溺愛
형님, 형님이 저 어렸을 때 그러셨죠.
일국의 황자라면, 그게 걸맞는 품위를 가지라고.
니가 나가 죽든 뭘 하든 아무것도 상관없으니, 그저 일국에 치욕이 될 일만 저지르지 말라고.
아버지의 이름에 먹 칠하는 일만 하지 말라고, 형님이 항상 제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전 어렸을 때부터 죽어라 화국인(火國人)으로 살지 않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 빌어먹을 화국(火國)이라는 이름이 죽어라 싫어서, 비겁한 설국인(雪國人)들한테 빌빌거리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미칠만큼 더럽고 치졸해보여서, 죽어도 그런 삶은 살기 싫어서.
그런 방법으로 권력을 쥐고싶진 않아서, 그래서 품위든 뭐든 그딴 거 다 개나 줘버리자고 생각했다고요.
근데요, 형님.
그 아이를 보면, 제가 미칠듯 싫어했던 그 품위라는 게 가지고 싶어져요.
그러니까, 그 아이만 보면 자꾸, 형님의 목을 노리고 싶어진다고요.
그게 비겁한 방법이든 또한 누군가를 아프게 할 권력이든, 그런 거 상관없이,
그게 그 아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길이라면 뭐든지 다 해주고싶어져요.
그러니까, 제발 조심하세요.
그 아이 앞에만 서면, 예상치 못하게 변해버리는 제 모습이 저도 두려우니까,
제가 그 아이를 위해 언제 형님의 그 잘난 목을 치게 될지, 저도 잘 모르겠으니까.
그 아이는 절 자꾸만, 미치게 만들거든요.
.
화국(火國) 황태자 曰
"이상해."
꽃길을 함께 걷던 도중 한참을 아무말 없이 묵묵히 걷던 정국이 갑작스레 목소리를 꺼내놓았다. 달달한 향이 넘쳐 흘러, 목 뒤를 타고 지나갔다. 아까 윤기와 함께 있을 땐 온 몸이 무겁고 마치 차가운 살얼음판을 걷는 것만 같았는데, 정국과 함께 있으면 자꾸만 온 몸이 나른해졌다. 괜히 숨을 깊게 들이켰다 천천히 내뱉자, 나란히 걷던 정국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이상하다."
"네가 나와 함께 걸어주니."
옅게 붉어진 듯한 그의 얼굴이, 그저 달빛 때문인지, 아님 흘러나오는 향과 같은 달달함 때문인지. 몽롱해진 정신으론 그 무엇도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 분위기에 취해,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담았다. 살면서 이토록 누군가에게 끌린 것은 처음이었다.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그의 향이 좋은 건지, 바다를 담은 그 눈빛이 좋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의 모든 것이 자꾸만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심장이 이리 빨리 뛰어도 되는건지, 잘 모르겠어."
뒷짐을 지고 걷던 그가 앞에 있던 의자를 발견하곤, 먼저 앉으라며 손짓을 했고, 그의 손짓에 따라 의자에 몸을 앉히자, 나와 조금 떨어진 옆자리에 그 또한 몸을 앉혔다. 주변을 맴도는 꽃향에 취해, 깜깜한 밤 속일 뿐인 이 풍경이 마치 꽃잎 가득 스며든 환상과 같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없는 머리 위로 자꾸만 꽃잎들이 흘러넘치는 것만 같았다.
"너와 마주하는 것을 마냥 기쁘다 해야하는 건지,"
"아님, 곧 끝날 이 행복에 서글프다 해야할지."
"난 항상, 제대로 된 판단을 한 적이 없으니까."
그의 목소리에 진득한 어둠이 끼어들었다. 사국(四國) 중 가장 약국인 나라, 풍국(豊國)의 황태자. 그 속에 갇혀진 그는 항상 좋지 않은 기로에 서서, 잘못된 선택을 했다, 원망의 소리를 들어야 했을테다. 사실은 그의 잘못이 아닌데. 사실은, 좋은 선택권에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것 뿐인데. 사람들의 위에서 잘못도 없이 벌을 받고 있는 그는, 그로인해 많은 상처를 받은 듯 했다.
"그저, 꿈만 같아."
"네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윤기형을 찾지 않았다는 게,
네가 윤기형에게 등을 보였다는 게,
네가 윤기형을 무시한 채 발걸음을 돌렸다는 게."
나 또한 이 상황이 꿈만같았다. 매번 들리던 지긋지긋한 고함소리가 아닌, 낮고 아름다운 너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는 게. 코 끝을 울리던 비릿한 피냄새가 아닌 너의 그 달달한 향에 취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게.
