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 導儺愛夢(도라애몽) - 上
w. 로망틱
-
장르 체인지 - 로맨틱 코미디
교수님
듣고 계세요?
물론 듣고 계실리가 없겠죠. 왜냐하면, 교수님은 지금쯤 편안한 집 침대에 누워 주말 예능프로를 보고 계실 테니까요.
저는 이렇게, 도서관 여행을 나왔답니다. 교수님의 넘치는 사랑에 못 이겨 남은 과제를 해치우러요.
오갈 데 없는 어린 양을 친히 거두어주시고 나아갈 길을 마련해주시는 우리 교수님 너~어무 너무 고맙습니다.
비꼬는 것 같다고요?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비록 오늘 친구와 옷 사러 가기로 한 약속, 9시 이후 술 약속까지 모두 취소가 되었지만 저는 정말 괜찮아요!
정말! 정말 괜찮아요!
-
'죽고 싶다'라는 생각이 '죽이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때는 후덥지근한 6월,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엄청난 과제량에 정신을 못 차리곤 폐인 마냥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찰나였다. 생각해보니 나 고3 현역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뭐 캠퍼스 로망이니 들판에서 치맥 까먹고 이런 거 다 개소리다 진짜 개소리다.
'아버지 날 보고 있다면 정답을 알려줘-.'
개별 과제를 마치고 나면 그 악명높다고 소문난 이름값 하는 조별과제가 남아있었다. 먼저 시작한 다른 동기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주 가관이다. 첫 조모임 때부터 눈맞아서 과제고 뭐고 모텔방 전전한다는 양아치 커플 탄생 속보부터 이 자료 어디서 났어요? - 네이버 지식인이요 까지. 내가 이러려고 미친 듯이 공부해서 이 대학 온 건지 몹시 자괴감이 든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진짜 죽고 싶다. 살기 싫다. 정말 살기 싫다.'
이젠 프린트물의 글자가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아니, 내가 알파고도 아니고 대체 이 많은 자료를 어떻게 3일 내에 분석해서 나만의 스타일로 요약까지 해오란 말인가. 나만의 스타일은 또 뭐야. 나 다운 게 뭔데! 대체 나 다운 게 뭐냐고!
뭐 그것만 있으면 그래도 어떻게든 해보려 애썼을 테다. 마치 연예인이 된듯한 기분이다. 어떻게든 내 손을 거치고 싶어 안달이 난 과제들이 이렇게나 수두룩했으니까. 그러니까 애초에 기가 빠진다 이거다.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이만한 과제들이 또, 또 있고 그를 해치우고 나면 또 보란 듯이 새로 갱신될 게 뻔했다. 교수님은 내가 자기 수업밖에 안 듣는 줄 아시니까.
'살기 싫다, 죽고 싶다 진짜로.'
고등학교 시절 내게 죽고 싶다-,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아이가 있었는데, 난 늘 진지하게 그 아이에게 화를 내곤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귀한 생명을 두고 왜 그런 듣기 싫은 소리를 하냐며. 모든 생명은 소중하며, 이번 모의고사는 단지 남아있는 10번의 모의고사 중 단 3번째에 불과하다며 남은 7번의 모의고사를 잘 치면 된다는 그런 선교사적인 마인드 탑재에 설교까지. 아아-, 열아홉의 나는 정말로 순백 그 자체였나보다.
지금은 이렇게 보란 듯이 찌들어버렸으니, 잠시 교내카페에 가 카페인 충전이라도 할 참이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어두워지는 창문 밖 풍경이 왜 이리도 내 마음을 시리게 하는지. 뭐 청춘이니까, 대학생의 특권이니까-,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해보겠어 따위의 되지도 않는 주입식 청춘 마인드로 내 요동치는 마음을 좀 잠재워보려던 찰나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보고 있던 공책을 그대로 덮으려 했다. 그러나 내 손은 보란 듯이 공책을 관통하고야 말았다. 처음엔 당황하면서도 아직 내가 잠이 덜 깼나 보구나 싶어 다시 손을 가져다 댔는데, 이건 진짜였다. 깜짝 놀라며 입을 크게 벌리고선 주위를 살폈다. 마치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듯 내가 그렇게 당황한 티를 냈음에도 내게 신경을 쓰는 이 하나 없었다. 아, 그럼 잠이 덜 깬 게 아니라 아직 잠을 자고 있는 중이구나!
