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오/지코]안녕 병신아.
04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처럼 밝았던 지호의 얼굴에 수심이 깊었다. 이미 잠에서 다 깨어났음에도 불구하고 10분만 이라며 엄마에게 잠투정을 부린것은 물론이고, 맛있는 아침밥을 깨작이며 밥알을 세다가 태운에게 뒤통수를 맞는 수모를 겪었다.
왠지 모를 억울한 마음에 학교에 안가겠다고 꼬장을 부리다가 결국엔 대문 밖으로 쫒겨나기까지. 이모든 일들은 20분 만에 일어난 일이고 이젠 피할 수 조차 없다.
그토록 마주하기 싫었던 지훈을.
*
아오 썅, 뭘쳐다봐. 단체로 동물원왔냐? 누구보다 학교에 일찍 도착해 다리를 꼬고 폰을 보고있던 지훈의 묵직한 한마디에 지훈을 신기하게 쳐다보던 반아이들이 급하게 시선을 치웠다.
정말 이건 조선일보 헤드라인에실어도 모자랄 기사건이었다. 시선이 급집중되는 것은 당연한것이고 있을수도 없는 큰일이었다.
경이 코끝에 걸쳐있던 안경을 쓱올리며 헤 벌렸던 입을 닫았다. 고개를 좌우로 몇번흔드니 충격이좀 가시는 것 같기도했다. 말도안되. 표지훈의 정상적인 등교라니.
앞문이 드르륵 열리고, 누구보다 축 쳐진 어깨를 하고 있는 지호의 등장에 지훈이 자리에서 벌떡일어나 허헝거리며 바보같이 웃었다.
" 안녕, 지호야. 잘잤어? "
" 난 뭐, 그냥 그렇지. "
" 오늘따라 다크서클이 더 내려온것같아. 어제 잘못잤구나. "
너 같으면 잘잤겠냐!! 라고 소리쳐주고 싶은 마음은 가슴속 깊숙이 묻어둔 지호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아홉시에 침대에 누웠건만 다음날 지훈을 볼 생각을 하니 1시간도 못자고 새벽하늘만 쳐다보며 신세 한탄을 했더랬다.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무거운 시련을 주시나이까. 제발 이 어린양을 지옥불 속에서 구원 해주소서. 기도를 끝마치니 4시. 그나마 양을 세서 그런지 쪽잠이라도 잘 수 있었다.
그런 빡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웃는 낯으로 자신에게 인사하는 표지훈이라니.
미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이게다!! 김성규 씹새끼! 옆옆분단에서 룰루랄라 노래를 들으며 어깨춤까지 추고있는 성규를 한번 째려본 지호가 심호흡을 한번 하고 가라앉은 마음으로 교과서를 펴 눈으로 읽어나갔다. 우와, 넌 아침시간에도 공부해? 쩌네. 전교 일등하는 이유가 다있어.
옅은 노란색머리카락을 긁적이며 가까이 다가와 지호가 읽고있던 교과서 글씨에 손가락을대고 설설 훑어대는 지훈. 갑자기 훅하고 끼쳐오는 섬유유연제 냄새에 지호가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생긴건 담배만 주구장창 펴서 냄새에 찌들어있게 생겨서는. 지호가 어깨로 슬쩍 지훈을 밀었다. 잠, 잠깐만. 이것 좀 읽을게. 그러자 지훈이 멋적게 크흥 하고 웃었다.
" 나 교과서 깜빡하고 집에 놓고 왔는데 같이 보자. "
사물함에 잘 있는 교과서에게는 미안하지도 않은지 새빨간거짓말을 술술 잘도 밷어내는 지훈이었다.
미심쩍었지만 말없이 교과서를 옆으로 밀어준 지호. 지훈이 씩웃으며 지호의 옆으로 슬금슬금 붙었고, 수업에 집중하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가까이서 담아 낼 수 있었다. 지호야. 야동에 찌든 나의 더러운 눈동자로 널 쳐다봐도 되는걸까. 하는 은근한 죄책감.
찹쌀떡처럼 하얀얼굴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데도 트러블이 하나도 없는 피부. 한번 만지면 스르르 녹아서 없어질것만 같았다. 상체를 모로 세워서 팔에 기대어 올려보는 얼굴도 가히 환상적이었다. 아, 시발.진짜 미쳐버리겠다.
입을 반쯤벌리고 자신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지훈을 티안나게 살짝 내려다본 지호가 살풋이 웃음을 터뜨렸다. 눈에서는 레이져가 나올것같았고 벌름거리는 콧구멍은 500원 짜리 동전이 들어갈 것 같았다.
"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
자신의 볼을 어루만지며 눈을 몇번 깜빡이는 지호를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지훈이 얼른 상체를 일으켜 아무것도 묻혀있지 않은 지호의 입술옆을 엄지손가락으로 스윽 문질렀다.
통통하고 부드러운 볼살이 쓸려가는 느낌에 하도 두근두근 뛰어대서 손가락에 심장이 들어간줄알았다. 아, 묻어있었는데 뭔지는 모르겠다. 한쪽손을 가만 두지 못하는 지훈. 죽 찢어진 눈을 아래로 깔았다가 동그랗게 올려뜨는 지호의 사소한 행동에도 돌아버릴것만 같았다.
이대로가다간 나무아미타불 불상이 될것같아, 뭔가 획기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지호와 자신의 관계를 급진전 시켜줄 그런.
