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디] 늑대소년
08
w. 마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경수가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왔다. 내려오자마자 보이는 식탁의 풍경에 경수는 '아.' 하고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일어났어? 와서 아침 먹어."
경수의 엄마는 오늘따라 조금 들떠보이기도 했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식탁 의자에 경수가 앉자 곧 거실에 있던 소년도 경수의 옆으로 와 앉았다. 고소한 떡국 냄새가 코 끝을 찔렀다. 벌써 한 해가 지났구나 싶어 경수는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참 별일이 다 있었던 것 같은데. 경수는 코 끝을 문질렀다.
열아홉. 평범한 대한민국의 열아홉이라면 다들 수능 앞에 초조해질 그런 나이였다. 그러나 이제는 나와 다른 세계 얘기겠지. 경수는 그리 생각하며 괜스레 숫가락으로 떡국을 휘적였다. 옆을 힐끔이자 숟가락을 이제는 제법 자연스럽게 쥔 소년이 꽤나 열심히 숟가락질 중이었다. 사실 새로운 해를 맞은 소년이 몇 살인지는 누구도 몰랐지만 그래도 경수는 소년과 처음 맞는 새해라는 것만으로도 꽤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소년이 경수의 집에 들어온지도 거의 2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국물을 떠 입안에 넣던 경수의 눈 안에 포크로 반찬을 찍어먹는 소년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 덩치에 포크를 쓰는 모습이 귀여워 보이기도 했지만 경수는 소년에게 젓가락질 하는 법을 가르쳐줘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어린애처럼 포크를 사용하기도 그랬다. 경수가 손을 뻗어 젓가락통에서 젓가락을 새로 꺼냈다. 이왕 생각난 김에 지금부터 가르쳐야 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손 줘 봐."
열심히 포크질을 하던 소년이 의아한 눈길로 경수를 바라보았다. '빨리.' 그러자 소년이 포크를 쥔 손을 그대로 내밀었다. 그래도 이젠 제법 제 말을 알아듣는구나 싶어 그와중에도 소년이 조금 기특하게 느껴진 경수였다.
"앞으론 젓가락 써야 돼."
경수가 소년의 손에서 포크를 빼내곤 젓가락을 쥐어주었다. 그리곤 자기처럼 해보라는 듯 젓가락을 들어 허공에 집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소년이 서툴게나마 경수를 따라하려 애썼다. 그 모습에 주방일에 여념이 없던 경수의 엄마도 소리내어 웃었다.
"그래, 그렇게. 잘했어."
그래 이렇게 하나하나 내가 가르쳐 주면 되지. 경수는 새로운 새해 목표가 하나 생긴 것 같았다.
경수와 소년이 같이 살게 된지도 거의 2개월이 다 되어갔다. 사실 경수는 처음에 정말 아직 걸음마도 못뗀 아기처럼 기본적인 젓가락질, 양치질, 옷입기 같은 것도 혼자서 할 줄 모르는 소년에 당황했었다. 그동안 소년이 어떻게 살아왔을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2개월 동안 경수와 생활하며 소년은 조금씩 조금씩 배워갔다. 이제는 생활 하기에 필수적인 것들은 기본적으로 혼자서도 잘 해냈고 전혀 통하지 않던 의사소통도 조금씩 경수의 말을 알아듣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손의 정교한 움직임이 필요한 것들은 혼자서는 조금 힘들어 했다. 가령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말이었다.
"봐봐. 단추는 이렇게, 이렇게 구멍에 맞춰서 끼워 넣으면 돼."
소년의 남방셔츠에 달린 단추를 경수는 아래부터 하나하나 차근차근 끼워주고 있었다. 소년이 조금은 호기심이 초롱한 눈으로 꼬물거리는 경수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았지? 다음부턴 너가..."
맨 윗단추만 남기고 그 아래까지 단추를 꼼꼼히 채워준 경수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너무나 가까이 마주친 얼굴에 놀라 흠칫했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이 어느새 경수를 향해 있었다. 소년과 눈이 마주친 경수가 당황해 들었던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키 차이때문에 자신의 눈 바로 앞에 보이는 소년의 입술에 더욱 당황하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도톰한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경수는 그만 그 날 밤 일이 떠오르고 말았다. 크리스마스, 소년의 이마 위에 닿았던 자신의 입술. 입술.
갑자기 팟 정신이 든 경수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발이 땅에 닿기도 전, 갑작스럽게 소년이 경수의 허리를 잡아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가깝다. 너무 가까웠다.
아까보다 더욱 더 가까워진 거리에 경수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몰랐다. 그러다 설핏 마주친 소년의 눈이 마치 도망가지 말라는 듯 세게 경수의 시선을 옭아매었다. 그덕에 꼼짝없이 소년과 눈을 마주하게 된 경수가 한참이나 소년의 눈 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언제나 자신을 향해있는 이 눈이 좋았다. 항상 소년은 자신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최대한을 담아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돼, 됐어. 이제 너가 해."
