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끼 해요
W.미니부기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나왔습니다."
손님이 주문한 커피를 건네고 난 뒤, 습관적으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약 한 달 전부터, 출석도장을 찍는 남자가 있다. 그 남자는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음료를 주문한다. 지금 쯤이면 올 시간이 됐는데..
"역시."
아니나 다를까, 오늘 역시도 정장차림인 그는, 한 손에 파일 철을 들고 카페 안으로 발걸음을 들였다. 늘 그랬듯이, 오늘도 주문대 앞에 서서, 메뉴판을 바라보는 그. 보나마나 뻔하다.
"카페모카죠?"
아, 젠장. 머릿속으로 생각한다는 걸 그만,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나의 말에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날 쳐다본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입을 열었는데, 막상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어버버, 하며 쓸 데 없는 말만 늘어놓는데, 그가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는다. 매일 무표정만 봐서 몰랐는데, 웃으니까 되게 예쁘네. 넋 놓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그가 나와 눈을 맞추곤, 입술을 달싹였다.
"나랑 밥 한 끼 해요."
***
물론 난 그의 제안을 단번에 거절했다. 내 스타일도 아니었으며, 남자친구와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그러나 그 남자는 생각보다 끈기 있는 남자였다. 그 날 이후로, 꼬박 한 달 째, 남자는 가게에 들를 때마다 내게 밥을 먹자고 말했다. 오늘 역시도 그렇다.
"오늘은 나랑 밥 한 끼 하기 좋은 날씨인 것 같은데."
"먹구름 잔뜩 끼었는데요."
"막걸리에 파전 어때요?"
남자는 나의 철벽에도, 끄떡없었다. 밥 못 먹은 귀신이라도 달라붙었나. 눈을 동그랗게 뜨곤, 파전을 먹자는 그에게 대답 대신 커피 잔을 들이밀었다.
"안녕히 가세요."
"내일 또 올게요."
안 와도 되는데. 내게 손을 흔들며 카페 밖으로 나서는 그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이쯤 되면 포기할 법도 한데.
"밥 한 번 먹어주는 게 그렇게 어렵냐?"
"네. 엄청 어려워요."
"얼씨구, 비싼 척은."
"비싼 척이 아니라 진짜 비싸거든요."
"야, 영민이 진짜 괜찮은 애야."
사장님이 입을 비죽이며 말한다. 두 달 동안 그와 나를 지켜 본 사장님은 그가 가고 나면, 늘 그에 대한 칭찬을 한 가지씩 하곤 했다. 사장님 덕분에 그에 대해 몇 가지 알게 되긴 했다. 그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직업정도?
"알아요."
"근데 왜 안 만나."
"괜찮다고 다 만나야 돼요?"
"못 만날 건 뭐냐."
"나이차이가 많이 나잖아요."
준수한 외모에 탄탄한 직업까지 가진 그를 만나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다. 10살이라는 나이 차이 때문. 아직 창창한 나이인 24살에, 34살의 아저씨를 만나고픈 마음은 딱히 없다. 10살이래도 앞자리 숫자가 다르니까, 나이차이가 확 느껴지기도 하고. 얘기 나눠봤자 세대차이 느낄 것 같다. 더군다나 사장님의 절친한 친구라면 더더욱 만나고 싶지 않다. 철 없는 사장님이랑 친하면 성격도 똑같을 거 같아서.
"10살 그거 별 거 아니야."
"하긴. 띠동갑 연하 만나는 사장님한테 무슨 얘길 하겠어요."
"12살이 뭐가 어때서. 서로 좋으면 그만이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는 사장님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 아가는 사장님의 뭘 보고 만나는 걸까요. 난 진짜 이해가 안 가는데. 34살이면 뭐해. 정신연령은 나보다 어린 것 같은데.
"짐승."
"야, 걔가 먼저 꼬신 거야!!"
사장님이 잔뜩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를 빽, 하고 질렀다. 나는 그런 사장님의 모습을 무시하곤, 얼음 통에 얼음을 채워 넣었다. 어쨌든 난 나이 많은 아저씨와 만나고 싶은 생각 없다.
"사장님, 혹시 우산-"
"너 줄 건 없다."
"아, 진짜 치사하게."
"치사하면 남자친구 만들던가."
내가 찌릿, 사장님을 째려보자, 사장님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얄미워 죽겠다. 열심히 일할 때는 흐릿하기만 하던 날씨가, 집에 갈 때가 되니까 굵은 빗방울을 쏟아내는 건 뭐람. 하는 수 없이 가방을 뒤집어쓰곤, 카페 문 밖을 나섰다.
