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친 박우진
03
약숫물까지 뜰 기세로 오지 않게 해달라고 빌던 그날은 결국 오고야 말았다. 전날 꾸역꾸역 짐을 싸면서도, 이게 대체 뭔 날벼락인가 싶었다. 묘하게 들떠 보이던 박우진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두둑해진 가방 지퍼를 잠그며 크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박우진이 저렇게 좋다는데. 까짓것 뭐 가서 죽은 듯이 있다가만 오면 되는 거 아닌가.
#남사친 박우진
솔직히 나쁘지 않았다.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바다는 모처럼 쨍쨍한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고, 바다 바로 앞에 위치한 펜션의 통창 너머로 이런 바다가 원 없이 보였다. 이모와 엄마가 엄선해서 골랐으니 기대하라던 6인실 펜션은 기대 이상으로 완벽했고, 그에 죽상을 쓰고 있던 내가 들뜬 채로 감탄사를 남발하며 펜션 이곳 저곳을 쏘다니자, 짐을 풀고 나온 박우진은 그런 나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며 다가왔다.
" 좋댄다. "
" 야... 진짜 완전 좋아! "
" 그렇게 좋냐. 우리 먼저 바다 나가있으래. 정리하고 나오신다고. "
" 그래..., 응? 둘이 먼저 가라고? "
" 어. 너 바다 들어가냐? "
" ...나 수영 못하잖아. "
괜히 뻘쭘해져 눈을 굴렸다. 보통 이런 때면 곧 한심한 눈초리와 그러게 평소에 좀 배워 놓으랬지, 와 같은 낮은 목소리의 조곤조곤한 잔소리가 따라붙는지라, 이번에도 다를 바 없이 그럴 줄 알고서 가만히 서 있었건만.
" 가르쳐 줄게, 내가. "
" ...에? "
어... 이건 예상 못한 답인데.
" 내가 가르쳐 준다고, 수영. "
" 야... 난 그냥 구경만 해도 되는데. "
" 미쳤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너만 혼자 둬. "
" 너 노는데 방해되잖아. "
" 가르쳐 준다고 할 때 배워라. 너 혼자 놓고 들어가면 퍽이나 신경 안 쓰고 잘 놀겠네. "
" ...나 물 무서워하는 거 알면서! "
" 심한 거 아니잖아. "
가르쳐 주려는 자와 배우지 않으려는 자. 아마 제삼자가 보면 꽤나 우스운 꼴이 아니었을까. 이미 옷을 갈아입은 채로 모래사장 위를 가로질러 바다 쪽으로 가는 길이었음에도 나는 박우진에게 수영을 배우는 일만은 일어나지 않도록 기를 쓰고 버텼다. 그래봤자 족족 받아치는 박우진이 야속했지만. 결국은 반쯤 체념한 채로 박우진에게 손목이 붙들려 끌려가다시피 바다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다하다 별 우습고 못생긴 모습까지 보이겠구나. 사람이 많다는 박우진의 말에 비해 바다는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이런 걸 눈치싸움에 성공했다고 하던가. 탁 트인 바다에 몇 없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괜시리 기분이 좋아졌다. 수영복 색이나 악세사리 같은 것을 맞춰 입고는 팔짱을 낀 채 바닷가를 걷는 커플들이 대다수였다. 문득 별 같잖지도 않은 생각이 들었다. 본의 아니게 둘 다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나온 우리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커플 비슷하게 보이지 않을까. 아닌가. 스스로 생각하고도 어이가 없어 작은 웃음이 새었다. 실없는 생각들로 머리를 가득 채우고 걷다 발끝에 닿아오는 찬 바닷물에 놀라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박우진은 어느새 발목까지 바다에 들어간 채로 내 쪽을 보고 있었다.
" 뭔 생각하고 걷냐. "
" 어? 아니... "
" 멀리 안 나가게 조심해. 저 안쪽은 깊어. "
" ...... "
" 계속 옆에 붙어 있을 테니까, 겁먹지 말고. "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수영이나 배우자. 빨리 배우고 따로따로 놀면 되는 거 아냐? 조금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자 박우진은 덧니를 드러내고 웃으며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발 두발 앞으로 계속 향하다 보니 허리춤을 넘어서까지 바닷물에 잠겨 있었다. 차갑기보단 되려 시원하다고 느껴져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느새 목 끝까지 잠긴 탓에 숨쉬기가 조금 벅찼다. 마주 본 박우진은 어깨가 온통 물 밖으로 드러나 있었는데.
" 원래 뭐 잡고 해야 하는데..., 지금은 뭐가 없으니까 그냥 내 손잡고 해. "
" 어? "
" 이쪽으로 더 와 봐. "
...근데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방금 들은 소리가 정녕 맞게 들은 건가 싶어서 멍하니 정신을 놓고 서 있자 박우진은 물 아래의 팔을 잡아당겨 제 쪽으로 끌었다. 차가운 물 안에서 박우진의 손이 닿아오자 그 부근만 데인 듯 뜨거웠다. 여즉 정신을 못 차리고 박우진의 얼굴만 빤히 보자 박우진을 그런 나와 눈을 맞추더니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었다.