이런걸 루시드 드림이라고 하던가. 예전에 동기 중 하나가 나더러 최근 루시드 드림이란 걸 시도하고 있는데 좀체 잘 먹히질 않는다며 투덜댄 적이 있었다. 그때야 다들 어이없는 반응을 보이며 무슨 그런 걸 믿느냐고 핀잔을 주곤 했는데, 굳이 시도도 하지 않은 내가 그걸 보란 듯이 성공하다니. 역시 하나님이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신자가 있다는 걸 알곤 이런 깜짝 이벤트까지 준비해주시다니.
그도 잠시, 내겐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무리 꿈속이라 할지라도 현실의 내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고, 내게 주어진 과제의 양은 늘어났으면 늘어났지 줄진 않을 테니까. 고로 나는 딜레마에 빠졌다. 어쩌면 두 번 다시 겪지 못할 수도 있는 이런 진귀한 경험을 계속 이어나가느냐, 혹은 당장 잠에서 깨곤 밀린 과제를 어서 빨리 해치우느냐. 결국 나는 매정한 현실에 굴복해 후자를 선택하고야 말았다.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동기는 분명 무언가 특정 행동을 섣불리 시도한다면 루시드 드림-, 자각몽에서 깨어날 수 있다고 했다. 그랬기에 나는 우선 도서관 책상 위로 올라가 춤을 추려 했다. 비록 책상을 관통해버리는 내 두 다리에 그를 실현할 수는 없었지만. 어쩌다 조금 힘을 줬더니 공중에 둥둥 떠다닐 수 있게 되었다. 우주까지 나가지 않아도 무중력 상태도 경험하고 이거 완전 창조경제다. 과제 걱정에 마음이 조마조마하긴 했지만 동기들에게 어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여러모로 신이 나기도 했다.
그러기도 잠시, 나는 동기의 '특정 행동'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의아해졌다. 공중에서 비보잉도 했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약 올리기까지 했다. 어차피 그들은 날 볼 수 없을 테니까. 최후의 수단으로 내 몸을 다시 비집고 들어가 꿈에서 깨려 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게 먹히지 않았다. 조금 꼬였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해?"
"으억!"
화들짝 놀라며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설마 나와 같이 자각몽을 꾸고 있는 사람과 꿈에서 접선까지 한 건가? 싶어 설렘과 흥분을 좀체 감추질 못했다. 어쩌면 인셉션이라는 게 진짜로 있을지 모르잖아. 몇 년 전 봤던 영화를 가까스로 떠올리려 애쓰며 느닷없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나타나 날 제 조직에 캐스팅해가진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했다.
웬 남자가 날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학교 학생들에게만 도서관이 개방되니 우리 학교 학생인 건 분명한데, 우리 학교에서 이만한 인물이 있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다. 설령 그가 복학생이라고 해도 왜, 소문은 빠르게 돌지 않는가. 이 정도로 생긴 사람이 버젓이 우리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여태 내 귀에 이 남자의 이름이 오르내린 적이 없었다니. 흔히 말하는 아웃사이더 생활을 해도 난리가 날 정도의 그런 외모인데.
"저, 그쪽도 지금 그거 하고 있는 거 맞죠? 루시드 드림!"
"…뭐?"
초반부터 반말이라니 기분이 썩 그리 좋지 못했지만 그의 얼굴은 날 행복하게 했으니 된 일이었다. 원래 그렇게 생긴 애들이 성격도 얼굴값 하는 거라고, 나는 애써 웃으며 그와의 공통점을 찾으려 애썼다.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나중에 꿈에서 깨고 나서 이게 좋은 인연이 되어 나중에 밥 한 끼나 할지. 그렇게 같이 루시드 드림 동호회에 들어가고, 그러다 눈이 맞고 뭐 그런 거.
"루시드 드림이요! 자각몽! 지금 꿈꾸고 있는 거잖아요."
