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국지색 (傾國之色)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벚꽃을 닮은 그녀인데.
02
처음 별궁에 들어왔을 때 시녀들이 굉장히 많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모두들 무표정을 짓고서, 제각각 자신이 할 일만 하고, 놀자며 말을 걸어도 형식적인 대답만 했다. 하지만 그들도 나와 함께 지내는 게 익숙해지고 정이 들었는지, 처음보다 더 편해진 것 같았다. 그 많은 시녀들 중, 나와 가장 친해진 시녀 시연이가 있었는데, 꼭 궁 밖의 도연이와 닮은 구석이 많아서 더 친해진 것 같았다. 별궁 이외에 외출을 하지 못하는 나를 위해서 매일 별궁 밖의 이야기를 밤마다 해 줬었는데, 죽어도 얘기하지 않으려던 세자의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니까, 저하께서 매일밤 월담을 하셨는데, 사랑하는 정인을 만나야 해서 나간다는 소문이 돌았거든요, 근데 그 소문이 하필 중전마마의 귀에 들어가서..."
"저하께서는 모르시겠지만, 마마께서 그 여인을 잡으려고 더 큰 난리가 났었습니다. 잡아서 씨를 말리겠다나..."
"그래서, 그 여인이 잡혔대?"
"아니요.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도 더는 모릅니다! 정말!"
월담을 하셨던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소문은 그냥 소문이 아니었을까요? 소문이라... 내 표정이 굳어 있었던 건지, 시연이는 놀라며, 자신이 괜히 말했다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빈궁에 찾아 오지 않았던 걸까, 내가 마음에 안 들었을 거겠지. 세자에 대해 안 좋은 기억을 갖고 있긴 하였지만, 소문이 사실이라면, 세자도 나와 조금은 비슷한 구석이 있어보여, 그가 안쓰러워 보였다.
세자빈 책봉 후, 별궁에서는 세자빈이 갖춰야 할 것,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만 반복하여 배웠다. 그것들이 모두 익숙해졌을 때에, 또 다른 것들을 배웠는데, 가례, 세자와의 혼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너무 빨리 숙이시면 안 됩니다."
"걸음 걸이가 너무 빠르십니다."
"정숙하게 행동하십시오."
세자의 부인이 되는 것은 참으로 힘든 것이 맞나 보다, 술을 마시는 법부터, 따르는 법. 걸음 걸이는 어떻게 걸어야 하고, 어느 속도로 걸어야 하는지, 인사를 할 땐 너무 빠르게 숙이는 것은 무례를 범하는 일이라며, 나에게 계속해서 당부했다. 그렇게 얼마나 배웠을까, 세자빈의 모습이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고, 당장 가례를 올려도 손색이 없을 법한 모습이 보여질 때 쯤, 가례식이 다가왔다.
입궁을 한 후로 부터, 한 시도 마음을 놓아 본 적이 없었다. 소년도, 부모님도, 중전도 모두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중요한 날, 마음이 편한 기분일까.
시녀들의 손이 바쁘게 오가고, 얼굴과 머리에 무언가 하나씩 올려져 간다. 부드러운 솔들이 얼굴을 지나쳐 가고, 다른 붓은 내 입에 선홍색 꽃을 피웠다. 길게 늘어진 치마자락에선, 예쁜 꽃들이 수놓아져 있다.
"세자빈마마, 문양이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다른 장식을 꽂아 보시는 건 어떠세요?"
"세자빈마마와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오히려 긴장한 건, 나보다 나와 함께 했던 시녀들이었던 것 같다. 자신이 몰래 구해 온 것이라며 자신의 것을 달아 보라는 시녀, 다른 것이 더 예쁘다며 다른 장식을 달겠다는 시녀, 장식은 필요 없으니 옷을 입어 보라는 시녀등, 긴장하지 않는 이유가, 오히려 시녀들 덕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세자빈마마, 조금 더 화려한 비녀를 꽂아 보시는 건..."
"이정도면 되었다. 괜찮아."
벚꽃을 닮은 비녀가, 살짝 빛났다.
"영의정 댁, 여식이라..."
"사대부 집안에서 컸으니, 굉장히 정숙하고 조신한 세자빈마마가 되실 게 분명하옵니다."
금혼령이 내려진 그날부터, 간택이 된 지금, 그리고 가례를 앞두고 있는 세자는 세자빈에 대해 탐탁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는 거라면, 이미 피하고도 남았을 세자였다. 하지만 세자는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야 할 사람이고, 궁밖의 소녀에게 더이상 신경을 쓰지 말아야 했다.
"가례 전에 마마를 한 번이라도 봬시는 게..."
"가례가 며칠 남지 않았는데, 어찌 고생을 사서 하느냐."
어릴 적 세자에게 꿈이 하나 있었다.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서부터, 그래서 세자는 꿈을 정했다. 정인을 누구보다 사랑해 주는 것, 자신의 아버지처럼은 굴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하지만 지금의 세자는 상황이 달랐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인, 연모하는 사람. 연모하지 않는데 어찌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가례식이 시작되었다.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떨리기 시작하였다. 별궁에서 밥만 먹고 매일 연습하였던 의식들이 처음처럼 다가왔고,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무거운 머리 장식들이 더 무거워져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기분이었다. 가례 중 세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 행동이기에 바라보지 못하고 세자의 발 끝만 연신 바라보았다. 어찌 발 끝이 익숙해 보일까, 중엄한 분위기에 미쳐 가는 기분이었다. 기나 긴 시간 끝에, 총 여섯 번의 의식이 다 치루어 졌다.
"...이로써, 부부의 연을 선포합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가례가 축사와 함께 끝을 내렸다. 세자가 고개를 들어 내 쪽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무슨 이유일까, 고개를 들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앞에 있는 세자에게 연민의 감정을 품는 건 아니었다. 그저 고개를 들면, 안 될 것 같았다. 세자를 마주하지 않는 나를 보던 시연이는 어서 고개를 들으라는 듯, 나에게 눈짓을 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소년이었다.
나의 정인, 영원을 약속했던 소년은 세자였다. 세자 역시 나처럼 당황한 표정을 해 보였다. 한참을 바라보다, 그만 고개를 숙였다. 계속 바라보는 것 역시 법도에 어긋나는 것이긴 하나, 바라볼 자신이 없어서였다. 기분이 묘했다. 소년이 세자, 그럼 시연이가 말해 줬던 여인의 이야기도, 나였겠구나.
"감축드립니다, 빈궁."
당황스러운 표정을 뒤로 한 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세자, 소년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소년의 얼굴에서는, 처음 보는 것처럼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다시 마주한 소년은, 키가 조금 더 커져 있었고, 조금 어리숙하고 귀여웠던 모습보다는, 세자의 면모를 갖춰 고급스러운 자태를 내어 보였다.
문뜩, 도연이의 말이 생각났다. 이곳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고.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벚꽃을 닮은 그녀인데.
안냐세요 ♥ |
오랜만이에요 ㅠㅠ 사실 프듀 끝나고 넘놈넘 힘들어서 쪼금 늦었어요!!! 오늘도 똥똥똥같은 글을 썼는데... 잘 읽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