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꺼번에 듣기 X
그곳에는 어떻게 알고 온 건지, 화난 듯 보이는 이동혁이 우릴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숙의의 놀람에도 불구하고 우릴 향해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고, 마침내 내 옆에 다다랐을 때,
"꺄아악!!!!"
내 보자기를 풀더니 보자기를 그녀 머리 위에서 털었고, 원래 이렇게까지 할 생각이 없었던 아기새는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
"억울하시면, 전하께 직접 얘기하세요."
놀라서 이동혁만 쳐다보고 있는데, 내 앞을 막아선 그는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앞에 있는 숙의에게 침착하고, 또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본인이 직접 이런 짓을 꾸몄다고 말 하라니까."
얘가 어쩌려고. 뒷감당은 어쩌려고 이러나 싶었지만, 문득 이민형의 말이 떠올랐다. 국왕이 함부로 못 대하는 사람들 중 주요 인물. 이동혁. 그리고 분명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화는 못 내고 저렇게 씩씩대고만 있지. 계속 씩씩대고만 있던 그녀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두 분이 대체 무슨 사이시길래, 내게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그녀의 말에 대한 이동혁의 대답은 간단하고, 또 명료했다.
"국왕이 직접 벗이라고 칭하는 사람이자"
"……"
"중전마마의 벗입니다."
"……"
"이제 내가 이럴만한 자격이 됩니까."
*
"어떻게 알고 왔어?"
"어영이한테 들었어."
"…고마워."
"답답하게 당하고 살지 마. 저런 인간한테."
"그래도 ……"
"차라리 싸움을 해라. 그게 너잖아. 왜 참고 있어."
나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의 장난스런 답에 웃음이 나왔다. 비로소 숙의가 머무는 처소를 나오고서야 터진 웃음이었다. 그 새를 보자기에 싸 간 이유는 그저 그녀의 처소에 놓고 나오기만 할 심산이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이동혁의 행동이 좀 속시원했다. 그녀가 내게는 이래도 국왕에게는 직접 말하지 못할 것을 이동혁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근데 밤에 어쩐 일이야?"
내 말을 듣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이동혁이 "아 아까 떨어뜨렸나…." 하며 발걸음을 교태전으로 함께 옮기며 입을 열었다.
"사실 줄 게 있었는데, 없어졌어."
"응?"
"미안. 다음에 줄게."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약간 시무룩해진 이동혁의 모습을 보니 괜히 몽이가 떠올랐다. 몽이 못 본 지도 꽤 됐네…. 귀여워서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아내고 그를 향해 말을 내뱉었다.
"선물 안 줘도 돼. 아까 도와준 거 선물로 받을게."
"그거정도로 안 돼."
들어가. 그가 그 뒤에 한 말이었다. 아까 혼자 올 때까지만 해도 굉장히 멀었던 숙의의 처소와 내 처소 사이의 거리가, 단 몇결음으로 좁혀진 기분이었다. 혼자가 아니라 둘. 이게 이렇게 큰 차이였나. 그는 내 등을 떠밀며 추우니 빨리 들어가라 말했다. 그는 내가 교태전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끝까지 보더니 손을 흔들어 보였고, 그 끝에 내가 교태전에 들어가는 것까지 본 그가 그제서야 뒤돌아 교태전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알까, 저기 떨어져 있던 벚꽃다발을 내가 본 것을.
*
"마마, 이제 나가셔야 해요!"
"어? 어…"
마지막으로 머리에 흰 장식을 꼽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이었다. 전부터 국왕이, 그리고 모든 사람이 기다려온 연회가. 꽤 높은 사람들만 올 수 있었고, 나는 국왕의 옆자리다. 어영이가 장단을 마친 나를 데리러 왔고, 나는 그녀의 발걸음에 이끌려 옆에서 걸었다.
아 국모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하구나. 목이 존나 부러질 것만 같다. 큰 가채를 쓰고 까딱해서 조금이라도 고개가 숙여지거나 뒤로 넘어가면 몸 전체가 기울어질 것만 같은 무게다. 간신히 어영이의 부탁을 받아 겨우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불안한 건 매한가지였다.
"아니 여럿이 있는 자리에 이렇게 예쁘게 하고 오셔도 되는 거 맞습니까."
"…네?"
"뭐라도 두르고 가세요. 저만 보게."
교태전 계단을 내려가 어영이의 발걸음을 따라가다 보니, 원래 가던 연회장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향했고, 그 끝에는 국왕이 있었다. 연회장에 있어야 할 그를 보며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더니, 그는 날 보며 저런 부끄러운 말을 잘도 해대더라.
"왜 이곳에……"
"몰래 왔습니다. 원래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
"보고 싶어서."
그의 말에 웃음을 짓다가 하마터면 고개가 앞으로 쏠릴 뻔 했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어보이는데, 저쪽 끝에서 갑옷같은 옷을 입은 사람 여럿이 이쪽을 향해 달려온다.
"전하!!!!여기 계시면 안 되옵니다 !!!!"