순간 경수가 팍 소년의 어깨를 밀어내곤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고선 아까보다 한 발자국 더, 두 발자국을 물러섰다.
안 돼.
더 이상은 안 될것만 같았다. 그 더 이상이 무엇이 될지는 몰랐지만 그저 그래야 될것만 같았다. 바닥으로 고개를 숙인 경수의 귀 끝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이게 어려워?"
경수는 답답한 심정으로 노트 위를 바라보았다. 삐뚤빼뚤. 이걸 글씨라고나 할 수 있을까. 이건 글자를 쓰려했다기 보다는 그저 선 따라 그리기에 불과해 보였다. 그 선마저도 선이라 부르기 어색할 정도로 곧지 못했다.
그래도 이제는 말을 조금씩 알아들으니 글자도 조금씩 조금씩 가르쳐도 되지 않을까 해서 펼친 새 공책 위에 경수는 차례대로 기역, 니은, 디귿을 써 소년에게로 내밀었다. 그러나 연필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이제 겨우 기역을 두번 정도 쓴 소년의 손을 경수가 제지했다. 그래도 자기 딴에는 열심히 했을 소년이였겠지만 경수는 내심 가지고 있던 기대에 조금 실망을 하고 말았다.
"연필은 이렇게, 이렇게 쥐는 거야. 알겠어?"
보다 못한 경수가 옆에 앉아 있는 소년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덮어 연필을 쥐어 주었다. 그리곤 또박또박 공책 위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이건 기역. 이렇게 옆으로 가서 쭈욱 내려와야지."
'알겠어?' 하고 고개를 든 경수는 또 흠칫하고 말았다. 답답한 마음에 그저 연필만 쥐어주려 했을 뿐인데 어느새 소년에게 반쯤 어깨를 겹치고 기대 있는 모양이 되어 있었다.
경수의 턱 끝이 소년의 어깨 위로 닿았다. 경수에게로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또 살짝 분위기가 묘해져 있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떠오르는 아침의 일에, 경수는 후다닥 다시 원래 자세로 돌아왔다.
"뭐,뭐해. 빨리 써."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에 경수가 노트 위를 톡톡 치며 괜스레 틱틱 거렸다. 이내 다시 노트 위로 시선을 돌린 소년이 경수가 알려준 연필 쥐는 자세 그대로 한글자 한글자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경수의 방 안에 사각 거리는 연필 소리만이 가득했다.
경수는 멍하니 글씨를 쓰는 소년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가 경수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귀에 쿵쾅쿵쾅 뛰는 심장 소리가 온통 울려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보건소 문 앞, 경수는 당황해 멍하니 서 있었다. 보건소 문 옆에 달려 있는 작은 안내 표지판 위에 '진료 시작 시간 9:00 AM-' 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금은 여덟시 쯤이 되는 시간이었다. 기다릴까, 하던 경수는 그러면 잠에서 깬 소년이 자신을 또 추운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일부러 소년이 자고 있을 때 몰래 나와 들른 보건소였는데, 경수는 깜빡 진료 시간에 대해선 생각치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경수가 괜히 문을 밀어 보았다.
'어.'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잠시 들어가도 될까 고민하던 경수가 혹시나 싶어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 시간엔 왠 일이야?"
안에 들어서자, 나갈 참이었는지 가방을 챙겨 든 준면과 마주했다. 생각지도 못한 경수의 등장에 준면이 놀란 듯 경수를 바라보았다. '아...' 하며 혹시 준면을 곤란하게 하는게 아닌가 싶어 경수가 뜸을 들였다.
"나가시려던 거 아니였어요?"
"아, 아냐. 어제 갑자기 저녁에 꽤 심각한 환자가 와서 치료해 주다 늦어서 그냥 보건소에 잤거든. 그래서 그냥 옷만 갈아입으려 가던 참이었어."
다시 책상 위에 가방을 내려놓은 준면이 '이리 와 앉아.' 라며 항상 그렇듯 소파 쪽을 가리켰다. 그러다 이내 아, 하며 탄식을 내뱉는 것이었다.
"미안. 어제 급해서 정리 하는 것도 깜빡했다."
소파 위에 피 묻은 붕대와 찢어진 옷조각들이 이리저리 늘어져 있었다. 준면은 보건소 안 침대까지 데려갈 틈도 없어 급하게 소파 위에 눕히고 치료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저기 침대 위에 가서 앉아 있어. 이것만 치우고 갈게."
"도와드릴게요."
"됐어. 아침부터 피 보게 했는데 만지게 하는 것도 좀 그렇지."
그러고선 준면이 경수의 등을 침대 쪽으로 떠밀었다. 그에 얼떨결에 침대 쪽으로 밀려난 경수가 어쩔 수 없이 침대로 가 앉았다. 그리고선 그 위에 앉아 준면이 하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준면이 꽤나 분주하게 움직였다. 얼마 안 가 정리를 마친 준면이 개수대로 가 손을 씻곤 경수에게로 다가와 맞은편 침대에 앉았다.
"목도리 하고 왔네."
