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첸 - 김종대 / 레이 - 장예흥(한국식 발음입니다:D) / 디오 - 도경수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참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름이었다. 까진 상처, 공원의 흙먼지, 한심한 놈이라고 욕을 먹었던 가을……. 추억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가깝고 생생해서 가슴이 싸했다.
- 서머타임 (사토 다카코 作) 中 -
Ceso la lluvia
written by. 셜록
하나.
여름은 끝이 났다.
둘.
여름이 끝나갈때. 매년 이맘때면 불현듯 그의 생각이 난다. 그리고 그의 금방이라도 끊길듯한 간혈적인 음악소리가.
셋.
내가 기억하는 그는 늘 혼자였다. 무한한 이질감. 그는 그 안에 살고 있었다. 오고 가는 길. 동떨어진 그는 세상이 익숙치 않은 듯 힘겨워했다.
넷.
그에게서는 늘 시큼한 비 냄새가 났다. 비린듯 축축하면서도 버석하게 마른 냄새. 그것이 공기처럼 그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그가 걸음을 내딛을때면 막연한 떨림이 느껴졌다. 주위의 공기를 밀어내고, 쉼없는 시간을 헤집었다. 자석의 양극. 그는 정착하지 못한 이주민과도 같았다.
다섯.
그의 메마른 시선이 생생했다. 당장에 바스라져도 상관없는듯 미련없는 표정에 섬뜩해지던 나까지도. 가느다란 실만이 그를 이 세상에 잡아두고 있었다. 얇은 뒷모습만 수십번 곱씹다 처음으로 앞에 섰을때였다. 나를 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감정없는 눈에 나는 절망했다. 그것은 죽음을 기다리는 병자의 것과도 같았다. 무엇도 없다. 나는 그 공허함을 견딜 수가 없어 그를 마주보기를 포기했다. 대신 그의 명찰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비켜설때까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이름 석자가 곱게 박힌 명찰을 꽤 오래 지켜볼 수 있었다. 장예흥. 입 안에서 도록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이 신기해 남몰래 몇번이고 되뇌었는데. 3년의 시간을 보여주는 듯 하얀 천으로된 명찰은 회색빛이었다. 군데군데 실밥이 터져있었다. 이름 끝자의 받침 역시 검은 실이 풀어져 절반이 사라져있었다. 나는 다급해졌다.
여섯.
그의 존재를 부정했던 적이 있다. 급식실에서 본 그는 유일한 존재였다. 남고의 급식실 풍경이란 본디 넘어지고 싸우기 마련인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3학년중에서도 1반인지라 제일 먼저 도착해서는 남들이 다 받고 나서야 그는 슬그머니 식판을 챙겨들었다. 물론 나는 그가 급식을 받고 나서야 식판을 집어들었다. 옆에서 도경수가 배고프다고 찡얼대는 소리에도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 너, 저 사람 눈에 보이냐. "
어쩌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철처히 고독속에 살고 있으면서 그것을 자신이 만들어낸 것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게 신기했다. 여지껏 누구와 말을 섞은 것도. 심지어는 인사를 나누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터무니없는 걸 알면서도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지금 귀신에 홀렸나, 싶은 정도로 그가 좋아서. 그래서.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명확했다. 김종대, 이 미친놈아. 내 뒷통수를 내리치던 도경수의 매운 손에도 내 시선은 그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재작년 그가 쟁쟁한 예고쟁이들을 제치고 전국 콩쿨에서 우승했다는 것은. 또한, 학교에서 꽤나 유명한 위치에 있다는 것은. 그때서야 알았다.
일곱.
그가 내 세상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호기심을 지나 이내 관심이 되었으며, 끝내는 조금 더 짙은 농도의 감정을 지니게 되었다. 나는 열여덟,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청춘의 한가운데였다.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감정에 나는 버거워했다. 이리저리 휩쓸리며 암초에 부딪혔다. 좋고, 싫고, 행복하고, 슬프고.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나를 덮쳐와 힘껏 짓눌렀다. 폐 안에 들어찬 공기가 부족해졌다. 숨이 찼다.
그는 늘 내 앞에 있었다. 한결같은 무표정의 그는 내 세상에서, 웃고 울었다. 이상한 환희. 나는 주체할 수 없이 커진 감정에 야금야금 먹혔다. 끄트머리부터 천천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은 나를 통째로 쥐고 흔들만큼 크고 강해져있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나무가 자랐다. 처음에는 가지를 꽂아놓은 듯 볼품없던 것이 곧고 굵은 줄기가 되고, 가지를 뻗더니 결국은 잎이 났다.
