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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 & Moon 06
w. 2젠5
이태용 이야기 (2/2)
"너가 왜 여깄어."
이민형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예? 민형이의 눈동자가 공허하다. 텅 비어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호두 껍질 마냥 힘없이 덜그럭거린다. 아는 사람이야? 김시민이 묻는다. 혼만 나온거면, 기억이 아마 없을거예요. 만약에, 동생이 태용씨를 기억 못 하면, 어딘가에 살아있는거예요. 문태일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이민형이 살아있는 걸 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왔으면서도, 나를 모르는 사람 취급하는 이민형이 낯설다. 김시민이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와 대화하는 걸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왜냐고? 내가 내 모습을 애써 드러내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기때문이지. 게다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날 드러내면, 삭 때 내 모습이 저승사자들에게 더 잘 보이기 때문에 시민이는 내가 모습을 드러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건 다 나중 일이었다. 지금 내 앞에 이민형이 있다. 왜 그래 태용아. 아는 애야? 김시민이 점점 다가올 수록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이민형한테 왜 여기있냐고 화를 내야하나? 아니면, 얘를 데리고 침대에 누워있는 자기를 보여줘야하나? 사람들이, 제가 안 보이나봐요. 민형이가 벌개진 눈을 소매에 아무렇게나 부빈다. 동그란 눈이 금방이라도 흘러넘칠 듯 일렁인다. 나 봐요. 민형이의 앞에 김시민이 꿇어앉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이름, 기억나요? 고개를 떨구고 눈물 흘리던 이민형이 고개를 든다. 이민형, 제 이름은 이민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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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은 우리 집에서 지내게 해야겠어."
이민형을 제 침대에 눕힌 후 시민이 창가로 걸어왔다. 매일 너와 창가에서 만날 때면 내 손엔 꽃이 쥐어져있었는데 오늘은 아니다. 졸리다는 느낌이 없을텐데. 이민형이 괜히 침대에서 뒤척인다. 너도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우리 집에서 눌러앉는 건 어때? 김시민이 괜히 창문에 붙은 뽁뽁이를 손가락으로 터뜨린다. 그건 안 되지, 나 성불하면 또 얼마나 울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안 돼, 동생 찾아야지. 이민형을 찾았으면서, 김시민이에게 거짓말을 한다. 아직 성불하기 싫어서 그런게 아니라, 민형이가 다시 눈을 뜨게 도와줘야해서 그런거다. 민형이 있으니까 이동혁 집에 너무 자주 들이지 마. 괜히 이동혁 얘기를 꺼내곤 창가에서 뛰어내렸다. 팍, 하는 소리가 나야하는데. 트램펄린을 밟은 것 마냥 바닥이 부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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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력이 많이 쇠했어요."
의사가 제 안경을 찡긋 거린다. 간호사가 차트를 뒤적거린다. 우리 민형이 눈 뜰 수 있는 거죠? 아버지가 의사의 소매 끝을 붙잡는다. 아드님의 의지가 중요해요. 아빠, 아빠의 아드님은 지금 나랑 같이 있는데. 이민형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자꾸 무너져내리는 부모님을 지켜만 보는게 힘들어서. 형, 나 시민이 좋아. 이민형이 그렇게 말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내가 설령 죽었어도 상관 없을 것 같아. 그냥 걔랑 같이 있는게 너무 좋아. 그래서, 이동혁 그 새끼가 없었으면 좋겠어. 삭 때만 되면 저승사자들이 시민이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저승사자들 따돌리느라 제일 힘들게 뛰어다니면서. 그래놓고 매일 자기찾으러 병원 다닌다고 거짓말하면서. 이민형의 머리를 헝클였다. 어딘가에 살아있을거야, 형이 약속할게. 나는 당분간 이민형에게 제가 살아있다는 걸 알리는 걸 미루기로 했다. 첫째로, 자기가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된 이민형이 시민이에게 상처를 줄까봐였고, 둘째는 설령 이민형이 누워있는 제 몸 앞에 선다고 해도 다시 육체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사고로 죽은 귀신 나부랭이일 뿐이었다.
