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사랑해, 좋아해요
누군가가 흔들어 깨우는 느낌에 눈을 떴다. 눈이 잘 안 떠지는 걸 보니 보나마나 얼굴이 띵띵 부은 게 분명하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내가 보고 있는 게 강과장의 얼굴이라는 건 알겠다. 여기가 강과장의 집이라는 것도. 어제 특정 시간 이후로 필름이 끊겼다는 것도.
어젯밤 대체 얼마나 마신 건지 모르겠는데, 여기 이러고 있는 게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겠어서 뒤늦게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걸터 앉은 강과장은 피식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낮게 울려오는 잠긴 목소리.
"정신이 좀 들어?"
"....아..."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강과장은 그런 나를 안아왔고, 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연신 눈을 비볐다.
아... 도통 눈이 떠지지를 않아. 근데 지금 몇 시지? 나 출근해야 하는데. 과장님도 출근해야 하는데.
몇 시에요, 지금? 하고 물었더니 여섯시 반. 아침 차렸어. 씻고 나와. 하는 강과장이다.
그래서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떠내며 화장실로 걸어갔다. 걷다가 벽에 살짝 어깨빵을 맞은 건 안 비밀이다.
그러고 보니 화장을 지운 적이 없는데 화장이 지워져 있네... 옷을 갈아입은 적이 없는데 옷이 갈아입혀져 있고.
대체 어떤 이유로 내가 강과장의 집에서 자게 된 거고, 그 전에 강과장이 어떻게 나를 데리러 오게 된 건지 모르겠다. 물어봐야겠다. 일단 지금은 씻고.
무심코 짜낸 바디워시에서 과장님의 몸에서 나던 향이 난다. 요즘에야 내가 준 향수를 써서 이 향을 맡기가 어렵지만, 처음 맡았던 그의 향기는 이거였다.
좋은 향기에 머리가 조금은 맑아지는 걸 느끼며 미지근한 물을 몸에 끼얹었다. 아주 조금씩,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다.
기억 저편에 흔적도 없이 묻힌 어젯밤 상황도 떠오르면 좋으련만. 그러기는 힘들 것 같다.
"우와.... 과장님 요리 잘하시네."
"응. 못 하지는 않는데 안 하는 거야."
"..맛있다. 맛있어요."
다행이네. 하며 웃어보이는 과장님이다. 어제 술 먹고 뻗은 내가 미워 화를 낼 법도 한데 아직까지는 별로 화를 안 낸다.
그래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왠지 물어보기가 좀 어려워졌다. 괜히 이야기 꺼내면 혼날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반찬은 계란말이와 김치찌개였다. 그리고 밥.
아까 사실 아침 차려놓았다고 했을 때 어젯밤에 워낙 부어라 마셔라 먹어댄 탓에 잘 안 넘어갈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내 걱정이 쓸 데 없었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밥 먹는 속도가 너무 차이 난다. 내가 너무... 빨라. 배고팠나봐.
"과장님, 내가 이렇게 빨리 먹는 이유는..."
"....."
"어... 머리도 해야 되고.. 화장도 해야 되고... 하니까.
그래서 빨리 먹는 거에요."
"....."
과장님은 별로 안물안궁이었을 것 같지만 내가 괜히 찔려서 선수를 쳤다. 내 이야기를 들은 과장님은 알겠어.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 모습이 마치 그래, 네가 그런 거면 그런 거지. 라고 하는 것 같아서 괜히 미안해졌다. 사실은 좀... 아니 좀 많이, 맛있어서 그런 것도 있고요.
나는 서둘러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설거지 내가 할게요! 일단 준비하고 올테니까 과장님도 얼른 씻고 옷 갈아입으세요! 하는 말과 함께.
그런데 생각해보니 여기에서 바로 출근하면 화장은 그렇다 쳐도 옷은 어제와 똑같은 걸 입을 수밖에 없는 거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든 내 옷이 똑같아버리면 그건 집에 안 들어갔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거라, 빨리 준비하고 집에 가서 옷은 갈아입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행동을 서둘렀다.
