥주 캔이 손가락에 닿았다 떨어진다.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선 성규가 찡긋, 눈짓하고는 쓰레기통 위로 맥주 캔을 떨어뜨렸다. 성규가 룸을 나서자마자, 우현은 비식 웃음을 터뜨렸다. 타이밍 좋게도, 제가 방에서 나오자마자 방금 제 옆으로 지나친 무리가 룸으로 들어간다. 원체 몸에 냄새가 배는 것을 싫어하는 성규지만, 여전히 제 주변을 맴도는 머스크 향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Bloody Romance
  W.DKN





  C.



  술잔에 담긴 술이 노랗다. 센치하게 혼자 술을 따르고 있으려니 괜히 저 자신이 처량하게만 느껴졌다. 같이 술 먹을 사람 하나 없어서 혼자 마신다니. 우현은 회의감이 들었다. 스무 살,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아버지 밑으로 기어들어가 경영수업을 받고, 스물세 살, 부사장직으로 들어가 낙하산 소리나 들으며 제 몫 하나 차지하고. 그 흔한, 추억 하나 없는 삶을 꿋꿋이 살아가면서도 불만 하나 없던 우현이었다. 그런데 자꾸만, 요즘 들어 우현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툭, 툭 떨궈진 생각들이 이리저리 한데 뭉쳐 지저분한 음식물 쓰레기통마냥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그리고 스물여섯인 지금.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정략결혼이라는, 21세기에 걸맞지 않은 결혼을 하게 되고. 이제는 기정사실이 되어버린, 그러나 여전히 사랑하지도 않는, 생판 처음 보는 여자와 함께 식장에 들어갈 상상을 하면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짜증이 폭발할 듯 속에서만 부글부글 끓었다. 정아에게 모질게 구는 저를 보며 한심하다는 생각도 하긴 했지만, 뒤돌아서면 금세 잊어냈다. 해결방안 대신, 술 따르는 기계처럼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워넣었다.

  


  “…어.”



  결국 얼마 안 가 술이 동났다. 깜깜한 공간에 드문드문 켜져 있는 조명 불이 금방이라도 부딪힐 듯 마구 흔들린다. 몇 시지. 정신없는 와중에도 불현듯 해야할 일이 생각나 고개를 들었다. 손에 잡힐듯 말듯한 핸드폰을 간신히 쥐어잡았다. 아, 늦었네. 자꾸만 말꼬리가 늘어지고 눈이 감겼다. 일단 집에 가야겠다 싶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대리 부르셨죠.”


  차 키를 건네주고, 끌려가는 것마냥 대리운전사의 어깨에 기대어 겨우 차에 올라탄 우현이 아까부터 제 목을 자꾸만 조이는 넥타이를 길게 잡아빼며 시트에 드러누웠다. 깜빡이는 등불빛을 멀거니 바라보던 우현이 손을 들어 제 눈 위로 덮었다. 계산을 마치고 돌아온 대리가 벌컥 문을 열었다. 시트에서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히터의 따뜻한 바람이 우현의 손끝을 녹였다. 금세 안을 후끈하게 메꾼 히터 바람. 비록, 시리게 얼어붙은 마음은 녹여내지 못했지만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던 눈물이 녹아 우현의 손 아래로 비죽 흘러내렸다. 







  

  “사, 사장님!”
  “…무슨 일이야?”



  성규의 표정이 간만에 제대로 구겨졌다. 제발 술 처먹고 클럽에서 싸우지들 좀 말라고 사정사정해도 원 들어처먹질 않으니. 쿵, 소리를 내며 열린 문에, 우진이 건넸을것이 분명한, 달걀을 시퍼렇게 멍이 든 피부에 살살 굴리고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섰다.



  “당신, 경찰이야?”
  “아니요. 전 이 가게 사장인데요.”
  “아 경찰 부르라니까 뭐하는 거야!! 당장 경찰 불러!”
  