"...하, 미치겠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바깥으로, 차마 발을 내밀수가 없어, 카페 앞에서 서성이는데, 고급스럽게 생긴 은색 세단 한 대가 내 앞에 멈추어섰다. 차에 대해 모르는 내가 봐도 꽤나 비싸보이는 차다. 지잉, 소리와 함께 창문이 열리고, 내 눈 속에 들어온 사람은,
"내 차 타고 갈래요?"
그 남자였다. 그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킨다. 아무리 그래도 모르는 사람 차를 얻어 타는 건 좀 그런데.
"걱정돼서 그래요."
"…"
"비 맞으면 감기 걸리잖아."
그가 다시 한 번 눈짓으로 조수석을 가리킨다. 잠시간 망설이던 나는, 결국 그의 차 문을 열었다. 그래, 내일도 알바 해야 되니까, 눈 한번만 딱 감고, 얻어 타자.
"노래 틀어도 되죠?"
"네."
띠릭, 소리와 함께 노랫소리가 흘러나왔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런 노래 좋아해요?"
"네. 제가 빅스 팬이거든요."
"이거 엑소가 부른건데."
"아, 잠깐 헷갈렸네요. 하하."
헷갈린 게 아닌 것 같은데. 그 나이에 모르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큰 소리로 웃는다. 그리곤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집 갈 때마다 듣거든요. 엑소의 아리랑 맞죠?"
"..으르렁인데."
"아.."
차 안에 잠시간 적막감이 흘렀다. 민망한 지, 그가 큼큼, 헛기침을 한다. 알지도 못하는 노래를 왜 틀어놨대. 아이돌 노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라, 계속 으르렁 거리는 게 시끄럽기만 하다.
"자살각이네요."
"..네?"
"아, 이렇게 쓰는 게 아닌가."
그가 입술을 꾹, 깨물곤 내 눈치를 본다. 한 없이 어색한 그의 말투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내가 와하하, 하며 웃자, 그가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긁적인다.
"그런 말 누가 가르쳐 줬어요?"
"민현이가.."
"사장님이요?"
내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튼 못 말린다니까. 왜 소화지도 못하는 걸 가르쳐 준 거야.
"이렇게 하면 어려보일 거라고 했거든요."
"네?"
"그럼 ㅇㅇ씨도 저랑 나이 차이 덜 느낄 거고."
"아이돌 노래 틀고 신조어 쓰는 게요?"
"네. 아무래도 ㅇㅇ씨는 신세대니까.."
그가 우물쭈물 말을 건넨다. 땡그란 눈으로 내 눈치를 보는 그의 모습이, 퍽 귀여웠다. 나랑 친해지고 싶었다는 그의 말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렇게까지 노력할 줄은 몰랐는데.
"나 이런 노래 안 좋아해요."
"네?"
"신조어 쓰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나이만 어렸지, 내 취향은 3,40대 아저씨들과 다름 없다. 그래서 요즘 애들이 사용하는 말도 잘 모른다. 정신 사나운 노래를 끄고, 내가 좋아하는 김광석 아저씨의 노래를 틀자, 그가 눈을 곱게 접으며 웃는다.
"어, 나도 이 노래 좋아하는데."
"또 거짓말 하는 거 아니죠?"
"김광석 노래잖아요."
테이프도 열심히 모았다며, 그가 신나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이상한 신조어 섞어 쓰며, 아이돌 노래를 트는 모습보다 훨씬 낫다. 나 역시 김광석 아저씨의 광팬이기에, 그와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느새 우리 집 앞에 도착했다.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원해서 한 건데요, 뭘."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쉬운 마음을 달래곤 그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한참 이야기에 열 오를 때 도착할 건 뭐람.
"ㅇㅇ씨,"
그에게 인사를 하곤, 차 문을 닫으려는데, 그가 다시금 내 이름을 부른다. 내가 허리를 숙이곤 그를 쳐다보자, 그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인다.
"시간 괜찮으면 내일 나랑 밥 한 끼 할래요?"
"..."
"못 다한 얘기도 나누고, 맛있는 밥도 먹고."
그가 말을 마치곤, 나를 힐끔, 쳐다본다. 이번에도 거절할까 걱정이 되었는지, 설명을 덧붙인다. 그리곤 침을 꿀꺽, 삼키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간 망설이던 나는, 긴장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좋아요."
"어때요? 입에 맞아요?"