"...머리 말려줄게."
씻고 셔츠까지 입은 강과장이 방에 들어왔다. 화장은 이제 막 입술만 바르면 되는 상황이라 시간은 좀 있었다.
알겠다고 하며 그의 손길에 드라이어를 맡겼다. 내가 앉는 게 그에게 좀 더 편할 것 같아 침대에 살짝 걸터 앉았더니 내 뒤에 함께 앉아오는 그다.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리를 살살 만져주는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큼지막한 손에 비해 내 머리가 꽤 작게 느껴져서 웃겼다.
스르륵, 스르륵, 손으로 머리를 빗겨내는데 그 손길이 나를 예뻐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 간지럽기도 해서 낮게 웃었는데 과장님은 듣지 못한 모양이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내 머리를 말리고 있을 게 상상되었다.
"거의 다 말랐어. 그치?"
"네. 고마워요."
"......."
"과장님. 우리 한 15분만 일찍 나가요.
집 가서 옷 다른 걸로 입고 가야 할 것 같아서요."
"응."
파우치에서 립스틱을 꺼내 얼른 발랐다. 신기하다는듯 나를 보고 있는 강과장이 귀여워 장난스럽게 입술을 내밀어 허공에 대고 뽀뽀했다.
살풋 웃어보이는 미소에 뭔가 마음이 설레는 것 같다. 아, 얼른 나가서 설거지 해줘야겠다. 그러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다.
"어? 설거지 왜 했어요?!"
"아, 그냥 내가 빨리 했어. 어차피 내가 훨씬 짧게 걸리잖아. 준비하는 데."
"아이, 그래도... 내가 하려고 했는데."
"괜찮아. 지금 나갈까?"
아.. 뭔가 아침까지 차리게 만들었는데 뒷정리까지 혼자 다 하고... 미안한데.
그러면서도 내가 서둘러야 한다고 하니 또 서둘러 나가는 뒷모습이 듬직했다. 그래서 넓은 등에 손을 뻗어 한 번 안아봤다.
안은 등이 따뜻해서 머리카락을 부볐다. 큰 손이 제 허리에 걸쳐진 내 손목을 감싸왔다.
그러더니 이내 몸을 들려 제 품에 나를 안아온다.
"졸리지? 너 잠 설쳤어."
"으음... 그런가."
"응. 몇 번 깨서 내가 다시 재웠는데."
"....미안해요. 어제요."
"......."
"잘못했어요."
어젯밤 내 주량을 지나치게 믿은 죄, 걱정시키다 못해 한밤중에 쉬던 사람 데리러 나오게까지 만든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할 타이밍은 지금이었다.
내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그가 나와 눈을 맞춰왔다. 그의 큰 손 안에 내 얼굴이 자리했다.
눈을 마주보고 있기가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시선을 돌렸더니 그 시선을 집요하게 쫓는다.
"미안해요... 걱정 시켜서."
"......"
"...다신 안 그럴ㄱ,"
말이 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입술과 입술이 조심스럽게 부딪혔다.
과장님... 볼수록 프로말자름러인데 왜인지 밉지가 않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 립스틱은 왜 바른 거람. 의미 없는 칭얼거림은 혼잣속으로 되뇌었다.
-
"아, 저... 과장님.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으응. 죄송하면 됐어요."
".......과장님..."
"농담이고. 몸은 괜찮아요? 어제 진짜 많이 마셨는데."
"아, 네. 괜찮습니다. 과장님!
어제는 정말 죄송했어요.. 제가 조절했어야 하는 건데."
"○사원이 조절한다고 안 마실 수 있는 분위기 아니었잖아요.
다만 앞으로는 조심해야 돼요. 알죠?"
"네!!! 민폐 끼쳐서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과장님.
