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쌍방 과도기 (2)
배가 물살을 가른다. 하얀 진주알처럼 부서지는 파도와 쨍쨍한 햇살이 입을 맞추며 터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아이들은 배 난간에 설익은 포도알처럼 매달려 튀겨오는 물을 맞고는 좋다고 깔깔거린다. 전정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난간을 붙잡고 겁도 없이 몸을 수그리는 그 애애의 주위로 여자애들이 가득하다. 여자친구와의 불미스러운 헤어짐 이후에도 전정국의 인기는 사그라들 줄 몰랐으며 오히려 더 치솟는 추세였다. 이별까지도 여자친구를 배려하던 모습이 섬세했다나 뭐라나. 친구마저도 눈을 번뜩이며 전정국의 옆에 붙어 있기 위해 달려가는 바람에 얼결에 혼자 풍경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들뜬 기분을 요란하게 드러내지 않았지만 꽃내음을 잔뜩 머금은 봄바다는 여름바다 못지않게 상큼하고 청량해서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젤리처럼 투명하게 출렁이는 바다를 햇살 조각이 작은 통통배처럼 뛰어다닌다. 설렜다. 바다를 좀 더 가까이 보고 싶다는 핑계로 점점 더 전정국이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길 때마다 심장이 배로 뛰었다. 이러다가 쓰러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장이 쿵쾅거릴 때 기다렸다는 듯 내 옆자리에 그림자가 졌다.
"나 인기 겁나 많제."
"... 잘났다."
"와, 삐졌나."
"안 삐졌거든?"
"삐졌네. 입이 댓발 나왔다, 이 가시나야."
있지도 않은 돌고래가 보인다고 거짓말치고 빠져나오느라 힘들었다며 능청스레 눈썹을 찡긋대는 전정국에 결국 댓발 나온 입을 집어넣고 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전정국을 찾아 헤맸던 운동장에서의 그림자는 그렇게나 불안하고 낯설었는데 지금 그 애의 그림자는 누구보다 든든하게 내 옆자리를 채우고 있다. 원래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는 듯이. 전정국이 다리가 아프다며 슬금슬금 엉덩이를 내리더니 확 내 쪽으로 붙여 앉아버린다. 순간 훅 밀려오는 전정국의 채취에 머리가 아찔했다. 아직 제주도에 도착하려면 멀었는데 향긋한 감귤 같기도 하고 샛노랗게 영글은 유채꽃 같기도 한 향기에 정신이 혼미했다. 아까보다 백 배는 빠른 속도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내 몸에 배어드는 전정국이 너무 달콤해서 버거웠다. 손가락으로 바다 저 너머를 가리키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전정국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몰래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숨을 참았다가 내쉬는 걸 반복했다. 멀쩡하던 바다가 절절 끓었다. 자꾸만 일렁였다.
미쳤다. 내가 미쳤나 보다. 배에서 내려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내리자마자 정호석에게 전화를 걸어 따졌다.
"야."
"인사 예쁘게 한다?"
"진짜 미쳤어. 왜 얘기했냐?"
"뭐를?"
"전정국도 나 좋아하는 거, 왜 얘기했냐고!"
수화기 너머의 정호석이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듯 대답한다.
"야, 오빠가 사랑하는 동생이 짝사랑의 고통을 앓고 있다는데..."
"전정국 얼굴을 못 보겠다고."
"그럼 네가 여태까지 본 건 전정국 얼굴이 아니고 뭐냐? 귀신?"
"장난치지 마라. 진짜 개설레."
"어, 그래. 힘내고 난 감귤크런치 아니면 안 먹는다."
혹시라도 감귤 초콜릿 사 오기만 해 봐. 다시 제주도로 돌려보낼 테니까. 감귤! 크런치! 헛소리를 늘어놓는 정호석과의 통화를 단칼에 끊어버리고 팔에 머리를 묻었다. 막상 정호석이 얘기해주지 않았다면 몇날 며칠을 울며 왜 말해주지 않았냐고 원망했을 게 뻔했겠지. 짝사랑할 때는 그렇게 나를 봐 줬으면 좋겠다고 안달냈으면서 막상 서로 통하는 마음을 이어보려고 하니 여간 고역인 게 아니다. 혼자 가슴 떨려하던 전과는 달리 자꾸만 상대를 의식하게 되는 게 두 배로 힘들고 두 배로 설렌다.
"여주야."
"... 전정국."
"왜 여기 있나. 한참 찾았다."
그리고 지금처럼 다른 누구도 아닌 전정국이 다른 누구도 아닌 온전히 나를 위해 달려와 손을 내밀어줄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도 않던 뱃멀미가 뒤늦게 왔는지 또 속이 뒤집어졌다. 내밀어진 전정국의 손에 유채꽃이 한 다발 들려있었다.