*
밥도 먹었겠다 배도 부른데 오랜만에 산책이나 하자는 경이의 권유로 운동장 돌기 시작. 자신이 시작한 일에 한바퀴도 못돌고 힘들다며 주저 앉아 버리는 경 때문에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우연치 않게 농구 코트에서 공을 쥐락 펴락하며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는 지훈이 지호의 눈에 띄었다. 분명 여러명이 하고 있는데 왜 표지훈만 보이는지, 패딩 색이 튀어서 그런가.. 땀때문에 햇빛에 반사되서 그런지 빛이 좀 나는것 같기도 하고.. 자신과 같은 쪽을 바라보고있는 경을 툭툭 친 지호가 턱을 괴던 손을 때고 중얼거렸다.
" 내 짝꿍말이야, 생각한것처럼 그다지 나쁜애는 아닌 것 같아. "
" 돈뜯고! 담배피고! 싸우러다는게! 안나쁜거냐? 어? 정신차려 미친놈아. "
" 적어도 나한테는 안그러던데. "
" 아씨, 너 걔랑 어울릴거면 나한테 말도 걸지마. 무서워죽겠다. 진짜. "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냈지만 끝까지 농담으로 받아치는 경을 지호가 한껏 째려봤다. 그러자 권이 벤치에 앉아있는 경이와 지호의 사이를 파고들며 깐죽였다. 헐, 지호야 너 그놈 한테 걸렸어? 인생 망했네. 끝났네 끝났어.
지훈의 불러서는 안될 이름의 볼드모트라도 되는지 하나같이 다 그놈 아니면 걔라며 수식어를 칭했다. 그게 마음에 안들어서 미간을 살짝 좁힌 지호가 니네 들이 몰라서 그러는데 표지훈이 좀 착하다니까? 하며 버럭.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니에 빨대를 끼워넣고 음료수만 쭉쭉 빨아올리던 경이 앞에 드리운 그림자를 흘끗 올려봤다. 그러자 안그래도 큰 눈이 소눈알처럼 몇배는 커져서 입안에 있던 음료수를 뿜었다. 시발 좆망.
입모양으로 짧게 욕을 내뱉고서 권의 옷자락을 억지로 끌어당겨 학교를 향해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던 권이의 얼굴도 경악으로 물들었다. 설마, 제발. 누가 좀 아니라고 말해줘요. 지호가 바닥을 내려보던 눈을 질끈감았다.
" 좀 착한게 아니라 많이 착한거지. 그정도면 "
" ... ... ... "
" 고개 들어봐봐. 얼굴 좀 보게. "
이런 개같은 놈에 우연. 호랑이도 제말하면 찾아온다더니 옛말이 다 맞는 말이였다. 은근히 쫄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고개를 든 지호의 앞엔 농구공을 옆구리에 끼워넣고 가쁜숨을 내리쉬는 지훈이 있었다.
게임 중간에 나온건지 뒤에선 지훈의 친구들이 굵직한 목소리로 야야 거리며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고, 정작 본인은 그걸 신경 쓰지 않는듯 했다.
피식 피식, 뭐가 그리 웃긴지 셀셀 거리는 지훈을 멍하니 쳐다보던 지호의 시선이 점점 내려와 운동장 바닥에 안착했다. 이 모든것이 꿈이기를 바라며 허벅지를 꼬집어봤지만 억소리나게 따끔거릴 뿐, 변하는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 농구하는거 보러온거? 지호의 동글거리는 뒤통수를 보니 절로 웃음이 나는 지훈이었다. 힘들텐데, 이거라도 먹어. 민망함에 옆자리를 더듬거리다 권이 놓고간 포카리스웨트를 높이 쳐들고 웅얼 웅얼거리는 지호.
못알아 들은건지 못알아들은 척을 하는건지, 어떠한 행동도 대답도 없는 지훈 때문에 뭐지? 하고 지호가 살짝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꽤나 진지하게 자신을 내려다보고있는 지훈이 보였고 끼고있던 농구공은 언제 떨어졌는지 모래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내가 뭐, 잘못했나. 자신감 있게 번쩍 들었던 포카리스웨트도 스르르 내려와 지호의 무릎에 닿았다.
" 나 주는 거야? 졸라 감동 받았어. 눈물날라그런다. 씨바 진짜, 내가. 너. "
지훈의 따뜻한 손이 차가운 포카리와 지호의 손을 덮었다. 진짜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 금방이라도 툭툭 흘러내릴것 같은 모습이었다. 니가 막 나때문에 울어서..싫어하는 줄알고..
덩치는 산만해서 포카리는 손에서 놓지않고 한쪽손으로만 눈물을 닦아내는 꼴이 웃겼으리만도 한데 착해 빠진 지호는 안절부절을 못했다.
일어서긴 했지만 어떻게 해야할지몰라 아랫입술만 꾹 물었고, 음료수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훌쩍거리며 두팔을 벌려오는 지훈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폭 안겼다. 진짜 미안, 솔직히 무서워서 그랬는데. 너 정말 착한애같다. 울지마. 응?
한쪽 팔로는 지호의 목을, 반대쪽 팔로는 가는 허리를 꼭 껴안은 지훈의 눈이 반짝 빛났고 눈물은 이미 쏙 들어간지오래. 입꼬리가 씩 올라간건 영원히 지호만 모를 비밀이었다.
1,2,3,화 암호닉 정리와 작가의 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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