하지만, 또한 슬펐다. 너를 본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깊은 감정을 느낀다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나는 그랬다. 너를 꿈만 같게 만드는 것들이 모두 내것이 아닌 듯해 자꾸만 슬퍼졌다. 너를 이토록 기쁘게 만드는 게, 사실은 내가 아니라 다른 여인이라는 그 잔인한 사실이 이렇게나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아니,사실은."
"네가 윤기형이 아닌 나를 찾았다는 게,
네가 윤기형에게 등을 돌린 채 오로지 나만을 그 두 눈에 담아 주었다는 게,
네가 윤기형을 무시한 채 나의 손을 잡았다는 게."
"더 솔직하게 말하면,"
"네가 윤기형이 준 팔찌가 아닌 백색의 팔찌를 끼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가,"
어느새 바짝 옆으로 다가와 앉은 그가 조심스레 내 팔을 들어올렸고, 그로인해 약간 내려간 소매 사이로 백색의 팔찌가 빛을 발했다. 갑작스런 온기에 놀란 내가 흠칫- 몸을 떨며 손을 뒤로 빼내려 하였지만, 내 손목을 잡고있는 너의 손은 부드럽지만 강한 힘으로 다시 한번 나를 끌어당겼고, 그에 꽤나 가까워진 사이로 너와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자꾸 나를 기대하게 만들어."
저잣거리에서 샀던 팔찌였다. 진지하게 가라앉은 정국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봤고, 그보다 더욱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원래 팔에 끼워져있던 팔찌가 민윤기, 그 자가 준 팔찌였다는 것이었다. 색으로 나라를 구분하는 세계. 어쩐지 온통 푸른 빛이 맴도는 몸에, 유일하게 흑색을 뽐내고 있는 팔찌가 이상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민은 도대체 왜 이 팔찌의 행방을 모른다고 내게 거짓을 고했던 거지? 분명 이 세계 사람인 지민이라면, 내 곁에서 나를 보필해왔다던 지민이라면 이 팔찌가 윤기가 준 것이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을텐데 도대체 왜?
혼란스러운 머릿속으로 어려가지 생각이 정처없이 떠돌았고, 그 끝에 떠오른 기억은 맨 처음 윤기를 봤던 날 그가 자꾸만 매만지던 흰 손목이었다. 흑색 옷 사이로 유일하게 비치던 푸른빛의 팔찌. 자꾸만 내게 보여주려는듯 매만지던 푸른색 팔찌. 짙게 가라앉아있던 눈동자.
어쩌면 내 판단이 틀렸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나를 바라보던 윤기의 눈동자가 자꾸만 뇌리를 스쳤고,
"내 이 판단,"
"계속해도 되는 거야?"
정국의 진득한 목소리가 발끝을 타고 올라와 나의 모든 것을 잠식해버릴 시점, 귓가에 낯선이의 발소리가 울려퍼졌다. 꿈에서 깨듯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자, 언제부터 서있었던건지 한껏 헝크러진 머리를 한 지민이 나를 바라봤다.
늦었어, 들어가자. 조금은 가라앉은 듯한 목소리가 바람에 휘날려 흩어졌다.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 나도 몰래 자리에서 일어나려 몸을 들썩이자, 그보다 더 빨리 내게 닿은 정국의 손이 내 손목을 잡아챘고, 손목에 닿은 온기에 고개를 돌려 정국을 바라보자, 약간 굳은 표정으로 지민을 올곳이 바라보고 있는 정국의 모습이 눈에 가득 들어찼다.
"너 또한,"
"여전히 그 눈빛을 갖고있었구나."
낮게 흘러나온 정국의 목소리에, 한없이 침착한 얼굴만을 하고있던 지민의 얼굴이 살풋 찡그려졌다. 나 혼자 이해하지 못한 상황이 애석하게도 내 주위를 감돌고 일어나고 있었다.
"물론 나에게도 마찬가지일테지만,"
"네게 주어진 꽃은 더더욱 아니야."
정국의 말이 흘러나올 수록 주먹을 쥐고있던 지민의 손에 점차 힘이들어갔고,
"현명한 아이라 석진이 형이 많이 아낀다 하던데,"
"그 말이 진정 사실이었음 좋겠구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의 끝으로, 내 손목을 잡고있던 정국의 손이 풀리자마자 그 차갑던 공기가 누그러졌다. 늦게까지 잡아둬서 미안해, 들어가- 가라앉은 분위기와 맞지 않게 애써 미소를 띠운 정국이 내 손을 잡고 날 일으켰고, 그렇게 지민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오면서 지민은 지민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의 사색 속에 빠져 하염없이 침묵 속을 걸었다.
