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친 박우진
02
" 빨리 나와라. "
" 아 잠깐만, 야 박우진! 같이 가... "
서둘러 신발에 발을 집어넣으며 박우진의 어깨를 짚었다. 뭐야, 얘 이렇게 키가 컸었나. 문득 높게도 닿는 손에 놀라서 토끼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박우진을 보았다. 열린 문틈으로 햇빛이 스며들어 눈이 부셨다. 덤덤히 쳐다보는 박우진이 나를 보고 있었다.
" 방학식 날까지 늦고 싶냐. "
비로소 11년의 햇수가, 채워져 간다.
#남사친 박우진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를 거쳐 교복을 입고, 다시 다른 교복을 입기까지 자그마치 11년이 지났다. 우리는 자랐고, 변했지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박우진은 먼저 일어나 우리 집에서 내 준비가 마칠 때까지 나를 기다렸고, 같이 등교했으며, 같이 밥을 먹었다. 중학교야 워낙 초등학교에 같이 다니던 아이들이 많아서 박우진과 나의 관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고등학교는 타지에서 섞여 온 아이들도 있다 보니 사정이 달랐다. 입학 후 몇 달이 지나고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듣는 질문은 딱 하나였다.
" 근데 너네 무슨 사이야? 사귀어? "
이러한 질문은 내 옆 자리인 박우진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몰래 들려오기도 했고 때때로는 박우진과 내가 같이 있을 때 장난스럽게 던져지기도 했다. 의도가 빤히 보이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박우진은 그저 말없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나는 손사래를 치며 의미 없는 해명을 하기에 바빴다. 그런 거 아니고, 그냥 친구. 진짜 오래되고 볼 꼴 못 볼 꼴 다 본 그런 사이라고. 내가 횡설수설 해명을 마치면 그제서야 박우진은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한마디를 툭 던졌다.
" 그냥 친구래. "
그럼 나는 별것도 아닌 그 다섯 글자에, 심장이 둥둥 울렸다. 그냥 어딘가 조금, 저릿하기도 했다.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 박우진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미묘하지만 확실히 달라진 면이 있었다. 좀 더 매너가 늘었다고 해야 하나. 나를 소꿉친구보다는 여자처럼 대하기 시작했다는 거? 전에도 답지 않게 세심한 면이 있었지만, 생리통이 심해 한 달에 한 번씩 끙끙대는 내 책상 위에 초콜릿이나 달달한 것들을 올려놓고는 제 자리에 앉아 핸드폰 게임을 하며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과, 야자가 끝난 늦은 시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같이 집에 간다는 것과 같은 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아, 그리고 꼭 한 번씩 미동도 없이 얼굴을 뚫어져라 살필 때가 있었다. 그게 시작된 게 아마 올해 초쯤이었나, 학기가 시작되고 자리를 바꿔 박우진과 내가 맨 뒷자리 짝이 되었을 때. 아직 날이 추웠고, 수업 도중에 책상에 엎드리는 박우진에 그러려니 했으나 잠이 들었나 확인차 힐끗 박우진을 보자마자 마주치는 시선에 정말 말 그대로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 야, 뭘..., 뭘 보냐. "
" 참 나, 이제 보는 것도 허락 맡아야 하냐. "
"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깜짝 놀랐잖아. "
" 좀 볼 수도 있지. "
그래라.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도 못하고 애써 수업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뭐, 이미 박우진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통 집중도 글렀고. 신경이 온통 박우진 쪽으로만 갔다. 혹시 못생겨 보이지 않을까, 왜 하필 지금. 근데 왜 쳐다보는 거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 때쯤에 박우진 손이 볼 언저리를 스쳤다. 놀라서 커진 눈으로 박우진을 봤다. 잠이 오는지, 반쯤 풀린 눈동자로 눈을 마주하며 아직 거두지 못한 손을 제 얼굴 쪽으로 가져가 볼을 톡톡 건드렸다. 아까 박우진의 손이 닿았던 부근이었다.