"아니?"
"…네?"
너무나도 당당한 남자의 반응에 말문이 막힌다는 게 이런 걸까 싶었다. 아무리 잘생겨도 그렇지 사람을 이렇게나 무안하게 만들다니 심장에 해롭다. 이렇게 까칠해야 길들이는 맛이 있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선 말이다.
"지금 네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해?"
"이게 꿈이 아니라면 뭔데요?"
이게 무슨 말이지 싶어 조심스레 물었다. 아, 이 남자 혹시 도를 믿습니까 같은 곳에서 나온 사람인가. 그러면 뭐 주위에 친구들이 없을 법도 하겠다. 그래도 나라면 끔뻑 넘어가선 좋다고 옥장판이고 다단계고 모두 해치울 것 같긴 하지만.
"너 죽었어."
"…네?"
"너 죽었다고. 너 귀신이야, 이제."
꼬여도 정말 이상한 사람과 꼬였지 싶었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마세요-! 라는 도덕책에나 익히 나올법한 문구가 다시 한번 가슴속에 되새겨지는 순간이었다. 더는 이상한 그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아 책상에 대고 머리를 박으려 애썼다. 그렇게라도 해야 이 꿈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애석하게도 내 머리는 보란 듯이 책상을 관통했고 그런 나의 모습이 꽤 우스웠는지 남자는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왜 웃어요? 당신 이쪽 전문가죠? 저 지금 해야 할 과제 많으니까 저 좀 깨워줘요. 깰 수 있는 방법 좀 알려달라고요."
"과제를 왜 해? 죽었다니까 너. 제적처리 될 텐데 과제를 해서 뭐해?"
"저기요. 이거 진-짜 재미없거든요. 저 잘 웃는 편인데도 이건 하나도 안 웃겨요. 저 급하니까 좀 깨워주세요, 빨리."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선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는 남자에 좀체 상황파악이 되지 않아 가슴이 답답해지려던 찰나였다. 왜 제게 화를 내느냐는 남자의 물음에 내가 화를 냈던가-? 생각했다. 뭐 상황이 워낙 꽉 막혔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나 보다. 최대한 나긋나긋한 말투로 그에게 다시 청했다. 나 좀 깨워달라고.
"이게 네가 원한 거 아니었어? 죽는 거."
"…네?"
"왜, 죽고 싶다며. 살기 싫다 해서 죽여줬더니. 어디 보자. 이번 달에만 죽고 싶다고 말한 게 400번이 넘네. 간절해 보여서 네 바람 이루-,"
"뭐, 뭐라고요?"
진짜 제대로 정신 나간 사람인 것 같아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저 나름대로는 진지한 것인지 꽤 심각한 표정을 지은 남자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선 그를 차례로 읊기 시작했다.
"6월 1일 3시 42분 투썸 카페에서 '아 평생 이것만 먹다 뒤지고 싶다' 한 번, 6월 1일 6시 27분 코인 모아 동전노래방에서 '아 선곡 왜 이래 죽고 싶네' 한 번, 6월 3일 5시 33분 교내 도서관에서 속마음으로 죽고 싶다 17번, 6월 3일-,"
"자, 잠시만요. 지금 뭐 하시는 건데요?"
"보면 모르겠어? 네가 이번 한 달 동안 몇 번 죽고 싶다고 했는지 기록해둔 거잖아. 못 믿겠으면 여기. 내 권능이 부여된 수첩이라 만질 수 있을 거야."
이윽고 남자가 내게 제 수첩을 건넸다. 못 이기는 척 받아 들었지만 이미 내 두 손은 심각하게 덜덜 떨리고 있는 상태였다. 수치사라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이건 전부 내가 한 말이 맞다. 무의식중에 내뱉었건 맨정신에 내뱉었건. 그나저나 이 남자는 대체 뭔데 내 일거수일투족을 이렇게 세세하게 알고 있는 것인지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당황스러움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빤히 그 남자를 바라만 보고 있자 무언가 해명할 게 있다는 듯 입을 연 남자였다.
