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 정세운을 정의하다.
“어 여주, 안녕.”
“어, 어? 아… 안녕.”
오늘도 먼저 들려오는 정세운의 인사 소리에 화들짝 놀라 어색하게 웃으며 답인사를 했다. 정세운의 선 인사에 오늘도 세사모(통칭 세운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의 불타는 것 같은 화끈한 시선이 내게 와 꽂혔다. 엄마, 나 무서워서 학교를 못 다니겠어. 땀을 삐질 흘렸다.
정세운은 우리 학교에서 ‘ㅈ.’ 이라는 말만 꺼내도 바로 세사모들이 픽픽 쓰러진다는 전설의 프듀대 존잘남이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기고, 노래도 잘 한다고 들었다. 아마 그래서 이렇게 인기가 많은 걸지도. 그에 반해 나는 부끄럼 많이 타고 낯가림 많은 한낱 찌찔이일 뿐….
“어디 가? 강의실?”
“아… 아니, 아까 강 교수님께서 호출하셔서….”
“이번에 너 성적 좋게 나와서 한 번 보려고 그러신가보다.”
“아하하… 아니, 별로 좋게 나온 건 아닌데….”
나는 전생에 분명 말을 느리게 하다가 곤장 맞아 죽었을 운명이다. 거기서 말을 더듬거리면 어떻게 해, 멍청아. 아주 그냥 곤장 50대 맞고 싶은 거지. 애써 웃으며 뒷걸음질 쳤다.
“나도 그 주변 가는데, 같이 갈래?”
갓뎀. 일이 터졌다. 안 그래도 정세운 옆에 붙어 있어 나를 아니꼽게 보던 세사모의 회원들이 이번에는 더욱 노골적인 시선을 내게 보냈다. 아니, 정세운아… 나는 아직 죽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걸. 마음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미안… 나는, 그….”
“응?”
“비, 비둘기 모이 주러 가봐야 해서! 그럼 안녕!”
돌았냐, 김여주. 무슨 비둘기 모이야. 네가 진짜 미쳤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빅뱅의 에라 모르겠다를 듣고 싶은 심정이다. 정말 에라 모르겠다 싶어 두 눈을 감고서 교수님 방으로 튀자, 뒤에서 들려오는 정세운의 청량한 웃음소리다. 그러니까, 내가 쟤랑 어쩌다 엮이게 되었더라.
정 세 운 주 의 보
“여주, 한 잔 더 마셔야지!”
“하, 한 잔 더요…?”
불과 세 달 전, 나는 신입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신입생 OT에 끌려갔었다. 원체 낯을 많이 가리고, 부끄럼도 많이 타는 지라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선배들이 주는 술을 꼴깍 꼴깍 받아 마시며 혼자 뇌 속의 슬픔이를 꺼내 구석지에 박혀있었다.
“안녕, 여주야.”
“…느구 세어?”
“정세운.”
“정… 세웅…?”
정신은 멀쩡한데 마신 술이 모조리 혀로 갔나. 혀가 마비 된 듯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앞에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 잊은 채 물을 마시는 강아지 마냥 빠르게 연속으로 혀를 낼름 거렸다. 지금 생각 해 보면 정신도 멀쩡하지 못 했던 것 같고, 진짜… 진짜 진짜 진짜 세상에서 제일 쪽팔렸다. 아마 김여주의 가장 쪽팔린 기억 TOP3 안에 들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여주야, 그렇게 혀가….”
내 기억 상의 정세운은 얼굴 가득 번지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취기+올라오는 수치심에 그대로 기절하듯 쓰러져 잠을 잤고. 18,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지 싶다. 차라리 정신 똑바로 잡고 ‘미안, 앞에 사람이 있는 걸 순간 까먹었네.’ 라고 당당히 말 할 걸. 왜 또 잠이 들어서는. 정세운은 아마 그 날 이후부터 나를 ‘웃긴 여자.’로 찍어 아는 척을 하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방금 일은 내 생에 쪽팔린 기억… TOP5 안에 들어 갈 일이고….”
