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이 지나자, 붓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나자, 종이 위를 덜덜 떨며 뻗어나가던 선이 점점 안정 되어갔다. 평생 무디게만 느껴질 줄 알았던 손 끝의 감각이 세밀하게 와 닿았다. 시우민의 생활은 점점 그 날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병간호를 해주는 사람 한 명이 따로 붙지 않아도 스스로의 생활을 끌어나갈 수 있을 만큼 몸은 나아졌다. 또래의 친우들과 함께 들을 노니는 것도 좋았고, 글 공부도 좋았지만 시우민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붓을 잡고 화폭에 자신의 세상을 펼치는 것이었다. 섬세한 손 끝의 기술이 필요한 만큼 시우민에게 세밀한 감각이 돌아온 것은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기쁨은 붓을 이전처럼 자유로이 잡을 수 있다는 것에서 나오는 감정이 아닌 것 같았다. 아직 뻐근한 쓰라림이 느껴지는 뒷 목을 매만지다, 시우민은 살그머니 방 밖을 나섰다. 집은 조용했다. 형제들은 모두 글 공부를 배우러 갔거나 장사를 하러 갔을 터이고, 어머니는 출타 중이신 듯 했다. 방 밖에서 고개만 빼곡 내밀어 주위를 둘러보던 시우민은 조심스레 마당으로 발을 내딛었다. 얼마만의 바깥 외출인가. 약간 쌀쌀했던 바람은 흘러가는 날이 거둔지 오래였다. 시우민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포근했다. 혹여 중간에 어머니를 마주칠까 조심스럽던 발딛음은 마을을 벗어나자 자유로워졌다. 못 주변에 수두룩 핀 분홍 앵초꽃이 봄바람에 잔잔히 흔들렸다. 형제들이 장사를 하고 있는 곳을 지나치지 않고 장터에 가는 방법은 딱 하나였다. 마을을 끼고 도는 못을 지나 마을의 반대편 입구로 돌아가는 것. 들뜬 숨을 들이키며 시우민은 좁은 길을 내달렸다. 방 안에만 있던 탓에 답답하게 막혔던 머릿속이 시원해지는 듯 했다. 하지만 이상스레 늘 간질거렸던 가슴은 탁 트이지 않았다. 쿵, 쿵. 가슴에서 타고 올라와 귓가 그리고 제 온 머릿속에 울리는, 두근대는 심장 소리. 숨이 찰 만큼 달린 탓에 나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마을 뒷편의 입구는 한 낯에도 을씨년스런 분위기가 나곤 했다. 시우민이 살고 있는 마을은 이중적인 곳이었다.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동시에 공존하는 장소. 외부인이 보기에 겉은 번듯하고 사람 좋은 이들이 어우러져 사는 활기찬 마을이었으나 그 속을 파고들면 이만큼 더럽고 찌든 곳이 없었다. 시우민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 상업이 점점 발달되어 가던 때, 마을 내로 조금 다른 성질을 띈 물건들이 흘러들기 시작었다고 했다. 뒤에서 은밀히 거래되는 음지의 물건들. 그 작은 흐름들은 조금씩 세력을 확장해 가 어느새 마을 깊숙한 곳에서 물꼬를 틀어 거대한 강을 만들었고, 마을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마을의 한 켠을 차지한 그들과 기존의 마을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서로에게 아무런 관심도, 도움도, 피해도 주지 않으며 각자의 삶을 영위해 나갔다. 그 곳은 이 마을에게 있어선 달의 뒷편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암적인 존재인 그들 덕분에 오히려 마을은 평화로울 수 있었다. 어느 집단에서나 존재하는 어두운 그림자를 그들이 모두 흡수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며 평화를 이루는 묘한 곳. 그 중 마을 뒷 편에 자리한 조그마한 입구는 그림자들을 대표하는 장소였다. 작게 난 오솔길에 낡은 나무 판자가 몇 개 덧대여져 있는 간소한 입구는, 마을 앞편에 난 화려한 입구와 대조되어 꼭 마을의 가리워진 곳곳에 녹아있는 그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 했다. 시우민의 집은 비단과 문방사우를 주로 다루는 장사치였다. 신분은 평범했으나 쥐고 있는 금전이 많았기에 그의 아버지는 주변에서 꽤 영향력 있는 인사였다. 그말인 즉슨, 제가 장터를 거니는 모습을 알아챌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였다. 몰래 집 밖을 나섰다는 이야기가 가족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했다간 분명 그 즉시 다시 방구석에 틀어박히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을 뒷편의 이들은 시우민은 물론이고 아버지에 대해서도 자세히는 알지 못할 것이었다. 그만큼 분리된 삶을 살고 있으니까. 시우민은 조심스레 뒷편의 입구로 다가갔다. 정돈되지 않은 좁은 오솔길 끝에, 해괴한 모양새로 깎인 솟대가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풀이 다리에 쓸리는 소리가 났다. 입구에 발을 딛자 마자 끼이익 하고 나무 뻐드러지는 소리에 시우민은 흡, 하고 놀란 숨을 삼켰다. 지나치게 조용한 입구의 모습에 순간 덜컥 겁이 났다. 혹시 저번의 그 주름진 남자와 같은 사람을 만나는 건 아닐까. 긴장한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시우민은 천천히 입구로 발을 내딛었다. 그래도 저 멀리서 사람 웅성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장터가 그리 멀지는 않은 듯 했다. 1일1글이네여. 저 완전 성실한 듯. 읽어주신 분들, 덧글 남겨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힘이 나는군용.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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