下
***
밤새 콜록거린 덕에 목이 다 아렸다. 독해도 진득하게 독해빠진 감기다. 마르다 만 콧물 자국을 지우려 몇번이고 훌쩍거리다, 목도리를 얼굴로 둘러냈다. 덜컹거리는 버스안. 주변에 서있던 아해들이 시끄럽게도 훌쩍거리는 나를 힐끗힐끗 엿보았지만, 난 크게 신경쓰지않았다.
날이 추웠다. 버스서 내리기 무섭게 난 걸음을 빨리했다. 조금이나마 빨리 교실로 들어가 몸을 녹이고싶었다. 그러나 걸음은 막힌다. 추워죽을것같은 와중에도 멋낸답시고 셔츠에 마이하나 걸치곤 앞문에 삐딱하니 서있는 박흥수. 날 기다렸다는 듯 날 보자마자 자세를 바로한다. 난 무시했다. 옆으로 지나칠찰나, 박흥수는 내 어깨를 잡았다. 야. 야 고남순. 건방진 새꺄. 난 박흥수와 눈을 마주하지않았다.
어제 너 좆나 재수없더라.
다 아침인 덕에 잠긴 목소리가 웃겼다. 난 웃음을 간신히 참아냈다. 난 계속해서 쿨쩍거렸다. 그러면 곧 박흥수는 그런 내가 거슬린다는 듯, 욕지기와 함께 날 힘껏 돌려냈다. 난 돌려졌다. 박흥수는 나보다 조금. 정말 조금 컸다. 덩치 비슷한 놈에게 잡아 당겨진다는건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다. 하지만 난 어떤 말도 하지않았다. 난 피곤했고, 코는 계속해 나왔으며 지난 밤 계속 콜록거림으로 목은 다 쉬었다. 최악인 상태에서 앞에 있는 놈이 최악이라면 그 상황은 최악밖에 되지 못한다.
박흥수는 말없이 날 쳐다보기만했다. 치켜올라간 눈매를 따라 눈빛이 매섭다 생각했다. 부지런히 등교하던 아이들은 앞문앞에 떡하니 서있는 박흥수와 내 눈치를 살살봐가며 뒷문으로 향했다. 난 피곤했다.
“.......나와.”
“싫은데.”
“..........할말있어?”
“없는데.”
박흥수는 날 쳐다보기만했다. 결국 지친 내가 박흥수의 어깨를 밀쳐내고 앞문을 열었을때.
“너 오반 걔 좋아하냐?”
“................”
“나 걔랑 문자하는데말야.”
“............꺼져.”
걔가 너 얘길 그렇게 하더라.
“유치한 새끼래.”
“.......................”
“좆나 찌질하다고.”
“......................”
“맞는 말 같아.”
너 좆나 찌질해. 박흥수가 낄낄 웃으며 내 어깨를 한대 쳐냈다. 난 참았다. 손이 다 떨려올만큼 화가 많이 났지만 참았다. 그러면 박흥수는 한마디를 던지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놓곤. 얼이빠진 내 앞을 휘적휘적하니 지나가는 것이다.
걔가 나보고 오늘 데리러와달래.
***

눈이 또 진창내린다. 방학 시작도 전에 무슨 눈이 이렇게 내리냐며 옆자리 앉은 범생이가 투덜거렸다. 아해들은 야자 시간 내내 떠들어댔다. 눈이 이렇게 내리면 집에는 어떻게 가지, 이대로 학교에 갇히는건 아닌지, 부모님이 데리러 오시는지 마시는지. 물론 나도 믿을 구석은 없었다. 관심없는척 하루종일 내내 엎드려있었지만도, 신경은 점심시간부터 펑펑 내리기 시작한 눈에 꽂혀있었고, 은근슬쩍 걱정도 들었다. 집에 어떻게 가지.