여덟.
그의 기괴하게 꺾인 손가락을 기억한다. 이제는 쓰지 않는 음악실 안, 회색 먼지가 뽀얗게 쌓인 학교에 하나뿐이던 피아노. 보잘 것 없는 겉모습이었다. 게다가 조율도 제대로 되지 않아 건반을 누를라치면 소름끼치는 끽끽대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도 그는 수업이 끝나면 항상 그곳으로 향했다. 초라한 그 앞에 몇십분이고 앉아있는 모습이 마치. 음악실 문에 기대어 서있던 내가 그에게 물었다. 선배, 피아노 쳐주시면 안되요?
눈앞에 있어도 나를 보지 않았던 그였다. 인사를 해도, 안부를 물어도 돌아오지 않던 대답. 그의 초점은 매번 나를 비껴갔고 나는 그것이 서러웠었다. 이번에도 기대없이 던진 물음이었다. 일종의 혼잣말. 서두에 붙은 그를 향한 호칭은 단지 그뿐이었다. 단조로운, 어쩌면 시시하기까지 한 그 질문에 그가 나를 보았다. 올곧은 시선.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느린 걸음으로 내 앞까지 다가왔다. 나는 숨이 막혔다. 비단 탁한 공기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아-! 내 입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평온한 그의 표정과는 달리 볼품없는 그의 손이 바들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태풍에 부러진 가지처럼 손가락이 제 갈 곳을 못잡고 휘어졌고 손가락 마디마다 뼈가 툭 튀어나왔다. 나는 어째서, 매순간 그를 지켜보고 있었으면서 대체 왜. 문득 두어번 수저질을 하고는 새것처럼 깨끗한 식판을 그대로 버리던 그가 생각났다.
그가 내 앞에서 주먹을 쥐어보였다. 힘을 잔뜩 줘서 흔들리는 팔. 그럼에도 꼿꼿하게 버티고 선 손가락. 그는 긴 싸움을 끝내고 간신히 손을 오므렸다.
" 이제, 못쳐. "
그가 가방을 챙겨들고는 나를 지나쳐 나갔다. 나는 발이 붙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 미처 다 잠기지 않아 살짝 벌어진 그의 가방 틈 사이로 악보가 보였다. 끝이 너덜거리는 것이었다. 서머타임. 유명한 재즈명곡이었다. 나는 그의 연주를 상상했다. 가늘고 고운 손가락으로 엮어냈을 눈부시게 화려한 소리. 힘차게 내려치던 강렬한 재즈터치.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았다. 그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의 클래식은, 그리고 재즈는.
눈같이 쏘다니는 먼지를 들이키며 나는 깨달았다. 그를 사랑하고 있구나. 가라앉던 감정이 역류하며 나를 뒤덮었다. 그를 생각하자 심장이 요동쳤다. 그의 연주가 듣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무에 꽃이 만개했다. 흐드러지게 핀 꽃이 아름다웠다.
아홉.
여름방학식이었다. 유난히 일찍 끝난 종례에 쌩한 표정으로 앉아있을 그를 생각하며 먼지 날리는 음악실 문을 열었다. 그가 없었다. 실망했으나 머지않아 드르륵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올꺼라 생각했다. 나는 구석에 있는 체육 매트에 몸을 눕혔다. 눈 깜박이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잠이 들었다.
꿈 속에서 음악소리를 들었다. 참 못 치는구나,하고 생각했다. 손에 힘이 균일하지 못했다. 박자는 계속 어긋났다. 그리고 이건, 익숙한 멜로디. 서머타임. 나는 감았던 눈을 번쩍떴다. 그였다. 그의 연주였다. 벅차오르는 감정에 내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바야흐로 여름이었다. 내 여름의 시작에 그가 서있었다. 거대한 감정이 나를 집어삼켰다. 나는 필사적이었다.
그가 연주를 멈추고 울고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아 얼른 일어서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자리가 뜨거웠다. 그가 느릿하게 일어섰다. 나는 참을 수 없음에 그의 부서질 듯 가녀린 어깨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복합적인 감정이 나를 마구 흔들었다. 내 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그의 어깨를 적셔갔다. 말없이 내게 안겨있던 그가 천천히 나를 밀어냈다. 마침내 내 두 팔이, 두 손이. 그에게서 떨어졌다. 격정적인 감정. 그 속에 스며든 찰나의 허탈함에 나는 그에게 말했다.
