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는 두 명의 남사친이 있는데요, 02
무슨 소린가 싶겠지만, 어릴 때부터 난 여자이고 싶었다.
여자 역할을 하고 싶었고, 소녀이고 싶었고, 여자로 인정받고 싶었다.
주위 모든 사람들은, 심지어 우리 부모님마저도
내가 남자 둘과 어울려 놀며 공주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래, 내가 여자니까 전혀 아닌 건 아니지. 그럴 때도 있긴 해.
하지만, 그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지. 일상은 그렇지 않단 말이야.
우리 셋이 모여 놀 때면 난 인형놀이를 하고 싶었지만 내 손에 쥐어지는 건 늘 낯선 로봇 장난감이었다.
허리에 칼을 차고 팔에는 방패를 들고 다니엘의 칼 놀이 상대가 되어야 했고, 비눗방울을 불며 장난치고 싶었지만, 물 풍선, 물총. 그것들을 손에 들고 거칠게 놀아야만 했다. 당하지 않으려면 나는 더 거칠어져야 했고...
나는 웨딩 피치가 하고 싶었는데, 심지어 주인공이 아닌 릴리라도 좋았는데.
"너가 이글해"
"하기 싫어..."
나는 벡터맨의 이글이 되어야 했다.
"내가 베어고 세운이가 타이거야! 그러니까 너가 이글이야!"
"나 그냥 메두사 하면 안 돼?..."
그 어린아이가 얼마나 여자가 하고 싶었으면 악역을 자처했을까.
"안돼, 메두사는 나쁘잖아!"
중학생이 되어서도 변하는 건 없었다.
한창 옛날 노래가 다시금 재조명될 때, 축제를 하게 됐는데
"난 그냥 빼주면 안 돼?"
나는 무대에 오르고 싶지도 않았고 한다면 SES나 핑클을 생각했다. 그런데.
"너가 서태지해."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던가, 소방차라던가..
이게 뭐야.
"우리가 매일 붙어있으니까 연습하기가 좋아."
.
.
.
"넌 다니엘 들어야지."
에?
"에이, 세운아. ㅇㅇ가 다니엘을 어떻게 들고 가."
선배의 말에 세운이 나를 '너 정말 못해?'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아니지, 난 할 수 있지.
"못 들면 끌고 가면 되죠."
늘 여자이고 싶은 건 맞는데, 자라온 환경이 그렇다 보니
결국 남는 건 자존심 밖에 없어졌단 말이야?
부모님께서는 내게 남자인 친구가 두 명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기대거나
뭔가를 원하거나, 해달라고 한다거나 그러면 안 된다고 하셨어.
그러니, 난 혼자 할 수 있지!
"어차피, 정세운도 얘는 못 들어요."
180의 다니엘을 업기에 나는 너무 작았다.
허리를 반쯤 굽힌 채로 그 위에 다니엘을 업었다기보단 얹은 채로
질질 끌고 겨우 택시를 탔다.
"내려서는 내가 들고 갈게."
"싫어!!!! 이모랑 삼촌한테 내가 업고 왔다고 어필할 거야, 너 숟가락 얹지 마."
"그래, 그래."
세운이 비웃는 건지 앞자리에서 실실 웃었다.
- 다음 날 아침,
먼저 식당으로 가 해장을 하고 있는데 다니엘과 세운이 왔다.
"야 늦었어, 빨리 와."
"아, 나 진짜..... 정세운 어제 고생 좀 했겠어."
다니엘이 뻐근한 목을 풀며 세운의 숟가락을 놓아주았다.
"나야."
"뭐?"
"너 업고 온 거 나라고!!!"
업고 올 때는 정말 화났는데, 막상 몰라주니까 서운하군.
나 여자로 보이기는 글렀나 봐, 여자인 친구도 없고......☹
.
.
.
그리고 '사건'이 터졌다.
6월 초, 방학 전 첫 MT를 갔을 때였다.
게임으로 무르익는 분위기에 이미 주량을 넘겨버렸고,
겨우 정신을 붙잡고 있었던 것 같은데...
"니 괜찮나?"
다니엘은 그 동안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면서 주량이 꽤 늘은 듯했다.
"너, 그만 마셔. 이제 안되겠다."
"나 토할 것 같아."
눈을 반쯤 뜬 채로 무릎에 이마를 박고 있는데
3학년 선배가 갑자기 큰 대접에 술을 들이부었다.
"자, 이제부터 게임을 할 건데, 빠질 사람은 이거 마시고 빠지기."
당연히 나는 저 술을 마실 수가 없으니, 게임을 시작하지.
그러나 게임은,
"2번이랑 7번이랑 러브샷!!"
언제 적 왕 게임이야, 저 미친 복학생 새끼.
안 그래도 머리 아파 죽겠는데.
그전에 선배들은 자겠다고 이미 빠진 상태였고, 남아있는 사람은 대부분 1학년, 그리고 몇 남자 선배들이었다.
"오, 내가 왕이네. 좀 세게 가볼까?"
"이번이 마지막 맞죠?"
"마지막이니까 화끈하게."
또다시 맥주 잔에 소주를 콸콸 따르는데,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1번이랑 3번이랑 키스."
키스? 뭐 나만 아니면 좋은 구경거리가 되겠군.
"오왕아아ㅏㅇ!!!!"
"1번 누구야?"
나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하필 나라니...
나라니...
나는 소주가 가득 담긴 맥주 잔을 들었다.
"3번은 누구ㅇ…"
3번이 누구인지 주위를 둘러보던 와중에, 갑자기.
다니엘이 성큼성큼 내 앞으로 다가와 내 목덜미를 잡아 끌어 당겼다.
엄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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