"호위대 교육을 참 잘 시켰네요. 먼저 가보겠습니다."그리고 그 말을 마친 그는, 호위대가 뛰어오는 반대편 방향으로 마구 뛰어가기 시작했다. 세상에 저런 개구쟁이 같은 국왕이 있을까.
괜히 말을 어기고 날 보러 왔다는 그의 말에, 부끄러워 소매 끝을 만지작거렸다.
*
연회가 시작되었고, 나는 입장한다. 이 문이 열리고 나면, 긴 문을 통과해 앞에 놓여져 있는 의자를 향해 걸어가야만 한다. 그래, 이곳이었다. 국왕과 혼인을 한 곳. 그 때는 이 문이 참 멀고도 길었었는데, 지금은 전보다는 나은 기분이다.
문이 열렸고, 전에 봤듯 긴 복도같은 길이 펼쳐졌다. 복도를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사람들은 주요 사람들만 왔다면서 이렇게 많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꽉 차 있었다. 아직 숙의와 국왕은 오지 않았고, 나는 어영이가 안내하는대로 그녀를 따라갔다.
길고 긴 복도를 걷는데, 딱 그 때가 떠올랐다. 국왕과의 혼인식, 그리고
'가야지. 앞으로.'
이동혁.
그 때의 이동혁과 슬픔이 떠올라, 잠시 울컥할 뻔 했지만, 왜 그러냐는 듯 나를 쳐다보는 어영이의 눈빛과 그녀의 손길에 겨우 정신을 차려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아직까지도 세 개의 자리 중 맨 오른쪽으로 향하여 가 앉았는데, 그 순간이었다. 그녀와 그가 같이 나타난 것은.
"전하 입장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고, 그 옆에는 숙의가 함께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와중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
그의 표정이 굳어있다는 것이다. 작은 것 하나하나에 안도하며, 작은 한숨을 내뱉는데 그와 그녀가 내 옆 의자 두 개에 착석했다.
즐거울 줄만 알았던 연회는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국왕과 숙의가 함께 들어온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무예나 국악 연주 등이 끝난 후 높은 대신들과 국왕의 이야기는 마차 계속 듣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국왕이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만 하면
"재밌지 않았습니까. 부인은 어떻게 보셨ㅅ……"
"전하! 숙의마마께서 전하의 옆에 계시니 이건 하늘에서 내린 연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고 본인들끼리 허허 웃지를 않나,
"중전, 뭐 드시고 싶으신 것이 있으시면…"
"전하! 숙의마마께서 한과를 건네고 계십니다!"
등, 아주 말을 못 걸에 해 버린다. 환국이 이렇게 무섭구나 싶었다. 그리고 또, 그는 내게 말을 걸었고,
"중전, 날이 많이 춥ㅅ…"
"전하! 숙의마마께서 추위를……"
씨발이다 아주 씨발. 존나 수치스럽고 부끄럽다. 이럴 거면 나를 왜 데리고 온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 멕이려고 온 건가 다들. 그리고 저 멀리 끝쪽 자리에서 나를 쳐다보는 아버지의 시선은 어느정도 참을 수 있었지만,
언제 온 건지, 저쪽에서 나를 바라보는
"……"
이민형의 눈을 보자마자, 왠지 모르게. 정말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마마!!!"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내 왼쪽 뒤에 있던 문으로 나가버렸다.
*
(이거 멈추시고)
*
아침에 몰래 그녀를 보고 왔을 때는 좋았다. 어찌나 그 행동 하나하나가 사랑스럽고 어여쁘던지, 그 때 나온 예쁘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라 정말 자연스레 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당신과 함께 이 긴 길을 걸을 줄 알았는데.
"전하! 중전마마께서는 이미 들어가셨다 합니다. 저랑 같이 가시지요!"
싫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조금 더 일찍 오지 못한 나를 탓할 수밖에. 결국 숙의와 함께 이 길고도 긴 길을 걸었다.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박수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모든 사람들이 숙인 고개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저 앞 의자에 앉아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날 보는 당신의 표정만 들어올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중ㅈ…"
중전의 '중' 자만 꺼내도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난 사람들처럼 말을 꺼내기 무섭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이었다. 슬슬 열이 오르려고 할 때 쯤,
"……"
"마마!!!"
당신이 뛰어나갔고, 나는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들려오는 대신들의 빗발치는 항의에 억지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했다. 따라 나가주지 못함에, 이 상황을 만들게 됐음에. 그리고 조금 멍했다.
! 작가의 말 ! |
안녕하세요! 작가 니퍼입니다! ㅠㅠ 어.. 갑작스런 구독료 인상에 조금 많이 놀라셨죠..! 사실 조회수와 댓글수 차이가 많이 심하기도 하고 (그걸 요즘 많이 느끼는 것 같아요), 요즘 한창 바쁜 시기라 쓰는 데 조금 힘드네요..! 그래서 작가 니퍼 위로차 올렸습니다 (자기애 100) T^T 물론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힘이 많이 되지만, 예전과 비해 현저히 줄어드는 댓글 수를 보면 니퍼 맴이 아파요 엉엉... 오늘 분량 좀 많지 않나요?! (뿌듯) ㅋㅋㅋㅋ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ㅠㅠ.. ♥ 늘 부족한 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