"아, 내가 좀 아날로그 감성이 있어서 직접 기록하는 걸 좋아하거든. 요즘 악마들이야 다 첨단기기 쓴다지만 난 아직 그게 좋아."
해명하고자 하는 그 포인트가 나와는 조금 다른 것 같았지만, 해맑은 얼굴로 아날로그 감성이니 악마 따위를 운운하는 게 우스울 지경이었다. 어-, 잠깐. 악마?
"악마-, 악마라고요?"
"응, 악마. 왜. 이렇게 잘생긴 악마는 처음 봐?"
음-, 그래. 세상은 넓고, 미친놈들은 많다. 지난번 조별과제 때 걸린 애들만 봐도 그랬으니까. 술자리에서는 또 어떻고. 잔뜩 술에 취해선 인형뽑기 기계 안에 들어가겠다고 그 좁은 구멍에 대가리를 집어넣는 애들도 수두룩한데 뭐, 이런 애도 있어 줘야 사람 사는 재미가 있지-, 하며 심호흡을 한 나였다. 터지기 일보 직전. 겨우내 숨을 고른 나는 미친 듯이 내 안에 가득 쌓인 당혹스러움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야-, 이 정신 나간 중2병아. 장난도 정도가 있지 사람 목숨으로 그러니까 좋냐? 뭐? 악마? 이게 진짜 학교 도서관을 서코로 아나 진짜 야 '이렇게 잘생긴 악마는 처음 봐?' 이런 말은 트위터에서나 하는 거고, 나 참 잘생긴 거 인정하는데 현실에서 이런 말 하는 사람 처음 봤네 진짜. 지금 진짜 하나도 재미없거든요. 아날로그 감성이 있는 님아, 노잼이라는 말은 아세요? 진짜 노잼 그 자체니까 저 좀 제발! 좀! 깨워 달라고요 좀!"
이 정도면 솔직히 쇼미더머니 합격 목걸이 목에 자랑스럽게 걸 수 있을 정도였다. 온 힘을 다해 내가 지금 얼마나 과제가 급한지 그에게 잔뜩 어필했으나 오히려 나의 간절함이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것 같았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선 험악한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에 혹여나 그가 정말 악마여서 날 염라대왕 곁에 친히 두게 하겠다고 하면 어쩌지-, 따위의 걱정을 했다.
"어떻게 하면 믿을래?"
"…네?"
"이렇게 하면 믿을 수 있겠어?"
그가 손가락을맞부딪혀 경쾌한 딱-, 소리를 내자마자 거짓말처럼 도서관 안의 불이 모두 꺼졌다. 사람들이 모두 무슨 일이냐며 웅성거렸고, 이내 다들 휴대전화에서 플래시를 켜선 여기저기를 비추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가 다시 한번 더 손짓했고, 그 소리가 다시금 도서관 안을 가득 채우자마자 불이 들어왔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진-, 진짜 악마란 말이에요?"
"그래. 이렇게 귀한 몸인 내가 굳이 네게 거짓말을 할 필요가 뭐 있겠어?"
워낙 내가 간절해 보였기에 내 소원을 들어준 거랬다. 그럼 과제 좀 누가 대신해주면 좋겠다-, 라는 소원은 대체 왜 안 들어준 것인지. 꼴에 악마라고 자극적인 것만 골라서 제가 듣고 싶은 것만 들었나 보다.
"악마는, 사람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거예요? 바로 이렇게 절 죽였던 것처럼요?"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21세기 악마다워야지. 중세시대 그런 게 아니라. 방금 내가 네게 보여줬던 수첩, 그게 증거물이었어. 아래쪽에서 얘기하길, 네가 너무 간절해 보이니 하루빨리 죽이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죽였지."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고자 던진 질문이었는데 생각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인 남자였다. 이렇게 된 이상 나도 막무가내로 나가고자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진짜 죽었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으니까. 그냥 꿈, 혹은 그보다 더한 꿈속의 꿈이겠거니 했지.
"그럼 저, 원래 이렇게 죽을 운명이었던 건가요? 이제 다신 돌아갈 수 없는 거죠?"