지금쯤 그 애는 학원에 있을게 분명했다. 눈이 이렇게 펑펑내리는 걸 시트지 덮힌 학원 창문 덕에 못볼지도 모르겠다. 아무렴이다. 더이상 그 애에게 가는 관심은 사치고 신경은 낭비다. 의미라곤 눈곱만치도 없다. 괜한 기대감에 설레고 말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지만 연락한통 오지않아 배고픈 핸드폰은 꾹하니 입만 다물고있다.
야자종이 치고 가방을 들어맸다. 아이들은 야자시간 내내 소근소근 떠들다가, 왁자지껄하니 서로의 가방을 퉁퉁 쳐대가며 교실을 나섰다. 나도 따라나섰다. 밖에서 펑펑 쏟아지듯 내리는 눈 덕에 벌써부터 교내 계단은 눈구정물로 난리도 아니었다.
학교 현관. 난 어떡하지 발 동동구르는 아이들 틈 사이에 꼈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학부모들의 차로 꽉꽉막힌 길은 클랙션 소리로 야단이다. 저기서는 서로 버스비를 빌려달라 말라 꽥꽥 지르고, 여기서는 한숨 소리만 폭폭 내들렸다. 난 물끄럼 눈폭탄을 투하하고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까맣다. 밤에 낀 검은 먹구름은 티도 안난다. 난 심란했다. 눈을 잔뜩 품고있는 보이지않는 먹구름이 심통이라도 부리는 것같았다. 저 좀 봐달라고. 보이지 않는 저 좀 봐달라고. 때아닌 감성에 잠긴 나는 헛웃음을 뱉으며 발을 떼내었다. 걸어갈 생각이었다.
뒤에서 아는 아해들의 욕짓거리가 들려왔다. 고남순 저 새끼 미친거 아냐? 아무리 눈이라도, 이 정도 오면 그냥 걸어가기 힘들텐데. 또라이 새끼....난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렇게 교문을 지나 횡단보도 앞. 내리는 눈을 그대로 맞으며 목도리에 코를 박아내자면, 뒤로 사박사박 눈 밟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리위로 눈이 그친다.
“씨발, 맞네. 좆나 찌질해 너.”
“............”
“뭐하냐 초록불인데 안건너고. 병신 새끼.”
곧 내 등을 떠미는 큰 손이 의심스러웠고, 내 머리위로 쓰여진 우산이 믿기지않았다. 그리고 내 옆에 자리해, 입김을 잘도 뱉고있는 박흥수가 보였을때 난 헛웃음이 나왔다. 박흥수는 몰랐다.
“걔 데리러 가야되는데, 버스가 안오잖아 씨발.”
“..............”
“그리고 나 걔 학원 몰라. 안내해 개새끼야.”
“..............”
곧 춥다며 내 목도리를 돌돌 풀어내, 반은 제 목에 둘러버리는 박흥수가 웃겼다.
***

그 애의 학원까지 버스로는 꼬박 십분이 걸렸다. 걸어서는 삼십분남짓이 걸린다. 어느새 웬만큼 쌓인 눈 덕에 걷는 길이 힘들었다. 덤으로 난 피곤하고 아팠다. 감기는 정말 개새끼다. 박흥수는 내 옆에서 욕만 읊어댔다. 개새끼 눈, 씨발 눈, 좆같은 눈! 별에별 눈이 다나왔다.
“눈 내리니까 걷기 좆나 짜증나네. 에이 씨발, 학원은 뭐이렇게 멀어?”
“..................”
“넌 맨날 데리러갔다며. 애잔해서 눈물이 차오른다.”
“....................”
“나 너 좆나 맘에 안들어.”
그건 나도. 난 박흥수의 말을 모른척했다. 그러면 박흥수는 더 떠들었다.
“병신같이 허여멀건해서. 난 너같은 새끼들이 제일 재수없어. 삐쩍 말라서는.”
“..............”
“저번에 너 축구하는거 보고 환장할뻔했다. 사람이 공을 차는건지 공이 사람을 차는건지. 에라이 씨발.”
“.................”
“저번에 그건 또 뭐냐. 그래, 농구도 슛한번 못하고. 키는 장식이냐?”
“................”