머리를 잡아당기며 울상을 지었다. 정세운 너란 남자는… 나를… 참 쪽팔리게 만들어….
그래, 정세운을 정의하자면 그랬다. 나를 참 쪽팔리게 만드는 사람.
의도를 했든 안했든 그건 확실한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내 쪽팔린 기억 TOP5 중 2개는 정세운과 관련 된 일들이니까.
“엄마, 대학 온 지 딱 세 달 됐는데 벌써 쪽팔린 일이 2개가 더 생겼어.”
어디 가서 제발 쪽팔린 일만 만들지 말고 오라던 엄마의 신신당부가 떠올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엄마, 어쩌지. 벌써 두 가지나 생겼는데.
정 세 운 주 의 보
“뭐? 정세운 주의보?”
“응….”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김재환에게 터놓듯이 이야기 하자, 어이가 없다는 듯 ‘별의 별 주의보는 혼자 다 만드네.’ 라고 중얼거리는 김재환이다. 야, 나 다 들었다. 괜히 김재환을 째려봐 준 뒤,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세사모한테 깔려 죽을까봐 하루 하루 걱정하면서 살아.”
“네가 정세운 앞에서 혀 낼름거리는 거 못 본 게 진짜 한이다.”
“그 이야기 꺼내면 죽는다고 했지, 내가!”
악, 미안. 김재환이 인상을 찌푸리며 내 주먹질을 맞았다. ‘한 번만 더 꺼내면 너 죽고 나 사는 거야.’ 라고 말하자, ‘진짜 미안한데 너는 왜 살아?’ 라며 물었다가 한 대 더 맞는 김재환이다. 왜 꼭 맞을 짓을 사서 하는 지 정말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튼 나 요새 너무 힘들어. 그러니까 오늘 점심은 네가 쏴.”
“너 진짜 뻔뻔하다. 나 방금 진짜로 소름이 돋았잖아.”
“소름 돋게 맞고 싶어? 싸우고 시펑? 피나고 시펑?”
“어, 세운아 안녕.”
“안속아, 이 기러기 똥 같은 자식아.”
“안녕. 재환아, 여주야.”
네?
“비둘기 모이는 잘 줬어?”
“뭐? 비둘기 모이? 그게 무슨 소리야.”
“재환아, 다물어 봐….”
“김여주. 너 이제 비둘기한테도 모이 주고 그러냐? 친구 없다고 혼자 다니는 건 알았는데… 찡한 자식.”
재환아… 살고 싶으면 좀 다물어 봐…. 정세운은 김재환의 말에 또 본인 특유의 청량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친구가 왜 없어. 나 있는데.’ 아니야, 정세운아. 그거 아니야. 우리 친구 아니야….
“뭐? 얘가 아까 정세운 주… 읍, 읍읍!”
“나 왜?”
“정, 정세운 주… 주식이 뭐냐고! 나, 나는 밥인데 혹시 너도 밥이면 우, 우리 이따 같이 점심이나 먹을래?”
18….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나는 왜 이 놈의 입이 방정맞아서 항상 중간을 못 가는 걸까. 아아, 벌써부터 세사모들이 몰려와서 나를 뚜까 패는 장면이 머리속으로 그려진다. 그려져. 김재환은 내 해탈한 표정과 말에 풉, 하며 웃음을 터뜨린 지 오래고, 정세운도 말까지 더듬는 내가 웃겼던 건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응, 좋아.”
“…좋아?”
“너랑 같이 밥 먹는 거, 좋아.”
그러니까 저 말은 너랑 같이 밥 먹으면 네가 밥을 코로 먹을 것 같이 생겨서 좋다는 뜻인가. 벌써부터 느껴지는 두통에 이마를 짚으며 책상까지 두드려 가며 웃고 있는 김재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찍었다. 너는 진짜… 뒤졌다.
“그럼 나 여기 옆에 앉아도 돼?”