앞으로 정말 조심하겠습니다."
90도가 넘어가는 폴더인사를 여러 번 한 뒤에야 자리로 돌아왔다.
그나저나 정말 모르겠네. 내가 강과장을 부른 건 아니니까 옹과장님이 부르신 걸 텐데.
옹과장님은 어떻게 강과장을 불렀던 거고, 그 전화를 받고 왜 강과장은 그 자리에 왔던 건지. 전혀 모르겠다.
더 모르겠는 건 이걸 누구한테 쉽게 물어볼 수도 없다는 거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오로지 나와 옹과장, 그리고 강과장 세 명일 거니까.
분명히 사과는 드렸는데 마음이 불편했다. 뭔가 들켜버린 느낌도 들었고, 또 내가 알리지 않은 것을 옹과장님이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후우... 기분이 이상하다. 이게 대체 무슨 찝찝한 기분인지.
그렇게 자리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 어제 성황리에 시작된 프로젝트 덕분에 일이 쏟아졌다.
주책임자는 과장님이고 내가 부책임자로 따라붙었다. 공식적으로 팀장님과 부장님에게까지 보고를 드렸다.
신입으로 지내며 일을 배워가던 시기와는 달리 '내 프로젝트'라는 게 떨어진 거다. 능력치를 높일 수 있는 한 시점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과장님이 날 소회의실로 부르시길래 갔더니 업무분장을 해주셨다.
본인이 어떤 부분을 맡을 거고, 나는 어떤 부분을 해주면 되는지를 명확하게 말씀해주신 거다.
내가 맡은 업무는 어려운 건 아니었는데 주로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들이었다. 방대한 자료를 찾는다든가, 찾은 자료를 보기 좋게 편집한다든가 그런 것들.
내가 과장님께 넘긴 자료가 토대가 되어 과장님이 결과물을 뽑아내야 하는 거였다. 그런만큼 든든한 토대가 되어드려야 했다.
금방 끝날 부분은 아닌데 그날그날 해야 할 할당량이 정해져 있어서,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그날 계획된 건 그날 끝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야 겨우 클라이언트와 약속한 날짜를 맞출 수 있었고, 그때 다시 회의를 통해 프로젝트를 진전시킨다는 게 이 일의 흐름이었다.
그렇게 오후 다섯시쯤 되었을까. 도저히 여섯시에는 퇴근을 못하겠다 싶어서 강과장에게 쪽지를 보냈다.
[10분 뒤에 4층 계단으로 오셔요]
10분 뒤에 4층 계단으로 가니 강과장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종일 못 보다가 보니 또 금방 반가워져서 웃음이 나왔다.
과장님은 바쁘지? 하며 물어왔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과장님.
"오늘까지 찾아야 하는 자료가 많은데, 잘 안 나와요.
근데 또 정해진 양이 있어서 그것까지는 다 해야 해서... 야근해야겠어요."
"몇 시까지?"
"그것조차 모르겠다... 집에 언제 갈지 감도 안 와요."
"....기다렸다가 같이 가면 안 돼?"
"과장님도 일 많아요?"
"아니.. 요즘 숨통 좀 트이는데."
"그럼 안 돼요. 쉴 수 있을 때 쉬어야지..."
영업팀에 일이 몰아칠 때 얼마나 바쁜지는 익히 보고 들어왔기 때문에, 숨통이 트인다 하면 숨 좀 확실히 쉴 수 있게 해주는 게 맞았다.
한 달을 반으로 갈랐을 때, 후반부가 될수록 몸이 부서지도록 뛰어야 하는 게 영업팀이었다. 그렇다고 월 초에 안 바쁜 것도 아닐 일.
마케팅팀처럼 프로젝트 단위로 진행되는 게 아니니 연중상시 일이 있는 게 내심 안타까웠다. 그래서 어떻게든 집에 일찍 갈 수 있을 때 빨리 보내야겠다고 생각한 거다.