  아, 근데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또 서로 잡아먹으려는 남자를 말없이 떼어 낸 성규가 주먹으로 벽을 세게 내리쳤다. 여기는 내 가게고, 엄연한 영업장입니다. 당신들끼리 지지든 볶든, 그건 니네들이 할 일이시구요. 



  “무거운 엉덩이 그만 떼 내시고, 둘이 직접 경찰서로 가시라구요.”




  “왜 싸운 건데?”
  “화장실에서 싸움이 붙었나 봅니다.”


  피곤한 기색의 성규가 우진에게 나가보라는 손짓을 하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룸 밖으로 시끄럽게 흘러들어오는 음악 소리에 정신이 집중되지 못하고 자꾸만 둥둥 떠다녔다. 정리하고 있던 장부를 소리 나게 턱, 덮어 둔 성규가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붉은색 벽지 위로 펼쳐진 천장의 무늬를 하나하나 세어보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관두었다. 요새 들어 자꾸만 저도 모르게 누군가를 찾게 된다. 그 꼬맹이.


  ‘나 안 넘어가. 꼬시지 마.’


  그 이후로 우현은 단 한 번도 제 가게에 찾아오지 않았다. 벌써 몇 주 전이 되어버려, 그저 옛날 얘기하듯 늘어놓자니 조금은 자신이 안쓰러워 보여 그만두었다. 새벽 두 시 반. 쉴 새 없이 째깍 이는 초침이 빗겨 지나간 시침을, 앞으로 마구 돌려 서둘러 마감 타임으로 맞춰놓고 싶었다. 아니면 반대로 뒤로 마구 돌려 이주 전 그날, 그 시간으로. 



  ‘나한테 관심 있어요?’



  그 꼬맹이 앞에 서 있던 그 시간으로. 



푸흐, 웃음이 터졌다. 주책이다, 나이 먹어서 그런가 봐. 




_Say 

예고했던 대로 조금 늦었어요 ㅠㅠ... 
아마 다음편도 조금은 늦게 오지 않을까.. 싶네요 ㅠㅠ
댓글 달아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립니다! :D 완결까지 같이가요! 약속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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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고라니 암호닉 신청하구 신알신이요!!
13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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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KN
감사합니다 ! 자주뵈요 고라니님 ^ㅠ^
13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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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2
안녕하세여 새벽입니다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아유ㅠㅠㅜㅜㅜㅜ더 그리워해라 ㅜㅠㅠㅠㅠㅠㅠㅠ 잘읽구가여ㅠㅠㅠㅠㅠ
13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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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KN
감사합니다~ ㅎㅎㅎ 다음편에 뵈요!
13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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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3
아 진짜 글잡에서 연재하는게 너무 아까워요...ㅠㅠ 성우가 마이너가 아니였다면 진짜 대박일 픽인데.. 너무 잘 읽고가요. 다음편도 기대할게요!
13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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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KN
안그래두 갠홈 곧 열리는데 거기서도 연재하려고 해요! 아까울정도라니 감개무량하네요 ㅠㅠ.. 성우는 사랑이죠S2 감사합니다~ ㅎㅎ
13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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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4
1편에 방금 암호닉 신청하고 온 욤입니다. 글 분위기가 너무 좋아요ㅠㅠ 잘 읽고가요! 다음편 기다리고 있을께요~
13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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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KN
다음편에서도 뵈요 ^-^!
13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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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5
가문 제 마음에 성우라는 단비가 내리다니ㅠㅠㅠ 신알신하고 암호닉 신청하구갈게여 제시예요~♥
13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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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KN
저에겐 제시님이 남겨주신 단비같은 댓글이 내렸네요!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ㅎㅎ
13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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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6
디올이예요 으으으유ㅠㅠ 정말 좋아하는 장르ㅠㅠㅠ 거기다 배경이 바인ㅠㅠ
13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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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KN
바 얘기 좋아하시나봐요~? ㅋㅋ 저는 그런 얘기 매우 좋아합니다 ㅋㅋ 그래서 제가 도전 해본건데.. 어떤가요 ㅠ? 괜찮은가요?
13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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