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인생에서 열 아홉번째로 맞는 여름이었다. 고 3 이라는 무게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평소 같았으면 에어컨이 빵빵한 박지훈네 집에서 만화책이나 읽으며 아이스크림을 축내겠지만 내겐 양심이란 게 있었다. 이번엔 진짜 맨날 갈거야... 올해 들어 서른 다섯번째 하는 다짐과 함께 독서실을 새로 끊었다. 물론 제 2의 자아, 박지훈도 함께였다. 박지훈은 나보다 좀 더 공부를 잘 했다. 나는 암기과목을 빨리 익혀서 벼락치기를 잘 했고, 걔는 하여간 남자라 그런지 뭔지 수학을 좀 잘했다. 그리고 원체 부지런한 성격이라 시험기간이면 죽상을 하고 탐구과목도 파고... 그래서 나보다 시험을 항상 좀 잘봤다. ... 조금 더 잘하는거다... 아무튼 그랬다.
박지훈은 원래 집에서 공부를 하는 편이고 잠도 많아서 내가 아무리 같이 다니자고 꼬셔도 망부석같이 굴었었는데, 이번엔 같이 다녔다. 왜냐면 독서실에 갔던 첫 날, 새벽 한 시에 집으로 돌아오던 내 뒤를 누가 따라왔거든. 진짜로 내 착각이 아니라 골목길을 아무리 틀어도 발자국소리가 멎질 않았다. 집에는 엄마밖에 없고, 괜히 엄마도 휘말릴까봐 박지훈한테 전화를 걸었다. 원래 10시면 비몽사몽하던 앤데 내 전화에 단박에 나왔다. 잠옷은...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어쨌든 그 날은 좀 고마웠으니까. 그래서 독서실도 같이 다녔다. 박지훈은 캔커피 두 캔을 먹고 열두시까지 겨우 버티다가 2시까지 날 기다리며 숙면을 취했고, 집에는 나란히 투닥거리며 가는 일상이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쳐서 독서실에 아랫층 편의점에 매일 들렀는데, 문득 떠올랐다.
" 아, 나 이제 여기 안 와."
" 도미노."
" 뭐."
" 니가 일주일 내로 여기 한번도 안오면 내가 피자 삼."
이 새끼가.
" 아, 됐고 나 진짜 안 와. 나 이제 6시 이후로 아무것도 안 먹을거야. 나 뭐 먹으면 때려."
" 그거 작년 11월 23일에 포기한 다이어트?"
" 포기 아니라고... 성공했다고..."
" 1키로라도 빠지면 성공이긴 하지. 근데 왜?"
" 왜! 라! 니!"
오늘 문득 플래너를 뒤적거리다가 기억났다. 딱 일주일 후에 있을 동아리 MT. 안그래도 여름이라 옷도 짧은데... 바다 가면 수영복도 입어야 되고... 돈과 시간을 들여 만든 내 뱃살을 학깅이한테 보여줄 순 없었다.
" 피자내기는 유효."
... 챙길 건 챙겨야지.
" 어? 안녕, 지훈아! 웬일이야?"
" 남이사."
둘의 대면은 나조차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상큼한 학년이의 인사를 깔끔히 맞받아친 박지훈에 골이 울렸다. 지훈아, 왜 이래. 어금니를 꽉 물고 옷깃과 멱살 중간 쯤을 잡아 끌었다. 나보다 키가 한 뼘 정도 큰 박지훈을 눈높이까지 끌어내려 귓가에 속삭였다.
' 미친 새끼야. 돌았냐? 우리 학깅이한테 시비걸지마.'
' 너나 옷 똑바로 입어. 바지가 왜이렇게 짧아.'
' 남이사.'
내 당당한 대답에 박지훈이 골아프단 듯 인상을 찌푸리고 고갤 모로 저었다. 고속버스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며 성화인 후배들 곁으로 다가갔다. 1박 2일인데 짐이 한가득이었다.
" 언니, 근데 어떻게 된 거예요?"
" 뭐가?"
" 원래 댄스부는 단합대회 안 갔잖아요."
그러니까 이 씨발!
