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닥타닥, 빛 하나 없는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일정한 키보드 소리 뿐이었다. 그 키보드 소리의 주인공은 동그란 안경을 코 끝에 걸친 앳된 얼굴을 한 남자였다. 어엿한 남성이라 보기엔 어딘가 소년의 느낌이 강했고, 그렇다고 어린 소년으로 치부하기엔 얼굴 곳곳을 차지하고 있는 굵은 선들과 붉은 입술 사이에 살짝 걸터 있는 담배가 이를 부정하고 있었다. 몇 시간 째 일정히 울리던 키보드 소리가 멈춤과 동시에 남자의 입에 물려있던 담배 끝이 타들어가며 하얀 연기를 내뿜었다.
내내 노트북 화면을 향하던 남자의 시선은 조그마한 책상에서 엎드린 채 고르게 숨을 내쉬는 여자에게로 향했다. 남자는 입가에 있던 담배를 자신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 끼운 뒤, 여자의 얼굴을 잔뜩 가려버린 검은 머리칼을 살짝 걷어내었다. 곱게 잠든 여자의 눈이 미세하게 떨리다 이내 까만 동공을 드러냈다. 제 까만 도화지에 남자의 부스스한 모습이 담기자 여자는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입가에 굳은 침 자국을 닦아냈다.
"ㅈ,저 언제부터 잤어요?"
"시계 보세요."
남자의 높낮이 없는 목소리에 여자의 시선은 급히 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짧은 침이 2를 넘어가고 있었으며 그 옆을 차지하고 있는 작은 창문 너머로 훔쳐 본 하늘은 새까만 페인트로 덮은 듯한 모양새였다. 어림잡아도 4시간은 넘게 잠들었을 제 모습이 부끄러워 여자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실없는 말을 내뱉었다.
"하, 하하..2시가 글쓰기엔 가장 좋은 시간이죠..그렇죠 작가님?"
"사람마다 다르겠죠."
남자는 여전히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여자는 그런 반응이 익숙한지 별 서운한 티 없이 탁자 가장자리에 놓여 있던 재떨이를 끌어 와 남자의 앞에 두었다. 남자는 손끝에 걸린 담배를 재떨이 위로 두 어 번 털었다. 수북이 쌓인 담뱃재 위로 또 한 꼬집의 재가 올랐다. 여자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작가님, 제가 신경 쓸 일은 아닌데 담배 하루에 몇 개비 피세요?"
"신경 쓸 일 아닌 거 알면 굳이 물어볼 필요 있어요?"
"아니, 그래도 우리 안 지 꽤 됐고 앞으로도 계속 볼 텐 데 그렇게 야박하게 구실 필..죄송합니다."
남자의 차가운 눈초리가 여자를 향하자 불만을 터놓던 여자의 입술이 거짓말처럼 꾹 다물어졌다. 남자는 잔뜩 굳은 채 제 눈치를 보는 여자를 잠시 응시하다 피식하며 바람 빠진 웃음을 내보였다.
"한 갑 정도요."
"헐, 한 갑이요? 작가님 그러다 건강, 아 아니다. 잠시만요."
여자의 손이 바쁘게 제 가방을 뒤적이다 꺼내든 것은 다름 아닌 딸기 우유 맛의 막대 사탕이었다. 저와 닮은 사탕을 조심스레 남자에게 건네는 모습이 퍽이나 사랑스럽다고 느낄 만 했으나 당사자는 별 감흥이 없는 듯 보였다. 그저 점점 짧아지고 있는 담배를 도로 입에 물며 턱을 괼 뿐이었다.
"담배 대신 이거 드세요."
"저 단 거 별로 안 좋아하는,"
"에이, 그래도 담배보단 낫죠. 이거 효과 좋으면 저희 집에 있는 통 들고 올게요."
"됐습니다."
"네."
단호한 남자의 목소리는 변함이 없었고 여자의 튀어나온 입술은 들어갈 기미가 없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런 여자를 달래줄 법도 한데 남자는 정반대의 대우를 보였다. 여자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필터 부분까지 타 들어간 담배를 재떨이에 문질러 버리곤 도로 키보드 위에 하얀 손을 올렸다. 전보단 조금 늦어진 속도의 타자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흐트러진 자세를 고쳐 앉으며 남자의 자태를 바라보았다.
"작가님, 어느 정도 쓰셨어요?"