준면이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준면의 얼굴엔 잔뜩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그에 준면에게 미안해진 경수는 버릇처럼 목도리 끝을 매만지며 민망한듯 웃어보였다. 그러고보면 항상 준면에게는 고맙고 미안한 것 투성인 것 같았다.
"이런 시간에 책 돌려주러 온 건 아니지?"
준면이 경수의 옆에 놓인, 지난번에 빌려준 책으로 살짝 턱짓을 했다. 사실 그런 이유도 있긴 있었지만 오늘 경수가 준면을 찾아온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다. 경수가 외투 주머니 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었다.
"이게 뭐야?"
경수가 준면에게로 상자를 내밀었다. 준면이 의아한 손길로 상자를 받았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늦게 드려서 죄송해요."
그러면서 경수가 살풋 웃어보였다. 경수를 한 번, 상자를 한 번 내려다 본 준면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열어봐도 돼?"
경수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준면이 벨벳으로 되어 있는 상자를 열어 보았다.
"시계네."
꽤 오래되어 보이는 앤티크 스타일의 손목 시계였다. 요즘 파는 것들과는 조금 달라보이는 스타일에 준면이 설명을 바라는 듯 경수를 바라보았다.
"어릴때 처음 파리에 갔을 때 샀던 거에요. 근데 한 번도 못 쓰고 이태까지 가지고만 있었어요."
경수는 문득 열살 때 아빠를 따라 파리에 갔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겨우 한 달 있었을 뿐인데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경수는 느껴본 적 없던 슬픔과 아쉬움에 아픈 마음을 그 나이에 어쩔 줄도 모르고 크게 울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 때 마지막으로 테르테르광장에 들렀을 때 샀던 시계였다. 그땐 제 손목에 맞지 않은 그것을 왜 그리 고집스럽게 사달라 했었는지 경수는 알 수가 없었다. 비행기 안에서도 꼭 끌어안고 있었던 그것은, 결국 한번도 끼어 보지 못했다.
"너, 미술 좋아하는 구나."
담담하게 준면이 웃으며 말했다. 경수가 놀란 눈으로 준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전과 다를바 없이 평온했다.
"그 책도 미술하고 관련된 책이잖아."
경수의 눈이 무의식적으로 침대 위에 놓여있던 책 위로 향했다. 그리곤 다시 준면에게로 향한 시선이 무척이나 불안해 보였다. 그에 반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만 같은 준면은, 경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근데 왜그렇게 두려워 해."
경수는 아주 오래전에 묻어 두었던 그 사실이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에 깊이깊이 묻어 더 이상 꺼내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것.
"좋아하는 걸 두려워 하지마."
자신의 세계는 그 날 그 곳에서 시작되었었는데. 어린 열 살의 도경수가 빠져들어 행복해 했던 시간, 기억.
"다시 시작해도 괜찮을 거야."
이제는 그래도 괜찮은 걸까.
준면의 평온한 그 말들에, 아주 오랜만에 경수는 다시 연필을 잡고 싶다고 느꼈다.
그동안 경수가 숨겨왔던 사실은 '미술' 이었습니다. 1편 첫장면부터 이것과 관련된 장면으로 시작했었는데 드디어 이것을 드러내게 되었네요. 여기까지 달려오게 되어서 너무너무 뿌듯합니다 ㅠㅠ 나중에 마지막편을 올리고 나서 해설편으로 찾아올 때 꼭 이 얘기를 다루게 될거에요 제일 다루고 싶은 이야기 ㅠㅠ 사실 이 얘기는 늑소의 한 주축이 되는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나중에 1편부터 주욱 보게되신다면 몇가지 숨겨놓은 복선들을 보이실 거에요. 그동안 경수 비밀 (?) 말하고 싶어서 얼마나 근질거렸는지 ㅜㅠㅠ 어쩌면 이번에 bgm도 아이유의 '비밀' 이네요 ㅋㅋㅋ 암호닉 확인 해주세요. 저번에 6편 건너뛰고 공지부터 암호닉을 넣어서 중간에 못넣은 분들이 계시더라구요 ㅠㅠㅠ 죄송합니다ㅜㅜㅜ 됴르륵, 똥주, 두비랍, 왕관, 동해, 고등어, 전주 비빔밥, 도도하디오, 향수, 김미자, 알찬열매, 사물카드, 얌냠냠, 흰자부자, 민트초코, 맥쥬, 끼용, 경수네, 띵뚱,김어휴, 뭉티슈, 우왕, 경뜌, 꽁꽁, 르에떼, 오리, 소그미, 나나뽀, 떡덕후, 꿈이뤄21, 다이아몬드, 됴됴, 루루, 박수함성, 타워, 초코, 됴종이, 효렌지, 감다팁, 횬이, 똥개, 종수, 루한희, 팬더, 아됴겐, 떡덕후, 됴종, 찡코, 깡아지, 초밥 일주일에 두 편씩 올리겠다는 약속! 지켰습니다! ㅠㅠ 아마 늑소는 수,일요일 이렇게 올라올 것 같아요.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