" 내 열여덟을 선배한테 줄게요. "
" ……. "
" 열아홉의 김종대도. "
" ……. "
" 스물의 나도, 스물하나까지도 모두 선배한테 줄게요. "
" ……. "
" 선배를 사랑해도, 괜찮아요? "
그는 대답없이 교복 주머니를 뒤져 무언가를 내밀었다. 바들대는 손이 내게 준 것은 은박지에 쌓여 꾸깃하게 접힌 풍선껌이었다. 나는 그것은 받아들었다. 눅눅해진 껌을 입속에 집어넣었다. 입 안에 지독한 단내가 들어찼다. 그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한참이나. 단내가 다 사라지고, 질겅거리는 고무맛이 날때까지 그는 내 앞에 있었다.
그는 결국 등을 돌렸다. 악보는 남겨둔 채였다. 나 역시 한참을 그곳에 서있었다. 시린 비냄새가 짙어졌다. 코가 매웠다.
열.
2학기가 시작됐다. 여름방학은 끝이 났다. 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었다. 자살이었던가. 한동안 그의 이름이 학생들의 입에 쑥덕대며 오르내렸다. 걔 결국 죽었다며? 그럴만도 하지. 김용태가 멀쩡히 학교 다시 나오는데. 김용태가 걔 따먹었다고 자랑하고 다니더라. 음악한답시고 하도 비싸게 굴길래 자기가 손병신 만들었다고 그러던걸.
열하나.
올해도 여름은 찾아왔다. 꿈이었나. 그를 보았다. 그는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창 밖에 내리치는 장마가 거셌다.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열둘.
여름은 끝났다. 장마 역시 그쳤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다.
*
클민을 이어서 가져올까 했는데 시간이 쬐끔 걸릴것같아서
대신 같은 엠돌이커플링 중에 레이첸 들고왔어요!
사실 공수가 명확하게 드러나지않아서 첸씽인지 레이첸인지는 구별이 안가죠ㅋㅋㅋㅋ
독특한 구성이지만 제가 제일 아끼는 글들 중 하나에요:D
Ceso la lluvia는 스페인어로 '비가 내렸다.'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참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름이었다. 까진 상처, 공원의 흙먼지, 한심한 놈이라고 욕을 먹었던 가을……. 추억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가깝고 생생해서 가슴이 싸했다.
- 서머타임 (사토 다카코 作) 中 -
Ceso la lluvia
written by. 셜록
하나.
여름은 끝이 났다.
둘.
여름이 끝나갈때. 매년 이맘때면 불현듯 그의 생각이 난다. 그리고 그의 금방이라도 끊길듯한 간혈적인 음악소리가.
셋.
내가 기억하는 그는 늘 혼자였다. 무한한 이질감. 그는 그 안에 살고 있었다. 오고 가는 길. 동떨어진 그는 세상이 익숙치 않은 듯 힘겨워했다.
넷.
그에게서는 늘 시큼한 비 냄새가 났다. 비린듯 축축하면서도 버석하게 마른 냄새. 그것이 공기처럼 그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그가 걸음을 내딛을때면 막연한 떨림이 느껴졌다. 주위의 공기를 밀어내고, 쉼없는 시간을 헤집었다. 자석의 양극. 그는 정착하지 못한 이주민과도 같았다.
다섯.
그의 메마른 시선이 생생했다. 당장에 바스라져도 상관없는듯 미련없는 표정에 섬뜩해지던 나까지도. 가느다란 실만이 그를 이 세상에 잡아두고 있었다. 얇은 뒷모습만 수십번 곱씹다 처음으로 앞에 섰을때였다. 나를 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감정없는 눈에 나는 절망했다. 그것은 죽음을 기다리는 병자의 것과도 같았다. 무엇도 없다. 나는 그 공허함을 견딜 수가 없어 그를 마주보기를 포기했다. 대신 그의 명찰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비켜설때까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이름 석자가 곱게 박힌 명찰을 꽤 오래 지켜볼 수 있었다. 장예흥. 입 안에서 도록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이 신기해 남몰래 몇번이고 되뇌었는데. 3년의 시간을 보여주는 듯 하얀 천으로된 명찰은 회색빛이었다. 군데군데 실밥이 터져있었다. 이름 끝자의 받침 역시 검은 실이 풀어져 절반이 사라져있었다. 나는 다급해졌다.
