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
왜 남매라는 이름 하에 우리 둘이 묶일 수밖에 없는건지 하늘이 그저 원망스럽기만 했다.
문드러지는 속을 감싸쥐고 싶어도 차마 그럴 수가 없다.
"… 오빠. 축하해요 결혼."
추적 추적 내리는 비는 마치 내 심경을 대변해주는 듯 했다.
저 빗 속으로 들어가면 내 눈물도 같이 젖어들 수 있을까.
열다섯, 엄마와 아빠가 이혼했다.
아직 어렸던 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아빠를 자주 보지 못한 다는 말에 눈물만 펑펑 쏟을 뿐이었다.
한국에 머무르지 않을 거라며 내게 미련 없이 등을 보이던 아빠의 뒷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날도 비가 왔었지 아마.
몇 년간 엄마와 단 둘이 살았다. 어느새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있었고, 엄마가 만나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 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열여덟, 눈이 부시게 아름답던 4월의 봄에 엄마는 엄마의 남자친구를 내게 소개시켜주었다.
그 옆엔 갓 스무살쯤 되어보이는 남자 하나가 서있었고, 엄마의 남자친구는 그를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너가 여주구나. 반가워, 열아홉이랬나?"
"…네."
"아, 소개를 안했지. 참. 민현아 인사해라. 앞으로 네 동생 될 여주."
"반가워. 네 얘기는 어머니께 자주 들었어. 나이는 스물둘이고 이름은 황민현."
어머니라는 호칭을 자연스레 쓰는 모습에 왠지 모를 이질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웃으며 악수를 청해오는 그를 차마 쳐낼 수 없었다.
겉으론 화목해보이지만 냉랭하기 그지없는 분위기 속에서 제대로 대화에 끼지 못하는 사람은 나 하나 뿐인 듯 했다.
말 한마디 없이 깨작깨작 나온 음식만 먹고 있는 나를 신경쓰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외면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싫었다.
형식적인 만남과 헤어짐이 몇 번 더 이어지고 애초부터 내 의사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던 듯 두 사람의 재혼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엄마는 9월의 신부가 되어있었다.
엄마가 행복해보이니 됐다, 싶다가도 쓸쓸하고 씁쓸한 기분은 어딘가 감출 수 없었다.
먹구름이 잔뜩 낀 어둑어둑한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쳐왔고 내게 건넨 건 따뜻한 캔커피 하나였다.
"하나 마실래? 아직 학생이라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나…."
"…고맙습니다."
"아냐, 뭘…. 많이 속상하고 그렇지?"
"…아니예요. 아저씨 좋은 분이시고, 또…."
"여주야. 슬플 땐 슬프다, 힘들 땐 힘들다. 털어놓는 게 맞는 거야. 혼자 끙끙 앓고 있어봐야 네 속만 상해."
"……"
"…왜 울고 그래 여주야."
그의 말이 너무 따뜻해서 내 어깨를 감싸쥐며 토닥거리는 그의 손이 너무 다정해서 울어버렸다.
의지해도 되는 걸까, 이렇게 마음 놓고 기대어도 되는 걸까 후에 생길 후폭풍은 생각 조차 하지 못한 채로 그에게 안겨버렸다.
그 날도, 비가 왔다.
네 식구가 함께 살 집은 넷이 살기에 너무 과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화려하고 큰 2층집이었다.
2층에 있는 마주보고 있는 방 두 개 중 하나는 그의 방, 나머지 하나는 내 방이었다.
열여덟, 아직은 사춘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나이였고 열아홉을 코 앞에 둔 만큼 예민함도 극에 달해있다는 것을 다른 가족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최대한 다들 내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 신경써주는 게 보였다.
매번 야자를 마치고 새벽 늦은 시각 잔뜩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올 때면 항상 그의 방은 밝았고 집 앞 가로등엔 그가 서있었다.
"왔어? 오늘 하루도 고생했다, 동생."
"…안 자고 있었어요?"
"그럼. 어떻게 자고 있냐. 우리 동생 공부하고 있는데."
"……."
"주방에 한약 상자 뒀어. 그거 매일 아침마다 한 개씩 꺼내먹어. 아는 선배가 수험생들 한약 한재씩 꼭 지어줘야 한다더라."