"그래도. 같이 가고 싶은데."
"......."
"같이 가면 안돼?"
같이 가면 안 되냐고 조르는 모습이 또 강아지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덩치가 이렇게 큰데 자꾸 귀엽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건 명백한 재주임에 틀림없다.
나는 그럴수록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랬더니 강아지가 시무룩해져 귀를 추욱 늘어뜨리는 것 마냥 풀이 죽은 그다.
이럴 때는 내 말이 길어질수록 강과장은 더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알겠어. 그러면."
"으응. 집 가서 쉬어요. 어제도 잘 못 쉬었는데."
"...뽀뽀 한 번 해주면 갈게."
제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뽀뽀를 해달란다. 두 눈을 감고 입술을 내미는 모습에 어이없는 웃음이 번졌다.
날마다 보여주는 다른 모습에 점점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나를 느낀다. 이러다 정말 푹 빠져 정신 못 차리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다.
에이, 그래. 집에 같이 가지도 못하는데 뽀뽀라도 한 번 해줘야지. 하는 생각으로 까치발을 들고 입을 맞추는데,
"....읍,"
두 팔로 내 허리를 안아 강하게 입을 맞춰오는 탓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뒤늦게 손을 들어 툭툭, 가슴팍을 쳐보지만 역시나 그는 밀려날 생각이 없다.
한참 뒤, 숨이 막힌 내가 그의 팔뚝을 퍽퍽 때리고 나서야 그가 겨우 입술을 떼어냈다.
"사랑해."
입술을 떼어내자마자 바로 나를 제 품에 안더니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로 내가 아무 말을 못하게 만든다.
그의 입에서 이렇게 직접적으로 사랑한단 말을 들은 건 처음이라 갑자기 몸이 얼었다.
어버버하고 있는 내가 가만히 있자 내게 눈을 맞춰오는 그다. 어리둥절한 눈빛을 읽은 그가 왜 그래? 하고 묻는다.
나는 차마 너무 좋아서요, 라고 대답할 수 없어 아 몰라요, 하며 얼른 마무리하고 집에 가라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쿵쾅쿵쾅 정신없이 뛰는 심장이 혹시라도 들킬까 부끄러웠던 거다.
-
"○사원, 야근이죠?"
"네, 과장님. 과장님도요?"
"응. 이런 건 밀리면 끝이 없어서.. 끝내고 가야겠어요.
같이 밥 먹고 오자."
회사 근처 식당으로 와 겨우 배를 채울 수 있을 만한 걸 주문했다.
일이 많을수록 입맛이 별로 없어졌다. 그 일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많아져서 밥이 무슨 맛인지도 모르기 마련이었다.
옹과장님은 안 그래도 일 많고 바쁜데 더 잘 챙겨먹어야지 않겠냐며 본인이 사주신다고, 뭐라도 더 시키라고 말씀하셨지만,
정말 입맛이 없어서 다시 한 번 거절했다. 옹과장님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따라왔다.
"○사원 볼살이 점점 날아가는데..."
"그거는... 이제 볼살이 날아갈 나이라서..."
안 그래도 요즘 젖살이 자꾸 빠져서 예전보다 늙어 보이는 게 고민이었다.
처음에는 힘들어서 살이 빠지나보다 싶었는데 얼굴 빼고 다른 데는 그대로니 그게 아닌 거다.
그냥 얼굴살이 빠질 나이가 되어서 빠진다고밖에 할 수 없는... 그런 슬픈 사실이었다.
"뭐 나는 볼살이 있든 없든 괜찮지만...
그래도 있는 게 좀 더 예쁜데."
"...과장님.. 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
떠나간 볼살은 다시 돌아올 수 없어요."
하하하, 크게 소리내어 웃으시던 과장님이 귀엽다는듯 내 볼을 톡톡 두드리셨다.
