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정기 (1)
전정국은 소문을 무색하게 만들기는커녕 더 부채질하기로 작정한 모양인지 집에 가는 내내 말을 붙여댔다. 어색한 공기 사이로 전정국의 질문과 내 단답이 핑퐁처럼 오갔다. 이만하면 그만둘 때도 되었는데 지치지도 않는 모양인지 자꾸만 질문을 던져대는 전정국을 막아내는 것도 힘이 들었다. 전정국과 내가 지나오는 길마다 술렁임이 느껴졌다. 내일 학교에 갈 때쯤이면 그의 여자친구는 물론이고 전교생이 알고 있겠지. 부러 바쁜 척하며 걸음을 빨리 옮겨보기도 했지만 그 때마다 번번이 따라오는 전정국에 핑계를 대고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니는 좋아하는 색깔이 뭐가."
"... 노란색."
"노란색? 완전 병아리다, 병아리."
전정국이 정말 갓 태어난 병아리를 다루듯 내 머리로 손을 옮겨 왔지만 닿기 전에 재빨리 피해 아이들의 의미심장한 시선이 쏟아지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로부터 벗어나니 전정국이 따라 붙었다. 전정국은 의아한 눈을 하고 왜 피하냐고 물어 왔다. 이런 행동을 서슴없이 하니 여자친구는 화가 나고, 여자 아이들은 골키퍼 있어도 골 안 들어가겠냐는 마음으로 덤비는 거겠지.
"... 너 여자친구 있잖아."
"애인 있으면 예쁜 가시나 머리도 못 만지나?"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꼴이 뻔뻔해서 말문이 턱 막혔다.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지. 자고 있던 내 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전정국을 보고 여자친구가 엉엉 울 정도로 서러워했던 것도 이해가 갔다. 다정하고 착한 줄만 알았더니 그냥 지켜야 할 선을 구분 못하는 멍청이였구나.
"너 원래 아무한테나 막 그래?"
"... 어?"
"아무한테나 마음에도 없는 말 막 던지고, 스킨십도 아무렇게나 하고... 왜 그러는 건데."
"......"
"네가 그럴 때마다 너 좋아하는 애들은 거기에 하나 하나 의미 부여하면서 설렐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 여주야."
"그게 다른 애들한테는 먹힐 수 있어도 나는 아니야."
"정여주."
"갑자기 네가 왜 나한테 이러는지도 모르겠고, 학기 초에 이렇게 주목받는 것도 싫어."
이 정도면 알아들었을 거라고 믿을게.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연신 내 이름을 부르는 전정국에게 붙잡힐까 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7년간 전정국과 했던 대화보다 많은 말을 했는데도 친해졌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고, 분명 맞는 말만 했는데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애초에 나랑 엮일 수 있는 부류도 아니었다며 누군가는 해줘야 할 말이었다고 다독였지만 마음 한구석이 가시에 찔린 듯 자꾸만 쓰라렸다. 찔린 줄도 모르고 있다가 누군가가 건드리면 그 때서야 다쳤다고 알게 되는 작고 성가신 가시.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쏟아질 시선들을 감수하고 문을 열었지만 돌아오는 건 습관적으로 확인하는 몇몇 아이들의 눈빛뿐이었다. 전정국은 안경을 코끝에 걸친 채로 휴대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게 더 불안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친구를 붙잡고 물었다.
"어제 무슨 말 같은 거 못 들었어?"
"아니, 무슨 말? 숙제 있었어?"
"... 아냐. 고마워."
이상했다. 분명 나와 전정국이 집에 같이 가는 걸 본 사람만 해도 다섯 명은 넘었었는데 왜 아무 말도 나돌지 않는 걸까. 곁눈질로 전정국을 살펴보니 하트와 사랑해가 난무하는 채팅장을 보며 실실 웃고 있다. 어찌 되었든 귀찮은 소문에 시달릴 일은 덜어진 셈이었고 내가 원하는 대로 순탄하고 조용한 학교 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마냥 기뻐야 했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교과서를 꺼내다가 문득 스친 전정국의 팔이 지나치게 딱딱해서였을까.
"주현아."
"... 응?"
"나 끝나기 십 분 전에 깨워주라."
전정국은 어제 내가 했던 말들을 꽤나 의식하는지 짝꿍 사이에 할 말이나 심지어 저런 사소한 부탁조차도 굳이 옆 분단에 앉은 여자애에게 하기 시작했다. 밀어낸 건 나인데 자꾸만 밀려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고개 돌린 전정국이 내 쪽으로 돌아 엎드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서 붉어진 얼굴로 손부채질을 한다. 겉으로는 온갖 자존심 있는 척은 다 했으면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걸 보니 어지간히 설렘이라는 감정에 무뎌졌던 모양이다. 아무리 견고하게 쌓아 올린 벽이라도 공들여 관리하지 않으면 작은 공격에도 무너지기 십상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게 더 깊고 높게 쌓아야 한다. 애써 전정국에게서 시선을 떼어내며 속으로 굳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짝피구요?"
운동장이 설렘 가득한 야유로 시끄러워졌다. 초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모두의 반응은 한결같다. 역시나 여자애들 대부분의 시선은 전정국을 향하지만 막상 당사자는 무심하게 정면만 응시하고 있다.
"선생님, 짝은 어떻게 정해요?"
"교실 자리대로. 종 치면 공은 도구실에 가져다 놔라."
머리가 벗겨진 체육 선생님이 출석부를 휘휘 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애들은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신경질적으로 제 짝들의 손을 잡아챈다. 편을 나눈다, 공을 가져온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데 나와 전정국만 제자리였다.
"정여주."
"... 어?"
