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계에는 왕년에 잘나가던 연예인 한 명쯤은 있기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걸그룹 멤버로 데뷔하여 적당한 히트곡을 내고 웬만한 연차를 채운 뒤에 해체, 연기자로 전향하여 활동하던 여주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여주는 텔레비전에 비춰지는 모습과 실제 성격이 그렇게 일치하는 편은 아니었고, 오히려 극과 극에 속했다. 여주와 몇 년간 함께 생활했던 같은 걸그룹 멤버들은 물론이고 그녀와 화보 촬영이든 예능 프로그램이든 한 번이라도 같이 일을 해본 사람들은 모두 그 더러운 성깔과 패기의 지랄에 혀를 내둘렀다. 여주는 언제부터인가 '개여주'라는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나보고 이딴 걸 하라고?"
"이미지 메이킹도 할 겸, 몇 달만 꾹 참고..."
"내 짬밥이 몇 년인데 씨발, 이딴 걸 줘?"
여주가 신경질적으로 조수석을 향해 발을 날렸다. 끼익. 잔뜩 겁먹은 형섭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가 재빠르게 사과했다. 누나, 죄송해요. 안 다치셨어요? 여주는 대답 대신 가운뎃손가락을 한 번 시원하게 날렸다. 그나마 이어가던 70부작 시트콤마저도 시청자들의 강력한 항의로 게시판이 도배되는 바람에 출연 3회 만에 갑작스러운 시한부 판정을 받고 하차하는 길, 기분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 이딴 식으로 하차시킬 거면 대체 캐스팅은 왜 한 거야? 여주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대본을 갈기갈기 찢는 것으로 다스렸다. 형섭이 겁에 질린 토끼처럼 눈을 부릅뜬 채 앞만 보고 밟는다. 낡아 빠진 승합차가 터덜거리며 달렸다.
"그래서 이거 언제까지 하면 되는데요."
"네가 정신 차릴 때까지."
"아, 개소리 하지 말고."
"김여주, 정신 차려. 너 이제 더 이상 슈퍼스타 아니라고."
뭔 지가 아직도 샤방샤방 아이돌인 줄 알어? 민현이 거만히 다리를 꼬고 앉은 여주를 노려보았다. 쟤도 어릴 때는 참 순수하고 애가 착했는데.
"아, 그래서 언제까지 하면 되냐고. 이거 누구랑 같이 하는 건데?"
"강피디."
"씨발 뭐?"
"뭘 그렇게 놀라? 강다니엘."
여주가 용수철이 튀어오르듯 의자에서 일어났다. 강다니엘? 여주의 머릿속에 온갖 기억들이 날아다닌다. 강다니엘. 48번째인가 49번째 구남친. 겁나 튀는 핑크머리. 직업은 모 방송국 피디. 현재 라디오 프로그램 하나 기획중이고 유명한 예능 보조 피디로 일하고 있음. 의외로 여주는 비즈니스와 개인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에 다니엘의 커리어가 여기에서 끝났으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문제는 다니엘과 여주가 안 좋게 헤어졌다는 데 있었다. 그것도 아주 아주 안 좋게. 수십 명의 구남친들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안 좋게. 여주의 미간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형섭은 조용히 사무실에 쭈그려 앉았다. 사무실에 무시무시한 적막이 감돌았다.
"알잖아, 강 피디 능력 있는 거."
"능력이고 나발이고 장난해?"
"장난 아니야. 너 이번에도 실패하면 완전 매장인 거 알지?"
"......"
"눈 딱 감고 한 번만 고생해라. 강 피디도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잖아?"
민현이 남은 커피를 다 마시고는 유유히 사무실을 나갔다. 꽉 막힌 사람이 아니긴 개뿔. 여주는 목을 꺾었다. 한 번, 두 번. 형섭이 조용히 사무실 문을 닫고 줄행랑쳤다. 물론 한참이 지나서야 돌아온 민현은 성한 게 없는 제 사무실에 뒤늦게 뒷목을 잡아야 했다.
"김여주 씨. 늦으셨네요?"
"아 예. 죄송요~"
"그것도 세 시간이나."
미안한 기색도 없이 건들대며 대충 사과하는 여주에 다니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절반은 가 버리고 그나마 남아있던 스텝들은 역시 개여주라며 수군거렸다. 어쩌라고, 새꺄. 단정히 안경을 끼고 대본을 쥐고 있던 다니엘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여주는 언제 욕을 했냐는 듯이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든다.
"오랜만이네, 자기?"
"빨리 자리에 앉으세요."
"여전히 안색은 좋아?"
"... 김여주."
"네가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을 텐데."
싸늘해진 분위기에 스텝들이 알아서 문을 닫고 나간다. 형섭은 또 이를 악물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여주 누나 이번 스케줄도 망했다고 하면 길길이 날뛸 민현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대표님한테 된통 깨지겠구나. 형섭이 울상을 짓건 말건 여주는 대놓고 기분 더럽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나마 평정을 유지하던 다니엘도 보는 눈이 없자 대놓고 인상을 찌푸린다.
"좀, 다 끝난 얘기잖아?"
"다 끝난 얘기? 이 새끼 진짜 웃기네?"
순간적으로 욱한 여주가 백을 휘두르며 다니엘에게 돌진한다. 누나 그거 협찬이에요! 거의 울기 직전인 형섭이 여주를 말려보지만 눈에 뵈는 게 없는 여주는 그대로 백을 날려버렸다. 어디에? 다니엘의 얼굴에. 순간 아차 싶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백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다니엘의 얼굴을 강타하고 주르륵 미끄러져내린다.
"야, 진짜..."
"... 뭐."
"너 진짜 나랑 해보자는 거냐?"
빡쳤다. 누가? 다니엘이.
"그래, 한 번 해봐. 나랑."
"......"
"잘 부탁드립니다. 구여친 씨?"
얼얼한 얼굴을 문지르며 사무실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린 다니엘의 뒷모습을 보던 형섭이 울며 전화기를 들었다. 대표님 살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