속에서만 외치는 아우성을 꾹꾹 눌러담았다. 어쩌겠어. 댄스부 부장이랑 신문부 부장이 부랄친구인게 문제지. 고속버스 예매할때도 옆에서 꼬박꼬박 챙겨보면서 지가 갈 것도 아닌데 우등이 좋네, 어쩌네 하더니. 이렇게 완전 일정이 겹쳐버릴 줄은 몰랐지. 박지훈 개 짜증나는 새끼... 방학 시작도 전부터 오조 오억번 찔러보던게 이런 꿍꿍이 일줄은 몰랐다.
" 저 새낀 믿을게 못 돼."
" 네?"
" 아냐. 차에 타자. 짐 다 실었어?"
어쨌거나 대외적으로는 유능하고 친절한 동아리 부장이었기에 일단 참았다. 이건 도미노가 문제가 아니다. 이건 진짜 초밥뷔페급이다... 후...
-
" 어디까지 똑같으시려고?"
" 언제는 제 2의 자아라서 무조건 같이 붙어다녀야 된다며."
" 그건 치킨 먹을때고, 씨벌."
택시를 타고 숙소에 와서도 박지훈네 동아리는 함께였다. 여기가 제일 싸고, 가격대비 시설도 좋고, 어쩌구 하는 박지훈의 조동이를 세게 때리고 싶었다. 당연하지, 내가 삼일 내내 고심해서 정한 숙손데. 말을 섞을수록 기분이 잡치는 것 같아서 관뒀다.
" 얘들아, 짐 대충 풀고 옷 갈아입고 바다 먼저 나가자."
" 얘들아, 들었지?"
따라하지 말라고... 쪼리 차림인 박지훈의 발을 지그시 밟고 나서야 기분이 좀 나아졌다. 방은 남자 여자 따로 잡았다. 바로 바다에서 놀 생각이라 다들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야심차게 캐리어를 뒤져 내가 다이어트를 시작한 이유인 수영복을 꺼냈다. 이 존예템을 사기 위해 꿍쳐놨던 비상금을 털었다. 살도 빼고...
" 언니, 진짜 고삼 맞아요? 살이 이렇게 하나도 없어요?"
일주일 내내 굶다시피 했다고 말하긴 뭐해서 허허 웃어 넘겼다. 내가 이거 하나 입으려다가 골로 갈 뻔 했잖아... 계단을 내려가다 빈혈이 와 구를 뻔 했던 건 기억 한구석에 처박기로 했다. 나름 부장이라고 책임감이 돌아서 난장판인 방을 좀 정리하고 나오자, 이미 애들은 해변으로 나가 있었다. 저만치 날아가있는 슬리퍼를 찾아 신으며 나오자, 웬수같은 놈을 또 마주쳤다.
" ... 결국 그거 샀냐?"
" 이응. 너는 피자나 사셈. 나 편의점 안 갔으니까."
찝찝한 얼굴로 힐끔힐끔 내 쪽을 바라보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이걸 살 때부터 못마땅한 모양새긴 했다. 그걸 꼭 사야겠냐고 다섯 번 정도 되묻다가 나한테 멱살잡이를 당했더랬지. 사흘전의 기억을 되살리며 딴청을 부렸다. 해변가에 가까워지자 사람이 박시글해졌다. 딱히 걸음을 맞춰 걷는 편은 아니라 내가 두 발자국 정도 앞서 나가고 있었는데 박지훈이 내 손목을 딱 붙들었다.
" 아, 진짜. 이럴 줄 알았어."
하면서 훌훌 자신의 흰 티를 벗어 내게 던졌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멀뚱히 서있자 귓바퀴의 붉은 농도가 짙어졌다. 또 복숭아.
" 그거라도 입어. 너 그거 입고는 사람들 쳐다보는거 신경쓰여서 제대로 놀지도 못 해."
괜히 시선도 못 마주치고 우물쭈물거리는게 괜히 내가 다 민망했다. 평소라면 아무도 안 보는데 뭔 상관이냐고 지랄했을텐데 약간 기류가 이상하게 흘러서 씨알도 안 먹힐 소리는 관두기로 했다. 사람들 시선이 신경쓰이는 건 맞았으니까. 뻘쭘하게 티에 팔부터 끼우자 뒤에서 학년이 목소리가 들렸다.
" 부장! 뭐 마실래?"
" 아니, 너나 마셔라."
