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후나아.. "
" …어? "
" 있잖아, 사실. 나 아직 우진이 좋아해. "
" … 나도 아직 유정이 좋아해. "
" … … "
너가 박우진을 아직도 좋아한다는 말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우린 사귀는 사이인데. 취지가 어쨌든, 남들 눈에 우리는 연인인데. 조금 씁쓸했다. 그래서, 나도 마음에 없는 말을 했다. 나도 아직 유정이 좋아해. 너는 내 말을 듣고, 으음… 그렇구나. 라는 반응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그래도 난 너도 좋아하는데 넌 어떻게 그렇게 단박에 유정이를 좋아한다고 말 할 수가 있어? 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뭐? 나도 좋아한다는 말에 순간 잘못들은건가 싶어 물었다.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냥 계속 울기만했다.
" 성이름 그만 울어. "
" … … "
" 계속 울면 나 너 어떻게 할지 몰라. "
볼이 빨개진채로 내가 좋다며 우는데 너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도 이러면 안 되는 거라는 것을 알지만, 욕구가 나를 지배했다. 나는 너에게 조금씩 다가갔고, 그렇게 다음 날이 되었다.
──
눈을 떴는데 내 옆에 너가 있지 않았다. 사실, 그 날 일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사정이 생겨서 빨리 간 것인가 싶어 전화를 해보았는데, 받지않았다. 무언가 하고 있을거라는 생각에 전화하는 것을 그만두었고, 그렇게 무료하게 하루가 가, 그 다음 날에 학교를 나갔는데, 너가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시 전화를 해보았는데, 이번에도 받지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네가 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었을 땐, 없는 번호라는 소리만 들렸다. 순간 머리에 뭐가 맞은듯, 그 날 일이 떠올랐다. 나는 박우진을 쓰레기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너에게 있어서는 별 수 없는 쓰레기였다.
너의 집에 찾아간 것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수도 없이 찾아갔는데, 그때마다 너는 나오지 않았다. 용서를 받지않아도 되니, 사과를 하고 싶었다. 무릎이라도 꿇으며 내게 화내주길 바랬다. 그렇게, 너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힘들어하던 때, 아니나 다를까 박우진은 또 나를 긁었다.
" 너 싫어서 도망간거 아니냐? "
" 닥쳐. "
" 너네 집 같이 들어가는거 내 친구가 봤다던데. 설마 뒹군거야? "
" 씨발. 닥치라고. "
박우진은 눈치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너는 내가 싫어서 도망아닌 도망을 간 것도 맞고, 집을 같이 들어간것도 맞았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너무 싫어서 박우진에게 그렇게 욕을 했다. 마치, 내가 내게 하는 것처럼. 박우진은 그런 내 반응을 보며 즐겼다. 나도 쓰레기지만, 너도 쓰레기야, 새끼야.
──
박우진과 나는 다행히 1학년때 이후로 같은 반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박우진은 무슨 생각인건지, 나와 너가 그런 사이였다는 것을 소문내지 않았다. 이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할지, 어떻게 생각해야할지. 그래도 너에 대한 언급을 해주지 않는 것은 고마웠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조용히 졸업하고나서,─내 마음은 아주 소란스러웠다─ 나름대로 성적을 유지해, 내가 원하는 대학을 들어갔다. 혹시나 너를 만날까봐. 혹시, 정말, 혹시 너를 다시 만날 수도 있으니까 나는 군대를 먼저 갔다왔다. 내가 너에게 또다시 걸림돌이 되면 안 되니까. 군대를 갔다와서, 제대를 하고 바로 휴학했다. 휴학을 선택한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리고, 다시 복학을 했다.
나는 당연히 1년도 제대로 다닌 적이 없으니, 1학년으로 복학했다. 내가 복학했다는 소문이 나자마자, 그 해 신입생들이나 윗 학년 사람들이 나를 보러왔다. 이유를 들어보니, 단순히 잘생겨서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둘러보았지만, 너는 없었다.
아직 대학이 익숙하지않은 나에게 건물을 소개시켜주겠다며 계속 옆에 붙는 여자가 있었다. 나는 원하지 않았지만 또 거절하면 내가 받아줄때까지 옆에 있을 거 같아 그냥 알았다고 하고, 나름대로 웃으며 길을 걸었다. 그래,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갑자기 내게 지훈아, 오늘은 뭐 먹으러 갈까? 라고 물었다. 오늘은 이라니. 누가 보면 언제나 밥을 같이 먹는 줄 오해할거같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러자, 너가 보였다. 잘못본건가 싶어 다시 보았지만, 이미 가고 없었다. 대한민국에 대학이 몇 개 있는데 설마 같은 대학에 올리는 없을거라고 생각하고 옆에 있는 여자와 길을 걸었다. 그렇지만, 내심 생각했다. 너였으면 좋겠다고.