남자는 아무 말을 않고 서 있었다. 그제야 조금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다시금 책상으로 다가가 수첩을 비롯한 갖가지 필기도구를 잡으려 애썼다. 허망하게도 모두 내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올 뿐이었다.
"너, 죽는 걸 원치 않았나 보구나."
"하-, 당연하죠. 그건 그냥 하는 말이라고요. 왜, 혼잣말 같은 거 있잖아요."
시종일관 해맑게 웃고 있던 남자는 금세 시무룩해진 내 얼굴을 보고선 곧장 표정을 굳혔다. 제 딴에는 내가 그토록 간절히 바란 소원을 들어준 것뿐인데, 정작 내 반응은 제가 원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흘러간다는 듯이.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
"최현민이라는 사람도 죽일 수 있어요? 저널리즘 담당하는 교수인데, 아니, 다른 건 아니고 뭐, 그 사람 요즘 많이 피곤해 보이는 것 같아서. 일찍 돌아가서 뭐 눈 좀 붙이면 좋잖아요?"
짐짓 분위기가 심각해지려던 찰나 내뱉은 나의 말에 그 남자는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한참을 소리 내 웃던 남자는 이내 조금 삐져나온 눈물을 옷자락으로 훔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악마는 평생 한 사람하고만 계약할 수 있어."
"…그럼, 제가 당신 평생의 그 한 사람이라고요?"
"응. 간절해 보여서, 네가 자꾸 눈에 밟혔어. 너만 따라다녔거든."
제 눈앞의 이 남자를 대체 어쩌면 좋을까. 좀체 정리가 되질 않는 상황에 적응하기도 어려운데, 자꾸만 오락가락하는 이 남자의 기분을 맞춰주기도 꽤 고역이었다. 진짜 꿈인가-, 싶다가도 현실인 것 같기도 하고.
"이거 공권력 남용 아녜요?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어?"
"그럼 다시 살려줄게."
"…네?"
"살려줄게. 살려주면 되지."
이렇게 쉽게 죽였다 다시 살릴 수 있다면, 아까 그렇게 불쌍한 표정을 지을 건 또 뭐란 말인가. 괜한 동정심까지 품게 만들어 놓고선. 그정도는 별 무리도 아니라는 듯 너무나 쉽게 말을 내뱉는 남자에 어이가 없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었다. 이렇게 저를 막무가내로 가지고 노는 남자에 아까처럼 버럭 성질을 낼까, 하다가도 더는 이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기에 그저 살려달라고만 했다. 어서 빨리 자신을 살려달라고.
남자는 생긋 웃으며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렇게 고통 없이 죽기가 쉬운 게 아니라며, 언젠가 이렇게 귀신 생활을 할 때가 그리울 날이 있을 거라며 말이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난 아직 우리 집 앞에 새로 개업한 규카츠 집도 못 가봤고, 친구들과 배 터지게 피자 먹기 미션도 못 깬 상태다. 먹는 즐거움을 모르는 그런 생활 하고 싶지 않아 한사코 고개를 내젓고 싶었으나 갑자기 음식의 참맛을 느끼지 못할 그가 딱해 대충 장단을 맞춰주며 상황을 애써 모면했다.
"내가 다시 이 손가락을 맞부딪히면, 꿈에서 깨어날 거야.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 어떨 것 같아?"
"글쎄요. 아직 안 겪어봐서 모르겠는데."
긴말 안 할게-, 라고 덧붙인 남자는 싱긋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남자가 이전에 제 권위를 확인시켜 주겠답시고 했던 것처럼 손가락을 맞부딪히자 온몸의 기운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곤 암전. 다시 정전이 됐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저 내가 눈을 감고 있었던 것뿐이지. 수첩도 만져지고, 형광펜의 느낌도 그대로였다. 흔히 드라마에서 그러하듯 볼도 꼬집어 봤다. 모든 게 원상태로 돌아왔다.
어쩌면 진짜 꿈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피로가 가신 듯 개운함이 느껴졌으니 얼마나 푹 잤는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래도 밤샘 과제를 위해선 카페인이 필수였으니, 지갑도 만져지겠다 카페를 가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누가 보면 미친년이라 할 게 뻔하지. 최신 유행곡부터 아버지 취향의 트로트까지 섭렵하며 바쁘게 대학로를 쏘다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하고 카드를 꺼내는데-.
