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영원한 사랑을 속삭이던 입술은 언젠가 그 끝을 고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나는 사랑을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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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날 이후로 박우진을 피해 다녔다. 내가 왜?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이게 나를 위해서도 박우진을 위해서도 옳은 일이라 생각했다. 박우진과 같이 듣는 수업이면 수업시작 직전에 들어가 문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수업이 마치자마자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짐을 싸고는 교실을 빠져나갔다. 처음 며칠은 박우진도 크게 신경을 안 쓰는 듯 했지만 며칠 동안 반복이 되니 수업 시작 직전 내가 들어올 때부터 자리에 앉을 때까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마치기 직전에도 교수님이 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짐을 싸서 밖으로 튈 준비를 하는 나를 쳐다보는 박우진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게 다였다. 문자나 카톡으로 왜 피하냐는 둥의 물음은 없었다.
그러니까 겨우 그 정도의 마음이었던 거다. 박우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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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우진을 피해 다니면서 종종 동기 여자애들이랑 밥을 먹게 되었다. (한나는 남자친구랑 다니는 날이 더 많았고 나는 박우진이 없으니 매일매일이 혼밥이었기에 같이 먹자는 동기들의 말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자들 끼리 모이면 빠질 수 없는 이야기가 남자이야기였다. 남자이야기에 크게 관심이 없는 나는 조잘조잘 떠들어대는 동기들 틈에서 묵묵히 밥만 먹었다.
“아 근데 우리 동기 중에 우진이 진짜 괜찮다 아냐?”
“맞아 그 특유의 부산 사투리하며 성격도 좋고”
동기들 틈에서 밥을 먹으면서 알게 된 사실은 박우진이 동기들 사이에서 완전 대박 헐 리얼 인기가 많다는 거였다. 선배들이 일 같은 거 시키면 군말 없이 궂은일을 맡아서 한다는 둥, 학과행사에서 취한 동기들을 하나하나 챙겨주면서 집으로 데려다 주는 게 너무 다정하다는 둥, 가끔 웃을 때 보이는 덧니가 매력적이라는 둥, 제각각의 이유를 덧붙이면서. 이렇게 인기 많은 애가 뭐 부족하다고 나를 좋아하는 건지...
“ㅇㅇ야, 너 우진이랑 친하지 않았어?”
예상치 못하게 이야기의 화제가 나에게로 돌아왔다. 나랑 박우진? 그냥 종종 밥을 같이 먹던 사이였을 뿐이었다. 별로 안 친해. 나의 짧은 대답에 박우진이야기는 마무리 지어졌다. 한시 반 수업이 있어서 조금은 서둘러 식당에서 나온 동기들은 다음수업이 있는 학관 건물로 향하기 시작했다. 수업이 다른 나는 다른 건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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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의는 박우진과 겹치지 않는 몇 안 되는 교양 중 하나였다. 우리 과에서 개설되는 다른 강의가 있었으나 그 수업은 죽어도 듣기 싫었던 나는 그 강의를 빼고 (졸업 필수 영역이라 그 과목을 안 들으려면 이거라도 들어야했다.) 이 강의를 넣었다. 당연하게도 타 과수업이니 나의 독강은 확정이었다. 같이 듣자고 한나를 꼬셨으나 나의 꼬드김에 한나는 넘어오지 않았다. 다른 수업이었다면 수업을 끝내려는 교수님의 낌새가 느껴지자마자 가방을 챙기기 바빴던 나이지만 박우진이 없는 이 수업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느긋하게 가방을 챙기고 있었는데 뒤에서 여자아이들이 이야기가 들려왔다.
“헐 문 앞에서 기다리는 남자애 진짜 괜찮다. 잘생겼어.”
“어디? 헐 대박 뭐지 여자친구 기다리는 건가. 우리 과에는 왜 저런 애 없냐?”
별 의미 없는 대화를 듣고 있고 있다가 강의실을 나가기 위해 몸을 트는 순간 강의실 앞문에 기대서 초조해 보이는 표정으로 누군가를 찾고 있는 박우진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아마, 나를 찾고 있는 거겠지. 아까 여자애들이 말한 남자애가 박우진이었다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런데 박우진도 분명 학관 건물에서 아까 헤어진 동기들이랑 수업이 있을 텐데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교수가 멋대로 휴강했나. 자기 맘대로 휴강하고 보강잡기로 유명한 그 교수가 생각났다. 아 진짜 도움이 안돼요. 도움이. 박우진과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맘에 최대한 인파에 묻혀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이 강의가 경영대 개설이라 듣는 사람이 많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여전히 앞문에 서 있는 박우진의 뒤를 지나가는데 저기요.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거는 박우진의 목소리에, 걸음을 빨리해 그 건물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날 밤 처음으로 박우진에게 카톡이 왔다.
[오늘 논비 수업 안 들었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저 문장 그대로였다. 읽고 나서 뭐라고 답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못하고 나는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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찝찝한 상태로 잠이 들었으나 다음날 아침 나는 굉장히 상쾌한 기분으로 깰 수 있었다. 7시, 시계를 확인해 보니 7시였다. 그리고 오늘 수업은 10시 반이었다. 다시 잠을 자기에는 너무나 말똥말똥한 정신에 자는 것을 포기하고 이르지만 수업 들으러 갈 준비를 했다. 간만에 고데기로 머리도 말고, 화장도 공들여서 했다. 와, 이렇게 하고도 아직 시간은 8시반 이었다. 잠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워서 뒹굴거리는데 한나에게서 카톡이 왔다.
[잠?]
