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관찰기 (3)
타이밍의 신은 언제나 그렇듯 내 편이 아니었다. 전정국이 여자친구와 다투었다는 소문이 교내에 쫙 퍼질 때쯤 전정국과 함께 교실로 들어오는 것은 그렇게 좋은 선택이 아니었으니. 다른 반 아이들은 전정국이 교실에 같이 들어왔다는 여자애 얼굴을 보기 위해 창문에 딱 달라붙어 기웃거리기도 했다. 분명 이 오해하기 좋은 상황의 공범인 전정국은 들어오자마자 모든 책임을 나에게 전가시키고 엎드려 자기 바빴다. 학기의 첫날부터 이렇게 유명해지는 건 원하지 않았던 상황이라 곤란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아이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쉽게 사그라들 것 같지도 않다. 내가 원하던, 내가 해오던 학교생활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야, 전정국."
"......"
"전정국!"
"......"
"전정국! 일어나라고!"
"... 아, 왔나."
내 이름을 아는 아이는 모르는 아이에게 알려주고, 모르는 아이는 내 이름을 아는 애가 없냐며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교실 안팎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전정국의 여자친구가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얼굴로 전정국 앞에 딱 버티고 섰기 때문이다. 흥분 때문에 높아진 목소리가 조용한 교실을 카랑카랑 때린다. 꿈쩍도 않고 자는 전정국에 또다시 그를 깨우는 수고로운 짓을 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고 있을 때 전정국이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정리하며 몸을 일으켜 앉는다. 어떻게 보면 나름 심각한 상황인데도 전정국의 풀린 눈이 멋있다며 얼굴을 붉히는 여자애들도 몇몇 있었다. 눈을 몇 번 끔뻑이던 전정국이 곧 울 듯한 여자친구를 보고 놀랐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대형견처럼 안절부절하며 조심스레 눈물을 닦아주는 꼴이 영락없는 애처가다.
"와 그라는데."
"얘가 걔야?"
여자친구는 전정국의 다정한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힐난 가득한 손가락을 내게 겨눈다. 부러 숨죽이던 교실의 공기가 한차례 들썩거리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말로만 듣던 '얘가 걔야?' 의 얘와 걔가 될 줄은 생각도 못한 채로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는 속담을 18년 인생 처음으로 뼈저리게 실감했다. 시선을 정면에 고정하자 들어차는 건 전정국의 너른 등밖에 없었지만 그 등에 대고 열심히 빌었다. 제발 빨리 무슨 대답이라도 해 달라고, 이왕이면 지금 내게 쏠린 이 관심이 순식간에 사그라들 만큼 모두가 만족스러울 수 있는 대답으로.
"걔가 눈데."
"너 쟤랑 같이 들어왔다며. 방금까지 나랑 싸우고도 그러고 싶어?"
"얘랑 아무 사이 아니라고 했잖아."
"아무 사이 아닌데 왜 같이 들어오는데!"
마지막 말 뒤에는 분에 못 이기는 울음소리가 따라붙었다. 전정국은 서럽게 우는 여자친구를 달래 줄 생각도 않고 바라보기만 한다. 여자친구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전정국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간간이 두드러지던 사투리 짙은 억양도 자취를 감췄다. 전정국이 저러는 모습은 처음 본다며 수군대는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이내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울려퍼졌다. 한숨을 몇 번이고 내쉬던 전정국은 결국 여자친구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다정하게 무어라고 속삭인다.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던 여자친구는 아예 전정국의 품에 몸을 맡긴 채 서럽게 울어제끼기 시작한다. 전정국은 귓속말을 멈추지 않은 채 여자친구를 데리고 교실 밖으로 사라졌다. 무대에서 주인공이 사라져 버리자 관객들은 남겨진 엑스트라에게 과도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 엑스트라가 누군지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전정국의 여자친구가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교실에 돌아오며 소문을 일단락시키는 듯 했으나 한 번 불붙은 관심은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하교할 때쯤은 전교생이 내 이름을 모두 알고 있을 정도가 되었으니 이쯤 되면 나를 유명인사로 만들기 위한 전정국의 계획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친구는 전정국과 내가 모두 같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왔다는 말에 뒤로 넘어갔고, 별로 친하지 않다는 말에는 어떻게 안 친해질 수가 있냐며 기함했다. 전정국이 커 오는 걸 지켜보면 무슨 기분인지 내일 자세하게 얘기해 달라는 친구를 뒤로 하고 노을이 비추는 곳만 밟아 걸었다. 은근 관심 없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전정국을 좋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새삼 전정국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느껴졌다. 저 애가 전정국과 내가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어 있다는 걸 안 이상 1년이 순탄하지는 않겠구나.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자 벌써부터 진이 쭉 빠졌다. 축 처진 그림자를 노을이 자꾸만 엿가락처럼 늘였다. 걸음 한 번에 한숨 한 번, 걸음 두 번에는 짜증 두 번.
"여주야."
"......"
"아까는 내가 미안타. 많이 놀랐제."
"... 괜찮아."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마주치는 건 어떤 상황이든 달갑지 않다. 뛰어서 온 모양인지 목소리가 불규칙하게 일렁인다. 전정국이 숨을 몰아쉴 때마다 나도 같이 흔들렸다. 들숨 때는 전정국이 나를 신경 써 줬다는 사실에 흔들렸고, 날숨 때는 제발 신경 좀 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흔들렸고. 할 말 끝났으면 가 보겠다는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아 애꿎은 운동화코만 비벼 댔다. 한 마디만 더 하면 가야지, 한 마디만.
"앞으로 너 곤란할 일 없게 할게."
"......"
"근데 니 어디 쪽으로 가나? 같이 갈래?"
그 한 마디가 너무 질겨서 아플 정도로 잡아 뜯어도 떼어지지 않을 마음의 시작임을 알았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을 것이다.
*
저번 편에 댓글이 많아서 깜짝 놀랐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열심히 쓸게요.
암호닉
[슝아, 침침이, 땅위, 핀아란, 2월2일, 스케치, 금잔화, 물개, 꾸꾸룩, 뉸기찌, 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