"직접…"
"그래, 너 생각해서 지어왔다. 한약 쓰다고 먹다가 버리고 그런 거 보이면 이제 진짜 이런 거 없다."
"이런 거 안해주셔도 괜…."
"오빠 성의 생각해서라도 이럴 땐 감사합니다, 하고 그냥 먹는거야."
"… 잘 먹을게요. 고맙습니다."
"오냐."
"…아, 저 그리고… 이제 저 이렇게 밤 늦게까지 매번 안 기다려주셔도 괜찮아요."
"너 요즘 얼마나 밤길이 무서운 지 모르고 하는 소리야? 위험해서 안돼."
"…그래도 매번 피곤하실 테고 또,"
"들어가자."
매번 기다리지 말라는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하며 그 큰 손으로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들어가자고 달래는 그였다.
괜히 볼이 발그레해지는 기분, 이상했다.
새아빠를 만나기 전 짧게 잘랐던 단발머리는 어느덧 어깨를 훌쩍 넘는 길이에 와있었다.
자꾸만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머리로 내 얼굴을 감추려 애를 썼다.
가슴 한 켠이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기분, 무어라 정의 내릴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뛰는 심장에 그 날 밤은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다닌다던 대학에 원서를 쓰고싶었다. 워낙에 명문대에 다니던 그였기에 내 성적으로 그 대학을 갈 수 있을지에 대해선 미지수였다.
담임선생님과의 상담에서 Y대학에 가고 싶다 말을 꺼내자 네 성적으로 그 대학은 힘들다는 듯한 선생님의 표정에 우울해지기도 했다.
캐나다에서 태어났던 그였던지라 군대에 가느라 휴학을 할 필요도 없었던 그는 제가 입학하면 이미 졸업을 한 뒤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그 대학을 가면 나를 인정해주고 내게 칭찬을 건네 줄 것만 같았다. 너도 이제 내 후배라며 내 머리를 또 쓰다듬어주겠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웃는 그의 얼굴을 그저 상상했을 뿐인데도 주체 할 수 없이 뛰는 심장에 주위를 쓱 둘러보곤 했다.
9월 모의고사, 그리고 수능. 해냈다. 이 성적이라면 그의 후배가 될 수 있을 터였다. 그가 날 얼마나 칭찬해줄까.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내 볼을 쓰다듬어주진 않을까 잔뜩 기대하며 교복 대신 입은 새로 산 원피스를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앞에서 매만졌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에게 예뻐보이고 싶어 친구들과의 약속도 미룬 채 백화점에 가 가장 예쁜 원피스를 샀다.
언젠가 그가 내게 넌 흰색 원피스가 잘 어울린다고 말해줬던 걸 기억한다.
예쁘다.
이제 이 골목을 지나면 그는 가로등 밑에서 날 기다리고 있겠지, 그 언제나처럼.
웃음이 괜시리 피식 튀어나왔다. 성급하기만 하던 발걸음이 뚝 멈췄다.
그의 옆에는 그와 어울리는, 그에 걸맞는 여자가 서있었다. 내가 서있던 가로등 밑 그 자리에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여자가.
손을 마주잡고 헤어지기 아쉽다며 투덜대는 여자를 보는 그의 표정, 내게 지어주지 않았던 표정이었다.
아, 사랑하는 여자를 바라보는 눈빛이란 저런 것이구나.
애초에 저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었다. 될 수도 없었고, 되어서도 안 됐던 자리였다. 욕심을 부린걸까, 내가. 내가 잘못한 걸까.
입을 맞추려는 듯 다가서는 그들의 모습을 볼 자신이 없어 먼저 도망쳤다. 발 소리가 들린 탓에 잠시 고개를 돌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쩌면 눈물이 고였을지도 모르는데 ….
그와 눈이 마주쳐버린 난 또 도망쳤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선 성이 난 듯 번개가 쳤고 그칠 기미 없이 내리는 비를 보고 모두들 장마 의 시작이라고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비가 왔다. 끝없이 내리는 비를 맞을 자신 없이 나는 멍하니 서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