“........병신새끼.”
난 아무대답하지않았다. 대답할 틈이 없을 정도로 박흥수는 말이 많았다. 추워서 그런건지, 입을 다물면 찾아올 엿같은 어색한 기류가 싫어서인지는 모른다.
눈은 여전히 쌓이고있었다. 벌써 발목까지 쌓인 눈 위로 차박차박 발자국이 두쌍 만들어지고있었다. 박흥수는 콜록거리며 물었다. 그래 씨발, 됬다치고. 너 오반 걔랑은 언제부터 안거냐?
.
“.......오래.”
“그래. 오래 좋네.”
“.............”
“너 걔 좋아하지.”
“.......................”
“좋아한다면서 어제 욕은 왜했어?”
너 때문에. 난 말하지않았다. 열여덟이랍시고 자존심은 꽤나 굳건했다. 하지만 아무 말안하기엔 내 입은 너무나 근질거렸다. 난 두어번 콜록거렸다.
“...........좋아해서.”
“좋아해서?”
“..........응. 좋아해서. 많이 좋아해서.”
“.....................”
“많이 좋은게 좆같아서.”
“......................”
“좆나.”
“.................병신.”
걸어온 길 위로 난 발자국. 그 위로 눈은 다시 쌓인다. 네온사인이 희번득거리는 상가 거리로 들어왔을때. 박흥수는 다 빨개진 손을 주머니에 얼른 집어넣으며 우산을 접어냈다. 쓸때없는 친절이지. 난 눈이 조금 묻어난 머리를 털어냈다. 박흥수는 눈이 꽤나 쌓인 제 왼쪽어깨를 털어냈다. 그리고 매고있던 내 목도리를 풀어냈다. 그러면 난 고개짓으로 저만치를 끄덕여보였다. 저기. 저기가 걔 학원이야.
박흥수는 다시 우산을 피고 내가 고개짓을 해낸 곳으로 발을 떼내었다. 난 내가 처량해졌다. 눈이 조금 멎어들었다. 박흥수가 간곳과 정 반대방향이 우리집 쪽이었다. 별 생각 없었다. 집에 얼른 가서 씻고 잠이나 자야지. 별 생각없이. 별하나 뜨지않은 먹구름 가득할 밤 하늘 아래에서 내게 생각할 여유는 없다. 난 터덜터덜 걸었다.
얼마지나지않았다. 다시 머리위가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내가 다시 목에 둘러내었던 목도리가 풀어졌다. 놀라 옆을 보자면, 우산을 들곤 다시 내 목도리를 제 목에 둘러내고있는 박흥수가 보였다.
“..........뭘봐.”
“.................”
난 뒤를 돌아보았다. 저기 어딘가에서 박흥수를 기다리고있을 네가 보이는 듯했다.
“으 씨발, 좆나 춥다.”
“..............”
“네 집에 라면있냐?”
“...............너.”
“아 토달지마 개새끼야. 라면먹고싶어. 어쩔꺼야, 라면있냐고 없냐고 씨발아.”
“........................”
박흥수가 춥다며 난리를 쳐댔다.
“미친년이 알아서 지 집 가겠지.”
“...........”
“어쩔꺼냐고 찌질아. 라면 있어 없어.”
기가 다찬 나는 박흥수가 빨갛게 튼 손으로 들고있던 우산을 집어들었다.
“있어.”
“.........”
“좆나 많다 병신아.”
난 내 첫사랑을 발로 차냈다. 세게. 그건 곧 곪아버린 내 겨울 위로 날아와 터트려냈다. 진물은 별로 나오지않았다. 난 후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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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녹즙입니다~^^ 학교보면서 짬나는 시간에 쓴 글이 길어져 올리게까지됬네요.
이래저래 부족한 글이지만 재밌게 봐주셨다니 그저 감사할뿐입니다!
테니아님 오정호님 정말 감사합니다!
후 더 나은..(^_ㅠ) 글로 뵐 기회가있었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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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흑백 이번 시즌은 왤케 조용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