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은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겨울이었다. 입시 학원에 등록한 뒤 처음으로 학원 건물 앞에 발을 디뎠던 날. 지금 들어갈까 말까, 괜한 떨림과 어색함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던 때에 다가온 너는, 불쑥 내 앞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며 내게 물었다.
“혹시 청록학원 다녀요?”
“…아.”
예쁘게 쌍꺼풀 진 네 두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하얗고 말갛다고 생각했다. 눈 쌓인 겨울 풍경들과 함께여서 더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부끄럽지만 그 순간 너에게 한눈에 반해버렸던 것 같기도 하다.
“어… 음… 아. 아닌가? 실례했습니다.”
꽤 오랫동안 대답이 이어지지 않자, 가볍게 고개를 숙인 너는 네 등짝 만한 커다란 검정색 가방을 고쳐 메고 먼저 학원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것이 너와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그 날의 네 모습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낡지도 빛바래지도 않는 필름 영화를 재생시키는 것처럼, 아주 또렷하게 말이다.
비행운
“이번 전교 1등도 전정국각이라며?”
“어. 민해주가 국어에서 좀 미끄러졌다더라. 세 개 틀렸대.”
“와. 국어 난이도 완전 헬이었잖아. 세 개만 틀리는 게 가능해?”
“불가능할 게 뭐 있어. 전정국은 다 맞았다는데.”
“와, 진짜 미쳤다. 이 정도면 걔넨 그냥 완전 다른 세계 사람 아니냐.”
전정국과 해주는 시험기간만 되면 아이들의 화두로 떠올랐다. 학생 대표와 부대표로 나란히 입학했고, 입학 후 처음으로 치른 시험에서 나란히 전교 1등과 2등을 차지한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이번 시험 난 진짜 쳐망했다.”
“나도.”
“아이, 니들은 떡볶이 먹으러 가는데 왜 우울한 얘기를 하고들 그러냐. 중요한 건 수능이지~ 수능~”
“와… 이연지 얘 진짜 미쳤나 봐. 야, 이제 1학년 1학기 기말고사 끝났거든? 벌써부터 내신 포기했냐?”
“난 너의 그 멘탈이 존경스럽다, 연지야.”
“그래, 나는 지금 내신이고 뭐고 떡볶이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구.”
몸을 베베 꼬며 행복함을 표현하는 연지에 아이들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그런 연지가 유쾌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친구들처럼 크게 웃지는 못했다. 오늘 가채점을 마친 수학 점수가 자꾸만 머릿속을 떠다녔다. 65점…. 청록학원 심화반을 듣고 있는 같은 학교 아이들 중 수학 시험은 내가 제일 못 본 것 같다. 저번 중간고사 때도 그랬는데… 에휴. 나도 모르게 푹,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여주찡. 왜 한숨이야?”
“무엄하도다. 떡볶이를 먹으러 가는 길에 한숨을 쉬다니.”
소은이가 묻자 연지가 재빠르게 소은이의 말을 받아쳤다. 친구들이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여전히 마음 편히 웃지 못했다.
“저… 미안한데, 나 떡볶이 먹으러 못 갈 것 같아.“
나는 걸음을 멈춰선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들 또한 걸음을 멈추고 내 쪽을 바라보았다.
“왜?“
“헐. 왜? 혹시 다른 약속 있어?“
“…나 저기, 학원 가 봐야 해서.“
떡볶이 가게와 다른 방향인 길목 쪽을 가리키며 머뭇머뭇 대답했다. 아쉬움이 묻어나는 친구들의 표정에 괜히 미안해졌다.
