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 그래 일단 침착하게 생각하자. 난 옷까지 입히게 한 후 무릎을 꿇고 남자 앞에 앉았음. 솔직히 내가 어제 일은 싸그리 무시한 채로 기억을 되돌려보면 내가 아무리 필름이 끊겼어도 집에 남자를 데려오진 않았을테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남자는 믿기 어렵지만 분명 내가 어제 데려온 강아지가 맞았음. 그걸 증명할 수 있는 게 어제 이 후로 품에 안아준 게 그리운 건지 자꾸만 제 품에 안기려하는 재환이를 간신히 떼어놓았음. 그러자 왜 그러냐는 듯 제 쪽으로 다가오는 재환이 때문에 한 발 물러선 후 핸드폰을 집어들었음. 뭐라고 하지. 키우던 강아지가 갑자기 사람이 되어서... 멍 때리면서 핸드폰 자판을 입력하던 손은 다시 빠르게 내용을 지웠고 간신히 사정이 생겨 늦을 것 같다는 내용을 보낸 후 그 자리에서 엎어졌음.
그러자 제 품을 감싸는 따스한 체온에 옆을 돌아보니 재환이가 있었음. 아니, 근데 재환이 안같아. 처음에 데려왔던 하얀 백구의 재환이는 어디가고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아니야, 재환이야. 재환이다. 기억을 떨쳐내려고 내 뇌에 세뇌를 하며 재환이를 보자 순하게 웃으며 저를 끌어당기는 재환이를 보고 백구가 맞았던 것 같기도 했음. 그 때 제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 요란하게 지잉지잉ㅡ하며 진동음이 울렸고 곧 전화를 받자 동료 직원이 다급하게 빨리 튀어오라는 한 마디에 부랴부랴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던 것 같음.
그 때 재환이한테 다녀오겠다는 인사라도 할걸...
* *
"이 정도의 아이디어밖에 못 내는 겁니까?"
"다시 한 번..."
"매번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지겹네."
동료 직원의 전화를 받고 출근하여 자리에 채 앉기도 전에 빨리 부장실에 가보라는 연락을 받았고 굳게 닫힌 문에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자 바로 이어지는 따가운 말에 애꿎은 구두 끝만 괴롭히고 있을 뿐이었음. 평소 직원들한테도 쓴소리 마다 않는 강부장이라 오늘은 또 어떤 말이 이어질까 속으로 긴장하고 있는데 예상외로 들어가봐요, 라는 말에 고개를 숙이고 문 밖을 나서는 찰나 강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음. 그다지 좋은 말은 아니라 문을 닫고 나오면서도 속으로 참을 인을 수없이 그렸던 것 같음.
이래서 몇 달하고 그만 둘 계약직은 뽑지 않았어야 하는건데.
오전, 오후 업무를 어떻게 했는지조차도 기억이 안날 만큼 피곤에 찌든 상태로 회사 밖을 나왔음. 거리는 이미 어둑 어둑해진지 오래였고 집에 혼자 있을 재환이가 생각이 나 걸음을 빨리하던 중 마침 남성복 매장이 눈에 보여 안을 들어갔음. 혼자 지내왔던 터라 옷장은 내 옷밖에 없어 재환이에게 티와 바지를 사줘야겠다고 마음 먹었음. 천천히 매장에 걸린 옷들을 보고 있는데 뭐이리 비싸. 알고보니 내가 들어온 매장은 남성 정장 위주라 그나마 걸려있는 옷 중에서 흰색 와이셔츠에 검정 기본 슬랙스가 그나마 내가 시중에 가지고 있던 돈으로 살 수 있었던 거였음. 이마저도 값을 지불하면 며칠은 허리띠를 매야했지만 재환이를 위해서라면야. 눈물을 머금고 옷들을 집는데 입구 쪽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음.
어떻게 타이밍이 그렇게 절묘하게 딱 들어맞는지 재환이 옷을 계산하려 입구 쪽에 있는 계산대에 시선을 두는데 마침 들어오는 강부장과 시선이 딱 마주쳤음. 이미 내 몸은 계산대와 얼마 차이 나지 않는 거리에 있었고 내 옆에 강부장이 있었기에 모른 척을 할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이었음. 입꼬리를 최대한으로 끌어당기며 오늘 일은 없었던 일인 것처럼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상냥한 미소를 지어보였음. 그러자 시선 한번 주지도 않고 제 뒤를 쌩ㅡ하고 지나쳐가는 강부장의 인성에 어색한 상황은 덤이었음. 민망함에 하하하, 웃으며 계산대에 있는 직원에게 재환이 옷까지 계산을 마치고 그 자리를 도망치듯 벗어나왔음.
* * *
현관에서 불편한 구두를 벗고 재환아ㅡ! 하며 두 손가득 재환이에게 줄 옷들을 들고 거실로 갔는데 재환이가 보이지 않았음. 제 방에 있나, 방문을 똑똑 두드려봐도 기척이 없어 문을 열자 제 침대에서 백구의 모습으로 곤히 잠들어있는 재환이가 보였음. 깨우기도 미안해 쇼핑백들은 침대 옆에 재환이가 깨지 않게 조심히 내려 놓았고 처음 재환이를 데려왔을 때처럼 침대 밑에 앉아 손등에 턱을 받친 상태로 재환이를 보았음. 눈을 감고 자고 있는 재환이를 보니 슬슬 졸음이 밀려오는 것 같아 꾸벅 꾸벅 졸다가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던 것 같음.
엄마, 나 이 상황 어디선가 본 것 같아. 데자뷰? 난 눈을 꿈뻑 꿈뻑 뜨고 제 앞에서 저를 빤히 보는 남자의 얼굴을 손으로 만져보았음. 재환이 맞지? 재환이라는 말에 끄덕끄덕하며 웃어보이는 재환이가 보여 그대로 나도 웃으며 재환이를 꼭 끌어안았던 것 같음. 자리에서 일어나 날짜를 보니 오늘은 빨간 날, 주말이었음. 시계 초침은 아침 10시를 넘어 11시에 가까워 있었고 배고플 재환이를 위해 오늘은 요리를 해줄 생각이었음. 집에 엄마가 왔을 때 해 먹으라고 넣어준 반찬을 확인하고 오늘의 메인 요리인 된장찌개에 필요한 재료들을 찾고 있을 때쯤 방문 끝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내 행동을 보는 재환이가 서 있었음. 그러자 결심한 듯 주방으로 오려는 재환이의 앞을 막아섰음. 재환이 앞에서 두 팔을 쫙 뻗고 서 있자 재환이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이해한 듯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꽉 끌어안았음. 아니, 재환아. 이게 아니고. 괜히 민망해져 손으로 재환이를 살짝 밀어내자 그제야 제 품에서 놓아주는 재환이었음.
요리가 완성될 때까지 가만히 앉아있기를 당부한 나는 분주히 움직여 어느덧 한상 가득 차리었고 재환이에게 숟가락을 쥐어주자 숟가락과 나를 번갈아보는 재환이에 아차했음. 재환이 손 위로 내 손을 겹쳐잡고 먼저 밥을 한 숟가락 떠서 재환이 입에 가져다대자 오물오물 먹는 재환이 볼이 너무 귀여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