"네. 맛있으니까 그쪽도 좀 먹어요."
내 대답에 그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내가 음식을 먹을 때까지 계속 눈치만 보더니, 맛있다니까 그제야 안심하는 모양이다. 나이에 안 맞게 귀여운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말 놓으셔도 돼요."
"네?"
"저보다 나이 많잖아요."
한두 살도 아니고 무려 10살인데. 굳이 존댓말을 쓸 필요도 없고. 저보다 10살이나 어린 애한테 계속 존댓말 쓰는 것도 불편할텐데.
"아니요. 전 이게 좋아요. ㅇㅇ씨도 저 편하게 불러도 돼요."
"그러고 싶은데 마땅한 단어가 없네요."
오빠라기엔 어색하고, 아저씨라 부르자니 안 어울리고. 그는 아저씨와 오빠의 사이, 딱 그쯤이다. 그렇다고 영민씨라 부르자니, 손발이 오그라든다. 그래서 무어라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다.
"호칭이 뭐 중요한가요. ㅇㅇ씨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요."
"그럼 영민아, 라고 해도 돼요?"
"그건 좀 곤란한데."
그가 미간을 찌푸리곤 대답한다. 농담인데. 내가 푸스스 웃자, 그 역시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는다. 웃을 때 드러나는 새하얀 치아가 퍽, 예뻤다. 남자한테 예쁘단 말 쓰기 쉽지 않은데. 그한테는 예쁘다는 말이 참 잘 어울렸다. 그것도 능력이지, 뭐.
"덕분에 잘 먹었어요. 감사합니다."
식사를 끝마치고 나대신 계산하는 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와의 식사자리는 꽤 유익했다. 먹는 내내 미소가 끊이질 않았으니까. 이렇게 즐거울 줄 알았다면 진즉에 같이 먹는 건데.
"아니에요. 저야말로 맛있게 먹어줘서 고맙습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예쁜 대답에 베싯,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그도 나를 보며 활짝 웃는다.
"ㅇㅇ씨, 여기."
그가 검지로 제 입술을 톡, 톡 두드린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문지르는데, 그가 작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여기가 아닌가.
"그럼 여기요?"
그의 대답에 다시금 찾아보지만 여기도 아닌 모양이다. 하는 수없이 주머니 속에서 거울을 꺼내드는데, 내 손보다 그의 손이 더 빨랐다. 그가 스윽, 하곤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훔쳤다.
"이제 됐네요."
그가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며 말한다. 그 모습에 화륵,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저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준 것뿐인데. 왜 이렇게 화끈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운 건지.
"가요."
"아..네."
그가 내 팔을 끌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상하다. 진짜 이상하다. 왜 갑자기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건지. 그의 머리도, 옷도, 그리고 날 보는 눈빛도. 왜 갑자기 빛이 나는 것 같은지. 내가 진짜 미쳤나보다.
***
"오늘 나 되게 노력했는데, 괜찮았어요?"
"네. 재미 있었어요."
"다행이다."
여느 남녀처럼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하늘이 어둑어둑 해지고 나서야, 우리 집 앞에 도착했다. 빈 말이 아니라, 오늘 정말 재미있었다. 그와 함께 있으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래서 그런가. 막상 그와 헤어져야 하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다음엔 더 재미있게 준비할게요."
"네?"
"ㅇㅇ씨 보고 싶다던 연극, 같이 보러 가요. 그럼 만나주려나?"
눈을 반짝이며 묻는 그에게,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나 역시 그에게 손을 흔들곤, 집으로 들어왔다. 입가에 미소가 걸린 채 말이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다 잔 것 같다.
"하..."
그 날 이후로 일주일 째, 그에겐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매일 찾아오던 카페에도 발걸음을 끊었다. 딸랑, 종소리에 문 쪽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어보지만, 그가 아닌 다른 손님들 뿐이다.
"땅 꺼지겠네. 그러지 말고 연락을 해 봐."
"이미 했어요."
근데 답장이 없는 걸 어떡하라고요. 심지어 내 카톡을 읽지도 않았다. 거기에 대고 다시 카톡을 보내면 집착하는 것 같아, 핸드폰만 들고 전전긍긍하는 중이다.
"관심 없는 척 하더니, 아주 푹 빠졌구만?"
"남이사, 사장님 연애나 잘 해요."
"난 너무 잘해서 탈이지. 좀 가르쳐 줘?"
"어제 카페에서 싸운 거 다 봤거든요."