"내 싫은 건 알겠는데 손 잡아라."
결국에는 전정국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전정국 말대로 내 생각 하나 때문에 반 전체에게 피해를 주고 싶은 마음은 없어 순순히 그 손을 잡았다. 손을 맞잡기가 무섭게 전정국은 나를 끌고 라인 안으로 들어간다. 분명 운동 경기를 위해서 선을 넘은 것뿐인데 자꾸만 전정국의 라인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밀려왔다. 어떻게든 끌어당기려는 전정국과 끌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나. 잽싸게 자리를 잡은 전정국이 내 손을 제 허리에 가져다 대고서는 잡은 손을 풀었다. 삐익.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음에 모래바람이 불어닥쳤다.
피구 경기는 우리 팀의 대승이었다. 물론 승리 요인의 9할은 당연히 전정국이었다. 이리저리 날아오는 공을 족족 잡아내어 빠르게 던지는 것도 모자라 여자애들은 최대한 피해가며 맞추는 엄청난 매너 플레이까지 선보였으니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 애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대상은 전정국의 공을 맞고 나간 아이도, 다정한 사과를 받은 아이도 아닌 바로 나였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전정국이 날아다니는 내내 허리를 꼭 붙잡고 같이 뛸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으니. 그러나 전정국은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마자 제 허리를 붙잡은 내 손을 매정하게 떼어내고는 다른 여자애들에게 사과한다는 핑계로 쌩하니 가 버렸다. 공에 맞지도 않았는데 가슴이 욱신거렸다. 친구는 전정국이 유난히 제게 환히 웃어준 것 같다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래서 전정국 초등학교 때가 어땠다고? 중학교 때는?"
"안 친했다니까."
"그래도 기억나는 게 하나쯤은 있을 거 아냐?"
뭐라도 말해주지 않으면 끈질기게 캐물을 기세길래 희미한 기억까지도 싹싹 헤집어 가며 얘기해 주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는 잘생겼다기보다 귀여운 편이었다, 그 때는 피구보다 축구를 잘했었다, 중학교 때는 아이유를 좋아해서 축제에서 불렀던 곡이 아이유의 미아였다, 그 때는 낯을 좀 가리는 편이었는데 고등학교에 올라오더니 엄청나게 활발해졌다...
"아니, 그런 것도 좋은데 막 설레는 그런 거 없냐고."
"... 설레는 거?"
"응. 당연히 여친 있었을 거 아냐? 아님 네가 설렜던 거라던가."
그런 거 없었다고 고개를 저어도 요지부동이라서 결국 가벼운 한숨과 함께 한 번 더 기억을 뒤집어야 했다. 머릿속으로는 알게 모르게 나를 챙겨주던 전정국의 모습이 희미했다 진해졌다 하며 스쳐가고 있었지만 정작 친구에게는 전정국이 정말 좋아하던 여자친구에게 고백할 때 이런 저런 이벤트를 하며 고백했다는 따위의 말이나 지껄이고 있었다. 박수까지 치며 설렘을 표현하는 친구를 두고 화장실을 핑계 삼아 밖으로 나갔다. 설마, 아니겠지. 그냥 전정국은 처음부터 다정했으니까 그랬던 거다. 착각하지 말자. 혼자 의미부여하지 말자. 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인 '전정국은 여자친구가 있다' 와 '나는 전정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당당히 얘기했다' 를 끊임없이 세뇌시키며 정처 없이 복도를 걸었다. 아닐 거다, 아니어야만 한다. 상식적으로 다정한 손길 몇 번 받았다고 금방 사랑에 빠진 것처럼 구는 건 말이 안 되는 행위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전정국과 부딪히지 않기를 바란다. 제발 나에게 어떤 눈빛도, 여지도 주지 말고 그저 무심하게 지나쳐 줬으면 좋겠다.
"... 전,"
"......"
"정국..."
바라던 대로 전정국은 아무런 동요 없이 나를 지나쳐 갔다. 시선은 팔짱 낀 여자친구에게로 고정한 채로. 바라던 대로 잘 되었다며 스스로를 달래고 뒤돌아서려던 순간 모든 소리가 물속에 잠긴 듯이 먹먹해지며 즐겁게 웃고 떠드는 아이들의 입이 뻐끔대는 금붕어와 겹쳐 보였다. 대화가 오가고 웃음이 터질 때마다 오색 빛깔 공기 방울들이 팡팡거리며 만개했지만 내 주위는 잔거품들만 보글거릴 뿐 색깔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 혼자서 외로운 섬처럼 감정에 고립되어 흑백으로 빛 바래고 있었다.
"... 국아. 정국아!"
"... 어?"
"빨리 가자."
"어, 어. 미안타."
내 또 한눈 팔았네. 분명 저 멀리서 들려야 할 전정국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 대고 소리치듯 크게 울렸다. 흑백으로 전락한 내 세상에서 전정국만 빛났다. 그 애의 목소리만 생동감 있게 내 마음을 유영했고, 그 애의 눈망울만이 쨍한 색으로 내 눈동자를 관통했다. 전정국에게 꼼짝없이 마음이 붙잡힌 채로 견뎌야 할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
제가 고등학생인지라 글 쓸 시간이 마땅히 없어 학교에서 틈틈이 쓴 걸 이어 붙이는 식으로 올려서 분량이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남겨주시는 댓글은 정말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고 있어요. 항상 감사합니다.
암호닉
[슝아, 침침이, 땅위, 핀아란, 2월2일, 스케치, 금잔화, 물개, 꾸꾸룩, 뉸기찌, 여지, 꾸꾸쓰, 뿡쁑, 잇꾹, 루이비, August_d, 김태형여사친, 청춘, 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