끄응... 과장님 너무해. 그래도 어쨌건 볼살 있는 게 예쁘다고 하시니 오늘 아주 이 저녁을 배 터지도록 먹어보겠습니다.
돼지같이 처먹기만 잘한다고 뭐라고 하지만 마십쇼.
살이 볼로 가지 않고 배로만 가는 기적을 보여드릴게요, 제가.
-
"와, 몇 시냐 대체.."
쏟아지는 졸음에 문득 시계를 보니 배가 터지도록 저녁을 먹고 들어온 이후 딱 6시간이 지났다.
오랜 시간 동안 한 자리에 앉아서 같은 일만 하고 있으니 엉덩이에 쥐가 날 것 같은 기분에 잠시 일어났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면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그나마 지금까지 함께 남아있던 전략팀 황민현 대리님이 일어선다. 집에 가려는 모양이다.
"과장님-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사원도, 늦었는데 얼른 가고요."
황대리님의 낭랑한 인사를 끝으로 나와 옹과장님 둘만 남은 사무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어느덧 열두시를 지나치고 있는 시곗바늘이 야속해졌다. 일은 거의 다 끝나긴 했는데... 지금 빨리 걸으면 막차 잡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런데 또 생각해보니 대중교통 타고 왕복하는 시간이면 사무실에서 잠을 자도 집에서보다는 훨씬 편하게 잘 것 같은 거다.
디자인팀처럼 새벽까지 야근하는 이들을 위한 라꾸라꾸 침대가 사무실에 몇 개 있다는 건 익히 알고 있던 사실.
지금 하고 있는 걸 얼른 마무리하고 회의실에 라꾸라꾸 침대 펴놓고 자면,
내일 아침 8시에 일어난다고 해도 적정 수면시간을 채우고도 남을 정도는 되었다.
그래. 뭐 어차피 집에 못 들어가는 거면 사무실에서 잠이나 잘 자고 말지. 하는 생각으로 서둘러 오늘 일을 마무리했다.
"○사원, 얼마나 남았어요?"
"저 거의 다 했습니다, 과장님!"
"응, 나도. 집에 가야죠?"
"아, 아뇨. 과장님. 저 사무실에서 자려고요!"
"사무실에서?
아니에요. 내가 데려다 줄게요."
옹과장님 집은 회사에서 차 타면 15분 정도 거리였다. 회사에서 우리 집까지는 30분은 거뜬히 걸렸고.
그 말인 즉 우리 집에 갔다가 과장님 집으로 가면 못해도 한 시간은 훌쩍 넘게 걸린다는 거였다.
어느덧 열두시 반이 넘어가고 있는 시간, 집에 데려다 달라는 핑계로 과장님을 새벽 두시에 귀가하게 하는 건 당연히 민폐였다.
나는 과장님을 극구 말리며 사무실에서 자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근데 이건 쓸 데 없는 고집이라기 보다도 당연한 거였다.
과장님은 잠깐 고민하시더니 다시 입을 여셨다.
"그럼 나도 사무실에서 잘게.
○사원 혼자 못 재워요."
어..... 이게 아닌데. 의도했던 것과는 다르게 전개되는 이야기에 잠깐 고민이 생겼다.
그럼 다시 집에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한 1초 정도 들었다가 없어진 이유는 내일 아침 회사로 올 걱정 때문이었다.
아무리 강과장의 차를 얻어 탄다고 하더라도, 그 거리를 오가는 것은 내 몸을 더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나는 알겠다며 디자인팀 창고에서 라꾸라꾸 침대를 꺼내 회의실로 가지고 들어갔고,
내 뒤를 이어 옹과장님도 침대 하나를 더 꺼내서 따라 들어오셨다.
갑자기 라꾸라꾸와 담요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잘 수 있겠다는 뜬금없는 믿음이 생겼다.
다만 화장을 지우고 쾌적하게 잠들기 위해서는 세면용품을 사야 했고... 그래서 옹과장님과 함께 잠깐 같이 편의점에 다녀왔다.
