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파의 증거
W. 청설
1-1
상처입지 않도록 두꺼운 갑옷을 입거나 피부를 탄탄하게 하면 통증은 줄지만, 그만큼 감수성은 날카로움을 잃어
젊을 때와 같은 싱싱하고 신선한 눈으로 세계를 볼 수 없게 된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무라카미 하루키.
1-2
한 아이가 전학을 왔다. 갈색과 검은색 그 어딘가의, 어쩌면 검은색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색을 띄는 머리와 눈동자는 사람의 호기심을 묘하게 자극시켜다. 그것도 잠시, 무어라 말하곤 꾸벅 인사한다. 아마 자기소개였을거다. 역시나 나는 그것을 들을 수 없다. 이어 선생의 손짓과 동시에 제 뒤로 걸어온다. 주변을 돌아보니 제 옆과 뒤로 자리가 비어있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응어리가 지는 듯 했다.
아이는 단정하니 봄이지만 더운 바람이 부는 오늘에도 단추를 맨 끝까지 잠궈 그 위로 넥타이를 하고 있었다. 물론 더운 바람 사이에서도 덥지 않은 바람이 간간히 불어와 학생과 선생의 얼굴을 간질게 스쳤다. 그래도 저렇게 교복을 정석적으로 입는 것은 탄소 주변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탄소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선생의 얼굴이 밝다. 앞으로 저 아이가 받을 차별의 애정은 달고 또 달겠지. 호기심이 더욱 거세져으나 다시 잠재웠다.
여자 아이들의 시선이 전학생을 집요하게 따랐다. 설렌다는 얼굴들이 퍽이나 웃겼다. 이미 속으로는 자기 각자만의 망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테다. 그에 걸맞게 말갛게 달아오른 두볼이 영락없는 여고생임을 자각시켰다. 암만 저들끼리 수준 낮은 대화를 해도 사랑 앞에선 한없이 작아지나보지. 시선을 돌렸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 솔직히 부러웠다.
시선을 돌리다 문득 올린 곳에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했던 분위기와 맞닿았다.
눈썹이 일렁이고 뱀 같은 두 눈이 가늘어진다.
짧은 찰나였다. 서로의 눈들은 자리를 찾아갔다.
툭툭. 탄소의 어깨를 치는 미세한 손길에 몸을 틀었다. 크게 움직인 탓에 그 아이의 책상이 뒤로 밀렸다. 아예 틀거라곤 예상을 못 한건지 눈을 크게 떠보인다. 그리곤 입을 달싹이며 눈이 휘어진다. 패이는 보조개가 유순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긴 눈이 꼭 뱀 같으면서도 초승달 같았다. 부드러우면서도 어딘가 날카롭다는 말이다. 그것이 불쾌해 인상을 찌푸렸다. 안녕. 안녕 다음으로 분명 이름 비슷한 것을 말한 것 같은데. 애석하게도 탄소는 그 다음부터 읽지 못했다. 두터운 입술이 두루뭉실하게 움직이는 탓이다. 아이들과 다를 것 없이 얘도 발음은 그닥 좋지 않구나. 그래서인지 읽기가 싫었다. 그럼에도 미안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저 제게 쏠린 여자 아이들의 질투 어린 시선들을 받기 싫다는 생각 뿐, 반응이 없는 탄소 때문인지 새카만 머리칼을 만진다. 여전히 시선은 아이의 입에 고정한 채 어눌함을 뱉어냈다. 일종의 결계고 경계였다.
겁쟁이라 놀려도 할 말은 없다. 겁쟁이가 맞아서 아니라고 반박할 수가 없음으로.
사실을 부정하는 것만큼 비참한 순간은 없다.
"나 말하는 거 싫어해."
"아. 그럼,"
"시키는 것도, 듣는 것도 싫어."
쏘아붙이는 내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입술을 말아문다. 뱀같던 눈이 축 처진다. 틀었던 몸을 바로했다. 1교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는지 하나 둘씩 자리에 가 앉는다. 교실 분위기가 잠잠해졌다. 얕은 수면 위를 표현한다면 이렇겠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중년의 남성에게 고개를 숙였다. 탄소의 시간의 척도는 그렇게 알아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주변에서 일어나면 이동 수업이겠거니, 주변에서 손을 잡고 나가면 점심시간이겠거니.
책을 뒤적이는 손은 수전증이 있는 듯 달달 떨린다. 저기에도 소리는 존재할까? 저도 따라 교과서를 꺼냈다. …몇 쪽이지. 시선을 힐끔였다. 다행히 시력은 좋은 탓에 맞는 쪽수를 찾을 수 있었다.
필통을 뒤적이는 사이 제 책상 끄트머리에 올라온 작은 종이가 눈에 띄었다. 짜증스레 종이를 펼쳤다.
'김남준. 이거 내 이름이야.'
펼치기 무색하게 바닥으로 내던졌다. 정갈한 글씨체가 저의 화를 더욱 북돋았다. 전혀 그 필체에 악의는 없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냥, 그냥 화가 났다. 동정이 아닌 호의를, 호의가 아닌 호감을 알지도 배우지도 못하는 저는, 사회에서 퇴출 당해야 마땅한 아이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정신 병원에 영원히 고립되어 살아도 되는 아이일지도. 생각에 잠기기 직전 다시 쪽지가 던져졌다.
