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린다. 새햐얀 눈이 내 발에 찬찬히 떨어졌다. 어느새 눈은 온 세상을 새하얗게- 소복히 덮어 눈부시게 새햐얀 세상을 만들어냈다. 손등에 차가운 게 닿았다가 사라졌다. 눈송이가, 눈꽃이. 손등에, 옷자락에 천천히 내려앉았다가 제 모습을 감추었다. 차가워. 그렇게만 생각했었는데 어쩐지 눈꽃이 손 안에 담길 때마다. 마음은...
언뜻, 낯설고도 익숙한 목소리가 마음을 파고들었다. 흐릿하게 잔상으로 남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한참을 눈이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몸을 돌려 다시 병실로 향했다.
“야- 한여주. 어디갔었어.”
“너 말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니까.”
아무런 말없이 사라진 나에 놀랐는지. 정호석과 박지민은 인상을 찌푸리며 아이를 다그치듯 말했다.
“박지민, 지금이 정말 2016년이야?”
“어, 너 아직도 ...기억이 잘 안나? 하나도?”
“그냥...난 2015년에 있었는데. 깨어나보니 2016년이잖아.”
약 1년간의 기억이 통째로 날아갔다. 누군가가 일부로 삭제해버린 비디오 영상처럼 떠오르는 건 없었다. 심지어 잔상이 남은 것도, 그냥 뭣도 없었다. 그 부분은 그냥 잘린 채 2015년의 초봄에서 타임워프라도 하듯 2016년의 초봄으로 건너왔다.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1년간 뭘 한 건지를. 하필 맨날 같이 붙어다니던 정호석과 박지민도 군대에 가 있을 때였고. 사용하던 휴대폰은 사고현장에서 산산조각이 나서 복구조차 불가능했다. 간신히 살던 집을 알아내 짐을 추려왔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그러니 특별히 변한 것도 없었어야만 했는데.
1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 날 이후로 내게는 좀. 특별한 변화가 생겼으니까.
***
이별을 도와드립니다
W.체리빛
Chapter 2.
“아, 뭐 그럼 그 여자분 얘기 자세히 해주실래요?”
“음...걔는 진짜. 이상해요. 사람 지치게 한다고 해야되나.”
아까 그 패기 넘치던 남자는 어디가고. 한숨을 쉬며 얘기를 하는 모습에서 언뜻 언뜻. 아직 어린 고등학생의 모습이 묻어나오는 게 보였다. 어리긴 어리네. 남자의 얘기를 듣다보니 그닥 어려운 일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여학생이 좀... 좋게 말하면 활기찬? 나쁘게 말하면... 무대포. 인 것 같은데. 아직 세상 무서울 것 없는 고등학생이라서. 아니면 되게 사랑 많이 받고 자란, 가정이 화목한 아이라서 그러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얘기를 주고받고서 이야기가 마무리 될 때쯤 남자가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꽤 진지하고 정중하게 말하는 탓에. 나도 네. 그럴게요. 라고 진중하게 대답했다.
남자가 나가고 얼마 뒤 신이 나서 양손에 뭔가를 가득 든 채로 들어오는 정호석과 박지민이 보였다. 이것들이 일 안하고- 어디있다가. 아주 하나부터 열까지 맘에 안 들게 행동하지 오늘.야- 너네 오늘 땡땡이 친 거까지 빡세게 일 시킬거야. 너네 하기 싫다는 것도 다- 시킬거니까. 마음 단단히 먹어라. 자세를 삐딱하게 한 채로 으름장을 놓으며 말했다. 그러자 비닐봉지를 뒤지더니 과자와 음료수를 손에 쥐어주며 용서해달라고 되도 않는 애교를 피우길래. 더욱 인상을 쓰며. 웃기지마- 내가 이런 걸로 마음이 풀릴 거 같아? 하고는 몸을 돌려 내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손에 쥐어준 과자봉지를 뜯으면서. 흠... 뭐 과자는 맛있네.
***
“야. 저기 쟤 아니야? 맞지. 맞지?”
“어디? 어디? 오- 맞는 거 같은데?”
“야- 둘 다 조용히 해”
아... 진짜 괜히 데리고 나왔어. 그냥 혼자 올 걸. 내가 미쳤지. 미쳤어. 하... 옆에서 계속해서 쫑알쫑알 거리는 녀석들 탓에 일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버럭 화를 내고 나서야. 아ㄹ..알았어... 라며 입을 다무는 두 녀석이다.