엌. 박지훈이 멋대로 대답하며 나를 제 뒤로 잡아끈 덕에 휘청했다. 모래밭에 얼굴을 묻을뻔했다... 티를 다 껴입고 나서야 괜찮다는 싸인을 보냈다. 학년이는 까만 민소매 차림이었다. 뒷모습이 사라질때까지 헤실거리며 보고 있다가 박지훈의 어깨죽지를 꾹꾹 눌렀다.
" 학년이 팔근육 대박... 얼굴은 애긴데..."
" ... 나는?"
" 너 뭐."
그제야 얘가 맨살이란걸 알아차렸다. 헐? 니 세간살이 다 싸왔네. 하다하다 빨래판도 챙겼냐? 하복 허용기간이 되면서 진작에 단단해진 팔뚝은 눈치챘지만 복근까지 있는줄은 몰랐네. 고작 세 달 차이지만 나름 누나라고, 엄마마음이 들었다. 우리 지훈이... 많이 컸네... 물론 복근을 꾹꾹 눌러보는 건 그냥 사심이었다.
" 아 진짜."
" 왜. 니가 보라며."
" 변태..."
새침하게 유유히 떠나는 뒷모습을 보자니 진짜 개변태치한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어이가 없었다.
... 맞지만.
-
사실 바다 오는 이유는 팔할이 바베큐 파티 아니겠는가. 주어진 시간은 오늘 밤 뿐이었다. 궤짝으로 싸들고 온 삼겹살이니 목살이니 잔뜩 늘어놓고 고기판을 벌였다. 처음엔 남자애들이 집게를 잡았지만, 정말... 드릅게 못 굽길래 못 참고 내가 나섰다. 아, 이런 건 권력맛인데... 나는 왜 부장이 되어서도 이런 궂은 일을 자처하는가. 삼겹살 한 줄을 회생불가로 태워먹은 학년이는 미안하다며 계속 곁을 지켰다. 내가 많이 못 먹었다며 쌈을 싸주는 것마저도 사랑둥이였다. 근데, 학년아.
" 아- 해."
" 내가 먹을게..."
" 장갑꼈잖아. 아-"
쌈이 그렇게 크면... 내가 짝남앞에서 입을 그렇게 크게 벌리고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먹게 해줘, 제발.
" 내가 줄게. 너는 새거 싸와."
또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박지훈이다. 학년이가 테이블쪽으로 사라진 걸 확인하고 나서야 한입에 쌈을 쏙 넣었다. 니네 동아리 애들은 어쩌고. 눈도 안 마주치고 묻자 심드렁하니 대답한다. 술판이야. 하긴 박지훈은 술이니 담배니 질색하긴 하지. 박지훈은 쌈을 크게 하나 더 싸주면서 킬킬 거렸다.
" 고생이 많다, 니가 진짜. 환장하는 고기 코 앞에 두고 못 먹고."
" 니가 그냥 쌈 좀 계속 싸라. 학년이 고기 많이 먹으라고 하고."
" 저거 탄다."
" 땡큐."
박지훈의 만류로 학년이는 쌈셔틀에서 벗어났다. 자유로운 쌈요정 학깅이... 뭐래. 어쨌든 한결 편해진 건 다행이었다.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핑퐁으로 이어나가는 새, 밤이 무르익었다.
다음 일정은 불꽃놀이였다. 애들이 폭죽용만 사와서 약간 시무룩해 있었는데 박지훈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스틱으로 된 불꽃놀이를 사왔다. 역시, 19년 친구 이럴때 써먹는다. 말 안해도 뭘 원하는지 척하면 척이었다. 어릴 때부터 불꽃놀이에 환장하는 날 진즉에 알았다. 열다섯개를 손에 쥐어주고 학년이한테 주지말라고 신신당부였다. 근데 넌 학년이한테만 자꾸 그래? 별 생각없이 물었는데 반응이 거셌다.
" 그, 그냥. 걔가 어? 그 비보잉한다면서 우리 동아리에 들어오지도 않고, 이거 완전 우리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어? 그리고 걘 약간 웃는게 약간 어?"
" 그냥 물어본거야. 왜 이래?"
" 아, … 그냥 니가 오해할까봐."