'점심 같이 먹을래?'
싫어. 대충 휘갈겨 쓴 답을 김남준이라는 아이의 책상에 신경질적으로 올렸다. 더이상 엮이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제 인생사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로 인해 복잡해지고 싶지 않았다.
쪽지는 1교시가 끝나고 점심시간 직전이 되어도 오지 않았다.
01. 무음[無音]
소리가 없음. 또는 소리가 나지 않음.
1-3
마지막으로 국까지 식판에 받아 자리에 앉았다. 뼈대가 약해 아리는 손목을 주무르다 수저를 들었다. 반찬으로 나온 콩나물을 뒤적이다 재빨리 입에 집어넣었다. 얼른 먹고 가자. 체를 하는 한이 있어도 5분이면 급식실을 나왔다. 그러기 위해 적게 받는 탓도 있었지만 시선이 쏠리고 무언가를 속삭이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정도로 탄소는 유순하지 못했다. 콩나물에선 걸레 빤 맛이 풍겼다. 젓가락을 옮겨 그 옆의 고기를 집었다.
밥을 크게 떴다. 입으로 가져가려 할 때, 눈의 여백 사이로 식판 하나가 제 앞에 앉는 것이 보였다. 남준이었다. 자리는 내 앞에 아니더라도 많은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남준은 젓가락을 놀린다. 여전히 핸드폰은 손에 쥔 채로. 뭐지? 알 수 없는 불쾌감과 수치심이 탄소를 감싸고 돌았다. 가지런히 모으고 있던 손을 내려다보다 아이의 식판을 두들겼다. 서슬퍼런 촉감의 진동이 손톱을 타고 올라와 소름이 끼쳤다. 국을 뜨던 숟가락이 멈칫하고 밥알을 세던 눈이 옮겨져 저를 쳐다본다.
"너 나 동정하니?"
수화를 하려던 손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내가 제대로 말하는 게 맞을까? 그런 생각은 터무니없을 정도였다. 탄소의 말은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그에게 튀었을 것이다. 동정. 뱀 같던 눈이 토끼가 되는 순간이었다. 고개를 젓는다. 그럼. 되물었다. 시선을 옆으로 옮겨 탄소 뒤에 걸린 잉어 그림을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인다.
기분이 더러워 잔반을 모을 생각도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튕겨지듯 벌어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식판을 아무렇게나 던지듯 내려놓고 급식실을 빠져나갔다. 손에서 냄새나는 물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동정'이라는 단어가 지배해버린 탄소의 머릿속에서 그 작은 사소함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화가 났다. 동정이 아니라면 제게 아니라고 말하면 될 터였다. 그러나 그는 어땠는가. 어깨만 으쓱이고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래서 새학기가 싫은건데. 턱이 으스러져도 좋을 정도로 어금니를 악물었다.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은 누군가가 미웠다.
1-4
오후 수업은 하나도 듣지 않았다. 정확히는 선생들의 귀찮음으로 새학기의 첫수업이라는 일념 하에 아이들을 풀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책이라도 읽을까 싶었지만 가방은 텅 비어 필통만 이리저리 치이고 있었다. 불쌍한 것. 이어폰이라도 가져왔으면 덜 민망하지 않았을까란 생각에 탄소는 옆 아이의 이어폰을 뺏을까, 잠깐 망설였다.
'나 이어폰 있는데.
같이 듣는다고 하면 빌려줄게.'
참으로 거슬리는 애다. 흘끗 쳐다보니 검은색 이어폰을 손에 쥐고 흔든다. 더불어 자신의 핸드폰도. 더운 바람이 머리칼을 간질였다. 손을 내밀자 이어폰 한 쪽을 얹는다. 곧장 귀에 쑤셔 넣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내려놓는다. 고개를 수그리고서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아무 느낌도 나지 않는게 답답했지만 그래도 무언가 하나에 집중하고 있다는 묘한 모순이 일었다.
아이들이 일어나 자신의 친구들에게로 다가간다. 시계를 쳐다보니 앞에 있어야 하는 선생은 이미 나간지 오래로 보였고 그를 알리는 시침과 분침은 각각 2와 10을 가리키고 있었다. 늦지 않게 도서관에 들려 책을 빌려와야겠다고 생각한 탄소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어폰을 뺐다. 기대에 찬 눈빛으로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마냥 탄소를 올려다 보고 있는 남준과 눈이 마주쳤다. 멈칫. 속입술을 깨물다 책상에 올려둔 핸드폰을 교복 안으로 밀어넣었다. 따라 의자를 밀어넣었다.
"¨고마워. 이어폰."
"다음에 또 빌려줄게."
서툰 고마움에 응하는 남준은 부드러웠다. 긴 머리칼로 얼굴을 가리며 서둘러 교실을 빠져나갔다. 오전의 여자아이들과 같이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은 말간 분홍빛을 띄고 있었다.
---------
암호닉을 신청해주신 감사한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정말 너무 감사드립니다.
분량은 최대한 마른 걸레를 짜듯 제 뇌도 그렇게 짜낼게요.
제 글을 독방에서 추천해주신 독자분이 계셨는데
부끄럽고...좋고...묘하네요.
댓글도 너무 간지러워서 토나와요. 좋다는 표현입니다.
그럼 좋은 주말 보내세요.
저는 망할 시험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