팀을 나누어 담당하기로 했다. 나는 그 여자아이를 미행하는 걸로. 아, 내가 맡은 이유는 딱 하나다. 쟤네가 따라다니면 너무 수상해보이잖아... 어디선가 신고당해서 잡혀갈지도 모르는 모자란 녀석들을 위해 가장 위험성이 높은 일을 하게 되었다. 넉살 좋은 정호석은 그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정보를 얻기로 했고, 박지민은 그 남자, 전정국을 만나 더 자세한 얘기를 듣기로 했다.
“야, 맡은 일 잘해.”
“아- 내가 또 일을 또 허벌나게 잘하지이-”
“허세 그만부리고 일이나 똑.바.로 해서 제대로 된 정보 얻어와라.”
“...”
“또 저번처럼 그냥 수다나 떨고 오면 너 진짜 확-”
일은 제대로 해오기는 할지. 걱정되는 마음에 일 잘 하라고 하자. 자기는 일을 엄청 잘한다면서 허세를 부리는 녀석을 쳐다보지 않고, 똑바로 하라고 말했다. 박지민처럼 가만히나 있던가.저번에도 같은 포지션을 담당한 적이 있었는데. 대화를 엄청 하길래. 무슨 큰 정보를 얻어오는 줄 알았더니. 90%는 쓸데없는 대화를 나눈 것 같았다. 이번에도 그러면 어떻게 할까... 잘하자 호석아. 잔뜩 으름장을 놓고 나서야 각자 할 일을 하러 찢어졌다.
**
무슨 고등학생이 저렇게 여기저기를 쏘다니는지. 내가 미행하는 걸 알아채고 일부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사람처럼 여자아이는 쉴 틈 없이 계속해서 돌아다녔다. 가뜩이나 사람들도 많은 번화가라서 여자아이를 따라다니는 자체가 힘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그렇기 때문에 여자아이가 내가 따라가는 걸 눈치 채지 못한 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따라다녔을까. 별 소득도 없고. 힘만 들어서 잠시 숨을 고르며 서있었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누군가 내 팔을 확- 잡아당기는 바람에. 내 몸은 저절로 돌아. 나를 잡아당긴 사람을 바라보게 되었다. 전혀 안면이 없는 사람이었다. 사람 잘 못 본 건가? 남자는 나를 놓칠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내 팔을 더 강하게. 빈틈없이 잡아왔다. 남자의 악력에 손목이 저릿해지는 것 같아서. 사람을 잘 못 보신 것 같다고 말하며. 손을 빼내려하는데.
“한여주.”
내 이름을 불렀다. ...잘못 들은 건가? 내 귀를 의심했다. 분명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한여주.”
“...”
“여주야...”
다시 한번 정확히 내 이름을 부르는 남자를 올려다보자. 어딘가 슬픈 눈으로 나를 응시하던 남자는 나를 세게 끌어안았다. 여주야. 여주야... 내 이름만을 반복하면서.
내 기억 속에는 없는 사람이었다. 정말로.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 남자에게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하고 망부석처럼 굳어서 그저 안겨있었다. 한참이 지났을까. 먼저 정신을 차린 내가 남자에게서 황급히 벗어났다.
“저기... 죄송한데. 저 아세요?”
내 질문을 듣자마자. 남자의 눈에 의구심이 피어나는 것이 눈에 뻔히 보였다. 너무 잘 보여서 미안할만큼. 남자는 오히려 제가 더 당황해서. 한여주 아니예요? 그러고는 중얼거렸다. 아닌데. 여주 맞는데. 여주인데... 남자의 처량하고 애달아보이는 중얼거림이 내 귀에 닿았다.
“저... 어떻게 아시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제 이름은 한여주는 맞아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의 눈은 기대감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는데.
“근데. 저는 그 쪽을 잘 모르겠네요. 음... 혹시 예전에 아는 사이였을까요?”
“...아는 사이.”
허탈한 목소리가 들렸고, 눈에 번져가던 기대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고요한 어둠이 남자의 눈을 채워가고 있었다. 아는 사이...밖에 안됐나. 우리가. 삐딱하게, 공허하게 내뱉는 남자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 목소리에, 눈빛에 내 마음 한 구석이 저릿-해져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사고로 1년간의 기억이 사라져서 그 안에 만난 분이면...기억을 못해요.”
“기억이...사라져?”
놀라서 눈이 동그래져 물어오는 남자에. 네. 음... 그러니까. 그 쪽이 찾는 사람이 저 맞다면 아마 2015년에 만났을 거예요.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기억하지 못하는 미안함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제 사라진 기억이 2015년의 기억들이라서. 기억하지 못해서...”
사과를 건네야만 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들에게. 그리고 그 시간에 함께 머물렀던 사람들에게. 기억하지 못한 미안함을 건네는 일은 언제나...
“...죄송합니다.”
나를 가장 아프게 만들었다.