"내 건?"
등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아닐 거야, 아닐 거야 되뇌며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섰다. 고개만 돌려 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뭐라고 이렇게 떨리는지. 카드, 멀쩡히 내 손에 쥐어져 있고-, 카페 선반도 모두 잘 만져진다. 죽은 건 아닐 테고, 그럼 대체 뭐란 말이지?
고개를 확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분명 아까 보았던 그 남자, 김태형. 그의 두 발은 땅에서 떨어져 있었고, 그림자 하나 드리우지 않았다. 여유롭게 휘파람을 불며 카페 내부를 유유히 휘젓는 그 모습에 말문이 막힌다는 게 이런 걸까 싶었다.
"저, 손님. 계산하셔야 하는데-."
카페 아르바이트생이 머뭇거리며 내게 카드를 달라는 듯 손을 뻗었다. 남자에게 카드를 건네주며 넌지시 물었다.
"저기, 다른 건 아니고. 이 카페에 지금 우리 둘밖에 없는 거 맞죠?"
내 물음이 끝나자마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곤란하다는 어투로 내게 이렇게 답한 남자였다. 아, 저 여자친구 있어서-.
그 말을 들은 자칭 악마, 김태형은 미친 듯이 배를 부여잡고 웃어댔다. 아니, 어떻게 이 말이 작업 멘트로 들릴 수 있는 거지? 그저 아르바이트생에게 김태형이 보이는지를 확인하려 한 것이었는데, 본의 아니게 이런 어색한 상황을 만들어버렸으니.
"재밌네. 저 남자가 마음에 들어? 나보다? 조금 섭섭하다."
커피를 받아들고 카페를 빠져나오는 길. 내 주위를 정신없이 둥둥 떠다니며 내게 말을 거는 그 남자가 뚜렷이 보였음에도 나는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 정신 사납게 구는 남자에 하필이면 발을 헛디뎌 차에 부딪혀 튕겨 나갈뻔했다. 그가 먼저 그를 알아채고 제 권능을 시행할 수 있는 특유의 동작-, 핑거 스냅을 해준 덕분에 그를 피할 수 있었지만.
"장난쳐요? 왜 자꾸 옆에 나타나서 알짱거리는 건데요!"
혹여나 사람들이 들을까 스산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누군가 지나가면 통화하는 척이라도 하려 휴대전화까지 단단히 한 손에 쥔 상태였다. 그 남자는 여전히 내 주위를 둥둥 떠다니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너랑 나, 계약됐다니까."
"계약 파기 못해요?"
"응. 왜? 너 내가 그렇게 싫어? 난 네가 마음에 들어서 널 선택한 거였는데."
"하-, 이유라도 압시다. 기분 좋아서 그런 건 아니고, 제 어디가 그렇게 좋았는데요?"
"이유? 글쎄. 그런 게 굳이 필요해?"
순간 오토바이를 타고선 골목을 지나가는 배달원에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그래, 내가 이 남자에게 애초에 뭘 기대를 해.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요. 이렇게 자꾸 제 주위를 맴돌 참이세요? 제가 어딜 가던 계속 따라다니고?"
"씻을 때는 안 건드릴게."
"그건 당연한 거고요. 아니, 그쪽 동네 악마들은 일 없답니까? 뭐 지나가는 천사 돈 뺏고 이런 거 좀 하세요. 나한테 들러붙는 게 아니라."
다시금 지나가는 또 다른 오토바이 한 대. 장소를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지 싶었다. 아마 요 근처 동네 배달원들의 핫플레이스, 베테랑 중의 베테랑만 안다는 지름길인 듯했다.
"실은 나, 해야 될 일이 있어. 그게 무사히 끝나면 우리 계약도 끝이야."
그렇지. 사회생활 하며 배운 것 중 하나다. 절대 사람들은 내게 목적 없이 접근하지 않는다. 무언가 내게서 원하는 게 있었기에 내 주위를 맴도는 것이니까. 그런데 그게 사회생활에서 그치는 게 아닌, 사후 생활까지 이어질 줄이야. 젠장.