──
과 모임을 한다던 날이었다. 딱히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과 사람들의 얼굴도 익힐겸, 한 번 즐겨보고는싶은 마음에 나갔다. 역시나,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이미 친한 사람들끼리는 서로 사적인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고, 나는, 계속 번호를 달라는 무리에 얽매이고 있는 중이었다. 절대 줄 마음이 없는데 주지 않으면 계속 달라고 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이상한 번호를 찍고는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그 번호 주인에는 미안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우연인지, 인연인지, 내 앞에는 정수정이라는 여자가 앉았다. 학년은 3학년이지만, 나이는 나와 동갑이었다.─나는 1학년이지만, 여기있는 3학년들은 대부분 나랑 동갑일것이다─ 나와 몇 번 말을 하고는,─관심사가 나름 맞다고 생각했다─ 어딘가에게 전화를 걸더니, 성이름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순간 놀래 고기를 먹던 손을 멈추고 통화를 하는 정수정을 쳐다보았다.
" 왜 이제 전화 받아! 오늘 과 모임 있다고 했잖아… "
" … … "
"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대박이야. 너 오늘 안 온 거 후회할걸? 백퍼? "
" … … "
" 너 혹시 우리 학교에 박지훈이라고 알아? "
이름만 듣고 너일거라고 단념짓지는 않았지만,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수정은 나를 힐끗 보다가, 너 혹시 우리 학교에 박지훈이라고 알아? 라고 물었다. 정수정이 왜 말이 없냐고 하는 걸 보니 아마 상대방이 대답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그 사람이 대답을 하지 않아서 너라고 더 확신했는지도 모른다. 너가 아니었다면, 몰라, 혹은 알아 라고 대답했을텐데, 답이 없는 걸 보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수정에게 누구야? 라고 물었다. 아, 유교과에 성이름이라고.
" 근데, 여자친구 있어? "
" 어. "
" 있다고? "
" 어, 있어. "
" 얼마나 됐는데? "
" … 육 년? "
정수정은 전화를 끊고, 나와 여러 말을 하다가, 갑자기 내게 여자친구가 있냐고 물었다. 내가 보기엔, 정수정은 나한테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단순히 궁금해서 묻는거같았다. 나는 있다고 대답했더니, 정수정은 놀란 눈치였다. 왜, 나는 있으면 안 되나. 얼마나 됐냐는 말에, 육 년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너랑 헤어진 적 없으니까. 몸이 떨어져 있을 뿐이지, 이별 통보는 안 했으니까.
──
여느때와 다름없이 다음 강의를 위해 강의실로 걸어가던 중이었다. 사실, 강의가 시작하려면 많아봤자 3분정도밖에 남지않았는데, 그냥 오늘따라 뛰기가 싫었다. 그래도 양심상 천천히 걸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조금은 속도를 내서 걸어가고 있는데, 너와 눈이 마주쳤다. 이제, 정확히 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이 동그랗게 떠지면서 얼른 뒤를 돌아 이어폰을 꼽고 빨리 뛰었다. 따라가서 잡고싶었지만, 3분 남은 강의가 내 발목을 잡았다. 어쩔 수 없이 강의실로 발을 옮겼다.
늘 그렇듯 이 교수님은 출석을 부르지 않으셨다. 그러다가 어쩌다 한 번 부르긴했는데, 정말 드물었다. 2분 정도 지났을까, 누군가 살며시 들어오더니, 내 옆자리에 앉았다. 앉아서 가방에서 책을 빼는 틈을 타, 누군지 옆을 봤는데, 너였다. 아까 본 너와 옷도 똑같았고, 머리도 똑같았다. 분명, 너였다. 나는 이게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다. 딱히, 교회를 믿는 편은 아니지만, 지금만큼은 믿고싶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내가 여기있다는 것을 티내고싶었다. 해서, 크게 내 이름이 적힌 전공서적을 너의 쪽에 두었다.
너는 자세를 바꾸려고 하다가, 펜이 떨어졌다. 제발 내 쪽으로 굴러와라, 굴러와라 마음 속으로 몇 번이고 외쳤다는데, 정말 신께서 들으신 것인지 펜이 내 쪽으로 굴러왔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주워야하는 상황이었다. 너는 내가 옆에 있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머리로 얼굴을 가려 펜을 건네 받았다. 일부러 네가 보라고 나는 내 책에 너의 이름을 한껏 적었다. 너가 그것을 보았는지, 두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나가려는 너에, 나도 모르게 덜컥 너의 손목을 잡았다.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하나, 생각해두었는데, 그 손목을 잡자마자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얘졌다. 너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맞지. "
" … … "
" 성이름 맞지. "
이미 너인것을 알고있었는데, 다짜고짜 보고싶었다고 할 수는 없으니 네게 너가 맞냐고 물었다. 너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네가 입을 열었다. 성이름 아니니까, 놔주세요. 그 말에 비수가 꽂혔다. 당연할거라고 생각했는데. 넌 내가 당연히 보기싫을것이라고 생각은 했는데, 막상 이렇게 들으니 그 말이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다.