"네 친구 데려왔다."
"......"
"예쁘제. 빨리 가자."
다른 사람이었으면 오글거린다며 혀를 찼을 멘트도 낯간지럽다며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게 전정국의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순간을 엿가락처럼 늘리고 또 늘여 영원히 붙잡아두고 싶었지만 야속하게도 빨리 집합하라고 외치는 교관의 우렁찬 목소리에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유채꽃이 머금고 있던 전정국의 온기가 손을 타고 올라왔다. 가슴께에 귀뚜라미가 붙었는지 자꾸만 찌르르 울었다. 전정국을 좋아하고 나서부터는 계절을 막론한 모든 감정이 휘몰아친다. 사계절이 자꾸만 전정국이라는 하나의 계절이 된다.
식상하고 뻔한 일정이 지나고 저녁 식사 후 레크레이션이 이루어진다는 방송이 울렸다. 친구는 전정국이 춤을 춘다며 입에 거품을 물다시피했다. 전정국의 춤은 중학교 때부터 유명했으니 여자애들이 댄스부의 무대만 학수고대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춤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전정국은 춤을 참 잘 춘다. 힘이 대단해서 절도 있는 동작을 할 때는 멋있고, 섹시한 동작을 할 때는 절제되어 오히려 더 섹시하다. 작년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봤던 무대였는데 올해는 사심이 들어가서 그런지 무슨 춤을 춰도 멋있을 것 같았다. 댄스부를 소개하는 사회자의 말이 끝나고 조명이 켜질 때까지 분명 그랬는데,
"아악!!! 씨발!!! 안 돼!!! 안 돼!!!"
"....."
"안 된다고!!! 야!!!"
웬 예쁘장한 여자애의 허리를 붙잡고 끈적한 춤을 춰대는 전정국을 보고 있자니 울화통이 터졌다. 남자애들의 부러움 섞인 탄성과 패닉에 빠진 여자애들이 질러대는 비명이 반쯤 섞인 강당은 상당히 언밸런스한 화음을 이루어냈다. 시끄럽거나 말거나 전정국은 춤에만 집중한 채 여자애와 완벽한 호흡을 자랑했다. 이런 씨발. 나지막한 욕설과 함께 쥐고 있던 순서지가 형편없이 구겨졌다.
"와아아아아아아악!!!!! 여주야. 이건 말도 안 돼. 누가 저런 거 시켰어!!!!"
"... 어, 진짜 말도 안 돼."
"그치??????? 그치????? 와, 나 진짜 미치겠네!!!"
"......"
친구는 숙소로 돌아가는 내내 전정국의 커플 댄스가 얼마나 잘못된 행동인지에 대해 열변을 토했지만 모두가 그 이야기에 바빴으므로 그런 친구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커플 댄스를 마치던 마지막 전정국의 모습이 계속 반복재생되고 있었다. 한껏 여자애와 얼굴을 맞댄 채 고개를 틀고 슬쩍 지어보이던 그 미소, 그놈의 미소! 진짜 나쁜 새끼. 방에 고이 모셔둔 유채꽃을 생각하니 더더욱 참을 수 없었다.
"전정국."
"어? 웬일이고?"
"너 나랑 얘기 좀 하자."
마음이 약해지지 않기 위해 부러 바닥에 시선을 두고 이야기했다. 막 씻었는지 전정국이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마침내 전정국의 발이 내 발과 마주하자 그대로 손목을 잡아채고 정신없이 달렸다. 복도를 지나다니는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다 우리에게로 쏠렸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나를 뒤따라오던 전정국이 어느새 나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차마 다 말리지 못한 그 애의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자꾸만 얼굴에 튀어 눈을 질끈 감고 달렸다. 오늘 이 지긋지긋한 짝사랑과 홀로 마음 졸이는 게 어떤 결말을 맞게 될지는 온전히 우리 둘에게 달렸다. 정호석의 입을 통해 듣는 것 말고, 내 귀로 직접 전정국의 진짜 마음이 어떤지 들어야겠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전정국이 이내 멈춰서더니 뒤를 돌았다.
"무슨 일이고."
"......"
바싹 마른 입안을 한 번 적시고 입을 열었다.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전정국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았다. 바지 주머니에서 유채꽃이 바스락거렸다. 숨소리가 사포를 문댄 것처럼 거칠어졌다. 결국 또다시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갔다. 전정국의 눈이 동그래지고, 손에 들린 수건이 툭 떨어지는 걸 볼 수가 없어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
여주가 고백을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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