"아직 절정도 못 갔어요."
"마감일 얼마 안 남았는데.."
"아니까 조용히 좀 있어요. 거슬려."
남자는 무슨 벌레 따위를 치우듯 대충 손을 내저었다.
"가요."
"에? 저요?"
"그럼 내가 나갈까요? 여기 제 집인데."
"아, 네, 그렇죠. 제가 가야죠. 내일 봬요!"
여자가 황급히 제 짐을 챙긴 후, 현관으로 향해 방 안의 남자에게 들릴 만 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리는 남자의 대답 대신 쾅- 하는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뿐이었다.
"아오, 저 싸가지 없는 새끼 진짜."
여자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지며 옅은 욕이 튀어나왔다. 지잉 지잉-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여자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자는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ㅇㅇ야, 원고 받았어?
-받았으면 전화 드렸겠죠...
-아니, 황작가 혹시 마감일이 언젠지 모른대? 너 못 받아오면 나도 너도 끝이야, 끝.
-저도 알아요.
-거의 다 마무리 된 건 맞지?
-아뇨. 천재 작가님 아직 절정도 못 쓰셨답니다- 아 진짜 선배, 저 언제까지 여기로 출근해야 돼요?
-..절정도? 망했네. 언제 까지긴, 원고 받을 때까지지. ㅇㅇ야, 삼일 뒤야, 삼일. 그 때까지 못 받아오면..알지?
-...네, 알다마다요. 끊어요, 저 진짜 피곤해서 죽을 것 같아요.
-꼭 받아와야 된다!
ㅇㅇ는 제게 닦달을 해오는 동영보다 한 발 빠르게 전화를 끊어냈다. 몇 달 째 원고 하나를 받아내려 회사가 아닌 담당 작가의 집으로 출근을 하면서도 아무런 진전 없이 윗사람들에게 치이고 있는 제 모습이 애잔한 ㅇㅇ였다. ㅇㅇ는 불 꺼진 오피스텔 복도의 계단에 풀썩 주저앉아 제 통화기록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름 석 자를 괜히 노려보았다.
황인준. 천재 소설 작가. 21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천재적인 구성력과 그 특유의 나른하면서도 직설적인 문체는 21세기 문학계를 충격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그의 주 종목은 공포 소설. 귀신 따위의 공포가 아닌 사람의 정신적 공포를 극대화 시키는 소설이었다. 현실 사회의 비판을 적절히 잘 녹여낸 그의 소설은 냈다하면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했고 모든 상이란 상은 다 휩쓸었다. 더불어 신이 내린 재능에 얼굴 또한 반반하게 생겨 여성 독자 층 까지 끌어들이며 그의 소설은 전 세대를 아우르는 소설로 이름을 날렸다. 오죽하면 그가 소설을 출판하는 년도엔 다른 작가들이 일부러 책을 내지 않는다는 속설까지 떠돌 정도의 파급력이 큰 작가이자 소년이었다.
ㅇㅇ는 그의 프로필을 머릿속으로 쭉 읊어가다 이내 포기하곤 고개를 푹 숙여버리고 말았다. 머리카락이 땅에 끌렸지만 몇 달 째 인준의 싸가지를 받아내고 있는 ㅇㅇ에겐 그런 것을 신경 쓸 정신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겨우 생각을 정리하며 한숨을 푹 내쉬자마자 주머니에 던져 놓았던 휴대폰이 지잉지잉- 소리를 내며 수신을 알렸다. 끊은 지 얼마나 됐다고 금세 울리는 휴대폰에 ㅇㅇ는 한숨을 푹 내쉬며 수신자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통화버튼을 눌러 속사포로 짜증을 쏟아냈다.
-아, 좀! 방금 통화했잖아요! 원고를 내가 써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작가가 덜 썼다는데 어떡하라고요! 저라고 몇 달 내내 여기로 출근해서 그 싸가지 받아주는 게 좋은 줄 알아요?
-....
-동영 선배, 전화를 했으면 말을 해..헐, 작가님.
-싸가지 좀 더 받아 주셔야 할 것 같은 데요.
-넵. 갑니다.