여섯.
그의 존재를 부정했던 적이 있다. 급식실에서 본 그는 유일한 존재였다. 남고의 급식실 풍경이란 본디 넘어지고 싸우기 마련인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3학년중에서도 1반인지라 제일 먼저 도착해서는 남들이 다 받고 나서야 그는 슬그머니 식판을 챙겨들었다. 물론 나는 그가 급식을 받고 나서야 식판을 집어들었다. 옆에서 도경수가 배고프다고 찡얼대는 소리에도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 너, 저 사람 눈에 보이냐. "
어쩌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철처히 고독속에 살고 있으면서 그것을 자신이 만들어낸 것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게 신기했다. 여지껏 누구와 말을 섞은 것도. 심지어는 인사를 나누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터무니없는 걸 알면서도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지금 귀신에 홀렸나, 싶은 정도로 그가 좋아서. 그래서.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명확했다. 김종대, 이 미친놈아. 내 뒷통수를 내리치던 도경수의 매운 손에도 내 시선은 그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재작년 그가 쟁쟁한 예고쟁이들을 제치고 전국 콩쿨에서 우승했다는 것은. 또한, 학교에서 꽤나 유명한 위치에 있다는 것은. 그때서야 알았다.
일곱.
그가 내 세상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호기심을 지나 이내 관심이 되었으며, 끝내는 조금 더 짙은 농도의 감정을 지니게 되었다. 나는 열여덟,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청춘의 한가운데였다.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감정에 나는 버거워했다. 이리저리 휩쓸리며 암초에 부딪혔다. 좋고, 싫고, 행복하고, 슬프고.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나를 덮쳐와 힘껏 짓눌렀다. 폐 안에 들어찬 공기가 부족해졌다. 숨이 찼다.
그는 늘 내 앞에 있었다. 한결같은 무표정의 그는 내 세상에서, 웃고 울었다. 이상한 환희. 나는 주체할 수 없이 커진 감정에 야금야금 먹혔다. 끄트머리부터 천천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은 나를 통째로 쥐고 흔들만큼 크고 강해져있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나무가 자랐다. 처음에는 가지를 꽂아놓은 듯 볼품없던 것이 곧고 굵은 줄기가 되고, 가지를 뻗더니 결국은 잎이 났다.
여덟.
그의 기괴하게 꺾인 손가락을 기억한다. 이제는 쓰지 않는 음악실 안, 회색 먼지가 뽀얗게 쌓인 학교에 하나뿐이던 피아노. 보잘 것 없는 겉모습이었다. 게다가 조율도 제대로 되지 않아 건반을 누를라치면 소름끼치는 끽끽대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도 그는 수업이 끝나면 항상 그곳으로 향했다. 초라한 그 앞에 몇십분이고 앉아있는 모습이 마치. 음악실 문에 기대어 서있던 내가 그에게 물었다. 선배, 피아노 쳐주시면 안되요?
눈앞에 있어도 나를 보지 않았던 그였다. 인사를 해도, 안부를 물어도 돌아오지 않던 대답. 그의 초점은 매번 나를 비껴갔고 나는 그것이 서러웠었다. 이번에도 기대없이 던진 물음이었다. 일종의 혼잣말. 서두에 붙은 그를 향한 호칭은 단지 그뿐이었다. 단조로운, 어쩌면 시시하기까지 한 그 질문에 그가 나를 보았다. 올곧은 시선.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느린 걸음으로 내 앞까지 다가왔다. 나는 숨이 막혔다. 비단 탁한 공기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아-! 내 입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평온한 그의 표정과는 달리 볼품없는 그의 손이 바들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태풍에 부러진 가지처럼 손가락이 제 갈 곳을 못잡고 휘어졌고 손가락 마디마다 뼈가 툭 튀어나왔다. 나는 어째서, 매순간 그를 지켜보고 있었으면서 대체 왜. 문득 두어번 수저질을 하고는 새것처럼 깨끗한 식판을 그대로 버리던 그가 생각났다.
그가 내 앞에서 주먹을 쥐어보였다. 힘을 잔뜩 줘서 흔들리는 팔. 그럼에도 꼿꼿하게 버티고 선 손가락. 그는 긴 싸움을 끝내고 간신히 손을 오므렸다.