유난히 그날은, 밤이 길었다.
*
지민과 함께 꽃을 수놓던 중이었다. 지민에게 배운대로 열심히 꽃을 손질하여 예쁘게 수놓고 있는데, 순간 밖이 시끄러워져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지민이 밖으로 나갔고 나는 그저 무의미한 행위를 반복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창문 쪽에서 툭툭-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잘못들은건가, 싶어 금세 다시 고개를 돌렸는데, 톡톡-하는 소리가 계속 반복되더니 결국에는 더욱더 둔탁한 소리가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의문의 소리에 괜히 겁을 먹은 내가 들고있던 바늘을 내려놓은 채 슬금슬금 창문쪽으로 다가갔고, 창문을 가리고있던 커튼을 들어올렸을 땐, 그 밑에서 베시시- 웃음을 띠고 있는 태형의 모습이 눈 앞에 들어찼다.
'...김, 태형-?'
의외의 얼굴에 놀란 내가 놀란 얼굴로 창문 밑을 바라봤고, 그에 더욱 환히 웃어보이던 태형이 손을 뻗어 내게 뛰어내리라는 태세를 갖췄다. 몰래 눈을 피해 들어온 건지, 온통 산발이 된 머리와 흐트러진 옷차림이었다. 높이가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낮은 건 또 아니었기에 당황한 내가 멀뚱히 그를 바라봤고, 그런 나를 보던 태형이 시간 없다며 나를 재촉했다. 아마 아까 있던 소란은 태형이 만든 것인 듯, 소란스러운 밖을 곁눈질로 바라본 태형이 다시 한번 내게 팔을 벌렸다.
"얼-르은- 늦었어-"
발을 동동 구르며 인상을 잔뜩 찌푸린 태형이 재촉하듯 늘인 말꼬리에서 지민이 떠올랐다. 안 그래도 저번에 말도 없이 저잣거리에 나간 것 때문에 걱정한 것 같던데- 아니, 걱정 뿐만 아니라 나를 보필하는 의무를 맡고있기에 내가 이리 무책임하게 사라져버리면 가장 많은 피해를 받을 건 지민임이 뻔했다. 역시 안되겠다는 생각에 거절을 하기 위해 조금은 미안한 눈빛으로 태형을 바라보는데, 그런 나를 바라보던 태형이 내 마음을 눈치챈 듯 진득한 눈빛으로 나와 눈을 맞췄고,
"설국(雪國) 황자,"
"엿 먹이러 가자."
뜬금없이 울린 말에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장난스런 웃음으로 포장하려는 그의 의도에 무색하게, 진지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확연히 나를 바라보고 있음이 느껴졌다. 나를 올곳이 바라보는 눈동자에, 어떻게 해아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해 입술을 한 번 꾹- 깨무는데, 벌써 바깥 상황을 확인한 것인지 지민이 돌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빨리-"
다시 한번 나를 재촉하는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결국 그의 품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의 손이 몸에 닿자마자 온 몸이 따뜻하게 달아올랐고, 기분 좋은 온도의 끝, 태형의 품이 완벽하게 나를 받아들였을 때,
"걱정 마."
아직은 잘 이해하지 못할 태형의 말이,
"내 부디, 너만은 웃게해줄테니."
내 마음을 자꾸만 울렸다.
*
설국(雪國) 황자 엿 먹이러가자고 배시시 웃어보이던 태형은, 한참이나 내 손을 잡고 그 주위를 맴돌았다. 항상 내 곁을 맴돌던 꽃향은 그 날따라 자취를 감춘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나마 북적거리던 주변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조용하단 생각이 들 때 쯤에야, 오늘 아침에 주요한 회의가 있다고 알려주던 지민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래, 그랬으니 설국(雪國)의 황자인 민윤기도, 그의 지어미인 그 화국(火國) 여인도, 풍국(風國)의 황태자인 정국도, 나의 오라비도 모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겠지.
근데, 나야 불미스런 일으로 인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해도, 도대체 왜 태형은 지금 나와 이곳에 있는 거지? 태형 또한 화국(火國)의 황태자이니, 원래대로라면 회의에 참석해야하는 것이 맞는 일이었다.
갑작스레 드는 생각에 시선을 돌려 태형을 바라보니, 언제부터 나를 보고있었던 건지, 나를 보던 태형의 눈동자와 나의 눈동자가 마주쳤고, 그 순간 태형이 갑작스레 내 팔을 잡아 끎과 동시에 한 건물 안으로 몸이 이끌렸다.