그 전화의 발신자는 다름 아닌 인준이었다. 일정한 톤의 목소리에 ㅇㅇ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걸음을 빨리했다. 내가 이 짓을 하려고 피나는 노력을 해서 출판사를 들어온 건가. 동갑인 저 자식은 천재적인 재능 하나로 남 부려먹으면서 잘만 사는데, 나는 그저 저 자식의 말 한 마디에 새벽 2시에도 그의 집으로 향해야하는 을 중의 을이었다. ㅇㅇ는 절로 나오는 한숨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인준의 집 도어락을 해제했다. 삐리릭-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ㅇㅇ는 애써 입 꼬리를 당기며 그가 있을 서재로 향했다.
"작가님..?"
"들어와요."
살금살금 서재 안으로 향하자 동그란 안경을 추켜올리며 인상을 쓰고 있는 인준이 ㅇㅇ를 맞았다. 사실, 반겼다기엔 무리가 있는 성의 없는 대꾸였지만 ㅇㅇ는 이미 익숙해져버린 그의 태도에 별 다른 불만 없이 그의 옆으로 향했다. ㅇㅇ가 제 지정석에 앉자 인준은 타자를 멈추곤 느릿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는 그녀였다. 이어 그녀를 바라보던 인준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ㅇㅇ씨, 연애 해 본 적 있죠?"
"연애요? 있기야 있죠. 그건 갑자기 왜..?
"..."
"..."
꿀떡. ㅇㅇ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그럼 키스 해 본 적, 있겠네요."
"네? 키스요?"
예상외의 질문에 ㅇㅇ의 눈이 두 배 가량 커져 인준을 바라보았다. 연애 경험을 묻는 건 그렇다 쳐도, 난데없는 키스 경험을 묻는 질문이라니.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질문이었지만 왠지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 싸가지 없는 태도가 배가 되어 돌아올 것 같아 ㅇㅇ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느릿하게 답했다.
"..있죠."
"무슨 느낌입니까."
"예?"
도저히 예상을 할 수 없는 인준이였다. ㅇㅇ는 입을 떡 벌리며 인준에게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어깨를 으쓱이며 하품을 하는 태도뿐이었다. 부스스한 인준의 여유로움에 ㅇㅇ는 홀린 듯 입을 다물었다. 잠시의 정적이 흘렀을까, 듣기 좋은 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냥, 몽글몽글 할 때도 있었고. 분위기에 취해서 흥분될 때도 있었고. 상황에 따라 다르죠."
"많이 해봤나 봐요?"
인준의 안경 너머의 미간이 살짝 주름져 ㅇㅇ를 응시했다. 옅게 깔린 어둠 덕에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눈치 채지 못 할 정도의 찌푸림인지라 그 누구도 알지 못 했다. 그 공간엔 인준과 ㅇㅇ. 둘 뿐이었으니. ㅇㅇ는 자신을 발랑 까진 여자로 보는 건가 싶어 괜히 발끈하며 인준을 대했다.
"별로 안 많거든요! 제가 아무데나 쪽쪽거리고 다니는 줄 아시나."
"그거야 나랑 상관된 이야기는 아니니 별 관심 없는데요."
"..네, 그렇네요. 근데 그건 갑자기 왜요? 이번 작품엔 키스신도 있는 거예요?"
"네, 뭐."
"와, 작가님 글에도 봄기운이 실리긴 하는구나. 맨날 다 죽이고 싸이코만 만드시더니."
"..."
"죄송합니다."
인준의 나른한 눈빛은 어딘가 모르게 남의 기를 팍 죽여 놓는 특성이 있었다. ㅇㅇ 또한 다를 바는 없었다. 제 아무리 몇 개월을 인준의 집으로 출근하며 친분을 쌓았다지만 그건 지극히 일방적인 ㅇㅇ의 입장일 뿐이었고, 통 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인준의 입장은 도무지 알 방법이 없었다. 결론적으로 그의 눈빛에 기가 꺾이는 것은 지나가다 그를 마주한 어린 아이나 몇 달 째 봐온 ㅇㅇ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오늘도 여전히 기가 꺾여버린 ㅇㅇ의 급한 사과 후, 인준의 서재는 그 어떤 소리도 이어지지 않았다. 겨우 들리는 것이라곤 두 사람의 일정한 숨소리 뿐.
그 고요함 속에서 유난히 빛난 것은 인준의 나른함이었다.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턱을 괸 채 안경 너머로 ㅇㅇ를 깊이 담아내는 나른함은 나로 하여금 발가벗은 듯한 느낌을 주었다. 제 치부까지 싹 다 들켜버린 것만 같은 느낌에 ㅇㅇ가 슬쩍 시선을 돌리자 고요함을 깨뜨려버리는 소리가 울렸다.