"싸운 거 아니야. 애정표현이야."
퍽이나. 그렇게 격한 애정표현이 어디 있어요.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자, 사장님이 발끈한다. 나이만 먹었지, 애나 다름없다니깐. 그나저나 그 사람은 왜 안 오는 거야. 내가 그 날 무슨 실수라도 했나. 곰곰이 되짚어 보아도, 걸리는 부분이 없다. 답답함에 머리를 헝클어트리는데, 사장님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영민이 보고 싶냐?"
"아씨, 신경 꺼요!"
자꾸만 약 올리는 사장님에게 소리를 빽, 지르곤 설거지 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짜 밥만 먹고 싶었던 거야, 뭐야. 사람 한껏 들뜨게 해놓고, 나빴어. 진짜.
"손님 왔다. 주문 받아라."
오늘따라 손님은 왜 이렇게 많은지. 별 개 다 짜증난다. 사장님의 말에 툴툴 거리며 몸을 돌렸는데,
"잘 지냈어요?"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그가 서 있었다. 아무 소식 없다가 일주일만에 와 놓고, 하는 말이 뭐? 잘 지냈어요? 그가 괘씸해 아무 대답도 안 하곤, 주문을 받았다.
"뭐 드시겠어요?"
"..화 났어요?"
그가 축 쳐진 눈꼬리로 내게 묻는다. 그 모습에 서운했던 마음이 스륵, 녹아내릴 뻔했지만, 간신히 참아내었다. 안 돼. 이런 걸로 넘어가면 안 돼.
"미안해요. 나도 갑자기 외근 나가게 될 줄 몰랐어요. 핸드폰까지 고장나는 바람에."
"..외근이요?"
"민현이가 말 안했어요?"
처음 듣는 그의 말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그 역시 덩달아 커진 눈으로 내게 되묻는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사장님을 째려보자, 사장님이 어깨를 으쓱이며, 입술을 달싹인다.
"신경 끄라며."
저 인간이 진짜. 그렇다고 그걸 말 안하면 어떡해요. 그것도 모르고 완전 오해했잖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알면 됐어요."
"화 풀렸어요?"
"네."
그쪽이 가게에 들어오는 순간, 속상했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어요. 정말 신기하게도.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거니까, 괜찮아요. 내가 베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 역시 눈을 곱게 접어 웃는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어째 더 잘생겨진 것 같다. 주책 맞게 자꾸만 심장이 두근거린다.
"ㅇㅇ씨, 내가 외근 나가 있는 동안 생각해봤는데요,"
"네?"
"우리 영화도 보고, 밥도 먹었잖아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싱긋 웃고는 말을 이어갔다.
"또 ㅇㅇ씨랑 같이 하고 싶은 게 뭘까, 고민했는데-"
"..."
"아무래도 답이 하나더라구요."
"뭔데요?"
같이 연극 보는 거 아니었나. 궁금함을 가득 담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입술을 당겨 웃는다. 그리곤 싸인 패드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 내렸다. 다 적었는지, 그가 손가락으로 싸인 패드를 가리켰고, 나는 포스기로 시선을 돌렸다.
'나랑 연애해요.'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혀진 고백에, 입 꼬리가 스르르, 올라갔다. 고작 여섯 글자로 이렇게 설렐 수 있다니. 붉은 물감이 한 방울 떨어진 듯, 내 마음이 온통 붉게 물드는 것 같았다.
"답 안 해줘요? 나 무지 창피한데."
그가 눈썹을 꾸깃, 찌푸리곤 입술을 비죽이며 장난스럽게 말을 건넨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이내 침을 꿀꺽 삼키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알바 끝나고 데이트해요, 자기."
내가 생각한 그의 호칭이었다. 고민 끝에 입 밖으로 내뱉었는데, 그가 들었다고 생각하니, 화륵, 얼굴이 불에 데인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가 벙찐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내가 너무 앞서 나간 건 아닌지, 걱정이 스믈스믈 기어 올라왔다. 떨리는 손가락을 꼭, 부여잡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쪽,
그의 입술이 먼저였다.
"이따 봐요, 자기."
사탕처럼 달콤한 그의 말에 웃음이 새어 나갔다. 허파에 바람이 뚫릴까 걱정이 될 정도로 말이다. 그 역시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다. 다시금 가슴이 일렁였다. 눈부신 미소를 짓는 그를 보며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이제 나랑 밥 열 끼, 아니 백 끼도 넘게 같이 먹어요.
< 덧 >
읽으시는 분들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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