일단 들어나 보자 싶었다. 당장 급한 과제에 내가 대체 왜 이 남자의 장단에 놀아나고 있어야 하나 싶었지만 그래도 궁금하긴 했으니까. 죄 없는 나를 죽였다, 살렸다. 게다가 내 근처를 빙빙 맴돌기까지. 대체 내가 뭐라고.
"나,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
"그게 왜요."
"그게 왜라니?"
"…그래서,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환생. 환생이 하고 싶어."
음-. 그러니까, 정리해보자. 나는 도서관에서 과제를 하고 있었고, 어마어마한 과제량에 그저 죽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진짜 죽어버렸다. 알고 보니 내 혼잣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이 악마라는 남자가 제멋대로 날 죽인 거였고, 내가 살려달라 했더니 또 순순히 살려줬다. 그리곤 지금 내 주변을 쉴 새 없이 맴돌며 우린 이미 계약이 된 상태라 이렇게 날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며, 이젠 느닷없이 제 소원을 들어달란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환생을 도와달라고.
"저기, 김태형 씨. 그냥 편하게 말하세요. 내가 당신 소원을 제일 무난하게 들어줄 거 같이 어리바리하게 생겨서 날 선택한 거잖아요. 그렇죠? 뭘 내가 마음에 드네 마네야. 아, 마음에 들긴 들었겠다. 호갱 같이 생긴 게 부려먹긴 딱이었으니까."
"……."
"왜요.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요. 이제 뭘 하면 되죠? 불로초라도 구해 올까요? 아님, 같이 비행기 타고 중국 여행 좀 할래요? 진시황 무덤 파보면 뭐 나올지도 모르잖아. 당신 악마니까 도굴쯤은 껌이지?"
그를 또 잔뜩 쏘아붙이자 아까와 같은 측은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그였다. 뭐가 그리 쌓인 게 많은지, 온 세상 눈물방울이란 방울은 다 끌어모아 단번에 터뜨릴 법한 그런 눈빛으로.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
"아, 글쎄.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니까요! 그런다고 내 마음에 뭐 흔들리거나 변할 줄 알아요?"
결과만 놓고 말하자면, 내 마음은 흔들리거나 변했다. 평소 애들 부탁 거절 못 해서 조별과제도 혼자 씩씩대면서 도맡곤 했는데, 이젠 악마의 부탁이나 들어주고 앉았다니. 내 팔자도 참 기구하지.
"알았어요. 도와줄게요. 도와주면 되는 거죠? 그럼 우리 계약도 끝이니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표정을 풀곤 천진난만하게 웃어 보이는 그였다. 진짜 꼬여도 제대로 잘못 꼬였지. 어쩌다 이런 능청맞은 악마에게 -. 영혼이 팔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고 싶을 정도였다. 아, 이미 털린 지 오래인가.
"그래서, 뭘 하면 되는 건데요?"
"놀이공원에 가고 싶어. 날짜는-, 음, 다음 주 토요일이 좋겠다."
"저더러 혼자 놀이공원에 가라고요?"
"왜 너 혼자야? 우리 둘이, 같이 가는 거지."
순간 머리를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대체 이 남자가 생각이란 걸 하고서 말을 내뱉는지 의아해서.
"저기요. 말이 되는 소릴 좀 하세요. 당신 안 보이잖아."
"응. 그게 왜?"
"나 혼자 롤러코스터 타고 막 다니라고요? 혼자서 놀이공원을? 가족 단위나 연인이 와서 하하 호호 웃어대는 그곳을?"
"우리 연인 하면 되지. 내가 남자친구 할게. 네가 여자친구 해!"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절대 생각이란 걸 하지 않고서 말을 내뱉는다고. 그래서 나도 그에게 맞춰주기로 했다. 어쨌거나 그의 소원을 이뤄 그와의 계약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와 계속 동행해야 했으니까. 싫건 좋건 어쨌건 계속 말이다. 그러니 나도 그와 같이 행동하는 수밖에. 생각이란 걸 하지 않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