드르륵- 인준의 푹신한 의자가 끌리는 소리였다. 예상에 없던 움직임에 둘의 거리는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져 ㅇㅇ는 들이 마시던 숨도 꾹 참은 채 인준의 농염한 시선을 받아냈다. 야하다. 그 단어 외엔 그의 눈빛과 서재의 분위기를 설명할 수 없었다.
"..ㅇ,왜 그렇게 보세요."
"..."
당황해 횡설수설 하고 있는 ㅇㅇ를 바라보던 진득한 시선이 태세를 바꾸어 바라보았다. 이번엔 미칠 듯이 달았다. 나른함과 달달함이 더해지자 세상 그 어느 것보다 달았고, 그 시선은 ㅇㅇ를 향해있었다. 마치 연인을 바라보듯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눈빛을 지닌 인준이 홀린 듯 저를 바라보고 있는 ㅇㅇ의 뒷목을 슬며시 잡아 가까이 마주했다. 곧 입술이 맞닿아도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 할 정도의 달달한 끈적함이었다.
위험하다. ㅇㅇ의 머리는 상황의 심각성을 알리며 뜯어말리고 있었지만 마음은 정 반대의 태도였다. 제 이성과 본능이 적대감을 이루며 장벽을 치며 뜸을 들이고 있자 인준은 제 의자를 조금 더 가까이 당겼다. ㅇㅇ의 동그란 눈이 슬며시 감겼다 팍하며 뜨였다. 이성의 승리였다.
"ㅈ, 저 가볼게요! 원고, 그, 최대한 빨리 보내주세요."
ㅇㅇ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급히 짐을 챙겨 뛰쳐나왔다. 도망치듯 뛰쳐나온 ㅇㅇ는 오피스텔 앞 공원 벤치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온 몸의 힘이 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미쳤다, 미친 게 분명해. 키스를 안 해 본 것도 아니고, 방금 전과 같은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와 있는 내내 그에게 말려드는 제 인생이었지만 방금은 말리고도 남아 푹 젖어버린 수준이었다. 고개를 들어 둥근 달을 쳐다보아도 그저 인준의 눈빛만이 아른거리는 밤이었다.
같은 시각, 인준의 서재. 한 남자가 홀린 듯 여자가 사라진 방문을 바라보다 이내 의자에 편히 기대며 고개를 젖혔다. 저를 꼭 닮은 하얀 천장에 가까이서 마주했던 ㅇㅇ의 숨결이 저절로 그려졌다. 눈을 비비고 여러 번 깜빡여보아도 별 소용은 없었다.
"미쳤지."
인준은 부스스한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바람 빠진 웃음을 내보였다. 계속해서 그려지는 그녀의 모습에 쉽사리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
이튿날, ㅇㅇ의 출근지는 인준의 집이 아닌 출판사였다. 두 시간 쯤 전부터 그에게서 연락이 오고 있었지만 ㅇㅇ는 일절 무시한 채 7층 사무실로 향했다. 도저히 그를 멀쩡할 정신으로 대할 자신이 없었다며 애써 합리화를 시킨 후, 열린 엘리베이터 문 틈 사이로 빠져나가 곧장 동영을 찾아냈다. 예상치 못 한 감정의 변화 덕에 혼란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후배는 새까맣게 잊었는지 웃으며 모닝 커피를 즐기고 있는 동영에 ㅇㅇ는 괜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이에 슬슬 올라오는 열을 겨우 식혀내며 동영에게로 향했다.
"선배."
"어? 뭐야, 너 왜 여기 있어? 원고 받아 온 거야?"
"아니요. 선배, 저 진짜 황작가 담당 못 하겠어요. 차라리 그냥 여기서 복사나 하면 안 될까요? 제발요, 진짜."
"갑자기 뭐라는 거야. 이틀만 더 고생하면 되잖아. 응? 회사에 너 말고 황작가 성격 감당해낼 사람 없는 거 잘 알면서 그런다."
"아니 그게 아니라..아, 진짜 못 하겠어요. 이틀만 고생하면 되니까 선배가 대신 가주시면 안 돼요?"
"응, 안 돼요."