이동혁이 자꾸 시민이를 집으로 안 들여보내줘 형. 시민이가 학교로 간 아침. 김시민이의 침대 위에 누워서 이민형이 징징거렸다. 이민형은 어제 김시민이한테 고백을 했다. 김시민이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이동혁, 다 그 애 때문이다. 버스정류장에서 김시민이의 어깨에 기대 잠들어있던 그 애의 뒷통수를 떠올렸다. 너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우리에게서 김시민을 빼앗아가는지. 단지 살아있다고 해서 김시민이의 곁에 있을 수 있는 것인지. 이동혁이 모르는 사실을 나와 이민형이 더 많이 알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살아있는 자를 질투했다.
"그러면 정말 시민이 행복해 질 수 있어요?"
보름이었다. 민형이는 지금 시민이랑 집에서 영화보고 있겠지. 이동혁의 집 앞으로 가 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세요, 잔뜩 갈라진 목소리의 주인공이 날 맞이했다. 하고 싶은 말만 할게요, 나한테 다섯달만 양보해줘요. 시민이랑 잠시만 헤어져줘요. 이동혁이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었다. 별 미친 사람 다 보겠다는 표정이었다. 김시민, 영안이잖아. 코 앞에서 닫혀버린 문을 통과해 들어갔다. 시발, 무슨 짓이야! 제 머리를 긁적이며 소파로 돌아가던 이동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민형이라고 알아?
걔 내 동생이야, 나는 죽었고, 걘 아직 살아있어. 민형이가 시민이 많이 좋아해. 그래서 널 많이 질투해.
시간을 다섯 달만 줘. 그럼 내가 민형이 살리고 시민이 영안 가져갈게. 그리고 시민이 옆에서도 사라질거야. 성불하겠다고.
그러니까, 내가 민형이 다시 살릴 방법 찾을 때까지만 민형이가 시민이랑 행복하게 해줘. 부탁할게.
이동혁이 고개를 떨궜다. 그러니까, 영안. 다 그것때문에 이렇게 된 거네요? 그냥 그걸 나한테 줄 순 없어요? 이동혁의 검은 소파에 몸을 뉘였다. 이민형, 김시민, 이동혁, 그리고 나. 지독하게 얽혀버린 매듭을 풀기엔 이미 너무 많이 돌아왔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김시민이의 영안을 가져간 채로 성불 할 수 있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냥, 민형이를 행복한 채로 살리기 위한 최후의 발악. 이민형이 죽을 지도 모르기에, 제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기에. 난 전자든 후자든 민형이에게 좋은 형으로 남고 싶었고, 그럴거다. 미안하지만, 이런 내가 이기적인 걸 너무 잘 알지만 김시민이의 영안은 나중 문제였다. 김시민, 널 정말 좋아하지만, 난 좋은 형이 되고 싶어.
이동혁은 김시민이랑 헤어지는 대신에 김시민이의 영안을 제가 가져가겠다고 말했다. 그게 얼마나 힘든지 모르면서, 김시민이랑 헤어지기는 죽어도 싫은가보지, 나는 뭐 헤어지고 싶나. 민형이는 헤어지고 싶을까. 달은 해를 질투했다. 혼자 빛나는 것이 아니면서, 감히 그 빛을 탐했다.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시민이가 민형이에게 정을 주는 이유는, 제가 좋다고 고백했는데도 내쫓지 않는 것은, 이동혁이 제 곁에 없을 때 담뿍 사랑을 주는 것에 익숙해있어서라고. 이동혁이 사라지면, 이민형의 마음은 빛나지 못 할거라고. 커다란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이렇게 하는게 정말 민형이가 행복해지는 방법인걸까? 그렇지만 이동혁은 생각보다 김시민을 많이 좋아했었나보다. 말리기도 전에, 이동혁이 김시민이에게 헤어짐을 고해버렸다. 달이 구름 뒤로 숨어 어두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