“아, 거기 그… 내 친구….”
“얘 친구 없어.”
“가 아니라 김재환 친구….”
“오늘 수업 듣는 내 친구도 없는데.”
“가 앉으려다가 만 자리니까! 너 앉아….”
진짜 내 2017년 새로운 목표는 김재환을 없애는 것이다. 눈치도 없고 친구도 없는 김재환 자식.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을 주먹만 바들바들 떨며 애써 웃어보이자, ‘그럼 나 좀 앉을게.’ 라며 눈웃음 짓는 정세운이다. 응, 앉아. 앉으렴. 어색하게 웃으며 괜히 의자를 김재환 쪽으로 끌었다.
“재환아.”
“응, 왜 김비둘기 사육사?”
“너 오늘 전공 책으로 머리 어깨 무릎 발 스웩하게 맞아보고 싶냐?”
“…풉.”
아니, 정세운아. 그거 너 들으라고 한 말 아닌데. 본의 아니게 정세운을 웃겨버렸다. 정세운은 ‘미안,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웃겨서.’ 라며 사과했지만 이미 엎어진 물인데 어떻게 담니. 잔뜩 쪽팔려진 내 귀가 빨개질 때 쯤 나는 고개를 숙여 책상에 엎드려 버렸다. 엄마, 귀가 뜨거운 게 아마 또 빨개진 것 같아.
“이따 점심은 어디에서 먹을래?”
“나 학교 앞에 맛있는 볶음밥 집 알아. 김여주도 되게 좋아해.”
“여주야, 거기 가도 돼?”
교수님 언제 오세요, 겨스님 언제 오세여, 겨스님…. 한참을 속으로 교수님을 울부짖으며 부르고 있자, 나를 불렀는데 내가 대답을 안 했는지 내 어깨를 톡톡 치며 ‘여주야?’ 라며 묻는 정세운이다. 그에 놀란 내가 화들짝 놀라며 상체를 세우자, 무슨 오뚜기냐며 나를 비웃는 김재환이다.
“야, 김여주. 스타 볶음밥 고?”
“아, 응… 가도 돼.”
“안 될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지만.”
진짜 쟤는 1년 365일 나랑 싸우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걸까. 정세운이 보지 못 하게 김재환에게 작게 주먹을 쥐어보였다.
정 세 운 주 의 보
“아, 나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
“응, 다녀와.”
“빨리 와라.”
김재환은 내 마지막 말에 친히 윙크까지 해 가며 발걸음을 돌렸다. 오랜만에 김재환의 윙크를 보자니 방금까지 먹었던 볶음밥이 입 밖으로 튀어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진짜 싫었다. 처음 봤을 때는 노래도 잘 하고 생긴 것도 잘 생겨서 참 괜찮은 친구였는데… 고개를 저었다.
“여주야, 맛있어?”
“어? 어… 나는 여기 단골이라….”
“그럼 나도 오늘부터 여기 단골 해야겠다.”
“…응? 아, 여기 음식이 마음에 들었나보구나….”
그럼 나는 오늘부터 이곳으로의 발걸음을 끊을란다. 눈동자를 오른쪽으로 굴려 봐도 여성들이 정세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고, 왼쪽으로 굴리면… 그래, 왼쪽에는 세사모가 있었다. 괜히 안 본 척하기 위해 눈동자를 운동하는 빙글 빙글 굴리자, 정세운이 또 그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혀도 그렇고 눈동자도 그렇고… 스트레칭 하는 게 취미야?”
“아, 아니… 내 취미는 영화보기고… 나는 나쵸를 좋아하는 걸….”
아니, 그걸 왜 말해. 이제는 내 자신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정세운은 내 말에 본인도 나쵸를 좋아한다며 수긍했다. 거기서 수긍하는 게 더 웃겨. 김재환 이 자식은 전화기를 만들어서 전화를 받니? 생각보다 늦어지는 시간에 삐질삐질 땀이 배어나오는 손으로 주먹을 꾹 쥐었다.