“역시 대단해, 우리 여주찡… 역시 반 4등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아, 여주~ 떡볶이 조금만이라도 먹고 가면 좋을 텐데…“
“아…. 그게, 내가 늦으면 안 돼서. 미안해, 다음에 꼭 같이 놀자!“
가장 중요한 수학 시험을 망치는 바람에 한시라도 빨리 가야 한다고, 투정 아닌 투정도 부려보고 싶었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도 전교에서 나름 중상위 정도는 하는 성적이었으니까. 내 기준으로 절대 잘하는 건 아닌데, 친구들 기준으로는 정말 잘한 거라서… 애들끼리 성적 얘기를 꺼낼 땐 나 혼자 괜히 조심스러워졌다.
“응응 여주야! 다음엔 꼭 같이 놀자!“
“여주 열심히 해! 다음 학기엔 꼭 전교 1등해라!!!!“
“여주 파이팅! 다음주 월요일에 봐~“
“응! 다들 떡볶이 맛있게 먹어!”
나와는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친구들을 향해 세차게 손을 흔들어 준 뒤, 버스 정류장을 향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학원 방향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데에는 6분 정도가 걸렸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치마 주머니 속에 넣어둔 휴대폰과 이어폰을 꺼냈다. 이어폰을 휴대폰에 연결하고, 귀에 꽂았다. 그런데 막상 노래를 틀자니 딱히 듣고 싶은 노래가 없었다.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노래를 틀지 않고 하복 주머니 안에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이어폰도 빼 버릴까 생각했지만, 별로 거치적거리지도 않아서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기분이 좋지 않다. 나는 분명히 수학에 온 힘을 쏟아부었다. 영어와 국어, 그리고 미술 시험을 보기 전 날에도 수학 문제를 풀었고 공식을 외웠다. 중간고사 때보다 더 열심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성적은 제자리 걸음이었다. 그래, 정확히 따지자면 딱 3점 올랐다. 중간고사 때보다 난도가 높아진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쏟아부은 노력과 그에 상응하는 기대에는 한참 못 미치는 성적이었다.
“무슨 내가 성인도 아니고,“
우리 엄마야 뭐 괜찮다고, 네가 더 노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값진 결과라고 말씀하시겠지만,
현실적으로 나의 경쟁자는 과거의 나 자신이 아니라, 오늘을 달리고 있는 우리 학교 학생들을 비롯한 전국에 있는 수험생들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경쟁하기에는, 수학이라는 과목에서 경쟁력이 너무나도 밀렸다.
아무리 다른 과목 시험을 잘 보더라도, 수학이 정말 깔끔하고 더럽게 죽을 쒀 주니 평균 등급에 아주 지대한 영향을 미쳐버리는 것이다.
아오. 이 망할 놈의 수학 자식. 헤유… 어유…. 앓는 듯한 한숨소리를 연달아 내뱉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면 학원 가는 버스가 바로 왔으면 좋겠다. 버스를 타면 며칠 전에 벅스에서 왕창 다운 받은 뉴에이지들을 들을 거다. 지쳐버린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
“와 이 독한 자식 보소. 어떻게 고등학생이 전과목에서 딱 하나 틀릴 수 있냐? 아니 뭔, 무슨 중학생이여 뭐여?“
그렇게 별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며 터벅터벅 길을 걷고 있는데, 가까운 놀이터 쪽에서 굵직하고 커다란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과목에서 하나 틀렸다고? 혹시 전정국 얘기하는 건가? 뭘 더 생각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고개가 틀어졌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다.
그리고 정말,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발견할 수 있었다.
…전정국, 진짜 전정국이었다. 전정국은 놀이터 정자에 앉아 놀이터 바깥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니, 뭔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러니까, 내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그 새 시력이 안 좋아졌나. 착각이겠지. 착각일 게 분명한데도 괜히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오. 진짜 나 미쳤나 보다. 전정국 쟤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고작 눈 한번 마주쳤다고 심장이 뛰니, 왜!