그런데 분명 세면용품 사러 편의점 갔는데, 과자 두 봉지랑 맥주 두 캔 사온 거 실화냐...
"짠-"
"짠-!!"
한 시쯤 됐으려나. 나란히 뉘여진 라꾸라꾸 침대를 의자삼아 마주보고 앉아 맥주캔을 부딪혔다.
하루 내내 쌓인 피로를 맥주가 풀어주는 느낌. 한 캔이면 딱 좋게 잠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맥주를 마셨다.
지금 마신 맥주는 내일 아침 엄청난 붓기로 돌아올 거고, 그 붓기는 살이 되어 나를 괴롭힐 거다, 라는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나는 현재에 충실히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억지로 그 생각을 지워내려 노력했다.
"오늘 고생 많았어요. 힘들었죠?"
"아닙니다, 과장님. 이제 시작인데요."
"그렇지... 그래도 첫 프로젝트인데 많이 배웠으면 좋겠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여주시는 옹과장님이다. 살며시 입가에 걸린 미소가 스윗하다.
나도 괜히 따라 웃어보았다. 그랬더니 낮에 느낀 그 찝찝한 불편함이 다시 생각나기 시작했다.
"저, 과장님... 그런데 저 어제,"
".....응. 어제."
"...어... 아직 아무런 이야기도 못 들어서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렵게 어렵게, 아무런 이야기도 못 들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 말은 곧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다는 말이었다. 과장님은 입을 꾹 닫은 채로 두어 번 눈을 깜박이셨다.
"...일이라...
○사원이 내 차에서 잠들었고,
그런데 난 ○사원 집이 몇 동, 몇 호인지 모르니까.
내가 다니엘한테 전화해서 ○사원 데리러 오라고 했어요."
"......"
"거기까지가 우리 셋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인데.
혹시 더 궁금한 건?"
처음 듣는 목소리와 처음 보는 표정의 옹과장님이었다. 조금은 날카롭고, 조금 많이 낯선 느낌과 분위기의 과장님.
더 궁금한 건... 왜 전화한 게 강과장님이었는지. 강과장님이 온 뒤에 어떤 이야기는 없었는지, 하는 것들이었는데
그걸 차마 물을 수가 없어 입을 열지 못했다.
"○사원이 궁금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있어요."
"........"
"...내 개인적인 감정에 대한 건데,"
첫째로는, 두 사람에 대해 해온 내 배려가 결국 ○사원을 집에 데려다 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생각에 화가 났고.
다음으로는, 내 마음을 이만큼 숨겨왔으면 여태 다니엘에게 미안했던 건 다 갚은 거 아닌가 하는 마음에 좀 억울해졌고.
끝으로, 그럼에도 다니엘한테 ○사원을 부탁할 수밖에 없는 내가 미웠어요.
...그게 내가 어제 느낀 감정입니다. ○사원에게 말하고 싶었던.
입 안이 말라왔다. 차마 과장님을 바라보지도 못하겠어서 시선도 바닥에 떨군 채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몰랐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그게 지금이 될 줄은 몰랐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당황스러움에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고, 이 상황을 어떻게 넘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오늘 왜 이렇게 모르는 것 투성이일까. 나는 왜 그 이야기를 지금 꺼내서 상황을 이렇게 만든 걸까. 자책해보지만 이미 늦었다.
"그래서 어젯밤 내가 내린 결론은,"
"......"
"내 마음은 전해야겠다는 거였어요."
"......"
얼마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과장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는 건가 싶어 고개를 들어 과장님을 쳐다봤다.
눈을 맞추는 게 어렵긴 하지만 지금만큼은 눈을 맞춰야 할 것 같았다. 그게 맞는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 ○사원 좋아해요.
...진심입니다."
쿵, 하고 내 마음을 울려온 목소리.