애걸복걸하는 ㅇㅇ의 모습에도 동영은 이를 칼같이 거절해냈다. 이미 인준을 한 번 거쳤기에 자동적으로 나오는 반응이었다. 많이 힘들어 보이는 ㅇㅇ에 잠시 흔들리기도 했지만 인준의 담당 시절, 개고생하던 제 모습이 떠오르자마자 그녀의 부탁을 급히 끊어냈다. 힘이 쭉 빠져 넓은 테이블에 엎어져버린 ㅇㅇ를 지켜보던 또 다른 선배인 윤오가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왜, 황작가가 이상한 짓이라도 했어? 왜 이렇게 싫어해. 싸가지는 없어도 그 정도로 싫어할 만큼은 아니던데."
"네?!"
"뭐야, 생각 없이 말한 건데. 진짜야?"
"아니요. 절대 아니요! 아, 그냥 그 싸가지 받아주기 힘들어서 그러죠. 저도 한계라는 게 있는데 황작가 싸가지는 한계가 없더라구요. 맨날 물 가져와라, 커피 가져와라, 담배 사와라, 조용히 해라, 거슬린다. 참나, 진짜 내가 무슨 가정부도 아니,"
찔리기라도 한 것인지 ㅇㅇ의 입은 모터라도 달린 듯 재빠르게 인준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그런 ㅇㅇ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다 중간 쯤 갔을 땐 예능 프로라도 보듯 흥미롭게 바라보던 두 선배의 눈동자가 눈에 뜨이게 흔들렸지만 이미 입이 터진 ㅇㅇ의 눈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야, 야. ㅇㅇㅇ."
"ㅇㅇ야, 그만. 그만."
동영과 윤오의 목소리가 급히 이어졌다.
"아, 왜요. 진짜 선배가 안 겪어 보셔서 그래요. 물이나 커피 떠다주면 먹지도 않고 결국 미지근 해져서 다 버리질 않나, 담배 냄새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 담배나 뻑뻑 태우고, 진짜 "
"내가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야 되나요?"
"네?"
평소의 후줄근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검은 수트와 깔끔하게 올린 머리에 그의 냉소적인 모습은 배로 더해진 인준이었다. 더불어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동그란 안경과 높낮이 없는 목소리를 한 채 삐딱하게 기대어 ㅇㅇ를ㅈ노려보고 있는 그의 모습은 잘못이 없는 동영과 윤오에게 까지 왠지 모를 공포감을 주었다. ㅇㅇ는 새하얘진 머릿속을 애써 색을 입히며 억지미소를 지어보였다.
"아, 하하..작가님..여기까진 무슨 일로,"
"휴대폰은 왜 들고 다닙니까?"
"..어, 그, 시계 용도?"
"..."
"출판사 직원이라는 사람이 작가 연락도 다 씹고, 출근도 안 하고, 저랑 일 하기 싫으신가 봐요?"
"아니요. 그럴 리가요! 회사에 뭐 두고 온 게 생각나서 들렀다 가려고 했는..데...죄송합니다."
"알면 나와요."
"넵."
애써 변명을 해 보았지만 결국 찍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시무룩해져 인준의 빠른 발걸음을 쫓아가는 ㅇㅇ의 뒷모습이 꽤나 애잔했다. 을 중의 을,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동영과 윤오의 입 꼬리 또한 축 내려앉았다.
***
그렇게 다시 익숙한 인준의 서재에 눌러 앉은 둘은 각자 자신의 지정석에서 제 할 일 만을 충실히 해냈다. 물론 ㅇㅇ는 제 할 일 보단 인준의 눈치를 살피는 일에 더욱 몰두했지만 인준은 제 옆에 무언가가 있는지조차 까먹은 듯 빠르게 타자를 쳐내려갔다. 이는 그가 집중할 때 나오는 버릇이기도 했지만, 고민거리가 많을 때 나오는 버릇이기도 했다.
인준의 머릿속엔 아까 전 출판사에서 신명나게 제 뒷담화를 하던 ㅇㅇ의 모습과 어제 밤, 꽤 예뻐 보였던 ㅇㅇ의 모습이 겹쳐져 가득했다. 내가 그렇게 싸가지 없게 굴었나. 이 마음이 계속해서 맴도는 중이었다.