" 이제, 못쳐. "
그가 가방을 챙겨들고는 나를 지나쳐 나갔다. 나는 발이 붙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 미처 다 잠기지 않아 살짝 벌어진 그의 가방 틈 사이로 악보가 보였다. 끝이 너덜거리는 것이었다. 서머타임. 유명한 재즈명곡이었다. 나는 그의 연주를 상상했다. 가늘고 고운 손가락으로 엮어냈을 눈부시게 화려한 소리. 힘차게 내려치던 강렬한 재즈터치.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았다. 그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의 클래식은, 그리고 재즈는.
눈같이 쏘다니는 먼지를 들이키며 나는 깨달았다. 그를 사랑하고 있구나. 가라앉던 감정이 역류하며 나를 뒤덮었다. 그를 생각하자 심장이 요동쳤다. 그의 연주가 듣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무에 꽃이 만개했다. 흐드러지게 핀 꽃이 아름다웠다.
아홉.
여름방학식이었다. 유난히 일찍 끝난 종례에 쌩한 표정으로 앉아있을 그를 생각하며 먼지 날리는 음악실 문을 열었다. 그가 없었다. 실망했으나 머지않아 드르륵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올꺼라 생각했다. 나는 구석에 있는 체육 매트에 몸을 눕혔다. 눈 깜박이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잠이 들었다.
꿈 속에서 음악소리를 들었다. 참 못 치는구나,하고 생각했다. 손에 힘이 균일하지 못했다. 박자는 계속 어긋났다. 그리고 이건, 익숙한 멜로디. 서머타임. 나는 감았던 눈을 번쩍떴다. 그였다. 그의 연주였다. 벅차오르는 감정에 내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바야흐로 여름이었다. 내 여름의 시작에 그가 서있었다. 거대한 감정이 나를 집어삼켰다. 나는 필사적이었다.
그가 연주를 멈추고 울고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아 얼른 일어서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자리가 뜨거웠다. 그가 느릿하게 일어섰다. 나는 참을 수 없음에 그의 부서질 듯 가녀린 어깨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복합적인 감정이 나를 마구 흔들었다. 내 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그의 어깨를 적셔갔다. 말없이 내게 안겨있던 그가 천천히 나를 밀어냈다. 마침내 내 두 팔이, 두 손이. 그에게서 떨어졌다. 격정적인 감정. 그 속에 스며든 찰나의 허탈함에 나는 그에게 말했다.
" 내 열여덟을 선배한테 줄게요. "
" ……. "
" 열아홉의 김종대도. "
" ……. "
" 스물의 나도, 스물하나까지도 모두 선배한테 줄게요. "
" ……. "
" 선배를 사랑해도, 괜찮아요? "
그는 대답없이 교복 주머니를 뒤져 무언가를 내밀었다. 바들대는 손이 내게 준 것은 은박지에 쌓여 꾸깃하게 접힌 풍선껌이었다. 나는 그것은 받아들었다. 눅눅해진 껌을 입속에 집어넣었다. 입 안에 지독한 단내가 들어찼다. 그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한참이나. 단내가 다 사라지고, 질겅거리는 고무맛이 날때까지 그는 내 앞에 있었다.
그는 결국 등을 돌렸다. 악보는 남겨둔 채였다. 나 역시 한참을 그곳에 서있었다. 시린 비냄새가 짙어졌다. 코가 매웠다.
열.
2학기가 시작됐다. 여름방학은 끝이 났다. 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었다. 자살이었던가. 한동안 그의 이름이 학생들의 입에 쑥덕대며 오르내렸다. 걔 결국 죽었다며? 그럴만도 하지. 김용태가 멀쩡히 학교 다시 나오는데. 김용태가 걔 따먹었다고 자랑하고 다니더라. 음악한답시고 하도 비싸게 굴길래 자기가 손병신 만들었다고 그러던걸.
열하나.
올해도 여름은 찾아왔다. 꿈이었나. 그를 보았다. 그는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창 밖에 내리치는 장마가 거셌다.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열둘.
여름은 끝났다. 장마 역시 그쳤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다.
*
클민을 이어서 가져올까 했는데 시간이 쬐끔 걸릴것같아서
대신 같은 엠돌이커플링 중에 레이첸 들고왔어요!
사실 공수가 명확하게 드러나지않아서 첸씽인지 레이첸인지는 구별이 안가죠ㅋㅋㅋㅋ
독특한 구성이지만 제가 제일 아끼는 글들 중 하나에요:D
Ceso la lluvia는 스페인어로 '비가 내렸다.'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