[나 수업시간 착각해서 지금 학교]
[ㄴㄴ 새나라의 어린이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남]
[지랄;]
[시간도 많은데 간만에 카페 ㄱ]
[ㅇㅇ 쪽문 쪽 카페에 있어. 옷만 입고 곧 감]
[ㅇㅇ]
아, 뭐 입지. 자취생이라 얼마 차지도 않은 옷장을 뒤적이다가 이렇게 풀메한 날에는 평소와 다르게 입고 싶은 마음이 커 옷장 구석에 걸려있는 원피스를 꺼냈다. 이 정도면 되겠네. 원피스를 입었는데 운동화가 웬 말인가 신발장에 고이 모셔놨던 구두까지 개시함으로써 오늘은 좋은 하루가 될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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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평소와 달리 빡세게 꾸민 나를 본 한나는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는 뭐 잘못 드셨어요? 를 시전했다.
“닥쳐.”
짧고 굵게 맞받아쳤다.
간만에 한나와 수다를 떠는 건 재미있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한나와 한나 남자친구의 이야기가 중점이었다.
“여전히 남자들은 연락 많이 오냐?”
“연락은 무슨, 그런 거 없어.”
“고등학교 때 밥 먹듯이 번호 따이던 ㅇㅇㅇ 다 죽었네.”
“뭔 개소리야. 좀 조용히 해주련?”
“카톡으로 질척대도 너는 질척대라 나는 씹을 터이니 라며 마이웨이였던 ㅇㅇㅇ 생각나네. 내가 불쌍해서 답장 좀 해줘라, 라니까 저런 것들한테 쓰는 내 시간이 아까워, 랬나? 그 와중에 공과 사 구분이 확실해서 사적인 내용만 지독하게 씹어댔지.”
“야, 그 정도는 아니었...다...”
“니가 생각해도 할 말 없지? 읽씹하고도 전혀 미안해하는 기색 없는 게 포인트였는데.”
문득 박우진의 카톡을 읽고 나서 뭐라 답장해야할지 고민 했던 어젯밤의 내가 떠올랐다. 어제 박우진이 나에게 한 질문은 사적인 질문인걸까.
“한나야”
“왜? 왜 불러?”
“...곧 10시 반이니까 슬슬 일어나자.”
목구멍까지 차오른 질문을 꾹꾹 눌러 담고는 수업 들으러 가자며 말을 돌리면서 일어났다.
*
와 지각 할 뻔 했다. 나와 한나가 앉자마자 들어오시는 교수님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교수님은 출석을 부르시고는 수업을 시작하셨다. 더 리더라는 별명에 걸맞게 교수님의 수업은 책을 줄줄 읽어 내려가는 정말 따분한 수업이었다. 아침에 상쾌하게 일어났던 나는 어디로 갔는지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고 헤드뱅잉을 하면서 잠을 잤다.
“야, 수업 끝났어. 일어나.”
뭐라고? 벌써?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니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하고 다음시간에 뵙죠. 라며 인사를 하는 교수님이 보였다. 아, 통으로 날렸구나. 이 수업 재수강하게 되진 않겠지. 따위의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데, 오늘 남친이 밥 같이 못 먹는데 오랜만에 밥 같이 먹자. 는 한나를 보며 오? 강한나가 웬일로? 라는 마음에 고개를 한나 쪽으로 돌리자 내 쪽으로 걸어오는 박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한나의 말에 대답도 않고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분명 처음에는 빠른 걸음으로 걸었던 거 같은데 어느샌가 뛰고 있는 나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왜 또 도망을 가고 있는 거지.
하지만 그렇게 멀리가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잡혀버렸다. 그 누군가는 확인할 필요도 없이 박우진이었다. 박우진은 한동안 내 눈을 쳐다보기만 하고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런 박우진을 보며 나는 오늘 아침에 구두를 신고 나온 저 자신을 탓하기 시작했다. 그냥 평소처럼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었으면 이렇게 마주하는 상황이 없었을 텐데.
하, 박우진의 한숨소리가 들리더니 나를 어디론가 잡아끌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는 벤치에 나를 앉힌 박우진은 내가 신고 있는 구두를 벗겼다. 순간 통증이 느껴져서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익숙하지 않은 구두를 신고 뛰다보니 뒤꿈치가 까여 피가 나고 있었다. 박우진은 말없이 내가 앉아있는 벤치에 자기 가방을 올려놓고는 어딘가로 뛰어갔다.
*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서 뛰어오는 박우진을 볼 수 있었다. 뭐를 그렇게 많이 샀는지 들고 오는 봉지는 빵빵했다. 들고 온 봉지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고는 뒤적뒤적 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내 발 뒤꿈치에 가져가서는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소독용 알코올 솜으로 아기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상처를 소독하는 박우진이었다. 넘어진 것도 아니고 까져서 피나는 거에 이렇게 유난일까라는 생각과 동시에 이렇게 집중하면서 상처를 봐주는 박우진의 모습이 조금은 낯간지러워 어색하게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어서 봉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발뒤꿈치에 연고를 바르는 듯 한 감각이 느껴졌다. 뒤꿈치에 닿는 연고의 느낌이 조금은 간질거려 발가락을 꼬물거리니 아프나.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라고 짧게 대답하니 아까 그 봉지에서 데일밴드를 꺼내고는 뒤꿈치에 붙여주고는 조심스레 다시 구두를 신겨주었다.
“내가 니한테 고백한 거 때문에 이렇게 피해 다니는 거가.”
구두를 신겨 주고는 나도 박우진도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박우진이 침묵을 깨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있었다. 아마 박우진은 이 침묵의 의미를 알았을 것이다.
“그런 거면 이제 피해 다니지 마라. 싫다.”
뭐가, 도대체 뭐가 싫은데? 박우진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밥 먹으러 가자는 박우진의 말에 나는 그 질문을 애써 삼킬 수밖에 없었다.
*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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