그의 까맣고 큰 눈동자에 내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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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편 암호닉(16편 업로드 이전에 달린 댓글, 별도 공지 내 암호닉 신청확인자에 한함) [녜리] [망개몽이] [댕댕녤옹] [우주] [자몽] [#0613] [피치씌] [덧깨비] [분홍색솜사탕] [경찰차] [딸기시럽] [불꽃] [아마수빈] [666666] [강사모예드] [데헷] [아이셔(: 확인 필요)] [녤녤] [크앙] [몽글] [SRJ] [밍] [마이관린] [체크남방] [어깨어깨어깨] [율예] [밀르] [포동이] [어어] [체리] [댕댕] [호다닥] [밍밍이] [피치수플레] [일오] [블라썸] [디눈디눈] [파요] [샘봄] [121027] [옹침] [춘쟝] [응] [남융] [요거팅팅] [쁘니야] [퍼지네이빌] [국국] [차차] [일개사원] [1122] [꽃녤] [다녤맘] [사용불가] [넌내희망] [L4L] [너부리] [필통] [괴물] [리베0511] [옹피치] [이스트팩] [진이진] [블리블리] [인턴] [무네큥] [댕댕이] [세념] [0302] [헤이헤이헤이] [메르시] [뚜기] [다정] [참새] [녤둥] [리베르떼] [쫑쫑] [갓의건] [짱짱맨] [K사원] [참참참] [댕댕이 강다니엘] [수저] [다녜루] [비버] [짹짹이] [뚠뚠] [몽구] [짠따라] [둘셋0614] [ㅇㄱ39] [알바생] [다녤의만두] [도앵도] [린] [818] [DMR] [묭묭이] [녤르미] [파리링] [졔졍] [녤03] [녜롱] [은하수] [만두] [0226] [청포도] [주황주왕] [금붕어] [우유콩] [히릿] [뀨쓰] [뉸뉴냔냐] [030901] [어피치] [포로리] 와... 엄청 많네요... 혹시 16편 업로드하기 전에 댓글 다셨고, 2차 암호닉 신청하셨는데도 누락되었으면 말씀해주세요! 당부드리고 싶은 말씀은 암호닉이 너무 많다 보니 혹시 제가 빠뜨렸더라도 너무 노여워하지는 말아주세요ㅠㅠ 저도 사람이다 보니 실수를 하게 됩니다... 엉엉 최대한 안 하려고 하지만 양해 부탁드립니다.. 콘서트 못 간 자는 글이나 써야죠 뭐... 그쳐? 혹시 지금 현장에 계신 분들은 재밌게 잘 즐기고 오시기를 바랍니다!>.< 안방1열에 계신 분들은 저와 함께 글로나마 달려주시기를ㅋㅋㅋ바라요... 호호 이번 한 주 내내 너무너무너무x100 바빠서 떡밥만 겨우 따라가는 수준이었네요.. 흑흑 글도 너무 오래간만에 들고 와서 죄송합니당... 히웅히웅 마구 달려야 하는 시점인데!! 안타깝네요 ㅠ^ㅠ 이번 편은 BGM 고르는데 정말 힘들었어요ㅋㅋㅋ 선택장애가 와서 후보곡 3곡 중에서 많이 고민했는데, 비하인드를 좀 들려드리자면... 이 곡을 A라고 하고, 다른 곡을 B와 C라고 한다면, B는 녤+여주 장면에는 너무 잘 어울리는데 성우 시점을 반영을 못하더라고요. C는 성우 시점은 반영되는데 녤+여주 시점과는 또 안 어울려서.. A는 어떻게 들으면 녤+여주 시점이고, 또 다르게 들으면 성우 시점을 잘 말해주는 것 같아서 결국 A로 고른 게 이 곡입니다! Sik-k의 랑데뷰 라고 합니다. :) 오늘 글 잘 읽으셨는지 모르겠네욥! 저는 댓글 창에서 여러분들 댓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편안한 토요일 밤 되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