아니지, 아니다. 지금 전정국은 나를 보고 있는지, 보고 있지 않은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다. …아니. 확실한 것 같기도 한데, 분명히 날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그러니까…
“진짜 전정국 너 딱 기다려. 내가 2학기 땐 꼭 너 꺾고 만다.“
그대로 정신머리를 빼 먹을 뻔한 순간, 귀여운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전정국의 한 쪽 팔을 자연스럽게 잡아채는 하얗고 작은 두 손도 시야에 들어찼다. 전정국의 팔을 꼭 붙들고 있는 작은 손을 따라 시선이 옮겨갔다. 해주였다. 뭐지. 전교 1등과 2등의 정모 현장이었던 건가. 낄 생각도 없었지만 나 같은 건 끼워주지도 않을 것 같은 모임이었다.
어깨에 멘 가방끈을 양 손으로 꼭 쥔 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내 걸음이 이 곳에 멎어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와. 나 진짜 바보 같다. 어떻게 내가 걸음을 멈춘 채로 아주 가만히- 서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을까.
터벅터벅, 멈춰 있던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어째 아까보다 발걸음이 더 무거워진 것 같다. 일부러 더 발걸음을 재촉했다
“야, 전정국! 무시하냐? 비웃어?“
“저런 것이 전교 1등의 여유인 거지.“
길을 걷는 도중 간간이 해주와 누군지 모를 남자 아이의 목소리도 들렸다. 놀이터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목소리들이 점점 희미해졌다. 야속하게도 전정국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게 왜 야속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야속했다.
전정국.
잘생겼고, 귀엽고, 성격도 좋고, 공부도 잘 하고, 친구도 많고, 축구도 잘 하고… 그냥 가질 수 있는 좋은 건 다 가진 애였다. 아미고등학교 내의 연예인 같은 존재랄까.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마도 그런 걔를, 동경한다. 인정하기 부끄럽지만 그런 것 같다.
그래도 걔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그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쭉쭉, 걷다보니 어느덧 삼거리가 나왔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어 걸음을 재촉했다. 버스 정류장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 무리들이 눈에 띄었다. 버스 정류장에 거의 다다랐을즈음 11번 버스가 도착했다. 아이들이 우르르 줄 지어서 11번 버스에 탑승했다. 덕분에 버스 정류장 의자 자리가 텅텅 비었다. 나는 달려가듯 빠른 걸음으로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안착했다.
노래 들을 거다. 우울한 노래 왕창 들을 거다.
휴대폰을 꺼내 뮤직 어플을 켰다. ‘좋아하는 노래’ 폴더로 들어가서 셔플 재생을 눌렀다. 에픽하이의 우산이라는 곡이 흘러 나왔다. …왠지 지금은 이 노래를 들을 기분이 아니다. 다음 곡으로 넘어가야지. 검지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 찰나, 누군가의 손이 불쑥 내 손목을 붙들었다. 뭐야, 누구지? 휴대폰 쪽으로 숙이고 있던 고개를 훽 들었다.
“…아.“
“…….“
…전정국이었다.
…나, 방금, 심장이 떨어진 것 같다.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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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나름 열심히..ㅠㅠ) 썼던 글인데.. 묵혀두고 싶지 않아서 올립니다!ㅎㅎ 아마도 다음편은 없을 것 같아요..! 먼저 우리는 친구일까를 연재해야 하니까요 하하하!!
아!! 그리고 우리는 친구일까 2편에 댓글 달아주신 분들 ㅠㅠㅠㅠ혹시 보고 계실진 모르겠지만!!! 정말정말 감사합니다ㅜㅜㅜㅜㅜ 과연 읽어주시는 분들이 있을까 했는데ㅜㅜㅜㅜㅜ 진짜 행복했어요ㅜㅜㅜㅜㅜ♣♧♣♧ㅠㅠㅠㅠ 우리는 친구일까 다음편은 이번 달 안으로... 올리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근데 못 올릴 수도 있어요...시험기간이라서...크흡 그래도 노력해 볼게요ㅜㅜㅜㅜㅜ
모두 행복한 일주일 보내세요! 파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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