아. 경쟁의식이었구만. 친구들한테서 뺏었다며 박지훈이 건넨 라이터의 부싯돌을 몇 번 튀겼는데 잘 켜지질 않았다. 켜 줘. 쭈그려서 라이터를 내밀자 걔도 쩔쩔맸다. 여하튼 저런 거랑은 안 맞는 애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불을 붙였다. 치지직 하면서 불꽃이 끝부터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동그랗게도 돌려보고, 별도 그려보고, 세개 쯤 그리니까 꺼졌다. 또 켜 줘. 그렇게 아홉개 정도 태웠다. 우리랑 꽤 멀리 떨어져 있던 다른 애들은 벌써 불꽃놀이를 다 썼는지 숙소로 돌아간 모양이었고, 벌써 밤 열한시 가까이 됐던 터라 주변에 사람도 별로 없었다. 밀물 때인지 파도가 자꾸 내 발끝에 스쳤다. 엉거주춤하게 몸을 뒤로 물리고 새 불꽃놀이를 꺼내들었다. 박지훈은 이제 라이터도 능숙했다.
계속 내 옆에서 하는 양을 바라보기만 하던 박지훈도 내 옆에 나란히 앉았다.
" 예쁘다."
" ... 그러게."
주어를 잃은 말이 바닷바람에 나돌았다. 왜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는지…, 붉어진 얼굴을 들킬까봐 그 애의 시선이 어디 있는지 확인도 할 수 없었다. 열 한개째의 스틱이었다.
" 나 글씨 쓸래. 사진 찍어줘."
약간 가라앉은 분위기를 쇄신시키기 위해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4분할컷으로 설정된 카메라를 넘겼다. 잘 찍어라. 당부하고 첫번째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불꽃놀이로 글씨쓰는 건 내가 이 스틱의 존재를 알게 된 6살 때부터 연마해오던 장기였다. 내 눈이 비장하게 반짝이는 걸 보고 박지훈이 낮게 웃었다. 해 봐.
" ... 이게 뭐야? 지읒 히읗 비읍 시옷?"
찍은 사진을 확인하는 걔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나는 쥐날 것 같은 팔을 주물거리며 조그만한 액정을 확인했다. 사진은 만족스러웠다.
" 지훈병신."
" ... 아오. 진짜 때릴수도 없고."
" 들어가자."
박지훈 놀리는 거 세계최고유잼.
-
물놀이를 하고 한번 샤워는 했지만, 종일 바닷바람을 맞아서 찝찝했다. 온 몸에 소금기가 남은 느낌이었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마지막으로 나오자, 애들이 둥글게 모여서 진실게임을 하고 있었다. 난 별로 남의 일에 관심이 없어서 시큰둥하게 박지훈에게 온 카톡 같은 걸 확인하고 있었는데 애들이 잡아끌었다.
" 언니도 같이 해요!"
" 응?"
얼결에 꼈다. 아, 피곤한데. 뻐근한 뒷목을 돌리며 사이를 비집고 앉았다. 걸리면 나 뭐 물어보냐. 물어볼 거 없는데.
내 생각이 무색하게 게임은 순조로웠다. 자리를 잘 잡았는지, 한 세바퀴쯤은 질문도 답변도 안 했다. 얼마나 비밀이 없는지 술잔은 빌 생각이 없었다. 난 잡소문을 얻었다. 음악 선생님 안준영이 학깅이를 싫어한단 거랑, 박지훈을 경계한단 거랑(왜?), 동아리 차장이 2학년 배진영을 좋아한단 것 정도.
" 어! 언니 걸렸다!"
어. 걸렸네. 박지훈이 아까 보낸 카톡에 답해야되는데. 도미노 피자 뭐 먹을건지 물어봤었다. 내가 뱃살이 없는 게 너무 어색하다면서 빨리 먹이고 싶다나 뭐라나. 애들은 뭐 별거라도 된 양 귓속말로 질문을 토의하기 시작했다. 벌써 새벽 한신데 언제 자.
" 언니... 사귀는 사람 있죠?"
" 응? 아니?"
뭔 소리야. 남자에 조또 관심이 없었다. 내 첫사랑... 초등학교 4학년... 자발적 모솔인뎅.
" 네에???"
" 없다구요?"
" 말도 안돼."
" 그럼 지훈이 오ㅃ, 헉."
지들끼리 난리법석을 치다가 입을 합 다물었다. 응? 박지훈?
" 박지훈이 뭐?"