'너 갑자기 무슨-'
"아- 여기 진짜 오랜만이다. 내가 여기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당황스런 표정을 한 나와는 달리, 배시시 웃는 얼굴을 한 태형이 주변을 돌아보며 자신의 머리를 쓸어넘겼고, 그에 나 또한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다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놀라 나도 몰래 몸을 움직여 기둥 뒤로 숨어버렸다.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들이 울려퍼졌다.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있는 이들을 보니 이곳이 지민이 말했던 그 회의 장소인듯 했다. 입구와 회의장이 조금 떨어져있었기에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그들이 바로 나와 태형의 모습을 발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금 어두운 기둥 뒤에 몸을 더더욱 숨기며 어서 나가자고 태형을 잡아 이끄는데, 답지않게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던 그가 그를 이끌던 나의 손을 잡아 내 행동을 저지시켰고, 다시 한번 두 눈을 마주쳐왔다.
"설국(雪國) 황자한테 지고싶지 않지?"
"저딴 놈 때문에 아파하는 것도, 신경쓰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도,
싫고 창피하잖아. 안 그래?"
태형의 목소리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래, 전에 이 몸의 주인은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의 나는 설국(雪國) 황자에게 지고싶지 않음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날 밤에도 그의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은 채 발걸음을 돌렸던 거였고.
아무말도 하지 못한 채 태형을 바라보자, 내 손목을 잡고있던 그가 손을 내려 내 손을 마주잡아왔고,
"그렇담, 더더욱 네가 이 자리를 벗어나선 안 돼."
"여기가 네가 있어야할 자리잖아.
네가 설국(雪國) 황자를 사랑하는 한 여인이 아닌, 수국(水國)의 황녀라면 저 자리에 껴서,
아무렇지 않은 척 그 자리를 지켜야지. 안 그래?"
"품위, 그딴 거 내가 진짜 죽어라 싫어하는 건데.
그래도, 네가 설국(雪國) 황자에게 엿 먹이는 가장 큰 방법이 그거라면,
멋들어지게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너라면, 당연히 해낼 수 있음이 분명하기도 하고."
나를 마주보며 웃는 그모습에, 나도 어쩔수 없이 배시시 웃음을 지어보였다.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그를 만나면 마음이 편해지고 긴장이 풀리는 게, 진정 오래된 친구를 만나는 것만 같았다.
그가 내 손을 꽉 잡아왔고, 회의장으로 함께 들어서자 마자 민윤기와 시선이 마주쳤다. 발소리도 없이 조용히 들어간 것인데 어떻게 그가 단번에 우리를 눈치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의 검은 눈빛이 나를 향했고, 다시금 태형과 붙잡은 나의 손으로 내려갔다 다시 시선이 마주쳤다. 무언가 할 말을 잔뜩 담은 듯한 눈이 자꾸만 나를 갉아먹는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위축되는 느낌에 태형의 손을 꽉 잡은 채 몸을 그 뒤로 슬쩍 숨겼고, 그에 민윤기의 눈빛이 더욱 진득하게 가라앉았다.
"...형?"
민윤기가 말을 하고 있던 중이었는지, 갑작스레 끊긴 대화에 당황한 듯한 정국이 그를 불렀고, 그럼에도 민윤기의 시선이 나만을 바라보고 있자, 정국의 시선 또한 나를 향했고 금세 놀란 듯 두 눈이 커졌다. 나를 바라보던 민윤기가 들고있던 종이를 내려놓은 채 주먹을 꽉- 쥐었고, 그를 보던 태형이 별안간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왜?-'
놀란 내가 태형을 바라봤고, 그럼에도 나를 바라보는 민윤기만을 바라보던 태형이 내 손을 더욱 꽉 쥐어왔다.
"글쎄,"
"이상해서 말이야."
장난기가 담긴듯한 태형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설국(雪國) 황태자,"
"그저 안절부절 못하게 해서 골탕이나 먹여줄 생각이었는데."
"온통 마음이 이리 기울어있잖아."
태형이 나와 잡고있던 손을 두어번 흔들었고, 그에 나 또한 설국저하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의 시선이 나와 태형의 손으로 가있는 것이 나 또한 확연하게 느껴졌다.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을 옆에서 흔드는 화국(火國) 여인의 손길에도 나만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진정 신경쓰인다는 듯 태형과 맞잡은 내 손을 바라보고있는 그 시선이. 마치,
"마치, 네가 깽판이라도 피우길 기다리는 것처럼."
마치, 진정 나를 사랑하기라도 한다는 듯 많은 말들을 담은 듯한 그 눈동자가.
자꾸만 내게, 이상한 기분이 들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