아무리 사과를 건네도. 기억은 되돌아오지 못하니까.
**
그렇게 사과를 건넨 후는 간단했다. 사과를 건네고. 괜찮다는 말을 듣고. 다만, 평소 그랬던 것과는 달리. 남자는 제 번호를 건네고, 내 번호를 받아갔다. 지금까지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만났을 땐 그저 사과하고 간단한 인사를 한 게 전부였는데. 남자는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내 번호를 받아갔다. 무슨 정신으로 사무실에 돌아왔는지 정말 단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남자의 존재는 강렬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미 다 끝을 낸 건지. 앉아있는 정호석, 박지민이 보였다. 그리고, 전정국, 그 남자도. 박지민과의 대화가 다 마무리 지어지지 않았나보지. 그것보다 내게는 중요한 게 있어서. 왔냐고 인사를 건네는 녀석들의 말을 무시하며. 사뭇- 비장하게 다가가 말했다.
“야. 박지민, 나 좀 빨리 안아봐.”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내 부탁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박지민이 무슨 소리냐며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옆에서 정호석은 우리의 상황이 웃겼는지.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는데. 아, 그냥 빨리 안아봐봐. 장난인 줄 알았었는지. 다시 한 번 말하는 나에 어느새 웃음을 멈추고 의문스레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박지민은 아...진짜 한여주 왜 그래. 말은 투덜거리면서도 시키는 대로 나를 끌어안았다. 역시, 심장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너무 오래봐서 그런가? 친구라서? 박지민에게 이제 됐어. 라며 녀석의 품에서 빠져나왔지만 확신을 가지지를 못하겠어서. 좀 미친 것 같게도. 이 자리에 있는 게 잘못인거지.
“전정국씨. 나 좀 세게 안아볼래요?”
자리에 앉아있던. 친구도 뭣도 아닌 그 남자, 전정국에게 부탁했다.
동공지진을 일으키며, 네? 하고 놀란 표정으로 나를 멍청히 쳐다보는 그에게. 확인할 게 있어서 그러니까 빨리요. 가만히 지켜만 보던 정호석이 미쳤냐고 물어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전정국을 재촉했다. 안 그러면 의뢰고 뭐고 안 하겠다고 협박하자. 제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던 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전정국은 협박하니까. 해드리는데, 자기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나도 그쪽한테 관심있어서 하는 건 아닌데. 뭔 착각이야. 그것보다는 확인이 더 급해서.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재촉하자. 잠시 한숨을 쉬던 그가 나를 잡아당겨 세게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다시 팔을 풀며. 됐죠? 이제 의뢰가지고 협박하지 마세요. 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옆에서 정호석과 박지민이 미쳤나봐. 한여주 드디어 미쳤나봐. 따위의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지만. 그런 건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중요한 건, 박지민이든. 전정국이든. 내 심장은 조금도 반응하지 않고, 아주 평온-했다는 점이었다. 정말로.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런데... 아까 그 남자에게 안겼을 때는
“분명... 심장이 뛰었었는데. 반응했는데...”
내 말에 놀란 표정으로 정호석이 물어왔다. 무슨 소리야? 너 뭐. 무슨 일 있었어? 심장이 반응을 해? 누구한테. 잠시도 말을 쉬지 않고 몰아붙이는 녀석이 시끄러웠다. 진정을 시키며 두 사람도 자리에 앉힌 후. 사무실에 오기 전의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사무실에는 잠시 정적만이 맴돌았다. 몇 분 후 조용히 고민을 하던 박지민이 입을 열었다.
“...근데, 너. 그 사고 이후에 심장 반응 안했잖아”
나는 그 사고 이후로
“너. 그 이후로 설레거나, 가슴이 떨린다던가 그런 거 못 느낀다며. 아니야?”
더 이상 설레는, 가슴 떨리는. 즉 사랑과 관련되어서 단 한번도. 한 순간도.
심장이 누군가에게 반응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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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질문
Q. 여주가 만난 사람은 누구일까요?
어 일단 감사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어요.
이건 진심입니다!!!!!
소재가 신선하다고 많이들 칭찬해주셨는데... 감사합니다. (ㅠㅠ혼자서 감동해서 울 뻔...)
그리고 첫 화 밖에 안됐는데도 암호닉 11분이나 신청해주셨어요. 엉엉 감사합니다.
댓글 남겨주신 분들 정말 고마워요 ♥
진짜 엄청난 힘이 되어서 글을 좀 더 빨리 들고오게 되었답니다.
하지만 오늘 글은 썩 잘 쓴 거 같지 않아요.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더 다듬어서 다음 편을 들고오겠습니다.
다음화에서 봐요!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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