“재, 재환이가 좀 늦네….”
“그러게. 전화기를 만들어서 전화를 하고 오나.”
“어, 나도 그 생각 했는데!”
“우리 둘이 통했나보다.”
정세운의 말에 베실 웃으며 ‘그러게, 이렇게 통한 거 처음 인 것 같은데.’ 라고 말하고서 다시 헙하고 입을 막았다. 그걸 왜 말해? 다시 정신 줄을 잡고서 ‘미안… 말이 잘못 나갔….’ 까지 말 했을까, 해사하게 웃으며 ‘그거 알아?’ 라며 되물어오는 정세운이다.
“뭐, 뭐를…?”
“너 나랑 있을 때 그렇게 웃는 거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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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응, 웃는 게 예쁘다.”
웃는 게 웃긴 게 아니라…? 정세운의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응, 너도 웃을 때… 예뻐.’ 라고 말하자, 고맙다며 볶음밥을 입에 쏙 넣는 정세운이다. 그리고 그 때, 익숙한 문자소리가 내 휴대폰에서 띠링하고 울렸다. 나 문자 할 친구 없는데.
‘세운이랑 점심 맛있게 먹어, 여듀얌>〈'〈!--’
하마터면 며칠 전에 산 휴대폰을 던져 깨뜨릴 뻔 했다. 그렇다 그거지, 이 자식. 몰려오는 빡침에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내 이 자식을 정말 전공 책으로 머리 어깨 무릎 발을 털어버려야지. 그렇게 생각하고서 정세운을 바라보자,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피실피실 웃는 정세운이다.
“너 되게… 신나 보인다.”
“응? 그래? 별 일은 없는데.”
‘너랑 밥을 같이 먹어서 그런가.’ 정세운의 작은 중얼거림을 듣지 못해 고개를 갸웃하며 ‘으응?’ 이라 최고 멍청이같이 되묻자, 아무 것도 아니라며 또 작게 웃는 정세운이다. 쟤는… 뭔가 나랑 안 맞는 것 같아…. 나도 불편하게 웃으며 차게 식어버린 볶음밥을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정 세 운 주 의 보
“그래서 정세운이랑 단 둘이 밥을 먹은 기분은?”
“…체할 것 같아.”
더부룩한 속을 달래며 김재환이 건넨 소화제를 먹었다. 김재환아, 너는 병 주고 약 주는 게 취미냐? 내 말에 큭큭 웃은 김재환이 ‘나는 세운이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을 뿐이야.’ 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세운이가 너랑 친해지고 싶대. 그 말에 머리를 맞은 듯 띵했다.
“안 돼. 나 걔랑 친해지면 진짜 세사모한테 밟힌단 말이야.”
“어휴, 세운이도 불쌍하다 어쩌다가 너 같은….”
“나 같은 뭐.”
“…너 같은 애랑 친해지고 싶어 해서는.”
김재환이 정말 안 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재환아, 지금 나랑 정말 싸우고 싶은 거야? 김재환을 표독스럽게 바라보며 ‘너 진짜 한 번만 더 그러면 죽어.’ 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여니, 사전 차단인지 ‘깨똑!’ 하며 울린 알람이다.
“나 카톡 할 친구 없는데.”
“와, 너 진짜 인생 헛살았구나.”
“남은 인생 헛간에서 살기 싫으면 닥쳐라.”
그건 그렇고 나 진짜 연락할 친구 김재환 밖에 없는데. 고개를 갸웃하며 노란 채팅방을 들어가자, 떡하니 와 있는 딱 다섯 글자다.
정세운
안녕, 여주야. 오후 1:23
갓 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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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안녕하세요! 정세운 주의보를 연재하는 지지리입니다... 하핫....
많이 읽어주시고 많이 입 소문 내주세요 하핫.... 아 부끄럽네. 저는 이만 빛보다 빠른 속도로 사라지겠습니다!!! 그럼!!! 다들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