" 왜 계속 피하는 거야. 피하지마. "
" …… "
" 피하지 말아줘. 부탁이야. "
" 갈게요. "
너를 학교에서 처음 봤을 때 부터, 나를 피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피하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너는 매몰차게 손을 놓고 가버렸다. 나도 얼른 뒤따라 나갔는데, 너는 놀랬는지 주저앉아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너의 팔을 잡고 일으켜주었다. 그랬더니, 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
강의도 다 끝났고, 생각도 정리할겸 오늘은 집에 걸어갈까싶어 걸어가고 있는데, 우연히 보게 된 카페 안에 너와 정수정이 있었다. 너와 정수정은 나를 보지 못하고, 뭐가 그렇게 심각한 것인지 둘 다 얼굴에 심각하다는 표정을 짓고 얘기를 하고있었다. 나도 모르게, 카페 안으로 발이 이끌렸다. 정말, 들어갈 마음은 없었는데─무슨 얘기를 하나 궁금하기는 했지만─ 어느샌가 나는 너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 말을 들었다. 정수정이 한 마지막 말. 얘, 박지훈 닮았어.
정수정은 아직 나와 너가 그런 사이라는 것을 모르니, 자기 딴에서는 서로 친해지라고 소개해준것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너의 옆에 있는 아이를 정수정이 사촌 동생이라고 말했는데, 누구의 사촌 동생인지는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거기에서 내가 누구 사촌 동생이야? 라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그런가보다싶어 계속 그 아이를 보고있으니, 내 어릴때 모습이 담겨있는것 같아 말을 걸지 않을 수가 없었다.
" 귀엽다. 이름이 뭐야? "
" … … "
" 이름이 박정훈인가보네. 정훈이야? 박정훈? "
낯을 가리는 건지, 대답을 해주지 않자, 아이의 가방에 적힌 이름을 보았다. 박정훈. 내 이름과 비슷해 묘한 느낌이 들었다. 생김새도 닮았고, 이름도 닮아 신기했다. 이름이 정훈이냐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고개를 한 번 끄덕였을뿐인데, 아이와 친해진 느낌이 들었다. 원래 애를 좋아하지않는 나인데, 왜이러지.
" 귀엽지. 이야, 이렇게 있으니까 진짜 닮았다. 나 안 그래도 너 오기 전에 얘랑 너 닮았다고 얘기하고 있었거든. "
" 내가 언제.. "
" 아아, 정정. 내가 일방적으로 얘기했지, 같이 얘기한건 아니야. "
정수정이 저렇게 말하는걸 보니, 자신의 사촌 동생은 아니라는 말같았다. 만약, 저의 사촌 동생이라면, 나를 만났을때부터 말했겠지. 나 너 닮은 사촌 동생있다고. 그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정훈이가 너의 사촌 동생이라고 확신했다. 이 말을 할 때까지, 너는 나와 눈을 한 번 마주치지 않았다. 만약, 강의실에서 만나지 않고, 여기서 만나는 것이었더라면, 너의 반응은 어땠을까. 아까처럼 눈이 커졌을까 아님,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났을까.
" 너 근데 여긴 왜 온거야? "
" 아, 그러게. 너보러..? "
" 아무리 그래도 여자친구 있는 애는 안 건든다. 내 철칙이야. "
정수정이 근데 여긴 왜 온거냐고 물었다.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더니, 정수정은 코웃음을 치더니, 아무리 그래도 여자친구 있는 애는 안 건든다. 내 철칙이야. 라며 나를 살짝 때렸다. 여자친구라는 말이 나오니 너의 표정이 어두워진것이 보였다. 당연히 그러겠지. 나같아도 내게 그런 짓을 한 애가 갑자기 여자친구가 있다고 그러면, 기분이 매우 나빴을 것 같다. 근데, 다행이야. 이름아. 그게 너거든. 너는 여자친구라는 말에 표정이 굳어지더니, 몸도 같이 움찔한 것을 보았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정훈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 엄…마? "
+ 지훈이 버전은 두 세 편으로 나눠서 하지 않을까 싶어요!
댓글 반응을 보니 우진이 나쁘다며,, 맞아요 원래 더 나쁘게 하려다 말았는데..
아무튼 댓글도 사랑하고 여러분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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