" 내가 양손 잡고, 앞으로 조금씩 끌어당길 거야. "
" ....... "
" 그럼 그냥 발장구 쳐서 따라오면 돼.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 같으면 손 놓을 거야. 알겠냐. "
" 야, 나는, 잠깐만! "
" 손 놔도 너무 멀리 가지 말고. "
손이 잡힌 건 순식간이었다. 한 걸음 성큼 다가와 물 안에서 손을 낚아채듯 잡은 박우진은 다시 한 걸음 뒤로 가서 섰다. 힘을 주어 잡은 박우진의 손이 화끈거렸다. 조금씩 뒷발질을 치는 박우진의 귀가 빨갛게 물들어 가는 것을 넋 놓고 보다, 발장구를 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바보같이 박우진을 따라 걸었다. 몇 걸음도 가지 못하고 다시 우뚝 멈춘 박우진이 다시금 덧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 뭐 하냐, 김여주. "
" ...어? "
" 발을 들어야지. 바보도 아니고. "
안되겠네, 이거. 고개를 양쪽으로 가볍게 젓고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 싶던 박우진이 순식간에 훅 가까워졌다. 한 뼘도 안될듯싶은 위치에 박우진의 얼굴이 보였다. 서둘러 고개를 숙이자 박우진 쪽에서 작게 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박우진은 잡고 있던 내 손을 제 어깨 위에 얹었다. 물에 닿지 않아 건조했던 옷자락이, 손에 있던 물에 의해 축축하게 젖어들어갔다. 내 양쪽 손을 제 어깨 위에 얹은 박우진은 곧이어 조금 거리를 두고 팔 언저리를 잡아왔다. 역시나 박우진의 온도가, 고스란히 옮겨져 왔다.
" 이게 더 편할 거다. "
" ....... "
최대한 박우진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했다. 다시 뒤로 조금씩 나아가는 박우진을 따라서, 잡은 어깨에 조금 힘을 주어 발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나아가자 박우진도 의외라는 듯 웃으며 잘 하고 있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아, 이거 자전거 배우던 때랑 왠지 비슷한 것 같은데. 암튼 계속 잘 한다, 잘 한다 해 주니 스스로도 자신감이 붙어서 혼자서 해 보고 싶고 그런 거다. 사실 박우진이 잡고 있는 팔이 계속 신경이 쓰여서, 온 신경이 팔에 집합이라도 된 것 마냥 계속 신경이 쓰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렇게 무모하게...
" 야, 나 이제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아. "
" ... 아직 좀 무리인 것 같은데. "
" 진짜 잘 할 수 있다니까? "
" 그럼 멀리 나가지 마. 계속 보고 있을 건데..., 그래도 조심하고. "
" 내가 애도 아니고. "
박우진의 허락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손을 떼어내었다. 바다 안쪽으로 멀어지며 돌아본 박우진은 이쪽을 우두커니 서서 보는 듯싶더니 이내 그 자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고 노는 듯했다. 난생처음 배워 본 수영에 시원한 바다라, 괜히 혼자 들떠서 가지 말라던 안쪽 깊은 곳까지 갔던 게 화근이었나. 계속 쉼 없이 발장구를 치다 이제 조금 힘이 든다 싶어서 다시 돌아가려고 했다. 발을 딛고 조금 서서 여기가 어디쯤인지 확인하려고 했는데, 아무리 발을 디뎌도 바닥이 닿지 않아 지레 겁을 먹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쥐가 난 건지 종아리가 뭐에 맞은 것 마냥 아프고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당황해서 잘만 하던 발장구도 마음처럼 되질 않았고, 결국엔 간신히 허우적거리며 부족한 숨을 들이쉬기에 급급했다. 입으로 쉼 없이 밀려들어오는 짠 바닷물과, 귀에도 물이 들어차 모든 소리가 차단되고 바닷물이 찰박거리는 소리만 증폭되어 들리자 더욱 무서워져 눈물이 터졌다.
" 박우진..., 박우, 진! "
도움을 청할 만한 누구도 주위에 있질 않았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보이는 사람들은 제각각 등을 돌리 고서 노는 것에 열중이었다. 버둥대며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 때 서둘러 박우진을 찾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짧은 시간 동안 기를 쓰고 박우진을 찾으려 두리번 거려도 어디에도 박우진은 보이지 않았다. 눈물이 더 세게 흘렀고, 버둥거릴 힘도 없이 지쳤을 찰나에 누군가가 힘을 주어 허리에 팔을 감고 물 위로 끌어올렸다. 물 위로 올라오고서는 한참 동안 정신도 못 차린 채로 기침을 했고, 그 사이에 뺨 위로 어지럽게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는 손길이 있었다.
" 괜찮아. 김여주, 숨 쉬어. "
" 우진아, 박우진... "
" 응. 내 여 있다. 울지 말고, 천천히 숨 쉬고. "
박우진. 어느새 발이 닿는 곳으로 나온 박우진은 내내 허리를 꽉 감고 있던 팔을 풀어 진정하라는 듯 등을 토닥였다. 박우진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안심이 되어 긴장이 풀린 나는 안기다시피 박우진의 팔을 부여잡고 어깨 언저리에 얼굴을 묻은 채로 엉엉 울었고, 그런 내가 진정될 때까지 박우진은 오래도록 등이고 머리고 팔을, 토닥였다. 귓가에 괜찮다는 말을 쉴 새 없이 속삭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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