반면, 이를 알 리 없는 ㅇㅇ의 눈길은 제 앞에 놓인 종이 뭉치 한 번, 글이 잘 풀리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린 인준 한 번. 수없이 왔다 갔다 하다 정착한 곳은 인준이었다.
안경 너머로 슬쩍 보이는 쌍커풀이 예쁘게 진 눈, 글 쓴다고 집 안에만 박혀 있어서인지 여자인 저보다 고와보이는 피부, 그러나 마냥 예쁘기만 하지 않는 느낌에 한 몫 한 굵직한 선. 객관적으로 보아도 열에 열은 잘생겼다라는 찬사를 내뱉을만한 얼굴이었다. 성격이 좀 더러워서 그렇지, 얼굴로만 본다면 ㅇㅇ를 포함한 대부분의 여자가 한 눈에 반했을 것이 분명했다. ㅇㅇ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감상하고 있자니 또 다시 어제 밤, 저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떠올라 급히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심장은 제 속도를 찾지 못한 채 빠르게 뛰고 있었다. 좋아하기라도 하는 건 가, 뭘까. 혼란스러웠다.
몇 시간 째 일정히 울리던 키보드 소리가 멈추자 ㅇㅇ의 신경은 급히 곤두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노트북 화면에 고정되어있었다.
"뭐 가져다 드릴까요? 아님 어디 불편한 데라,
"ㅇㅇ씨."
"네?"
"내가 그렇게 싸가지 없이 굴었어요?"
정말 예상 밖의 질문만 툭툭 던지는 인준이었다. 이에 익숙지 못한 ㅇㅇ는 저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오다 겨우 이성을 잡아 대답을 해내기 마련이었다. 이번도 다를 바는 없었다. ㅇㅇ는 멍하니 고개를 두 어 번 끄덕이다 급히 내저으며 말했다.
"네, 아니요? 작가님보다 훨씬 예민하신 분들이 얼마나 많으신데요. 전혀요."
손까지 내저으며 횡설수설하는 ㅇㅇ의 모습을 흘깃 바라본 인준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번지다 그녀가 눈치 채기 직전에 도로 제자리를 찾았다. 인준은 여전히 커서가 깜빡거리는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툭 내뱉었다.
"원래 성격이 이래요."
"네?"
"남 좋은 말 못 하고, 내 뜻대로 안 되면 짜증내고, 내가 봐도 싸가지 없어 보이는데 남들이 보기엔 오죽하겠어요."
덤덤히 들려오는 인준의 목소리엔 어딘가 쓸쓸함이 묻어나왔다. 이를 눈치 채지 못할 리 없는 ㅇㅇ의 입 꼬리가 축 가라앉았다. 크고 멀게만 보였던 남자의 어깨가 유난히 작아보였다. 지금 ㅇㅇ의 눈에 비치는 황인준이라는 사람은 천재 작가, 냉철한 남성 등 그를 수식하는 다양한 단어들이 아닌 그저 싸가지 없는 모습 뒤로 자신의 수많은 상처들과 본질을 감추어버린 소년 같았다.
"..그래도 ㅇㅇ씨한테는 안 그러려고 노력 중이니까, 너무 상처 받진 마요."
"..."
"남 좋은 말 보다 더 못 하는 게 나 때문에 상처 받은 사람 달래주는 거니까."
인준의 시선이 입술을 앙 다문 ㅇㅇ에게로 향했다. 미안해 할 것은 저인데 오히려 자신이 더욱 큰 죄라도 지은 듯 울상을 하고 있는 그녀에 인준의 입 꼬리는 옅은 호선을 그려냈다. 저도 모르게 그린 그림이었다. ㅇㅇ는 처음으로 마주한 그의 미소에 머리가 띵해졌다. 이어 열이 오르고 양 볼이 잔뜩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져 고개를 푹 숙이며 가려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무래도, 그라는 깊이 우려낸 술독에 취해버린 듯 싶었다. ㅇㅇ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스며들고 있었음을 그제야 눈치 챌 수 있었다. 좋아하나 봐, 아니. 좋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어쩌면 꽤 오래 전 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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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망한 것 같군요 울고 싶네요 으앙 인준이 마냥 까칠하기만 한 게 아니라 상처도 있고 연애 경험 별로 없어서 키스 느낌도 잘 모르고 은근 스윗한 면도 있는 캐릭터 쓰고 싶었는데...망했어..망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