" 너 여기 점 있는 거... "
" ........ "
" 나 왜 몰랐냐. "
암튼 나 좀 잔다. 웅얼거리듯이 끝맺어지는 말을 끝으로 박우진이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런 박우진을 뚫어져라 보다 이내 손바닥 위로 얼굴을 묻었다. 어이가 없었다. 고작 이런 것 가지고도 박우진한테 설레는 게. 금방이라도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18살이 되었고, 금방 반 편성이 나왔다. 박우진네와 외식이 끝나고 우리 집으로 와 내 방 침대에 누워 후식 삼아 아이스크림을 쪽쪽 빠는 박우진에게 편성표를 보여주자, 박우진은 아이스크림 끝을 입에 문 채로 이렇게 말했다.
" 같은 반이네. "
" ...뭐, 그래서 싫냐. "
" 누가 싫다고 했냐. "
" ........ "
" 좋다고, 또 같은 반이라. "
그리고 다시 태연하게 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박우진의 귀 끝이 우연치곤 너무 붉어서. 그래서 마음이 너무... 벅찼다. 박우진네가 돌아가고, 결국 잠을 설치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자그마치 11년이다. 흔들리지 말자.
괜한 욕심 부리지 말자.
고백이라면 수도 없이 할 기회가 있었다. 둘만 있을 때가 태반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입도 벙긋하지 않는 건, 기를 쓰고 숨기는 건 혹시나 박우진을 영영 지금처럼 보지 못하게 될까 봐. 같이 쌓아온 11년을 한순간에 무너뜨리게 될까 봐. 오직 그 이유 때문이었다.
" ...고, 김여주. "
" 어, 어? "
" 빨리 오라고. "
" 아. 어..., 미안. "
혼자 딴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조금 뒤처져서 걷고 있었다. 몇 발자국 앞에서 멈춰 선 채로 몸을 틀어 나를 기다리는 박우진에게 잰 걸음으로 붙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니 낮게 왜, 하는 물음이 떨어진다.
" 그냥, 여름 방학에 뭐 할 건가 싶어서. "
" 겨우 2주 가지고. "
" 애들이랑 안 놀러 가? "
" 귀찮아. "
글쎄, 박지훈은 널 기를 쓰고 데려가려고 할 텐데... 작년에도, 그리고 중학생이던 재작년에도 박우진은 여름 계곡이나 워터파크 같은 곳을 일체 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박지훈은 징징대며 되려 내게 짜증을 냈다. 너 때문에 박우진이 안 가는 것 아니겠냐고. 나는 그럴 때마다 뭔 소리냐며 무시를 택했지만 박지훈은 끊이지 않고 박우진 좀 설득해 보라며 나를 닦달했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었지만.
" 그래도 가지? 박지훈이 벼르고 있던데. "
" 어차피 못 가. 이번 여름에 너네 가족이랑 바다 가기로 했잖아. "
" ...엥? "
" 왜 못 들은 척이야. 저번에 고기 먹을 때 얘기 끝났는데. "
...그래도 이건 진짜 상상도 못 했다. 바다라니. 여태껏 방학 동안 박우진네와 세운 계획들은 많았어도 실행된 건 단 하나도 없었기에 이번에도 무산되겠구나, 싶었다. 근데 이미 얘기가 끝났다니. 바다라니! 초등학교, 중학교도 놔두고, 이제 와서 가족여행이 무슨 말인가.
" 바보냐? 이미 펜션 예약도 다 끝났어. "
잘 넘어갈 수 있을까. 어쩐지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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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었지요ㅠㅠ 죄송합니다. 보고싶은 장면들만 생각해놓고 무작정 저지르는 타입이라 연재가 늦어지게 되었네요... 급하게 쓴 티가 팍팍 나서 마음에도 안 들고ㅠㅠㅠㅠ 앞으로는 빠른 연재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런 똥망작을 참고 봐주시는 분들 너무 감사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