" 아... 언니 지훈이 오빠랑 사귀는거 아니었어요?"
" … 풉."
애들 얼굴이 진짜 심각해서 비웃을 수가 없었다.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라잌 드라마 여주가 개삽질하면서 메인 남주랑 엇갈린 것 마냥...
" 진짜 아니야."
" ... 그럼요?"
" 걔? 친구지."
" 근데 막... 완전..."
" 아, 뭔 생각해. 진짜 아냐. 걔랑 나랑 19년 알고 지냈어. 걔 그냥 형제나 다름 없다니까?"
" 그럼 언니는 지훈이 오빠한테 사심도 없어요?"
" 그렇다니까 몇번을 말해, 얘넨. 왜 못 믿어?"
나 학년이 좋아해.
의심을 종식시키기 위해 띄운 승부수에 다시 한바탕 뒤집어졌다. 이거슨 라잌 그 드라마 여주가 뜻밖의 서브남주와 엮인 것같은 반응이었다.
" 너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자. 내일 또 못 일어난다."
여전히 멍한 애들을 위해 자리를 파하고 불을 껐다. 애들이 주섬주섬 자리를 펴고 누웠다. 고롱고롱 숨 쉬는 소리가 안정적이어졌을 무렵, 휴대폰을 꺼냈다. 아까 확인한 카톡에 아직도 답을 못해줬다. 부재중이 5건이나 있었다.
윗집 주민
뭐 먹을건데? 오전 12:09
빨리 말해라
ㅃㄹㅃㄹㅃㄹㅃㄹㅃㄹㅃㄹ
ㅃㄹㅃㄹㅃㄹㅃㄹㅃㄹㅃㄹㅃㄹㅃㄹㅃㄹ 오전 12:10
자? 오전 12:31
너 ㅜㅈ학년이랑 있는거 아니지? 오전 12:55
야
전화 ㅏㅂ다
전화 받아 오전 1:05
아니네 미안.
근데 뭐해? 오전 1:29
아직까지 안 자고 뭐 했대. 방금 전까지 이어진 카톡에 혀를 내둘렀다. 원래 10시면 곯아떨어지는 놈이 오래도 버텼다. 학년이 얘긴 왜 나와. 또.
난 너 어디 나간줄. 오전 1:32
ㅇㅋ
비싼 것도 먹네 오전 1:33
알았어. 오전 1:33
여기까지 쓰다 멈칫했다. 이거 왜 말하고 있지, 내가? 근데 지금 짜르는 거 너무 의심스럽고 박지훈이 생각보다 끈기있게 귀찮은 타입이라 끊는 게 더 이상해보일 것 같았다.
? 오전 1:34
혼자 치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킥킥거리는데 박지훈이 말이 없다. 오전 1:37. 칼답이던 애가 2분이나 지났는데 왜 답장을 안하냐. 이거 약간 분위기 이상하게 만드는 그런 멘트였지? 아, 그냥 박지훈한테 쪼여도 말하지 말걸. 아... 병신...
잠드는 순간까지 웃기네, 이 새끼. 이내 화면을 끄고 나도 눈을 감았다. 근데 옆에서 뒤척거리던 차장이 잠꼬대처럼 그랬다.
" 근데 언니이..."
" ... 왜."
" 근데 쌍방은 아니어도... 일방은 확실한 것 같은데..."
" 뭐가."
" 눈빛이 좀..."
말은 거기서 끊겼다. 뭔 뜬구름 잡는 소리야. 일방은 뭐고 쌍방은 뭐지. 기분이 존나 이상했다. 막 구리고 그런 건 아니고... 약간 명치가 간지러운 기분. 온 몸이 폭신폭신한 솜사탕에 갇힌 기분. 말랑말랑하고 단내나는 구름이불을 덮은 기분이었다. 뭐라고 정의내릴 순 없는데.
그 기분을 다음 날 아침 다시 느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전 2:03
미쳤네. 누가 형제랑 사귄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전 2:08
잠든 줄만 알았던 박지훈은 멀쩡히 답을 보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 시간의 텀은 뭐였는지. 걘 무슨 생각으로 답을 보내지 않은건지.
" 왜 얼굴이 썩었냐."
" 아... 밤 샜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밤을 지새운건지. 여하튼 이상한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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